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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6. 묵상글 ( 사순 제 5주일. - 그제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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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6. 사순 제 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그제야
오늘 독서 에제키엘서는 두 번이나 ‘그제야’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야’가 그동안 그렇게 애썼는데 이뤄지지 않던 것이
이제 비로소 이뤄졌다는 과거적 표현이라면
‘그제야’는 한동안 애썼는데 이뤄지지 않은 점에선 ‘이제야’와 마찬가지지만
이뤄지는 시점이 지금이 아니라 미래 어느 시점인 미래적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나의 주인임을 이제라도 알게 되면 좋을 텐데
우리는 그렇게 알고자 애쓰는데도 지금 그것을 알지 못하고
세월이 흐르고 더 많은 과정을 겪은 뒤에야 알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과정입니까?
이에 대해 에제키엘서 스스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이라고.
그리고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겁니다.”
그리고 복음은 죽은 나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성령도 죽지 않게 하지 않으시고 죽은 다음에 살리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나자로가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도
바로 가지 않으시고 이틀이나 더 있다가 그래서 나자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뒤에 나자로에게 가시고 다시 살리십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죽지 않을 수는 없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뜻이고
영원히 살려면 이 세상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안 죽는 삶을 택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는 삶을 선택하셨으며,
그것이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뜻이고,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는 되살아나고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나자로는 이 세상에서 다시 살아났지만
실은 이 세상에 다시 살아나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죽었다가 영원히 다시 살아나는 모든 인간 존재의 상징입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죽어야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사도들은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그리고 성령을 받고 난 뒤에야 그제야 알게 되는데
그것은 사도들 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 무덤을 열고 우리를 꺼내주시는 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무에서 우리를 있게 하신 주님께서
무덤에서 우리를 나오게 하시는 것쯤은 너무도 쉬운 것임을 믿는 우리입니다.
그리고 나오라는 명령에 순명한 라자로처럼 우리도 무덤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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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6. 사순 제 5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병을 앓다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하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병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질병과 거기에 따른 모든 고통은 동서고금 모든 사람에게 문제가 되어왔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세계관과 인생관에 따라 달라집니다. 고대 근동지방 사람들은 병을 악령들이 끼치는 재앙이나 경신 예식의 실수로 인해 잡신들이 보낸 재화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치유를 얻기 위해서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푸닥거리를 한다든가, 그들에게 빌고 제사를 올림으로써 용서를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의술은 사제들의 영역이었고 마술에 가까운 형태였습니다.
병을 통해서 인간을 지배하는 죽음의 세력이 나타나므로(1코린 11,28-32) 병이나 죽음은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구약 성서에서 질병은 인간을 채직찔 하시는 하느님의 행동이라고 보고 있습니다(시편 39,11-12), 이렇게 질병이 하느님께 달렸다고 하는 원칙 아래서, 그 병 속에서 인간은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들의 작용을 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바라시기에 질병은 다른 모든 인간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뜻과는 상반됩니다. 질병은 죄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왔고(창세 3,16-19), 죄인의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의 표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약에서 질병은 하느님의 백성이 불충실했기 때문에 주로 당해야만 했던 저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신명 28,21). 따라서 질병의 체험은 사람으로 하여금 좀더 깊은 죄의식을 갖도록 합니다. 인간은 병의 치유를 구할 때 마다 항상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시편 38,2-6).
하느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병에 걸렸을 때 우선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해야 합니다(집회 38,9-14). 찌르는 것도 하느님이요, 고쳐주시는 것도 하느님이십니다(신명 32,39). 하느님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훌륭한 의사이십니다.(탈출 15,26). 질병의 치유는 하느님께서 고통받는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들을 굽어 살피셨다는 것을 말해주는 표지로서의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께서는 공생활 동안에 어디서나 환자들을 만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질병에 관해서 편협한 응보론적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서도(요한 9,2-3 참조), 병을 죄의 결과로, 인간을 괴롭히는 악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사탄의 세력의 표징으로 보셨습니다(루카 13,16). 병자들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들어(마태 20,34), 그들을 위해 치유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자연적인 질병이나 귀신으로부터 오는 질병을 구태여 구별하지 않으시고 나쁜 영들을 쫓아내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마태 8,16; 마르 1,32; 루카 4,40). 자연적인 질병과 마귀들린 병의 치유는 결국 예수님의 권능을 드러냅니다. 이 둘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와 지상에 하느님나라의 건설을 의미합니다.
