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욥기 41장 1절 – 34절)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2 너는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3 그것이 어찌 네게 계속하여 간청하겠느냐 부드럽게 네게 말하겠느냐 4 어찌 그것이 너와 계약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5 네가 어찌 그것을 새를 가지고 놀 듯 하겠으며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두겠느냐 6 어찌 장사꾼들이 그것을 놓고 거래하겠으며 상인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지겠느냐 7 네가 능히 많은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꽂을 수 있겠느냐 8 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 9 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 10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12 내가 그것의 지체와 그것의 큰 용맹과 늠름한 체구에 대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13 누가 그것의 겉가죽을 벗기겠으며 그것에게 겹 재갈을 물릴 수 있겠느냐 14 누가 그것의 턱을 벌릴 수 있겠느냐… 18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빛을 발하고 그것의 눈은 새벽의 눈꺼풀 빛 같으며… 20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갈대를 태울 때에 솥이 끓는 것과 같구나 21 그의 입김은 숯불을 지피며 그의 입은 불길을 뿜는구나 22 그것의 힘은 그의 목덜미에 있으니 그 앞에서는 절망만 감돌뿐이구나… 25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두려워하며 달아나리라 26 칼이 그에게 꽂혀도 소용이 없고 창이나 투창이나 화살촉도 꽂히지 못하는구나… 31 깊은 물을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를 기름병 같이 다루는도다 32 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 33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 34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을 두고 친구들 간에 벌어진 3차례의 변론(4-31장)과, 그 자리에 참관하여 모든 내용을 듣고 있던 엘리후의 변론(32-37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변론이 다 끝난 상황에서, 침묵하시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두 차례에 걸쳐 말씀하시는 내용(38:1-41:34)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2차로 말씀하신 메시지(40:6-41:34)의 연속 부분으로, 거대한 체구를 가진 동물인 하마의 생태를 통해 말씀(40장)하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사람들이 감당하기 쉽지 않은 동물인 악어의 생태를 통해서 욥에게 계속하여 인간의 한계성을 일깨우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피조물들을 구체적 예로 든 생태적 질문을 통해서, 자신이 창조한 자연세계를 통치하는 주님의 무한한 섭리와 주권적 능력이 무엇인가를 증언함으로써, 그에 대비되는 인간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의 한계성을 욥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욥이 겪어야했던 고난의 원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오묘하고 무한한 주권적인 통치 섭리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절대적인 지혜와 권능만을 욥에게 질문 형태로 증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혜와 권능의 계시 앞에, 인간이 안다고 하고 또 보았다고 하는 것과 생각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극히 작은 부분이며,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욥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욥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의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한 탄식과 항변을 통해서 그러한 재앙을 당할만한 죄악을 저지른 일이 없다는 자신의 의를 주장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모든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주권적인 섭리를 믿는다면,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모순과 불합리처럼 보이는 인간 현존의 문제 앞에서 우리 인간의 지혜와 능력의 한계성을 인정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롬8:28)게 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앞에 전적인 순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야 말로 참된 신앙의 지혜입니다. 이것이 욥기서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1. 악어 사냥의 어려움을 어떻게 말씀합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위대한 주권적 섭리와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서, 욥에게 거대한 체구를 가진 ‘하마’에 이어서 이번에는 다루기 쉽지 않은 ‘악어’의 생태를 가리켜서,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너는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41:1-2)라고 질문합니다. “리워야단”은, 본래 신화들에 나오는 큰 힘을 가진 괴물로서, 성경에서는 악의 세력을 상징적으로 지칭하는 괴물입니다. 