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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로마서 6장 15~23절에 “그러면 무엇을 우리가 죄를 범하였다면 율법 아래 있지 않으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인가, 그것이 되지 않았노라. 너희가 순종 안으로 노예들로 제공하는 바에 노예들인 것을 알지 못하냐 또는 죄의 노예로 죽음 안으로 혹은 순종의 노예로 의로움 안으로 되나. 너희가 그 죄의 종들이었으나 교훈의 모형으로 마음에서 말을 들었으나. 그 죄에서 해방함을 받은 너희가 의로움에 예속시킴을 받았음이라. 너희의 지체들을 그 불결과 그 불법에 그 불법 안으로 제공하였듯 이런 방식에 너희의 지체들을 그 의로움에 성화(sanctification) 안으로 제공하라. 이는 너희가 죄의 노예들이었을 때는, 너희가 의로움에 자유로웠음이라. 그러므로 어떠한 열매를 그때 가졌었느냐 이는 저들의 끝이 죽음임이라. 그러나 이제 그 죄에서 해방함을 받았으나 그 하나님께 예속시킴을 받은 너희가 성화 안으로 그 열매를 가지지만 그 끝은 영원한 생명이니. 이는 죄의 그 급료들(the wages)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그 은사는 크리스트 예수 안에 영생임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6장 15절은 “그러면 무엇을”이라고 시작하고 있는데(롬 6:15), 1절의 “그러면 무엇을 우리가 말할 것이냐”에서부터 생략된 표현입니다.
로마서 6장에 “죄”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롬 6:1~2, 6~7, 10~14). 믿는 자는 죄에 계속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롬 6:1). 15절에는 “우리가 죄를 범하였다면”이라는 가정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죄의 상태에서 계속 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1) 여기서 “율법”은 도덕적 법의 요구들을 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크리스천이 아닌 자는 법의 요구들을 하여 의로워진다고 장담합니다.2)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본문과 복음을 철저히 오해한 것입니다.
죄를 범하였다면 율법 아래 아닌 은혜 아래이기 때문이냐고 묻습니다. 즉각적으로 “그것은 되지 아니하다”(may it never be!)라고 대답합니다. 결코 아니며(by no means!), 당치 않습니다(God forbid).
1. 사람의 신분은 노예일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6장 15~16절에 “그러면 무엇을 우리가 죄를 범하였다면 율법 아래 있지 않으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냐 그것이 되었지 않노라. 너희가 순종 안으로 노예들로 제공하는 바에 노예들인 것을 알지 못하냐 죄의 노예들로서 죽음 안으로 혹 순종의 노예들로서 의로움 안으로”라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냐”라는 말로 파울은 상식에 호소합니다(롬 6:16). 이러한 논증이 가지는 힘과 장쾌함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본문에서 사람은 죄의 노예든지 순종의 노예든지 하라고 말합니다.3)
로마서 6장 16절은 “너희가 알지 못하냐”라는 질문으로 시작되었는데, 순종 안으로 노예로 제공하는 바에 노예임을 알지 아니하냐는 것입니다. 파울은 여기서 분명한 사실을 소개하는 수사적 의문문을 쓰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곧 순종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4)
13절에서 “너희의 지체들을 불의의 도구들로 죄에 제공하지 아니하나 너희의 지체들을 의의 도구들로 하나님께 제공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노예들로 제공하는 바에 순종하는 바에 노예들이 되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에 노예로 제공한다면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노예로 제공한다면 순종의 노예가 됩니다.
죄의 노예가 되느냐 순종의 노예가 되느냐에 따라 종착점이 다릅니다. 죄의 노예들은 죽음 안으로고 순종의 노예들은 의로움 안으로입니다.
자신이 예속되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삶고 살고 있다는 자들은 실상 죄의 노예로서 살아가는 전형적인 사람입니다.5)
‘나는 아무에게도 노예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자는 “죄의 노예”입니다. 죄가 행하라고 시키는 대로 죄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죄의 노예”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자유인인 것 같으나 실상 “죄의 노예”입니다.
