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작품은 <<푸른 외출>> 제일 첫장에 실린 글이다.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도 아주 세밀하게 묘사를 잘 하고 있다. 묘사는 작가의 예리한 관찰력에서 나온다. 타고난 천재성을 가진 화가는 어린아이 때부터 개미, 벌레, 꽃 같은 것을 땅에 엎드려 그대로 그리기를 좋아한다.
지난 추억이 작가의 머릿 속에 사진 찍듯이 기억되어 있는 것은 그 장면이 자신에게는 아주 중요한 장면이었기에 기억이 되는 것이다. 그걸 불러 내어서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다. 이게 일찍이 나의 스승 도광의가 "글을 쓰면 부활한다"고 밤중에 나를 불러 내어 원대시장 어느 허름한 골목 대폿집에서 들려준 말씀이다. 나는 혹시라도 하는 마음에 아래 작품의 허구성을 검증하기 위해서 물가자미가 찬바람 부는 늦가을에 나오는 생선인지 검색하여 보았다. 경주 가까운 동해 감포 바다에 물가자미가 찬바람이 불면 많이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한달여 전에 소진 선생님과 차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어릴 때 코난도일이 쓴 탐정 소설 "셜록 홈즈"에 빠져 밤을 세워 읽곤 했다고 하니 선생님역 시 탐정 소설을 좋아 했다고 하였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알렉상드르 뒤마) "이나 "형사 콜롬보" 같은 이야기는 늘 흥미 진진하였다. 내가 탐정 소설 이야기를 꺼낸 것은 수필작가가 허구를 썼는가? 앞뒤 내용이 어거지로 끼워 맞추기를 한 것인가를 잘 찾아 낸다는 뜻이었다. (글도 글 같지 않은 것을 작품이라고 선정하고, 현란한 수사로 미화하여 상을 주려는 짓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마라. 정신이 죽으면 살아도 죽은 것이다. 시체하고 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나?)
나는 스스로 작가할 자격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거의 반 강제로 수필계로 끌어 넣은 분이 나의 스승 도광의 시인이다. 나는 그분의 순수 서정 시를 너무 좋아 한다. 미당, 박용래, 도광의로 순수 서정시가 이어지고 있다고 까지 말한다. 아래 김귀선 작가의 수필 <도마> 전문을 옮긴다. 순수 서정 수필의 전범이라 할 만 하다. 이에 대한 독자인 나의 평은 책이 나오자 바로 쓴게 있는데 찾아서 올리겠다. 동료 수필가들의 작품을 함께 감상하면서 나의 문심이 고양 되는 것이다. 남들이 내 글을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동료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무소 뿔 처럼 혼자서 밀어 가길" 바란다. 인생이란 결국 자기 자신하고의 싸움이니까. 수필작품을 휘리릭 읽고 내다버리는 습관. 세상이 긴 글 싫어한다고 세상의 입맛에 맞춘 단수필로 전향하는 습관은 나는 옳지 않다고 본다. 돌대가리들에게 아부하는 작가가 되지말고 무소 뿔처럼 혼자 가는 게 작가의 길이다.
내가 중이 되었다고 누가 상줄 일 없다는 뜻이다. 스스로 만행의 길에 들었으니 스스로 깨우침에 이르러 내가 어둠 속에 있을 때 알지 못했던 세계를 알아가는 기쁨을 만끽하고 그걸 글로 토해 놓으면 되는 것이다. 그게 대승의 길이다. 나는 김희자 수필 <악착동자>를 읽고 청도 운문사를 세번이나 가서 반야용선에 매달린 악착동자를 내 아들 딸 손자에게 까지 보여주었다. 생명의 끈을 놓치지 말라는 옛 선인의 깨우침을 전승하려는 내 방식의 전음(傳音)이었다. ^^
아래 작품을 열번 스무번 읽어 보길 바란다. 시를 외우듯이 시를 해설하듯이 그렇게. 문심이 열리면 그 속에 감추어진 보물이 보인다. 이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문심이 크게 열리기를 기도한다. 안 열리면 헛일이다. 문을 열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에서 열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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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도마/김귀선
밖은 찬바람이 부는 늦가을 날이었다.
주방에 퍼질러 앉아 엄마가 쓰던 도마 위에서 물가자미를 다듬는다. 칼로 비늘을 긁자 거뭇한 침묵이 차례로 쓸려간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희미한 시간, 도마는 움푹한 몸으로 맥없이 떨어져 나온 푸르렀을 적 추억을 한껏 보듬어 안는다.
탄탄한 플라스틱 도마와 평평한 나무 도마가 있지만, 나는 친정 빈집에서 들고 온 움푹한 도마를 씽크대 안쪽에서 끄집어낸 것이다. 어떠한 칼날도 마다치 않고 유연하게 척 받아들이는 품새가 물가자미 같은 생선을 다듬을 때는 더욱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다.
