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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리 한반도 길 나의 길 동해 뱃 길......
2차 5월
13일 차 연해주 아침이 밝았다. 숙소를 나서. 해변 길을 따라 잠시 걷자 불라디보스토크 역이 나온다,
세계에서 가장 긴 시베리아 횡단 열차(TSR) 종착역이며 시발역이기도 하다. 금년이 역사 개통 100주년 되는 해며
선조들의 비극이 배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1909년 하얼빈역 광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공개 처형한 안중근 의사가 이곳에서 하얼빈으로 떠났고
1937년 10월에는 수십만 연해주 동포들이 이곳 등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실려 강제 이주를 당한 곳이다
이들이 당시 중앙아시아로 흩어진 고려인의 모태다
비운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1891년 시베리아 횡단철길을 착공해 25년이 걸려 1915년 10월에 완공한다
4개월 후 공산당 혁명이 일어났고 당시 혁명군에 의해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고 가족과 함께 체포된다.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이 건설한 시베리아 횡단 철길의 열차에 실려 우랄산맥 인근의 한적한 산골에 유배되고 2년 후 공산당 당원들에게
가족들과 함께 살해되는 비운을 맞으며 러시아 황실은 역사 속에 사라진다.
불라디보스토크역
100년의 역사를 가진 역 대합실 분위기가 아주 근사하다. 유럽식 카페 같은 분위기로. 천장은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전의
모습이라고 전해지는데. 러시아를 상징하는 여러 가지 그림들이 멋지게 장식돼 있다.
대합실
플랫폼으로 내려가자 전시용 증기 기관차와 TSR 9,288Km라는 기념 팻말이 서 있다. 실로 엄청난 거리다. 지구 둘레 3분의 1 거리로
서울 부산 간 경부선 철길 약 23배의 거리다.
종착역 모스크바까지는 일주일이 소요되는데 여름 시즌에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오는 대학생들과 일반 여행객들로 매회 만원이며.
최소한 며칠 전 예약을 마쳐야 열차티켓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역 광장 건너편 작은 광장에 레닌 동상이 서 있고 우측 도로를 따라 100여 m 지점에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 못 미쳐 좌측에 율 부린너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율 부린너는 한반도와 인연이 깊다.
아버지는 일재 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목재 채벌권을 얻어 부를 축적했으나 당시 러시아 공산당 혁명 세력들에게 부르주아로
몰려 전 재산을 압류당한다. 이후 율 부린너는 어머니를 따라 조선과 만주 일본 등을 옮겨 다니며 생활고에 어려움을 겪고 1940년 미국으로
이주해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 할리우드에서 영화배우로 데뷔해.
1956년 왕과 나라는 영화에서 아카데미 최고 배우상을 받고 일약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되고 1985년 사망하기까지 율 부린너는
많은 명화를 남긴다.
생가를 나와 도로를 건너면 우측 큰 건물이 불라디보스토크 주 정부 종합청사다. 청사 앞을 지나 우측 길을 따라 100여 m 지점 우측에 큰 광장이
하나 나온다. 혁명전사 광장이다. 2차 대전 당시 극동지역에서 목숨을 바친 러시아 병사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 광장으로 지금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는 휴식 공간으로 주말이면 재래시장이 열리고 있다,, 이곳이 우리 선조들에게는 비극의 광장이다. 1937년 10월 4일부터. 10일에
걸쳐
연해주에 거주하는 조선인 대부분을 이곳과 우수리스크 등 몇 곳에 강제 집결시켜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태워 중앙아시아로 보냈다..
연해주는 19세기 후반경 북간도 연변과 같은 형태로 함경도 농민들 중심으로 이주가 이뤄졌는데 당시 10 년에 걸쳐 6만 명이 넘게
이주했고.
20세기 들어 10년(1917~1926년) 사이 또다시 대규모 이주가 이뤄져 당시 연해주에는 조선인 인구가 17만 명이 넘었다...
이 무렵 조선인들은 학교를 설립하는 등 신문을 발행했고 조선인 지도자들이 중심이 돼 고려족 자치주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이때 러시아 중앙정부에서도 연해주 고려족 자치주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고 전해지나 연해주지역 러시아 농민들의
반대와 일본에 대한 정치적 상황 등을 고려해 1925년 스탈린에 의해 최종 거부된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미 조선인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정책을 비밀리 확정해 두고 10 년 넘게 숨기고 있다가 1935년 군사 작전하듯 실행에
들어간다.