파울은 앞에 로마서 6장 13절에서 “죄”와 “하나님”을 대조시켰습니다. 그는 여기서 “죄”와 “순종”을 대조시킵니다. “죄”의 반대는 “순종”입니다. 그는 “죄”의 반대는 “의로움”이라고 하지 않고 “순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같으니 순종의 노예로 의로움 안으로 이르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파울은 이 구절에 “죄”와 “순종”을 서로 대조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음”과 “의로움”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때 “율법의 행위들”이 “의로움”이 아니라, “순종”이 “의로움”입니다. “율법의 행위들=순종”이라는 공식을 만들려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순종”은 “율법의 행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든지 순종이든지 간에 어떤 대상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으며, 사람은 중립적이거나 스스로가 주(Lord)가 될 수 없습니다.
2. 크리스천들의 신분은 변하였습니다.
1) 크리스천들도 죄의 노예들이었습니다.
로마서 6장 17절에 “은혜가 하나님께 너희가 그 죄의 노예들이었으나, 너희가 마음에서 가르침의 모형 안으로 순종하였으나.”라고 하였습니다.
크리스천은 크게 변화된 사람입니다. 이 변화는 지성과 정서와 의지, 인격 전체에 영향을 주는 변화입니다. 크리스트교는 감정의 영역에서만 감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변화는 굉장하여 소유권의 완전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6)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의 노예들입니다(롬 6:17).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이집트에 살 때 태어날 때부터 노예로 태어났듯이, 사람들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죄의 노예로 태어납니다. 모든 사람은 죄가 시키는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죄의 노예들입니다.
복음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7) 죄의 노예들로 살다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서 말을 듣는 대상에게 노예입니다. 아브라함은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하나님의 노예였습니다(창 22:18).
누군가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청각 작용을 뜻하지 아니하고, 들은 것을 행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은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순종”입니다(롬 1:5). “믿음=순종”입니다. 믿음에는 순종으로 되돌아서는 회개가 포함됩니다. 믿는 자들은 처음 믿을 때 이미 마음에서 순종하였습니다(롬 6:17).
“가르침의 모형(form)”은 사죄의 메시지만을 의미하지 아니합니다. “가르침의 모형”은 하나님의 진노를 포함한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복음 전도는 이 “가르침의 모형”을 개괄하여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넘겨줌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넘겨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8)
복음 진리에 지적으로만 승인하는 것은 어떤 자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만일 의지가 수반되지 아니하였다면 그는 참된 크리스천이 아닙니다.9) 참된 크리스천은 곧 마음에서 가르침의 모형 안으로 순종한 자들입니다.
2) 크리스천들은 의로움에 노예들로 만들어졌습니다.
로마서 6장 18절에 “그러나 그 죄에서부터 자유롭게 함을 받은 자들인 너희는 그 의로움에 노예로 만듦을 받았음이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의 노예들입니다(롬 6:17). 그 죄에서부터 자유롭게 된 자들은 그 의로움에 노예로 만들어졌습니다. 반복해 말하듯이,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명령형이 아니라 과거형입니다.
여기서 “자유롭게 하다”라고 번역한 헬라어(엘류데로오)는 죄의 노예 상태에서부터 면제되고 자유롭게 해방한다는(free)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셨습니다(롬 6:18, 요 8:32).
사람들이 그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진리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합니다. 그 진리를 들어야 합니다. 듣고 믿으면 그 죄에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그 죄에서부터 자유롭게 함을 받았으니 이제 죄의 노예들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종종 죄의 활동으로 인하여 시험에 빠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이제는 그 의로움에 예속되고 그 의로움의 노예들로 만듦을 받았습니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그 주인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이런 변화를 일어나게 만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넘겨줌을 받은 가르침의 모형 안으로 마음에서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말을 듣는다는 것이 크리스트교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람을 참된 크리스천으로 신분을 변경시켜 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거듭난다(born again)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놓인다는 뜻이며 그것은 의의 원리입니다.10)
3.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을 의로움에 제공하여야 합니다.
