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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의 효시는 아브라함의 십일조요,
아브람은 가나안 전쟁의 전리품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영원한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바쳤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소돔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떡과 포도주를 가진 멜기세덱은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라 축복하였고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고 하였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축복하고 십일조를 받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이 아브람의 십일조를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고 통전적인 이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리품의 나머지는 소돔왕에게 주었으며
그 가운데서 아브람과 함께 전쟁을 수행한 사람들의 분깃으로 나누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람이 전리품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영원한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바쳐
물질의 복을 받았다는 명제는 전혀 성립하지 않습니다.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사실은
창세기 저자의 영감적 성찰입니다.
그 후 멜기세덱은 다윗의 시에 나타났는데
다윗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주에 대한 멜기세덱을 영감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제사장은
태어난 날도 죽은 날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것이라고 영감적 이해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레위인 제사장은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았으나
멜기세덱은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신앙 고백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믿음이라고 주 예수께서 말씁하였습니다.
창세기는 아브람의 십일조를 언급하였으며
레위기는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와 가축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레위인의 기업이라고 하였으며
신명기는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요,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드려진 십일조는 레위인을 비롯하여
객과 고아와 과부 등을 위한 구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십일조의 목적은 물질의 복을 받기 위한 축복의 씨앗이 아니라
십일조를 드리고 함께 나누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신14:23)
그러므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요, 여호와의 성물이라는 말씀을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의무적으로 드리는 것이며 물질에 대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주신 그 언약의 증거입니다.
십일조는 물질에 대한 신앙고백이라는 신학적 상정은
성경의 산물이 아니라 교조적 신학의 이데올로기입니다.
물질에 대한 신앙 고백은 금은동목석과 같은 우상 숭배요,
십일조의 우상화는 사이비 신앙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십일조의 궤변, 그 골격을 이루는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으로서의 십일조입니다.
이것은 십일조의 궤변이요,
성경의 지력이 없는 작자들이 만들어 낸 교조적 이데올로기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으로서의 십일조라는 것은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사설(辭說)에 불과합니다.
애굽의 이스라엘은 십일조를 하지 않았고
광야의 이스라엘도 십일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신 것에 대한 언약의 증표요,
가나안 땅의 소산물로 드리면서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는 언약의 증거입니다.
사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것이라는 신앙고백으로서의 십일조에 대한 이해는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에 대한 신앙 고백과 마찬가지입니다.
개신교에서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라고 해서 예배때마다 사도 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지만
사도 신경은 10세기 동안 수정 보안된 로마 카톨릭의 압축된 교리, 그 강령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는 고백은
교황 중심의 교권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이후의 모든 고백은
교회의 권세 아래 있다는 신앙고백으로 성서와 동일한 권위의 교권을 인정하는 이단적 교리입니다.
개신교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도신경을 아전인수식으로 가르치고 종용합니다.
십일조의 문제도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언약의 증표요, 그 증거라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물질에 대한 신앙고백으로서의 십일조를 교조화시켰습니다.
더욱 구원받은 은혜의 증거로서 십일조라는 이해는 성서지대의 어불성설이요,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탄생한 신약의 교회와 주 예수의 복음은
아브라함 언약의 증거인 할례처럼 십일조를 폐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신 것에 대한 불신이요, 율법의 배신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신약의 교회가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받은 은혜의 배신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은혜와 십일조의 관계는
구약시대 유월절과 맥추절과 초막절과 5대 제사와 할례와 같습니다.
구약의 모든 절기와 제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로 완성한 언약의 성취요,
신약의 교회가 유월절을 지키고 초막절을 지키고 십일조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저주의 복음입니다.
☞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
십일조의 강조가 "다른 복음"이라면......
확실히 한국 교회의 교조화된 십일조의 신앙은 이단과 사이비의 올무, 그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성경지대에 여호와의 것,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은
십일조를 비롯하여 가축의 첫 태생과 제물과 기름의 향기며,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이며 구원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의무요, 또한 성도의 헌신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물질에 대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언약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단번에 드린 십자가의 영원한 제사는
구약의 모든 절기와 제사를 온전히 이루고 성취하였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궤변과 왜곡된 교조적 이데올로기의 강조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그 모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신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였던 초대 교회와 사도들은
십일조의 정신을 이어받아 연보를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증거하였습니다.