모든 병자들에게 주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신앙이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므로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9,28; 마르 5,36; 루카 8,50). 주님께 대한 믿음은 하느님나라에 대한 신앙을 내포하는데, 구원을 얻는 것도 바로 이 신앙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나라의 표징으로서 기적적인 치유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을 첫번째 파견하실 때 병을 고치는 당신의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마지막 파견에는 그들의 복음선포가 믿을 만한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표징이 항상 뒤따르리라는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마르 16,17-18).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은 예수 부활의 실재성과 예수님의 이름의 권능을 드러낸 치유의 기적 사화를 여러 차례 소개합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여러가지 은사들 중의 하나로 치유의 은사를 들고 있습니다. 이런 표징은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여전히 활동하심을 보여 줌으로써 주님의 교회에 믿음의 가능성을 부여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여러 차례의 경험을 통해서 질병이 수난하시는 주님과 인간을 일치시켜 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환자에게 봉사하는 것은 고통을 받는 당신의 지체를 통해서 바로 주님께 봉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프랑스 작가 샤또브리앙의 첫영성체
“말해보게, 자네는 어떤 죄를 지었기에 불안해하고 있지? 비밀로 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가?’”
저는 언제나 그분의 모든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신부님, 아니예요! “
그 후 저는 매번 고해실에서 나올 때마다 마치 방금 나쁜 죄를 범한 사람처럼 창백해지고 당혹해 하곤 했지요. 그래서 저는 저의 정직성에 대한 의심 때문에 고해신부님이 얼마나 근심하셨는가를 알았습니다. 맞습니다. 그분은 정확히 추측하고 계셨던 것이예요.
사실 저는 부끄러운 체면 때문에 저의 커다란 죄를 비밀로 감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부활절의 전주(前週) 수요일에 판공성사를 받으러 가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저의 첫영성체 전날이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철야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미리미리 준비했습니다. 또한 그때 저는 성서에 있는 정직하지 않은 고해에 대한 가르침을 읽고 정말 경악했습니다.
학생들이 부모님을 동반하여 신학교에 갔을 때는 오후 3시였습니다. 성당에 도착했을 때 저는 성체를 모신 감실 앞에서 완전히 도취된 채 마치 넋이 나간 듯이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저의 차례가 왔을 때 저는 마지막으로 올바르게 고해하고 거룩한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고해실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온 몸이 떨려서 무릎을 꿇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거의 없을 지경이었지요. 그 때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죄인인 저는 전지전능하신 주님 앞에, 그러고 주님을 대신하시는 신부님께 저의 죄를 고백합니다....”
저의 목소리는 매우 떨렸고 계속해서 끊겼기 때문애 저의 고해기도흘 끝마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몇 가지의 죄를 고백했을 때 저의 훌륭하신 고해 신부님께서 다정하게 질문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말해보게, 자네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지? 아마 자네는 아직도 한 가지 죄를 고백히·지 않았지?”(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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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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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6. 사순 제 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사순 5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성지주일을 앞두고, 마치 부활을 연주하는 ‘전주곡’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무덤에서 끌어내시고, <복음>에서는 죽은 라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며, 당신이 주님이심을 밝힙니다. <화답송>에서는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음을, <복음 환호송>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찬미하며,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오늘 이 ‘부활의 전주곡’을 들으면서, 사순시기가 생명으로 가는 길, 곧 부활로 가는 길임을 봅니다. 그리고 그 막바지에 이르러,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쓰라림보다는 감미로움이 서광처럼 비쳐옵니다.