로마서 6장 19절에 “너희의 지체들을 불법 안으로 제공하였던 것처럼, 너희의 지체들을 그 의로움에 성화 안으로 제공하라”라고 하였습니다.
파울은 사람의 말투(term)로 말하니 그들의 육체의 약함 때문입니다. “육체(flesh)”라는 단어(사르크스)는 “살” 또는 “육체”를 뜻합니다.
“육체”는 죄에 의해 영향받고 통제받는 부패한 사람의 기능입니다. 사람에게 부족한 것은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영적 이해입니다. 사람이 타락한 이래 영적 이해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그는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고 죄가 들어오면서 사람은 영적 이해력을 잃었습니다.11)
죄의 파괴성은 사람으로부터 영적 이해력을 빼앗아 감에 있습니다.12) 좌파의 논리력에는 오류가 가득 찼고 거짓말로 순간을 모면하려 합니다. 이재명과 민주당 의원들, 그리고 좌파 판사들을 볼 때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이든지 머리가 나쁘든지 둘 다여야만 좌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을 그 죄에 바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롬 6:13).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을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바쳐야(present) 합니다. 사람은 어떤 대상에게 자신을 바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하면 사람은 자신을 바치는 대상의 노예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을 죄에 바치면서 사는데 죄의 노예입니다(롬 6:16). 그러나 믿는 자들의 신분은 이제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신자들은 순종의 노예들이 되었으며 의로움에 노예로 만들어졌으므로 이 신분에 걸맞게 자신의 지체들을 의에 제공하여야만 합니다(롬 6:19).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을 의에 “성화 안으로(for)” 노예로 바쳐야 합니다.
성화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13) 그리고 명령한다는 것은 성화를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로마서 6장 18절에 “그러나 그 죄에서부터 자유롭게 함을 받은 자들인 너희는 그 의로움에 노예로 만듦을 받았음이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주인이 바뀌었다는 하나의 결정적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 명령은 이미 일어난 일과 이미 겪은 체험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14) 의에 노예가 되었으니 우리의 지체들을 의에 노예로 제공하여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누구나 이미 크리스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못 박힌 것입니다. 정말 크리스천이면 크리스천답게 사는 삶을 살라고 말한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전력으로 싸우고 남자답게 대담하여야 합니다.15)
불신자들이 그들의 지체들을 힘을 다해 불법 안으로 제공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을 의로움에 성화 안으로 제공하여야만 합니다.16)
실패하는 원인은 우리 자신에 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며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17)
전에 우리의 지체들은 불결과 불법에 불법 안으로 제공되었습니다. 부정과 불법은 우리가 노예 노릇을 하였던 우리의 상전이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은 본질에서 의로우며 진실하며, 부패하지 않았습니다.18)
우리 자신에게 우리가 누구며 어떠해야 하는지 상기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었던 때부터 우리는 크리스트 안에 있습니다.19)
우리가 그 죄의 노예들일 때는 그 의로움에 자유로웠습니다(롬 6:20). 우리가 그때는 의로움의 노예가 아닌 까닭에, 의로움에 자유로웠습니다.
우리가 예전의 삶 가운데에 어떠한 자였던지를 비추어 보여줍니다. 파울은 신성하고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제시하였습니다.20)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대상에게 종속되는 노예일 수밖에 없습니다.21) 우리가 죄의 노예들이었을 때는 의의 노예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22) 죄의 노예는 의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듯이 불신자는 궁극적으로 죄와 악마의 지배를 받습니다. 불신자가 가지는 것은 자신의 선함과 자신의 도덕들에 불과합니다. “의(義)”는 그 본질에 있어 하나님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23) 이것은 불신자들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떤 열매를 가졌습니까, 그것들에 대하여 지금 우리가 부끄러워하니 이는 저 일들의 결과(result)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롬 6:21).