연보는 제물이 아니라
구원받은 은혜를 증거하는 삶의 감사입니다.
은혜의 본질인 교회가 하나님을 겸하여 물질을 섬기면
맘몬 신앙의 사이비와 이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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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시대 십일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초대 교회가 드리지 않았던 십일조를 중세 교회가 부활시켜 종교적 농노제도로 고착화 시켰으며
종교개혁 후 개신교는 십일조를 영국에서 1688년에 폐지하였으며
프랑스는 1790년 이후 폐지하였으며 독일은 1807년에 폐지하였습니다.
청교도들도 십일조를 하지 않았으며
1900년대 초에 미국 캔자스주의 오순절 교회에서 방언기도와 십일조를 부활시켰으며
한국에 전래되어 한국 교회의 교조적 이데올로기로 고착되었습니다.
이처럼 중세시대 종교적 농노제도였던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중세적 종교장사요, 한국 교회의 사도신경과 더불어 중세 카톨릭의 흔적을 가진 아킬레스건이 되었습니다.
십일조로 부흥했던 한국 교회는
십일조로 무너지는 종말론적인 벼랑끝 낭떠러지에 놓였습니다.
성경과 말씀 중심의 교회를 외치면서도
비성경적이면서 비복음적인 복음의 가라지를 알곡으로 추수하는 우스꽝스런 현상은
이단과 사이비의 정체성을 가진 한국 교회의 종말론적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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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모세오경 이외에 성서지대의 십일조는
사무엘과 히스기야와 아모스와 느헤미야와 말라기에 언급되었습니다.
특히 아모스 선지자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을 조롱하면서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십일조는 매년 드리고 또 삼년마다 드리는데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는 아모스의 외침은
일반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고 송아지 형상의 여호와를 섬겼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을 경고하였습니다.
사사시대 350년 동안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으며
레위인의 기업인 각 지파의 십일조를 받지 못한 레위인은 유랑생활을 하거나
다른 지파의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실로의 성소가 파괴된 후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면서 왕은 십일조를 착취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삼상8:15-17)
자원하여 드리는 종교적인 십일조가 왕을 세우면
강제적으로 징수되는 세금이 될 것이라는 경계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십일조에 대한 사무엘의 의식이었으며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은 레위인의 기업으로 십일조에 대한 율법적 신앙을 오래 전에 잃었습니다.
사무엘 이후 십일조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왕국 유다만 남은 상태에서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으로 율법적인 십일조가 부활되었습니다.
☞ 또 왕의 재산 중에서 얼마를 정하여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
곧 아침과 저녁의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의 번제에 쓰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을 명령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몫의 음식을 주어 그들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힘쓰게 하라 하니라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첫 열매들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유다 여러 성읍에 사는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들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여러 더미를 이루었는데
셋째 달에 그 더미들을 쌓기 시작하여 일곱째 달에 마친지라
히스기야와 방백들이 와서 쌓인 더미들을 보고 여호와를 송축하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축복하니라(대하31:3-8)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열 지파가 사라지고 유다 지파만 남은 상태에서
유다 지파의 십일조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과 제시장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 이후 므낫세의 폭정으로 성전은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이 되었고
요시야 십팔년에 종교 개혁을 하였으나 히스기야 시대의십일조를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므깃도 전투에서 요시야가 전사한 후 애굽의 속국이 된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성전이 불타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모든 신앙을 잃어 버렸고
디아스포라를 위한 회당 중심의 율법을 상고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 70년이 끝나고 귀환한 후 이듬해 성전지대를 놓았으나
기득권 세력의 방해로 16년만에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다리오 왕 이년에 시작된 성전의 재건은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의 공사를 완성하였습니다.
성전지대를 놓은 지 20년 만에 성전이 완성되었으며
성전 건축에 관한 말씀을 기록한 에스라는 성전 건축에 동참하지 않았으며
스룹바벨에 의한 1차 귀한 후 대략 79년 만에 2차 포로귀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성전 중심의 권력을 가진 대제사장 가문의 타락이 시작되었고
에스라 느헤미야의 종교개혁으로 부흥되었으나 또 다시 말라기 시대 제사장 중심으로 타락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대대적인 종교 개혁으로 성전 곳간에 있는 도비야의 세간을 척결하였으며
성전을 봉사하는 레위인에게 분깃을 주지 않아 성전을 떠난 레위인을 다시 불러 그 몫을 주었습니다.