봄도 사순이 부활로 가는 길이듯, 여름, 가을, 겨울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을 꽃피우고 열매 맺고, 또 다시 생명으로 피어오르는 봄의 길도 역시 생명의 길입니다. “봄길”이라는 정호승 시인의 시롤 새겨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은 바로 ‘봄길’입니다. 생명을 열어주고, 부활을 가져다주는 참된 생명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걷는 이 길에 사랑이 걸어갑니다. 이 길을 걷는 여행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생각의 이동’(아나톨 프랑스)이요, 참된 생명에로의 이동이요, 사랑에로의 이동입니다.
오늘 우리는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는 이와 함께 울어주는 봄바람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둠의 동굴에 갇혀있는 이를 불러내는 봄 햇살 같은 이야기입니다. 주저앉아 웅크리고 죽어 있는 이를, 빛으로 불러내는 봄비 같은 생명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라자로의 소생이라기보다,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에서,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라고 장엄하게 예고된 그 “생명”입니다. 곧 빛이신 생명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하신 일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의 어둠 속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생명이시오, 빛이신 까닭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생명이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생명의 길로 부르십니다. 참 생명에로 이동입니다. 그 길은 ‘앎’에서 ‘믿음’에로의 이동입니다. 곧 ‘당신이 생명이요 부활임에 대한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본문>에서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11,22)라고 고백합니다. 마르타는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11,23)라고 말씀하셔도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11,23)라고, “안다.”고만 고백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을 떠올려봅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1코린 8,2)
마르타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부활과 생명을 믿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믿음”을 촉구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6)
‘아는 것’을 넘어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믿을 때라야, 그 믿는 이에게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부활과 생명은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은 믿음 안에서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그렇게 ‘믿음’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과 현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믿어야 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생명이 아니라, 현세와 현세를 넘어서 얻을 수 있는 풍만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는 질문에, 동문서답을 합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요한 11,27)
마르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었지만, “부활이요 생명”임에 대해서는 믿음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동굴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했을 때도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요한 11,39)하고 여전히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거듭 강조하시어 나무라듯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이는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앎’에서 ‘믿음’으로의 이동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불신과 어둠의 묻혀있는 저희의 무덤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저희를 당신 생명의 빛에로 부르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요한 11,4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주님!
부활을 믿게 하소서!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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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6. 사순 제 5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간의 눈물을 공감하시는 예수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공명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아픔에 공명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의탁하는 가운데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은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그리고 ‘라자로야 나오너라’하신 말씀에 대해 묵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루카복음 19장 41절에 보면,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며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한탄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정신 못 차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 죽음에 이르는 길을 가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히브5,7). 예수님께서는 눈물로 기도하셨고 또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서 우리를 위해 피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무덤에서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죽음을 보고 슬퍼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사랑하는 벗의 죽음을 슬퍼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큰 슬픔을 아십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에 깊이 연민하십니다.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죽은 사람의 가슴은 공명을 모릅니다. 마음의 울림이 없습니다. 깊이 공감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요한11장 33절에는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 지셨다.”35절에는“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그 슬픔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도 이웃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는 동정심과 온정의 본보기를 보여주시려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히폴리투스).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러셨어요. “울긴 왜 우냐? 하느님을 믿고 살아서 이제 하느님의 품에서 천상영복을 누릴텐데. 기쁘게 보내드려라!” 하면서 다른 사람 앞에서 절대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어머니는 홀로 숨어서 엉엉 우시더라고요….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 합니다.
눈물은 큰 축복입니다. 마태복음 ‘참된 행복의 선언’에서 예수님께서는‘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울어 줄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깊은 참회의 눈물로 아버지 하느님께 자비를 간구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면 복이 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는 곳에 은총이 주어집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습니다.‘닭이 울기 전 3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새로워졌습니다.
우리 삶에서 인색해진 눈물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영혼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보면 울지 못한다는 것은 병입니다. 영혼이 마를 대로 말라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이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은 주님 앞에서 대성통곡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함께 울어주시는 예수님, 성체 앞에서 실컷 울어야 합니다. 나의 삶을 드러내 놓고 눈물로 애원하면,‘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줄 것입니다.’