롬 6:21~23은 죄의 노예들의 결말과 순종의 노예들의 결말입니다.24)
그러나 이제 그 죄에서 해방되었으나 그 하나님께 노예로 만듦을 받은 우리는 성화 안으로 우리의 열매를 가지는데 끝은 영생입니다(롬 6:22).
앞에 20, 21절에서 옛 삶이 무가치한 삶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의로움에 자유로웠고 그 의로움의 영역 바깥에 있었습니다.25)
크리스천은 심오한 변화를 겪은 사람입니다. 죄의 노예였으나 이제 하나님의 노예가 되고 우리의 열매를 가집니다. 우리는 이제 성화 안으로 우리의 열매를 가집니다.26)
크리스천은 완전히 새롭고 아주 다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조는 변화의 완전성과 이미 신자에게 일어난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행동이고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하시는 일입니다.27)
죄에서 해방된 일은 크리스천이라면 예외 없이 해당하는 일입니다. 신자는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으며 죄의 영역 안에 있지 않습니다. 크리스천 안에 죄는 상전이 아니고 귀찮게 만드는 골칫거리입니다. 신자는 죄의 왕국에서 해방되고서 다른 왕국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죄의 영역에서 하나님께 노예로 만들어진 이주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 노예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크리스천에 관한 진리입니다.28)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면 태도가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노예로 만들어져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노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노예니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29)
예수님께서 영생(永生)을 주시고 우리가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하겠고 아무도 우리를 예수님의 손에서부터 잡아채지 못할 것입니다(요 10:28).
하나님의 노예가 된 결과 우리는 성화 안으로 우리의 열매를 가지는데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노예이기에 성화 안으로 우리의 열매를 가집니다.30)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지들입니다(요 15:5). 예수님 안에 머무르고 예수님께서 그 안에 머무르실 때 열매를 가져오니 그 없이(without) 우리가 아무것도 행할 수 있지 아니한 것 때문입니다.
생활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사람이라면 진짜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성화“는 하나님께 바치고 그를 섬기기 위해 드려진 것을 뜻합니다. 성화는 전진하는 것이고 그 증거는 우리에게서 증가하는 것입니다.31)
우리의 성화가 전적으로 크리스트 안에 있다는 주장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더욱더 그 사랑하시는 아들의 형상에 가까워가는 것입니다.32)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예속된 자는 성화 안으로 열매를 가집니다.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들은 성화 안으로 그들의 열매를 가지게 되는데 그 결과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칭의는 죄책의 제거고, 성화는 부패의 제거입니다. 칭의는 단번에 완성되나, 성화는 지속적인 과정입니다.33)
칭의와 성화는 나누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는 동시에 차이도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크리스트의 죽음은 죄의 벌에서 해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죄의 능력에서 해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34)
우리가 성화 안으로 우리의 열매를 가져야만 영생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러한 열매는 크리스트 안에 머무르는 연합의 삶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믿음”은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그와 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안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그의 죽음 안으로 그런 것입니다(6:3). 그의 죽음 안으로 세례를 통하여 그와 함께 매장함을 받게 됩니다(6:4). 믿는 자들은 그와 연합하여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매장된 것입니다.
예수 크리스트와 연합은 우리에게 성화가 일어나는 원동력입니다.35)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믿는 자들에게는 성화의 열매가 맺힙니다. 성화는 저절로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요 17:17~19). 그는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안에 구별하여 달라고 기도하셨는데, 그들이 진리로 구별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노예로 만들어진 자들은 성화 안으로 열매를 가지게 됩니다. 그와 연합하여서 그와 함께 죽음으로써 죄에서 해방된 것이 전제입니다. 크리스천들은 노예들이나 죄에서부터 하나님으로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자들만이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며 성화 안으로 열매를 가집니다.