그래서 고대 우가리트 문서에서는 바알에게 죽임을 당한 바다 괴물을 가리키며, 가나안 신화에서는 질서의 신에 의해 정복당한 혼돈의 힘을 가진 바다 괴물을 가리키지만, 본문에서는 길이가 7-8m에 이르는 거대한 힘을 가진 나일 강의 이집트 악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러한 거대한 악어를, 사람들이 작은 물고기나 잡는 “낚시”나 또는 잡은 여러 마리의 물고기들을 엮는 “노끈”이나 “밧줄”과 “갈고리”로 꿰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벌이는 것이라는 비유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의 능력과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미물인 하마나 악어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인간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제한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인가를 일깨우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거대한 체구와 힘을 가진 야생 동물인 악어가 “그것이 어찌 네게 계속하여 간청하겠느냐? 부드럽게 네게 말하겠느냐?”(41:3) 곧 “그것이 네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것 같으냐? 그것이 네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빌 것 같으냐?”(새번역)라며, 비유적으로 절대 주권과 능력으로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욥이 당하는 재앙과 고난에 대해서 하나하나 허락을 받아서 행해야 했었느냐고 하는, 역설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절대 주권적인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은총을 갈구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더냐고 하는 인식의 전환에 대한 촉구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욥에게 “어찌 그것이 너와 계약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41:4) 곧 “그것이 너와 언약을 맺기라도 하여, 영원히 네 종이 되겠다고 약속이라도 할 것 같으냐?”(새번역)라며, 힘이 세고 난폭한 악어를 누가 가축처럼 길들여 이용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인간이 세상만사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을지 몰라도,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경고였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편협한 생각과 의지대로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인가를, 하나님은 계속하여 어떠한 비유로 말씀합니까? 하나님은 욥에게 “네가 어찌 그것을 새를 가지고 놀 듯 하겠으며,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두겠느냐? 어찌 장사꾼들이 그것을 놓고 거래하겠으며, 상인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지겠느냐?”(41:5-6) 곧 “네가 그것을 새처럼 길들여서 데리고 놀 수 있겠으며, 또 그것을 끈으로 매어서 여종들의 노리개로 삼을 수 있겠느냐? 어부들이 그것을 가지고 흥정하고, 그것을 토막 내어 상인들에게 팔 수 있겠느냐?”(새번역)라며, 그 거대한 이집트 악어를 길들여 애완동물로 만들거나, 물고기를 잡아 생업을 삼듯이 누가 감히 일상적인 경제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생각을 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감히 하나님을 자기 노리개 감이나 이익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악한 자들이라는 경고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가지고 함부로 자기 판단과 지식만이 옳은 것처럼 욥과 논쟁을 벌인 모든 이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능히 많은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꽂을 수 있겠느냐? 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41:7-8)며, 하물며 어느 누구도 그 거대한 악어를 상대하는 순간 감히 더 이상 대적할 엄두를 내지도 못하면서, 감히 하나님을 상대로 무모한 편견적 지식 논쟁의 싸움을 벌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어떻게 일깨웁니까? 하나님은 그 거대한 악어를 “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41:9)며, 그 말씀을 한 이유를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41:10)라고 선언합니다. 2. 악어의 외형적 위용을 어떻게 증언합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쉽게 다루지 못하는 악어의 거대한 힘과 위용을 통해서,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41:10)라며, 악어를 잡을 능력도 없는 인간이 감히 그 거대한 악어를 만드신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우둔한 일인가를 각성시킵니다. 악어도 감당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연약한 인간이, 어찌 만물의 창조주요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자하기보다 항변하려고 하느냐는 질책이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얄팍한 선행과 봉사와 구제를 가지고 감히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들려는 것이 인간이라며, 하나님은 결코 아무에게 빚을 지지 않을뿐더러 질수도 없다는 것을,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41:11)고 선언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의와 자랑과 소유가 있다할지라도, 어떤 것도 내세울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욥이 자신의 의와 무죄를 주장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간접적인 답변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하나님도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충격적인 말로 한국 교회를 우습게 여겼던 전광훈 목사의 궤변에, 많은 한국교회 목사들이 침묵하고 동조하는 의외의 반응과, 오히려 맹신과 맹종으로 절대 신뢰를 보내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이게 뭐지?’