먼저 조선인 지도자 전부가 일본과 내통했다며 간첩 협의로 몰아 2년에 걸쳐 약 2.500 여 명을 처형시킨다.
스탈린은 반발의 불씨를 원천 차단해 놓고 1937년 10월 4일 작전에 돌입한다..
이때 러시아 극동군이 동원되었고 17만 명이 넘는 조선인 대부분을 이곳 광장과 우수리스크 등에 강제,집결시켜 시베리아횡단열차에 태워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보냈는데... 당시 강제 이주 작전은 단 10일 만에 끝을 낸다..
당시 열차는 중앙아시아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는데 이동 중 열차에서 동사와 굶어 죽은 이들이 당시 2만 명이 넘었고
다행히 살아남아 중앙아시아에 버려진 조선인들은 거주가 한 곳에 제한되었고 대부분 움막을 파고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1937년 10월 25일, 니콜라이 예조프는 조선인 강제 이주 작전이 종료되었음을 스탈린에게 보고했는데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인 총 171,781명으로 36,442 가구가 강제 이주 당했다는 사실이 보고서에 담겨 있다.
지금껏 우리는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대한 원인과 동기 등을 알 수 없다.
한반도 근대사에 가장 큰 대참사이나 우리 정부나 북한 정권은 지금껏 밝혀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들 대부분이 함경도 사람들로 북간도 연변의 조선족과 달리 500여 년 전 우리 역사에 사라진 고려족으로
재등장을 시도했던 것일까??
반역의 무리 이성계가 탈취한 조선을 부정하고 500여 년 잠재된 고려의 부흥 세력은 아닣까????
많은 궁금증이 남는다.
당시 강제 이주 열차를 탄 한가정이 볍씨 한 부대를 꼭 껴안고 떠났는데
볍씨는 다음 해 카자흐스탄에 심어지고 중앙아시아 벼농사의 원조가 되고. 80여 년이 지난 현재 카자흐스탄은
쌀 생산량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혁명광장 맞은편이 젠틀 라이 쇼핑센터다. 이곳도 오랜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7층에 자리한 카페 분위기가 아주 근사하다.
한쪽 벽면 전체가 통유리로 설치돼 시가지 조망권이 확보돼 있다.
입장료를 내고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독수리 전망대를 따로 갈 필요 없다.
빵 한 조각에 커피 한잔으로 중식을 대신한다. 불라디보스토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즉석에서 구워낸 유럽식 빵 쫄깃하면서 식감이 아주 좋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아르바트 거리와. 100년 넘은 굼백화점 등
볼거리 대부분 도심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다시 주정부 종합청사 앞을 지나 지하도를 하나 건너면 바로 아르바트 거리가 나온다.
아르바트 거리로 통하는 지하 계단에 러시아 한 소녀가 바닥에 돈이 들어 있는 박스를 내놓고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아주 이국적으로 다가온다.
아르바트 거리에 접어들자 거리 끝 지점에 동해 바다가 펼쳐진다. 러시아에서는 오호츠크해라고 한다
불라디보스토크의 명품 거리로 주변이 더없이 깨끗하다, 바다와 유럽풍 건물들이 조화를 이룬 환상적 거리로
주변에 젊은 여성들이 많이 보인다
불라디보스토크는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며 미녀들이 많은 도시로 알려져 있다
벤치에 앉아있는 젊은 여성들의 분위기도 예사롭지 않다.
이곳 젊은이들도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는 것이 일상화돼 있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를 본 딴 짝퉁 거리라고 하는데 오래전부터 기획된 도심 속 명품거리로
손색이 없다. 거리 양측에 유럽풍 전통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아르바트거리
아르바트 거리를 나서 루스키섬에 자리한 극동연방대학교 방문을 남겨두고 한반도 1만 리 길 13일 차 일정이 대부분 끝나고 있다.
잠수함 박물관이나 전쟁기념관 등이 있으나 우리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고
우수리스크나 한인촌, 아무르강 등은 후일 역 루트에 포함돼 있다.