헬라어로 “믿음”은 크리스트를 믿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36) 믿는 자들은 크리스트와 연합하여 모든 것을 그와 함께하는 자들입니다. 이 연합은 “크리스트 안에”로 표현되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크리스트와의 연합이 성화의 토대입니다.37)
죄는 하나님께 반항이며 그를 창조주로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에 대하여 계획적으로 거절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주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입니다(롬 1:25). 죄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는 불법적인 것과 관련됩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역이며 하 율법을 위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부패시키는 능력을 소유한 인격체와 같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죄인을 죄에 복종하는 노예로 묘사하였습니다.38)
열매는 흔히 삶의 열매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와 관련됩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나무를 심으면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39)
그 열매들부터 그들을 알아볼(recognize) 수 있는 것입니다(마 7:16).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수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선택은 성별된 행실과 연결됩니다(요 15:16). 언약의 사고방식에 있어서 선한 삶의 열매가 선택의 목적인 것입니다. 선택되었다는 것은 책임 있는 성별된 삶으로 논증되고 나타납니다.40)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이 열매 이미지로 묘사됩니다. 이 이미지는 구약에 있는 언약 사상에 특징적입니다(사 32:15~17).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의 열매는 특히 성화 안으로 열매입니다. 성화는 신자들이 구원을 얻고 성취하여 가는 현재의 경험입니다.41)
주께서 영원한 생명의 상속을 위해 그의 자비에 의해 예정하신 것들은 좋은 행실들의 수단에 의해서입니다(by means of good works).42)
죄의 급료는 죽음이나,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인 까닭입니다(롬 6:23). 사람은 누구의 노예냐의 신분에 따라서 영원한 결과에 도달하게 됩니다. 죄의 급료는 죽음이나 크리스트 예수 안에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입니다.
로마서 6장에 두 개의 끝이 나오는데, “죽음”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죄의 급료는 “죽음”이나 하나님께 노예가 된 자의 끝은 “영생”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의 노예이든지 하나님의 노예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사망이든지 영생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죄의 삯인 죽음은 무의식이나 사라짐이 아닌 영원한 고통을 뜻합니다. 죽음은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악인들의 처벌은 범죄와 고통 간에 적절한 비례가 이루어집니다.43) 예를 들면 살인자의 형벌이 도둑의 형벌보다 더 무거울 것입니다. 백신을 만들어 주사를 맞게 한 자들은 지옥 가장 밑에 있게 될 것입니다.
생각에 머문 죄보다 직접 실행에 옮긴 죄의 형벌이 더욱 클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형벌이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납니다. 지옥의 고통도 죄질과 죄인들의 악함에 따라서 차등이 두어질 것입니다.
그들의 벌레도 종말에 이르지 않고 불도 끔을 받지 않는 곳이, 악인들이 영원히 처하게 될 사망의 형벌입니다(막 9:48).
지옥은 벌레조차 죽지 아니하는 곳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악인들의 몸이 재생되어서 벌레가 파먹을 몸이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불조차 꺼지지 아니하는 곳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악인들의 몸이 불타 없어짐으로써 태울 것이 없는 불이 꺼지면 좋겠지만 악인들의 몸이 재생되어서 몸이 영원히 불타는 고통에 당면할 것입니다.
지옥 안에 모든 자가 불에 의해 소금 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막 9:49). 죄인이 죽으면 절멸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고통을 받습니다.
이 말씀은 다시 행복을 얻게 될 수 있다는 관념을 완전히 배제합니다. 소금은 썩지 않게 하고 영원히 계속되는 성질이 있습니다(레 2:13).44)
그들의 몸은 썩지 않고 죽지 않아 그들은 영원히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들의 몸은 이러한 몸으로 바뀌어 그들은 영원히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영원한 형벌의 교리를 의심스럽게 생각합니다.45)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분명 이런 영원한 형벌의 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6절에 “이들은 영원한 형벌 안으로 가버리겠고 그 올바른 자들은 영원한 생명 안으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마가 여자에게 “너희가 결단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유혹하였듯이 현대인들에게 “너희가 결단코 지옥에 가지 아니하리라”라고 유혹합니다.