라는 당혹스러움과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24:1-4)라고 분명하게 고백한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신들의 인간적인 논쟁 때문에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인간의 교만한 죄악에 대해서, “내가 그것의 지체와, 그것의 큰 용맹과, 늠름한 체구에 대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리라”(41:12) 곧 “리워야단의 다리 이야기를 어찌 빼놓을 수 있겠느냐? 그 용맹을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 늠름한 체구를 어찌 말하지 않고 지나겠느냐?”(새번역)라며, 말로 허세를 떠는 인간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한계성을 가진 무력한 존재인지를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미물인 악어의 거대한 외형적 위용의 증언을 통해서 자각과 각성을 요청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인간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거대한 악어의 외형적 체구의 위용을 “누가 그것의 겉가죽을 벗기겠으며, 그것에게 겹 재갈을 물릴 수 있겠느냐? 누가 그것의 턱을 벌릴 수 있겠느냐?”(41:13-14)라고 욥에게 반문합니다. 결국 인간은 이것들을 할 수 없다는 의미 아닌가요? 왜냐하면, “그의 둥근 이틀은 심히 두렵구나. 그의 즐비한 비늘은 그의 자랑이로다. 튼튼하게 봉인하듯이 닫혀 있구나. 그것들이 서로 달라붙어 있어, 바람이 그 사이로 지나가지 못하는구나. 서로 이어져 붙었으니, 능히 나눌 수도 없구나”(41:14-17)라고 밝힙니다. “둥근 이틀”은 날카로운 이빨로 둘러싸인 악어의 거대한 턱에 대한 표현입니다. “즐비한 비늘”은 악어의 온 몸을 철갑처럼 감싸고 있는 “겉가죽”으로, 너무나 단단할 뿐만 아니라 촘촘하게 붙어있어서 창이 뚫고 들어갈 조그마한 틈새조차 없는 견고한 외형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41:8,9)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악어의 겉모습만 보고도 두려워하는 인간이, 하물며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과 탁월한 지혜에 기초하여 그 악어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대적하는 교만한 행동을 하는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 것이냐 라는 자각과 각성의 경고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41:10)라고 경고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거대한 악어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드러나는 두렵고도 경이로운 외형적 위용을,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빛을 발하고, 그것의 눈은 새벽의 눈꺼풀 빛 같으며, 그것의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꽃이 튀어 나오며, 그것의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갈대를 태울 때에 솥이 끓는 것과 같구나. 그의 입김은 숯불을 지피며. 그의 입은 불길을 뿜는구나”(421:18-21)라는 시적 표현으로 비유합니다. 거대한 체구에 작은 눈을 가진 악어의 눈에 햇빛이 비칠 때 고여 있던 눈물에 반사되어 광채가 반짝이는 현상과, 거대한 체구를 가진 악어가 물속에서 힘차게 헤엄칠 때 수면을 가르며 호흡하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대한 물보라를 “불꽃”과 “연기”와 “솥이 끓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이러한 악어를 지켜볼 때 “그것의 힘은 그의 목덜미에 있으니, 그 앞에서는 절망만 감돌뿐이구나”(41:22) 곧 “목에는 억센 힘이 들어 있어서, 보는 사람마다 겁에 질리고 만다.”(새번역)라고 증언합니다. 인간이 만물의 창조주와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설 때 가질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떨림의 경외심에 대한 비유입니다. 3. 악어의 위력을 말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미물인 이집트 악어의 거대한 외형적 체구와 움직임만 봐도 “겁에 질리”는 “절망만 감돌뿐”인데도, 하나님을 뵌다면 과연 어떻겠느냐고 하는 상징적인 비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악어의 외형적 체구의 견고함을 “그것의 살 껍질은 서로 밀착되어, 탄탄하며 움직이지 않는구나. 그것의 가슴은 돌처럼 튼튼하며, 맷돌 아래짝 같이 튼튼하구나”(41:23-24) 곧 “살갗은 쇠로 입힌 듯이, 약한 곳이 전혀 없다. 심장이 돌처럼 단단하니, 그 단단하기가 맷돌 아래짝과 같다.”(새번역)라며, 그 위용을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두려워하며 달아나리라”(41:25) 곧 “일어나기만 하면 아무리 힘센 자도 벌벌 떨며, 그 몸부림치는 소리에 기가 꺾인다.”(새번역)라고 증언합니다. 보통, 동물들의 뱃살 쪽은 약한 편임에도 악어는 그렇지 않다는 것과, 어느 동물보다 냉혹해 보이는 외형의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공포감과 두려움 때문에 누가 감히 그 악어와 싸우는 무모한 일을 할 사람이 있겠느냐며 아무도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거칠 것이 없는 악어의 위력을 가리켜서 어떤 사냥도구로도 잡기 쉽지 않다는 것을, “칼이 그에게 꽂혀도 소용이 없고, 창이나 투창이나 화살촉도 꽂히지 못하는구나. 그것이 쇠를 지푸라기 같이, 놋을 썩은 나무 같이 여기니, 화살이라도 그것을 물리치지 못하겠고, 물맷돌도 그것에게는 겨 같이 되는구나. 