오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에 가셔서“돌을 치워라”하시고,“라자로야 이리 나와라”하셨습니다.“살아나거라.”하고 말씀하시지 않고, “라자로야 나와라.”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에게 하는 말입니다.“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나오너라. 무덤에서 나오너라! 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라자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자, 무기력한 자”(송봉모)입니다.‘모든 힘없는 사람’,‘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하느님께서 도와주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죽음 앞에서 무기력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우리 믿는 이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썩은 냄새가 풍기는 무력함에서 자비와 안식을 주시며 위로와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 덕분에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라자로를 도와주신 그분이 오늘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진짜 죽는 것은 내가 스스로 무덤에 갇히는 것입니다. 나를 꽁꽁 묶어놓고 있는 무덤,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은 오랜 악습, 선입견, 편견, 고집,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마음, 시기, 질투, 집착, 소유, 지배, 명예욕, 교만함 등등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일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무덤에서 나와라’하는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내 안에 지닌 이런 다양한 병을 인정하고, 그것을 원인까지 치유하시는 명의이신 주님께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하면 골치 아픈 모든 것이 풀리고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영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무엇보다 고해성사를 통해 내적인 무덤에서 나와 자유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으로 바꾼다면, 미움을 사랑으로 감싼다면, 바로 그것이 무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을 치웠습니다. 마르타가 냄새난다고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명하셨고 그대로 했더니 나자로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였는데 그것을 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풀어주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내 스스로를 옭아매지도 말 것이며, 남을 내 잣대로 재어 판단하고 단죄하여 무덤에 가두어 두지도 말아야 합니다.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는 어둠이 있다면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나를 위해 울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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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6. 사순 제 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토론토에 신문홍보를 가면서 저를 기억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18년 전에 토론토에서 3년간 지냈기 때문입니다. 한맘 성당 신부님은 저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18년 전에 신부님은 제게 주일 저녁미사를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2년 동안 주일 저녁미사를 도와 드렸습니다. 당시에 신부님은 제게 차를 빌려주었습니다. 뚜벅이었던 제게 차가 생긴 것은 마치 애벌레가 고치를 열고 나비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성당으로 미사를 갔고, 여행도 다녔습니다. 이번에도 신부님은 사제관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눈이 많이 내려서 신문홍보를 하지는 못했지만 신부님은 다음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다음에는 꽃피는 봄에 오라고 하였습니다. 반찬가게 하였던 자매님, 아이스크림 가게 하였던 형제님도 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기억 속에 머물러 있던 분들을 다시 만나니 반가웠습니다. 그때 미사 복사를 하던 소년은 결혼해서 가장이 되었습니다. 같은 신앙 안에 있기에 다시 만나도 반가웠습니다.
지난 2021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연해주로 이주한지 100년 만에, 카자흐스탄에 묻힌 지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운구하는 수송기가 대한민국 영공을 들어올 때였습니다.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 편대가 수송기를 호위하면서 이렇게 환영하였습니다. “홍범도 장군님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이제부터는 대한민국 공군이 호위하겠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먼 이국땅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던 홍범도 장군이 생각났습니다. 대한민국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실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2021년 국군의 날에 고국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 대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큼은 남아 존재하고 있으니, 이것이 통사를 서술하는 까닭이다. 정신이 존속해 멸망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으리라.”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억은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우리가 미래로 나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2000년 동안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였고, 기억한 이 말씀을 성체성사를 통해서 행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2000년 전에 행하셨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체성사는 2000년 전에 행하셨던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제가 축성하는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우리에게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신앙은 기억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기억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고 하셨습니다. 라자로는 죽은 지 삼일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라자로가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라자로에게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라자로는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게도 “가브리엘아, 이리 나와라.”라고 하십니다. 근심과 걱정의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욕망과 불평으로 악취가 나는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게으름과 나태의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가 욕망과 불평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가 게으름과 나태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이미 썩어가고 있으며, 우리가 머무는 이곳은 이미 무덤입니다. 