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의 명시감상 제1권에서
하나님 놀다가세요
신현정
하나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오늘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들판은 파랑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
염소들의 살랑살랑 나부끼는 거룩한 수염이랑
살랑살랑 나부끼는 뿔이랑
옷 하얗게 입고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
----「하나님 놀다 가세요」({자전거 도둑}, 2005년) 전문
신성의 세계는 거룩함, 숭고함, 정중함, 무거움 등이 그 특징이며, 따라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살고 있고, 우리 인간들은 끊임없이 존경과 예배와 찬양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성의 세계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세계이며, 진리의 창조주인 하나님이 살고 있는 세계이다. 이에 반하여 세속의 세계는 더럽고 비천하며, 날이면 날마다 살인, 강도, 강간, 사기, 마약, 매춘 등의 범죄가 그치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세계이며, 어떤 일도 가능하지 않고 모든 것이 부족한 세계이다. 우리 인간들은 아담과 이브의 후손으로서 불완전한 인간이며, 세속의 세계에서 天刑의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동화의 세계는 선과 악, 진리와 허위, 남과 녀, 음과 양, 신과 인간, 인간과 짐승의 세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세계이며, 따라서 그 때 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시선 때문에 영원히 잃어버린 지상낙원의 세계로 인식된다. 우리 인간들은 동화의 세계(에덴동산)에서 세속의 세계로 내던져진 ‘실존적 투기’의 존재들이며, 그 실존적 내던져짐에 의해서 세속의 세계를 저주하고 신성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신성의 세계는 정의로운 하나님과 최후의 심판자인 하나님에 의해서 굳건하게 문이 닫혀 있고, 우리 인간들은 그 좁은 문 앞에서 끊임없이 회개하고 참회를 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불완전한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이 된다는 것, 어느 것하나 가능하지 않고 모든 것이 부족한 세계에서 아름다운 천국으로 승천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행복론의 화두이며, 영원한 꿈일는지도 모른다.
신현정 시인은 요즈음 매우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매우 낯설고 생소한 이름일는지도 모른다. 그는 1948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7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고, 시집으로는 대립對立(1983), 염소와 풀밭(2003년), 그리고 이번에 출간한 자전거 도둑 등이 있다. 첫시집 대립을 출간한 이후, 20여년 동안 시작 활동을 중단했다가 새천년을 맞이하여 시를 쓰게 된 모양이며, 염소와 풀밭으로 각각 ‘서라벌문학상’(2003년)과 ‘한국시문학상’(2004년)을 수상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신현정 시인은 왜 시작 활동을 중단했던 것이며, 왜 다시 시작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던 것일까? 신현정 시인은 염소와 풀밭의 「첫머리」에서,
지난 해 이사를 하고부터 서울과 경기도를 경계짓는 해태 밑을 오고 가게 됐다.
해태는 시의를 판단하여 안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 여간해서는 자리를 뜰 것 같지 않은 굼뜬 형상 또한 제격이다. 그리고 머리 가운데 솟은 뿔 하나.
나도 해태의 뿔 하나쯤은 솟았으면 한다. 이 세상에서 전혀 새로운 입법자立法者로 살아가고 싶다.
라고, 그 까닭을 밝혀 놓은 바가 있고, 또 그리고 자전거 도둑의 「시인의 말」에서,
시가 무엇입니까.
초월, 우주적 자아, 아닐 것입니다.
눈물, 삶의 더러운 때, 아닐 것입니다.
위로, 화해, 더구나 아닐 것입니다.
희망, 절망, 아닐 것입니다.
죽음, 관념, 아닐 것입니다.
자유, 피의 전율, 그도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이 지상에 초대합니다.
당신이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을 반드시 보고야 말겠습니다.
라고, 그 까닭을 밝혀놓은 바가 있다.