그것은 몽둥이도 지푸라기 같이 여기고, 창이 날아오는 소리를 우습게 여기며, 그것의 아래쪽에는 날카로운 토기 조각 같은 것이 달려 있고, 그것이 지나갈 때는 진흙 바닥에 도리깨로 친 자국을 남기는구나.”(41:26-30)라고 증언합니다. 인간이 모든 수단과 노력을 동원해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악어의 위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들의 생태도 제대로 알지도 다스릴 줄도 모르는 인간인 욥과 세 친구들이, 마치 자신들만큼은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아는 것처럼 떠드는 것이 얼마나 교만한 행태인가를 경고하는 메시지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헤엄치는 거대한 악어의 위용을 가리켜서, “깊은 물을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를 기름병 같이 다루는도다. 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41:31-32) 곧 “물에 뛰어들면, 깊은 물을 가마솥의 물처럼 끓게 하고, 바다를 기름 가마처럼 휘젓는다. 한 번 지나가면 그 자취가 번쩍번쩍 빛을 내니, 깊은 바다가 백발을 휘날리는 것처럼 보인다.”(새번역)라는 시적 표현으로 다시금 증언합니다. 거대한 악어가 나일 강 같은 큰 강에서 헤엄치며 요동치거나 서로 뒤엉켜 싸울 때, 순간적으로 고요하던 물결이 함께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크게 파도치는 모습과, 악어가 빠르게 지나갈 때 물보라와 거품이 하얗게 생기는 모습에 대한 증언으로서, 힘 있는 악어의 모습과 위력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이 비유로 증언한 거대한 동물들의 생태를 통해 그것들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41:33)라고 증언합니다. 나일 강에 사는 이집트 악어와 같이 힘이 세고 강한 힘을 가진 짐승을,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 외에는 다스릴 존재가 없다고 증언합니다. 이러한 증언을 통해서,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41:34) 곧 “모든 권력가가 그 앞에서 쩔쩔매니, 모든 거만한 것들의 왕이 여기에 있다.”(공동번역)라며, 세상의 “교만한 자들”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여기다보니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깔보기만 하며, 그 위에 있는 존재를 보지 못하는 교만의 왕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거대한 악어가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이 제일인 것처럼 교만의 높이를 쌓듯이, 욥과 세 친구들이 논쟁을 통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지나치게 자신들이 아는 것만을 자랑하고 고집하며 서로를 정죄했던 어리석은 행태를 꼬집는 경고였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혜와 힘이 뛰어나다고 자랑한들, 하나님이 보시는 연약한 인간의 행태는 결국 “모든 교만한 것들을 우습게 보고, 그 거만한 모든 것 앞에서 왕 노릇을 한다.”(41:34,새번역)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경고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욥과 세 친구들에게 거대한 체구와 힘을 가진 하마와 악어의 위용과 위력을 거꾸로 되묻는 반문(反問)적인 질문의 증언을 통해서,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41:10)고 말씀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야생 동물 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함부로 하나님의 통치 섭리를 항변하는 행태를 가리켜서, 하나님은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41:10)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토론과 논쟁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마치 하나님이나 되어 모든 것을 다 아는 절대적인 주권자처럼 행세하며,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교만한 행태를 자행하지 말라는 경고의 표현입니다. 욥이나 세 친구 모두가 그러한 의도로 시작한 변론은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 그런 모습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또한 욥이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다보니 자신의 의를 과시하는 것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서,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41:11)며, 자신이 행한 자그마한 상대적 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드는 생색과 보상을 요구하는 행태를 조심할 것을 경고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욥이 행한 삶이 결코 자그마한 의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 앞에서 인간의 의는 상대적인 초라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2-5)라며, 우리가 아는 지식과 행한 것들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요구하는 우월적인 신앙 자세를 떠나서,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믿음 안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겸손한 믿음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2:20)며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41:10)라고 하신 선언의 의미를 깨닫고, 우리의 신학적 논쟁과 탄식의 기도와 신앙의 요구가 극단적으로 치우침으로써 자신이 마치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는, 그런 죄악에 떨어지지 않는 깨어있는 믿음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