우리가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래서 주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부활의 약속에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길목임을 믿고 위로를 받습니다. 부활 신앙만이 우리 인생살이의 진정한 힘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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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6. 사순 제 5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중학생 때, 수학여행으로 속리산에 갔었습니다. 1,000명에 가까운 학생이 속리산에 오르니 정말로 정신이 없었지요. 속리산 정상에 도착한 친구와 저는 빨리 내려가서 선생님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놀고 있자면서, 산 아래로 뛰다시피 하면서 급하게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길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올라갔던 길과 달리 내려가는 길이 점점 험해졌고, 심지어 사람의 인적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잘못 내려가면서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면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꼈고, 결국 우리는 큰소리로 “사람 살려!”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응답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한참을 헤맨 끝에 내려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산하는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때의 반가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벌써 거의 4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길을 잃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길을 찾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전까지는 사람이 그렇게 반갑지 않았습니다. 경쟁자, 방해꾼 등으로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하산하면서 그 고생을 한 뒤로 사람이 너무나 반갑고 감사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마음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생각나는 것을 보면, 꽤 깊은 인상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삶 안에서도 길을 잃은 것 같은 체험을 계속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서 힘든 시간을 보낸 적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순간 길을 찾는 고마운 체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삶, 그만큼 주님을 만날 확률도 높아집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되살리십니다. 사실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 남매는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말에도 가지 않으시고,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나서야 유다로 가십니다. 남은 자매인 마르타와 마리아는 무척 서운했을 것입니다. 그 서운함 때문일까요?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도 마르타처럼 맞이하지 않고 그냥 집에 앉아있지요. 아마 길을 잃은 것 같은 체험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면서 그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길을 잃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비로소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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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노력을 계속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과 용기가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다란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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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6. 사순 제 5주일. 키엣 대주교님.
무덤의 문을 열고 생명의 길로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열고 죽은 이에게 일어나라고 큰소리로 외치셨고 라자로는 죽음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문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생명의 문
죽음의 세계인 무덤을 연다는 것은 죽음에 갇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문 안에 있는 라자로가 생명의 길로 나올 수 있도록 무덤의 문을 열고 육신을 묶고 있는 천을 풀어주심으로써 죽음의 문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시켜 주셨습니다.
믿음의 문
마르타는 당시 다른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깊고 굳건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라자로의 기적을 목격한 후 확실하고 구체적인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른 유다인들도 라자로가 죽음의 세계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목격한 후, 이제는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라자로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들이 부숴질 때,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막고 있던 돌무덤도 함께 부숴졌기에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기쁨의 문
죽음은 슬픔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과 무덤에는 언제나 헤어짐과 상실, 슬픔이 가득합니다. 슬픔은 다른 사람을 슬프게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맺힌 눈물은 다시 또 나의 눈을 쓰리고 아프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끊이지 않는 슬픔의 눈물을 멎게 하셨습니다. 라자로가 무덤에서 나오자 슬픔의 장례식은 순식간에 기쁨의 모임이 되었고,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던 말들은 기쁨을 주고 받는 말이 되었습니다. 새 생명을 얻은 기쁨이야말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완벽한 기쁨입니다.
희망의 문
사람은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기 위해 태어납니다. 주님은 바로 ‘생명’이시고, ‘주님을 믿는 이는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깜깜한 마음의 무덤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죄악과 탐욕의 무덤, 이기심과 편견의 무덤, 쾌락의 무덤, 시기와 증오의 무덤, 가난의 무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무덤에서 나약한 우리는 혼자의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가로막고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돌무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우리도 주님과 함께 나의 가족과 이웃들을 둘러싸고 있는 무덤을 허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새생명을 얻고 주님의 보살핌 안에서 풍요로운 영혼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지금 나를 억압하고 있는 무덤은 무엇입니까?
2. 나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묻기 위해 돌을 쌓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십시오.