악마는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을 지옥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악마는 사람들에게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악인들을 처벌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담에게 순종과 불순종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었습니다. 불순종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죄에 따르는 응보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죽음은 단지 육체적인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급료인 죽음은 영원한 지옥에서의 영원한 형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함으로 급료를 받듯이 죄를 행함으로 죄의 급료를 받습니다. 이 죄의 급료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음”으로 표현된 이런 죄의 급료를 지급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죄의 급료인 죽음을 지급하였다면 다시 지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크리스트께서 죄의 급료를 지급하셔서 죄의 급료를 요구할 수 없습니다.
믿는 자의 생명 전체가 “크리스트 예수 우리의 주 안에” 있습니다.46)
크리스트 예수 안에 되찾음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롬 3:24). 크리스트 안에 있는 것은 그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차 올 영광에 관한 관념을 아직 가질 수 없습니다(요일 3:2). 신자가 장차 누리게 될 행복은 온갖 종류의 복의 결합에 그 근거를 두며, 신자는 크리스트와 맺는 인격적인 친교를 통하여서 이 행복을 얻습니다. 크리스트께서 자신의 피의 대가로 이 행복을 사셨기 때문입니다.47)
하나님께서 상속자 자격을 가진 그 자녀에게 이 행복을 베풀어 주시니 크리스트 예수 우리의 주 안에 있는 이 행복은 영원토록 존속합니다.48)
크리스천은 크리스트 예수 안으로 세례를 베풂을 받았습니다(롬 6:3). 크리스천은 그의 죽음 안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롬 6:3).
모든 크리스천은 예수님의 죽음 안으로 함께 매장되었습니다(롬 6:4). 만일 우리가 주 예수 크리스트의 죽음의 닮음에 연합된 자들이 되었다면 이제는 누구도 우리에게 죽음을 지급하라고 요구하지 못합니다(롬 6:5). 그 죽음의 닮음에 연합되었으면 또 그 부활의 연합됩니다.
크리스트께 함께 죽은 크리스천들은 크리스트와 함께 삽니다(롬 6:8). 믿음으로 크리스트 예수 안으로 들어간 자들은 그와 영생을 공유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순종”이라는 문구에서 3~4장이 “믿음”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5~6장은 “순종”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롬 1:5).49)
로마서 5장에서는 아담의 불순종과 크리스트의 순종이 대조되었는데, 아담이 불순종하였고 그 결과 죄가 세상 안으로 들어왔습니다(롬 5:12). 크리스트께서 순종하신 결과 의로움이 믿는 자들 안에 적용되게 됩니다. 믿는 자들에게 의로움의 선물을 주십니다(롬 5:17).50)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인들이었고 크리스트의 순종으로 의인들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을 통하여 사람들이 유죄판결 안으로 그 결과가 이르렀고, 크리스트의 순종을 통하여 의롭다 칭함 안으로 그 결과가 이르렀습니다. 불순종은 “죄”와 “사망”과, 순종은 “의”와 “생명”과 연관됩니다(롬 5:21).
로마서 5장이 예수 크리스트의 순종과 관련되는 부분을 다룬 것이면, 로마서 6장은 사람들의 순종과 관련되는 부분을 다룹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불순종”이라는 말 대신 “순종”이라는 말을 통하여, ‘순종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독자들을 집중시킵니다(롬 6:12~14).
우리는 죄 안에 계속하면 안 되고(6:1), 죄 안에 살면 안 됩니다(6:2). 신자들은 크리스트의 죽음 안으로 세례를 베풂을 받은 자들입니다(6:3). 죄 안에 살던 옛사람은 그와 함께 죽었는데 어찌 예전과 같이 사는가요? 옛사람은 죽었고 새로움에 걷기 위해 새 사람으로 부활하였습니다(6:4). 죄의 몸은 폐지되었으며 죄에 노예로 순종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6:6). 그와 함께 죽은 자들만이 의롭다 칭함을 받고 그와 함께 삽니다(6:7~8).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죽은 자들로 여겨야 합니다(6:10~11).