찬바람이 불면 산골 친정 마을 사람들은 이고 간 곡식 대신 물가자미를 몰고 왔다.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 마치 차례를 정한 듯이 돌아가며 물가자미회를 해놓고 이웃을 불렀다.
‘똥똥똥’ 엄마의 도마소리에 탄력이 붙으면 윗집 당숙의 헛기침 소리가 삽짝을 들어섰다. 태풍에 허리가 꺾인 앞밭 고목의 돌감나무로 도마를 만들어줬다던 아랫집 병욱이 아제가 담배 연기를 흩뿌리며 오셨고, 대숲 건너 큰아버지가 마른 손을 부비며 문지방을 넘어오셨다. 해바라기처럼 놓인 살점을 두고 병풍처럼 어른들은 둘러앉았다. 방 윗목의 농주 버지기엔 조롱박이 동동 떠 있었다. 입가에 흐르는 막걸리를 닦으며 어른들은 젓가락이 휘어지도록 입안으로 물가자미 무침회를 집어 날랐다.
물에 씻긴 말간 살갗들을 다시 도마 위에 누인다. 살갗 속의 등뼈가 선명하다. 달이 훤한 밤, 창호지에 비친 외가닥 문살 같다. 어디선가 ‘뜨르르’ 문풍지 소리가 난다. 한지 만드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던 친정 동네이다. 끊이지 않던 닥방망이 소리가 산골 골안개로 유영하다 가자미로 환생한 걸까. 빗살 거느린 지느러미가 고향의 겨울 산마루 끝을 닮았다.
한 마리를 당겨 놓고 아가미 부근에 칼날을 얹는다. 힘을 주자 머리가 썩둑 잘려나간다. 검붉은 핏물이 도마의 터실터실한 결속으로 스며든다. 방금 찧은 봉숭아 꽃물 같다.
옷밭골 명화가 생각난다.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봉숭아 꽃잎을 돌멩이로 찧어 내 손가락에 칭칭 감아주었던 동생이다. 감기인 줄 알았던 뇌종양에 열두 해도 못 넘기고 먼 길 가버린 명화다. 칼날에 묻은 핏물을 보는데, 명화의 혼을 달래던 날 ‘둥둥’ 천지바위 골을 울렸던 북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넋 잃은 명화 엄마의 눈빛도 떠오른다. 그 모습을 애써 뒤로 한 채 아릿하게 나를 흔들던 봉숭아 꽃물을 장맛비 같은 수돗물로 멀리 떠나보낸다.
봉숭아 꽃물이 어려 있는 도마에는 논마다 물을 대어주던 꼬불꼬불한 도랑물, 술주전자를 들고 심부름 갔던 아슬아슬한 논둑이 물가자미의 창자에서 길이 되어 흘러나왔다. 천수답에 소 부리는 소리, 바람이 앞산을 넘는 소리, 뒷골 절터의 고목이 낡은 가지를 내려놓는 소리까지도 움푹한 도마 안에서 들리는 듯하다.
머리 잘린 목어가 내게 온 듯 이제 도마 위엔 뭉텅한 물가자미 몇 마리 나른하게 누워 있다. 정 고일 곳 하나 없는 말끔한 도시 건물의 모습이다. 수많은 칼날을 견뎌온 도마가 그런 목어를 가슴으로 품는 듯 도마와 가자미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른다.
행주에 손을 닦는다. 미끄덩거리는 몸통에 왼손 끝을 모아 심지로 박는다. 달아나려는 고향을 잡듯 힘껏 움켜쥔다. 칼이 움직일 때마다 목어는 푸르렀던 시절 생각에 목이 멘 걸까. ‘찌꺽찌꺽’ 된소리를 낸다.
내 칼에 다 썰린 물가자미를 양재기에 담아 놓고 무채를 썬다. 귀에 익은 도마소리가 엄마의 음성인 양 정겹다. 그것은 소리가 소리를 딛고 그리움의 바다 속을 헤매는 시간.
무 냄새 섞여 나는 도마를 들여다본다. 순한 산봉우리 두르고 있는 내 고향의 모습 같다. 움푹하다고 한동안은 얼마나 불편해했었던가. 하지만, 이제 가자미들이 남긴 빗금마저 내게 따스함으로 전해오는 도마다. 푸근함과 넉넉함, 바로 잃어버린 옛 고향이 거기 있었다. 오늘처럼, 뜬금없이 찾아오는 지난 시절을 위해 햇빛에 잘 말린 고향을 다시 씽크대 안 깊숙이 넣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