3. 나와 형제의 무덤을 열고 새 생명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말씀의 나눔
1. 먼저 나의 마음과 영혼을 가로막고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돌무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스스로를 가둔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희망을 버린 이웃들이 무거운 무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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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6. 사순 제 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공동생활(共同生活)의 축복과 아름다움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130,5)
오늘 사순 제5주일 요한복음 11장 1절부터 45절까지 긴 복음이 참 은혜롭습니다. “라자로가 죽다-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눈물을 흘리시다- 라자로를 살리시다”순서로 전개되는 내용도 다채롭고 풍부합니다. 순간 영감처럼 떠오른 강론제목, “공동생활의 축복과 아름다움-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에 감사했습니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남매의 베타니아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의 모범입니다. 말그대로 공동생활의 축복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공동생활’을 사전에서 찾아보고 지극히 평범한 내용에 공감하며 은혜받았습니다.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여럿이 서로 도우며 사는 생활”
혼자서는 못삽니다. 더불어의 삶이요 더불어의 여정이요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고립단절의 혼자의 삶이 지옥입니다. 찾아오는 모든 분들께 언제나 활짝 열려있는 제 집무실이 흡사 세상 공동체의 중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도 예고없이 10여명쯤 방문한 자매들에게 판공성사를 드리며 교회공동생활의 축복과 아름다움을 체험했습니다. 성 베네딕도 규칙의 다음 두절도 공동생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성규 머리45)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성규72,11-12)
성규나 성경은 개인 수양 서적이 아니라 더불어의 공동생활에 필요한 사랑과 지혜를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더불어의 배움터인 공동체입니다. 제 집무실 게시판에는 2년전에 써놓은 말씀이 여전히 붙어 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제 몸담고 살아가는 수도공동체입니다.”
이와 더불어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시 6째 연은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믿음의 공동체 성원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를 설파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공동체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평생 날마다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평생 날마다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평생 날마다
수도가정공동체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날로 늘어나는 1인가구와 노령화 현실에 교회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구원의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넓게 깊이보면 믿는 이들은 혼자 살아도 교회공동체에 속해 있기에 물심양면 공동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 불가의 절친 관계였던 두 고승, 성철과 청담의 일화도 생생합니다. 나이는 10세 정도 많은 청담이었지만 격의 없이 우정을 나눴고 힘이 장사인 두 고승은 오랜만에 만나면 이층 다다미 방에서 반가움에 씩씩 거리며 한바탕 씨름을 하며 우정을 확인하고 나눴다는 웃음짓게 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수십년이 지닌 지금도 선명합니다.
수도원 다섯의 작은개들의 공동생활도 흥미롭습니다. 아예 이웃집 불암사의 선재라는 개는 요즘 수사님들의 환대를 받으며 상주하다 시피합니다. 어제는 새벽 4시 산책길에 제 뒤를 종종 따라왔고, 후에 날이 밝자 수도원 개집의 문을 열어놓으니 반가워 격렬하게 어울리는 모습이 더불어의 놀이를 즐기는 동네 아이들과도 흡사했습니다. 커다란 선재가 작은 개와 격렬히 싸우는 듯 해 자세히 보니 반가움과 애정의 표현이었고 몸에 전혀 손상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론 서론이 길었지만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평생 도반이자 베타니아 공동체의 중심으로 모신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를 사랑했고, 이들 또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자매들간의 우정이 함께 감을 봅니다.
삼남매의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공동체의 부요와 축복과 아름다움에 얼마나 크게 도움이 되는지요! 라자로의 소생 기적을 통해, 또 마르타와 주님과의 대화를 통해 주옥같은 진리를 배우고 체험합니다. 혼자라면 어찌 이런 구원의 진리 체험이 가능하겠는지요.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인간적인 면모가 물씬 풍기는 오늘 복음입니다. 이렇게 형제들의 아픔에 도움을 청할 주님이 공동체의 중심에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저도 자주 제 절친이신 예수님께 형제자매들을 위해 생미사와 연미사를 통해 간청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대부분 죽을 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진 예수님의 반응 말씀은 어제 저녁기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에 이어 오늘 아침성무일도 즈카르야 후렴시 흥겹게 불렀습니다. 오늘 하루 흥겹게 기도 노래로 바치며 지내려 합니다.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가서 그를 깨우자.”