루스키섬의 극동연방대학까지 택시 요금 400 루블로 20여 분 체 걸리지 않는다.
루스키섬으로 연결되는 루스키 대교는 불라디보스토크 도심 속 또 하나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이곳 다리는 2012년 APEC
정상회담 당시 건설해 루스키섬과 도심을 하나로 묶었다.
루스키대교
루스키섬 해변에 자리한 극동연방대학교다.
캠퍼스 전체가 2012년 APAC 정상회담 장소로 지었는데 회담 이후 불라디보스토크 시내에 있던 극동연방대학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극동연방대학교에는 세계 최초의 한국학 단과대학이 있다.
1995년에 개학 한 한국학 단과대학은 5년제 과정으로 학국어과. 한국 역사학과, 한국 경제학과. 한국 문학과가 있다.
한국과 인연은 한 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9년 극동연방대학교 동양대 조선어학과로 출발했다.
1937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억압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 강제 이주 당시 동양대는 폐교되고 교수들은 다 숙청된다. 이후 40여 년이
지나 1975년 한국어과가 다시 부활했고 5명의 학생을 모집했다, 이후 1994년 한국 역사학과 한국 경제학과,
학국 문학과 등 3개 학과가 충원되고 한국학 단과대학으로 승격했다. 현재 한국학 단과대학에는
250여 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며 태권도 전용 연습장과 사물놀이 동아리 등이 있다.
대학 정문은 누구든 통과할 수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 정면이 대학 본관인데 본관 건물이 좌우 1열 횡대로 하나로 길게 지어져 있어 외부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본관 내부를 통과하면 해안가 캠퍼스가 나오는데 학생 외 누구든 본관 입구에서부터 철저히 통제받는다
본관 데스크로 들어가 한국학 단과대학이 보고 싶다.. 단과대학 건물로 안내를 부탁하자 출입증을 요구한다
미처 몰랐다. 읍소 작전을 펼치는데 마침 지나던 러시아 한 여학생이 다가와 안내를 자처한다.
우리말이 유창하다. 한국어과에 다닌다고 한다.
한국어과 여학생의 도움으로 겨우 본관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학생처나 강의실은 휴일을 맞아 텅 비어 있다....
APAC 정상회담 장소다운 실내 강의동 분위기가 아주 고급스럽다.
강의동 뒤쪽으로 동해 바다와 함께 캠퍼스가 펼쳐진다.
해안가에 자리한 축구장 옆으로 동해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며 좌측으로 루스키 대교도 한눈에 들어오고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해변가 캠퍼스는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대학 정문과 캠퍼스 사이 대학 본관 강의동이 담장 역할을 하고 있는데. 정문으로 나오려면 다시 본관 건물을
통과해야 한다.
여학생의 친절한 안내로 캠퍼스 구경을 마치고 다시 본관을 거쳐 정문을 나와 작별 인사를 나눈다.
이때 동양인 한 여학생이 친구를 부르며 다가온다
한국 학생이다. 강원도 관동대학교 경찰행정학과 4학년으로 어학연수차 한 학기 교환학생으로 왔다고 한다.
우리 학생들이 세계 곳곳으로 뻗어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파이팅이다. 다음에 또 만나자
호출한 택시를 타고 루스키 대교를 건너 숙소로 돌아오고 러시아 일정이 모두 끝난다
오늘이 한반도 1만 리 길 마지막 날이며 오후 3시경 크로즈를 타고 귀국 예정이다. 내일 10시경 강원도 동해시에 도착한다.
13일간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는 순간이다.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모두 출국장으로 모여들었고 국경과 달리 출국 수속이 빠르게 진행돼 곧바로 승선을 완료한다
크로즈에 오르자 불 라디 보스토크 시가지가 한눈에 펼쳐진다. 출항한 후 잠시면 루스키 대교가 그림 같은 풍경으로 멀어져 간다
다시 보자 연해주
14일 차 마지막날 동해항이 가까이 오고 우리 팀을 환영하듯 여명이 움트고 밝은 해가 올라온다, 서해에서 일몰을 보며 출항한 1만 리 한반도길
동해에서 일출을 보며 긴 여정이 끝나고 있다..
팔공산 자락에서.........................
. 이 정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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