죄의 노예가 되면 안 되며 순종의 노예가 되어야만 합니다(6:15~23). 자신을 누구에게 종으로 제공하느냐에 따라서 주인이 달라집니다(6:16). 신자들은 죄의 종들이었으나 이제는 마음에서 순종한 자들입니다(6:17). 참된 신자들은 처음 예수 크리스트를 믿은 때 이미 마음에서 순종하였고 그 믿음의 순종은 그 삶 속에 믿음의 순종의 삶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고 의의 노예로 만들어졌습니다(6:18). 죄의 노예들은 그 지체들을 그 불결과 그 불법에 그 불법 안으로 바치나, 의의 노예들은 그 지체들을 의로움에 성화 안으로 바쳐야 합니다(6:19). 믿는 자는 순종의 노예며(6:16), 의(6:18), 하나님의 노예입니다(6:22). 의의 노예는 성화 안으로 열매를 가지며, 결말은 영생입니다(6:22~23).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의 노예로 성화 안으로 그 열매를 가지는 자들로 이런 성화 안으로 자신의 열매를 가져야 그 결말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성화 안으로 열매를 가지게 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며 영생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노예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신자의 칭의에만이 아니라(5:18), 성화에도 연관됩니다(6:22). 하나님의 은사인 영생은 성화 안으로 열매를 가지는 결말로 주어집니다. 성화도 하나님의 은사며 칭의가 그런 것처럼(5:16), 성화도 그렇습니다. 그의 은사는 중간에 끊어지지 않고 칭의와 성화는 분리되지 아니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사람들은 성화 안으로 열매를 가집니다.
1) D. M.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서문강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301.
2)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302.
3)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303-305.
4)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306.
5) 홍인규, 『로마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울: 성서유니온, 2001), 122.
6)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317-320.
7)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324.
8)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326-330.
9)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332.
10)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347.
11)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377.
12)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378.
13)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393.
14)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395-396.
15)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397-399.
16)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00.
17)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02.
18)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04-406.
19)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07-408.
20)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09-410.
21) 백대영, 『로마서의 이신칭의와 믿음의 순종 이해』 (석사학위 논문, 백석대학교대학원, 2016), 98.
22)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13.
23)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15-417.
24) 백대영, 『로마서의 이신칭의와 믿음의 순종 이해』, 99.
25)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29-430.
26)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31-432.
27)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33-435.
28)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36-441.
29)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42-443.
30)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44-445.
31)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46-448.
32)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49-450.
33) Louis Berkhof, 『조직신학 하』, 권수경·이상원 옮김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2), 765-766.
34) Douglas J.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Wm. B. Eerdmans, 1996), 350.
35) Ferguson 외 4인, 『성화란 무엇인가』, 이미선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52.
36) Ferguson 외 4인, 『성화란 무엇인가』, 82.
37) Ferguson 외 4인, 『성화란 무엇인가』, 95.
38) Richard B. Gaffin, 『구원이란 무엇인가』, 유태화 옮김 (고양: 크리스챤출판사, 2007), 61-65.
39) 이한수,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서울: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8), 665.
40) 이한수,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665.
41) 이한수,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665.
42)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Ⅲ. 14. 21.
43) Robert Haldane, 『로마서 주석』, 김귀탁 역 (서울: CLC, 2021), 391.
44) Haldane, 『로마서 주석』, 392.
45) Haldane, 『로마서 주석』, 393.
46) Lloyd-Jones, 『로마서 강해 3』, 466.
47) Haldane, 『로마서 주석』, 394.
48) Haldane, 『로마서 주석』, 395.
49) 백대영, 『로마서의 이신칭의와 믿음의 순종 이해』, 102.
50) 백대영, 『로마서의 이신칭의와 믿음의 순종 이해』, 102.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덕을 쌓으면 사람을 얻고 노력을 쌓으면 명성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이 힘들고 지치겠지만 결과에는 큰 보람이 있습니다.
소중한 하루 아름다운 시간 만드시고 무지무지 하게 행복하고 즐거운 하루 되세요. 💖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