얼마나 정겨운 주님의 반응인지요! 라자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주님의 친구가 된다니 말씀 자체가 위로와 구원이 됩니다. 죽음도 우리 전능하신 친구 예수님의 눈에는 잠들어 있음이요 이를 깨우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과 마르타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참 중요한 구원의 진리를 배웁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얼마나 주님의 아름다운 축복의 구원의 진리요 마르타의 모범적 신앙 고백인지요! 참으로 귀한 진리와 고백을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마리아도 울고 함께 한 유다인들도 울었다는 장면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요한11,35)는 대목도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참으로 인간적인 주님의 면모가 연상되어 큰 위로가 됩니다. 라자로를 살리는 절정 부분 또한 감동의 극치입니다.
“돌을 치워라.”
우선 우리가 살아나는 데 주님께 협조해 할 일은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의 돌을 치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돌을 치우자, 즉시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짧은 감사기도후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흡사 죽음과 같은 깊은 영적 잠에 떨어진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라자로 이름 대신 내 이름을 넣어 절망의 무덤안에 갇혀있거든 즉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무덤문을 열고 탈출하여 파스카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라자로를 살리는 복음은 예수님의 일곱 표징중 마지막 절정의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부활을 예고하는 놀랍고 고마운 표징입니다. 부활을 앞두고 부활의 기쁨을 미리 알려주는 복음입니다. 바로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 말씀의 실현입니다. 그대로 우리를 향한 구원의 말씀입니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라자로를 무덤에서 살려 내신 주님은 당신 백성인 우리를 살려 내시고 당신 영을 우리 안에 불어 살려주시니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영이 우리안에 사시기에 우리는 육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삶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명이 되어주시니 말그대로 영적 삶이요 이보다 더 큰 축복도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죽음의 잠에서, 육적인 삶에서, 깨어나 성령 충만한 영원한 영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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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6. 사순 제 5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라자로가 죽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라자로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로 발길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시간이 되기를, 때가 되기를 기다리시는 모습입니다.
마르타는 그런 주님이 야속하기만 한가 봅니다. 주님을 만나자마자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마르타에게 주님께서 살아서 믿는 이에게 영생이 있음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마르타는 대답합니다. 마르타의 대답은 단순한 대답이 아닌 신앙고백입니다.
‘당신은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고백이 있고 난 뒤 주님께서는 무덤의 돌을 치우십니다. 그리고 그 무덤 앞에 서서 썩어 가던 라자로를 향해 소리치십니다.
나오너라.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
그리고는 마침내 라자로는 죽음에서, 어둠에서 걸어나 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의 어둠 앞에서 그 돌을 치우고 라자로 때와 같이 소리치십니다.
나오너라. 다니엘아, 이리 나오너라. 데레사야, 안젤라야, 베드로야, 시몬아, 나오너라.
너의 어둠에서 나오너라, 너의 죽음과도 같은 슬픔에서 나오너라. 너의 썩은 살과 같은 죄에서 나오너라.
이렇게 주님께서는 부활의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부활을 준비할 때입니다. 우리가 나갈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내가 어디서 나가야 하는지, 무엇에서 나가야 하는지, 우리 각자는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앞에서 오늘 주님께서 소리치십니다.
나오너라. 거기 그러고 있지 말고 나오너라. 그 어둠에서 나오너라.
오늘은 당신의 남은 인생에 첫 번째 날입니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 중에서-
비슷한 말 중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이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청춘은 바로 지금, 일명 청,바,지
모두가 비슷한 말입니다. 이 말들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바로 오늘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오늘이기에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을 올지 안올지 모르니
이미 내 손에 쥐어진 오늘만이 내 것입니다.
이미 손에 쥔 오늘이라는 선물을
예쁘고 빛나게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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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6. 사순 제 5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에게 있으니>
내가 아직은
홀로 물리칠 수 없는
깊은 어둠일지라도
내가 다시
빛이기를 바라는 이가
늘 곁에 있으니
내가 다시
빛이게 하실 수 있는 분이
늘 함께 계시니
나는 또 다시
영원히 꺼지지 않을
빛으로 타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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