포로 귀환 후 성전을 재건하였으나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죽은 후 타락하였으며
에스라의 종교 개혁으로 회복되었으나 에스라가 떠난 후 다시 타락하였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중첩적으로 종교 개혁을 하였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죽은 후 말라기 시대 스룹바벨 성전은 극도로 타락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고 제사장은 십일조를 도적하였으며
성전에서 봉사하던 레위인은 분깃을 받지 못해 마지막 문지기마저 떠난 상태에서
말라기는 최후 통첩을 하였습니다.
말라기서의 경고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멸망의 선포요,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메시야의 비전이었습니다.
그 후 성전을 농단한 헬라의 폭정으로 분연히 일어나
유대의 독립국가 하스몬 왕조가 세워졌으나 선지자의 신탁은 없었으며
130여년 동안 통치하면서 왕은 제사장을 겸하였고 종말에 권력 투쟁으로 로마에게 멸망하였습니다.
하스몬 왕조를 무너뜨린 로마는 황제의 신뢰가 두터웠던 에서의 후손
이두메 사람 헤롯을 총독으로 삼았으며
분봉왕 헤롯 왕조를 열어 B.C. 55년경부터 A.D. 93년까지 통치하였습니다.
로마의 지배하에 에서의 후손 이두메 사람 헤롯이 팔레스틴을 통치하였고
팔레스틴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헤롯 성전을 증축하였으며 그 시대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하스몬 왕조시대 형성된 경건한 유대인이며
바리새인의 십일조는 바리새인의 외식적인 기도에 나타나며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외식적인 신앙으로 예수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한국 교회의 십일조는 외식으로 책망을 받은 바리새인의 십일조를 계승하였으며
교조적 이데올로기 신앙을 구축하였습니다.
신약 시대 성전이 있던 시대 사도들과 초대 교회는 바리새인의 성전에 드리는 십일조를 하지 않았으며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탄생한 초대 교회의 복음에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서지대 말씀 중심의 십일조가 아니라
성서지대의 십일조를 모티브해서 물질에 대한 신앙 고백이라는 교조적 이데올로기 신앙을 확립하였습니다.
십일조의 기준은 임직자의 자격 요건이어서
십일조를 통한 사이비 종교의 철옹성을 구축하였습니다.
참으로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십일조를 부정하면 이단이요,
십일조를 강조하면 사이비 종교 사기꾼이라는 함정과 올무와 늪에 빠졌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탄생한 초대교회는 성령의 충만을 입어
주님의 몸된 교회에 할례를 비롯하여 십일조를 적용하지 않았는데
한국 교회는 축복의 씨앗으로 십일조를 받아드렸습니다.
십일조를 부정하면 이단이요, 십일조를 강조하면 사이비 종교 사기꾼이 되는 딜레마에 빠진 한국 교회는
암울한 사사시대 제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던 십일조의 민간 신앙을 낳았습니다.
성서지대의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레위인과 제사장의 기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사시대는 그 시작부터 여호와의 신앙을 잃어 버렸으며
각 지파에 분배 받은 레위인은 십일조의 분깃을 받지 못해 유랑하며 다른 지파의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십일조는 가나안 땅의 소출 곧 곡식과 나무의 열매와 가축의 십일조요,
예수님의 신분인 목수와 대부분 제자들의 신분인 어부는
종이나 노예나 고아나 객 등과 함께 십일조 의무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신 언약의 십일조는
주 예수의 복음으로 천만민이 구원을 받는 복음에는 말씀으로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십일조의 호불호는 복불복의 신앙이 되어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현령비현령의 불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십일조의 애물단지에 새겨진 한국 교회의 십자가는
귀신을 섬겼던 신주단지를 변화시켜 성미를 담는 주단지로 토착화시켰습니다.
물질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축복의 씨앗인 십일조를 믿음으로 잘 드리면
가나안 땅의 복을 율법으로 받을 것이요,
천하민민이 구원을 받는 주 예수의 복음에 적용되지 않은 십일조를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영생의 구원을 확실히 받을 것입니다.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없는 한국 교화는
십일조에 대한 바리새인의 전통을 고수하며 확증편향된 성경적 신앙이라고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