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제주도 하멜이 표류해 왔던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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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16:26조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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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이 표류해 왔던 제주도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로 표류해 왔다가 귀화해서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 네덜란드 사람인 박연과 하멜이다. 제주도에 왔던 박연(朴淵/朴燕)이 첫 번째고, 그 뒤를 이어서 하멜이 왔다.
허벅으로 물 붓는 여인
하멜 기념비
하르방 삼형제
제주도는 바람이 많아 배가 표류한 경우가 많다. 실제로 네덜란드인 하멜은 산방산 바로 앞의 용머리해안에 표착해 제주도에서 억류생활을 했다. 지금은 하멜을 기념하는 하멜상선이 복원되어 있고 기념비를 세워 공원으로 조성했다.
박연은 본명이 얀 얀스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인 네덜란드 사람이다. 그는 홀란디아호 선원으로 아시아에 들어왔다. 1627년 우베르케르크호(Ouwerkerck)로 바꿔 타고 일본 나가사키를 향하여 가던 중 태풍에 밀려 제주도에 해안에 표착했다. 그는 동료인 D. 히아베르츠, J. 피에테르츠와 함께 식수를 구하러 해안에 상륙했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이들 세 명의 네덜란드인은 조선에 귀화하여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무기를 제조하는 일을 담당했다. 조선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전쟁에 출전했고, 박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박연은 그 뒤 포로가 된 왜인들을 감시ㆍ통솔하면서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紅夷砲)의 제조법ㆍ조작법을 조선의 군인들에게 지도했다.
효종 때인 1653년 H.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했을 때 박연이 제주도로 내려가 통역을 맡았고 그들을 서울로 호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하멜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속되자 그를 감독하고, 그에게 조선의 풍속을 가르쳤다. 박연은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으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서 여생을 마쳤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박연의 고향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쪽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하멜이 타이완에서 인도 총독과 평의회 의원들의 지시를 받고 일본으로 가려고 항해에 나선 것은 1653년 7월 30일이었다. 출발하자마자 태풍이 불어 닥쳐 표류하기 시작했다. 망망대해를 헤매다가 배가 산산조각 나서 제주도 용머리 해안에 내린 것은 8월 16일 새벽이었다.
산방산 아래 용머리해안
산방산 아래 위치한 용머리해안에는 화순과 사계리 인근의 봉화대가 있었다. 용의 머리를 닮아 작은 언덕처럼 구릉이 있다.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해변을 따라 걸으며 누군가 육지에 다다른 사람이 있나 찾아보고 소리쳐 불렀다. 여기저기서 몇 사람이 더 나타나서 우리는 최종적으로 36명이 되었지만 대부분 심하게 다친 상태였다. 한 사람이 난파선 속에서 커다란 나무통 두 개 사이에 끼어 있어서 구출했으나 3시간 후에 죽고 말았다. 그의 몸은 심하게 뭉개져 있었다. 우리는 비참한 심정이 되어 서로를 보았다. 그 아름답던 배는 산산조각 나고 64명의 선원 중 불과 36명만 살아남았다. 이 모든 일이 15분 사이에 일어났다.
『하멜표류기』 1) 에 실린 글이다. 하멜 일행은 일본인들을 만나길 원했다. 그래야만 배를 다시 주조하거나 수리하여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곳에 도착한 사람들은 그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조선 사람이었다. 8월 18일 정오 무렵, 1~2천 명의 군졸과 기병이 몰려와 텐트를 포위했다. 그들은 서기ㆍ일등항해사ㆍ이등갑판장 들을 연행했다.
하멜이 제주 앞바다에 표류해 왔던 당시의 상황이 제주목사로 재직하고 있던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본도의 남쪽 앞바다에 배 한 척이 난파하여 좌초하였습니다. 대정현감 권극중과 판관 노정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현장에 나가 진상을 조사하게 했으나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바다 가운데서 뒤집힌 이 배의 선원 중 생존자는 38명인데,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처음 보는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배에 싣고 있던 화물 중에는 약재ㆍ녹비 등 많은 물건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향목 94포, 용뇌 네 항아리, 녹비 2만 7000장도 들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눈이 파랗고 코가 높으며 머리는 노랗고 수염은 짧게 기르고 있는데, 개중에는 아랫수염을 깎고 윗수염만 남긴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입은 상의는 길어서 허벅다리까지 내려가는데, 옆으로 여미게 되어 있으며 소매는 짧은 편이었습니다. 한편 그들은 주름 잡힌 하의를 입고 있는데, 치마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왜어(倭語)를 사용하는 사람을 시켜서 물으니 모두 다 ‘야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나라를 가리키면서 물으니 ‘고오’라고 하였고, 본도를 가리키면서 물으니 ‘고또’라고 했습니다. 중원을 가리키면서 물으니 더러는 ‘따밍(대명)’이라고 했습니다. 서북을 가리키면서 물으니 ‘타타르’라고, 동쪽을 가리키면서 물으니 ‘야빵(일본)’이라고 하기도 하고 나가사키라고도 했습니다. 계속하여 가고자 하는 지역을 물으니 ‘나가사키’라고 했습니다.
용머리해안
절벽이 둘러싸고 있는 용머리해안. 옆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퇴적암이 쌓여 층층이 독특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하멜 일행이 여러 가지 조사를 받고 대정현청으로 옮긴 것은 8월 21일 정오 무렵이었다.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에게는 말이 주어지고, 부상 때문에 말을 탈 수 없는 사람은 병마절도사의 명령으로 담가(擔架, 들것)에 태워졌다.
조정의 부름으로 서울에 도착한 하멜 일행은 이보다 앞서 온 남만(南蠻)인 박연이라는 사람에게 보였다. 박연은 그들을 보고 말하기를, “틀림없이 만인이다” 했으므로 이들을 금군에 편입시켰다. 대체로 화포를 잘 쏘았으며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을 추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서울에서 내려와 여수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들이 조선을 탈출한 것은 도착한 지 14년이 지난 1666년 9월 5일 동틀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16명 중 8명이 탈출했고, 하멜 일행이 나가사키에 도착한 것은 9월 8일이었다. 나머지 8명도 모두 석방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1980년부터 그가 정박했던 곳에 하멜 기념전시관이 건립되고 그들이 타고 왔던 상선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우도 산호사해변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산호사해변. 우도의 명물로 하얀 모래해변과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바다 색깔이 특히 아름답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멜이 표류해 왔던 제주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7 : 제주도, 2012. 10. 5., 신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