전혀 상상의 동물인 ‘해태의 뿔’을 하나쯤 갖고 새로운 입법자가 되고 싶다는 꿈, ‘초월, 우주적 자아’, ‘눈물, 삶의 더러운 때’, ‘위로, 화해’, ‘희망, 절망’, ‘죽음, 관념’, ‘자유, 피의 전율’ 따위 등의 상투적인 말과 인습적인 허구들을 내던져 버리고, ‘이 세상에 당신을 초대하고’, ‘당신의 행복한 모습’을 반드시 보고 싶다는 꿈이 지난 20여년 동안의 잠적기에 그의 내면의 세계를 꽉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전혀 새로운 입법자로서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세상, 즉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지상낙원을 연출해놓은 자전거 도둑의 세계는 영원불멸의 금자탑의 세계이며, 우리 한국시문학사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 자신만의 화법과 문체를 갖기 위하여 20여년 동안이나 시작 활동을 중단하고 가장 독창적인 화법과 문체를 들고 나온 장인 정신,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이자 입법자로서 사상과 이념의 신전神殿을 연출해낸 장인정신, 만일, 그렇다면 신현정의 자전거 도둑은 오랜 시간 동안의 절차탁마의 산물이며, 가장 독창적인 화법과 문체의 산물이고, 그리고 마침내는 상상력의 혁명의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신현정 시인은 형이상학적인 초월성의 세계도 거부하고, 형이하학적인 세속성(현실성)의 세계도 거부한다. 그가 선택한 세계는 동화의 세계이지만, 그러나 그 동화의 세계는 정신병리학적인 고착과 퇴행의 세계가 아니라, 초월성과 세속성을 다같이 끌어안고 대통합을 이룩해낸 동화의 세계, 즉 지상낙원의 세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신현정 시인이 그의 ‘상상력의 혁명’을 통하여 사상과 이념의 차원에서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 보이고,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행복론, 즉 지상낙원의 세계를 연출해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상과 이념의 차원에서, 또는 문체와 화법, 그리고 기법의 차원에서, 또 그리고 상상력의 차원에서, 한국시문학사는 신현정 이전과 신현정 이후로 기술할 날이 오게 될는지도 모른다. 로빈스 크루소가 자기 자신의 장원의 주인공이자 전제군주이었듯이, 신현정 시인 역시도 자기 자신의 언어의 사원의 주인공이자 그 신전의 전제군주이다. 하나님도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이며 입법자이고, 신현정도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이자 입법자이다. 하나님과 시인은 다같이 대등한 존재이며, 그 대등한 관계에 따라서 만물의 조화를 연출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피조물들로 끌어내리고, 언젠가, 어느 때부터 ‘정의로운 하나님’과 ‘최후의 심판자’를 자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현정의 입법에 따르면 그것은 자연에 대한 무차별적인 만행이며, 대역죄에 해당된다. 하지만 신현정은 형이상학적인 신성성을 부정하면서도, 그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 분노와 증오는 커녕, “하나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그 하나님을 이 지상의 세계로 끌어내린다. “오늘 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들판은 파랑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라는 시구가 그것이고, “염소들의 살랑살랑 나부끼는 거룩한 수염이랑/ 살랑살랑 나부끼는 뿔이랑/ 옷 하얗게 입고/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라는 시구가 그것이다. 인간이 위대한 점은 그가 ‘사유하는 동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모든 학문의 예비학으로서 ‘비판’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 있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거기서 화를 내며 잔뜩 부어 있느냐”라는 것이 첫 번째 비판이며,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행복도 연출해내지 못한다면 그 천국은 살만한 곳이 못된다는 것이 두 번째 비판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비판은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챌” 수가 없다는 것이 獸神同形으로서의 신의 존재에 대한 비판이다. 요컨대 하나님도 없고, 천국도 없고, 바로 이곳이 지상낙원이라는 것이 「하나님 놀다 가세요」의 핵심적인 전언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즐겁고 유쾌하며, 다소 해학적인 동화의 세계는 이처럼 一刀必殺의 문체와 낙천주의의 사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신현정의 동화의 세계는 반기독교적이며 신성모독적인 세계이다. 그는 정의로운 하나님과 최후의 심판자로서의 하나님도 거부하고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삶의 표정에 반하는 분노의 표정도 거부한다. 신성의 세계는 거룩하고 엄숙하며 유모어가 없는 세계이지만, 동화의 세계는 언제, 어느 때나 즐겁고 유쾌하며 상하의 계급과 위계질서가 없는 세계이다. 하지만 그는 동화의 세계의 분위기만을 연출해내지, 동화의 세계의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신성의 세계도 거부하고 세속의 세계도 거부하며, 또 그리고 동화의 세계마저도 거부한다면, 만일, 그렇다면 그는 무정부주의자나 냉소주의자, 또는 회의주의자나 염세주의자에 불과하단 말인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그는 현실의 삶을 옹호하는 현실주의자이자 이 세상의 삶을 찬양하고 옹호하는 낙천주의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나의 신현정론([행복의 전령사--신현정의 ‘상상력의 혁명’에 대하여)의 머릿글에 해당된다. [하느님 놀다 가세요]를 더욱 더 명료하고 재미있게 분석해 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시의 성격상 동어반복을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차라리 가장 아름답고 멋진 ‘자기 인용’으로 대체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점을 독자 여러분들은 양해하여 주기를 바란다. 나는 몇 권의 실제비평의 평론집을 더 묶어낼 수도 있지만, 사상과 이론서가 아닌 그 잡문 성격의 평론집 출간을 한사코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행복의 전령사]는 우리 애지 홈페이지(www.ejiweb.com)에 게시되어 있으니, 그것을 참조하여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