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42/내 고향 전주全州]사史-도圖-락樂 유람!
누가 뭐래도 내 ‘제2의 고향’은 전주全州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주가 제2의 고향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초등학교 5학년,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되던 1968년부터 대학 1학년 1976년까지 청소년 학창시절을 다 보냈으니 그러지 않겠는가. 한양 천년, 서울은 1977년부터 군대생활 27개월을 제외하곤 2019년 6월까지, 모두 몇 년인가? 42년을 살았어도, 희한하게 정이 ‘1도’ 안들었다. 늘 고향에서 노후생활을 꿈꾸었다. 꿈은 이루어진다(Dream comes true)고 했던가. 마침내, 결국 고향에서 안분지족, 안빈낙도, 유유자적한 지 3년이 막 넘었다. 직장생활 37년도, 결혼도, 특별시인 그곳에서 두 아들도 낳고 길렀건만 어쩐지 ‘남의 도시같다'는 생각으로 늘 내 몸에 맞지 않은 옷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술만 마시고 살았을까? 흐흐. 공기가 보이고 인간들이 똥깐의 고자리처럼 득시글득시글한 도시가, 이제는 도리어 반가울 때가 있지만 말이다. 내가 여기에서 산 적이 있던가?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한다.
아무튼, 어제 KBS전주방송의 특집프로그램 이야기를 하고 싶어 고향이야기를 꺼냈다. 제목이 <사도락 전주유람(1부)>. 사도락? 들으니 금시초문,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 궁금증으로 모처럼 60분 시청을 한 소감졸문을 적는다. 역사학자 이익주 교수(서울시립대)와 영화감독 변영주 그리고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부문 장원 ‘전주의 딸’ 김나니 등 3인이 전주 곳곳을 다니며 스토리텔링을 엮는다. 자못 흥미로운 주제다. 전주역에서 만나 ‘사도락’을 풀이하는데, 사는 역사(史), 도는 영화(圖), 락은 국악(樂)이다. 한 마디로 시청 소감을 말하라면, <문화유산답사기> 1권의 서문중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이게 되고…”는 구절로 대신하겠다. 유홍준이 정조 때의 문장가 유한준의 화제畫題 <知則爲眞愛(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愛則爲眞看(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看則畜之而非徒畜也(볼 줄 알면 모으게 되므로 그저 모으는 것이 아니다>의 뒷부분을 약간 각색하여 유명해진 문구이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사랑하면 보이게 되는데/그때 보이는 것은 그전(모를 때와)과는 전혀 다르다” 어찌그러하지 않던가. 모르는 게 죄는 아니겠지만, 몰라서 장땡은 아니지 않는가. 알면, 사랑하면 더 좋은 것을. 참으로 멋진 말이다. 진리眞理가 아닐 수 없다.
감수성을 키워가며 10년을 산 제2의 고향에 대해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전주를 왜 ‘온고을’이라고 하는지도 알았다. 광주를 ‘빛고을’이라 하는 것처럼 ‘온전할 전全’자인데, 인근 완주의 완자와 합하면 ‘완전完全한 도시’가 된다. 내 고향 전주가 그런 곳이었다. 유토피아를 뜻하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의 무릉은 있어도, 완산주完山州, 완전한 도시를 뜻하는 이름의 도시가 어디 있던가. 또한 왜 전라도인가? 전주와 나주羅州를 합친, 도道 이름이 한번도 바뀌지 않은 채 1천년이 넘은 도시(2018년). 우리 중고교 다닐 때 전주는 7대 도시의 하나였고, 전국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로 이름을 날렸다. 이제, 쇄락鎖落의 도시가 되어 전국 50대 도시에나 낄 것인가, 자조自嘲가 앞섰는데, 아니었다. 이교수가 전주는 원래 ‘성곽의 도시’였다고 한다. 한양도성처럼 사대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풍남문만 남아있다며 고지도를 보여준다. 아항. 한옥 700여채가 고스란히 보존된, 전국 최대 규모의 한옥마을과 유서깊은 전주향교(‘성균관유생들’ ‘뿌리깊은 나무’ 등 영화촬영지로도 유명), 23회째를 기록한 국제영화제가 왜 전주에서 열렸고 유명해졌는지, 전문가들의 설명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오죽하면 어느 호텔 로비에 ‘영화박물관’이 있을까.
한국전쟁 이후 50-60년대 <피아골> 등 영화를 찍기 시작하여 부산과 함께 국제영화도시(한국의 할리우드)로 발돋움한 까닭은 무엇인가? 오늘날 K-컬처의 원조라 할만한 역사적인 도시, 국가지정 5대 관광도시 전주, K-컬처에 반한 외국 관광객들이 가장 와보고 싶은 1순위 장소로 뽑는다는 전주향교. 관광객 1천만명이 넘는다는 전주, 천년의 고도 경주가, 한양 고궁이 그럴까? 지금도 고스란히 보존된 카톨릭센터와 그 지하의 ‘문화다방’이 엄혹한 시절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해방이후 전주를 방문한 백범 김구선생이 하룻밤 머물렀다는 학인당(천만다행, 나도 학인당에서 일박한 적이 있다), 맛과 멋의 고장이라고 소문난 내 고향 전주는 광주보다 훨씬 순박하고 온순하고 내로라하는 특징이 별로 없는, 현대옥이나 삼백집 등 콩나물해장국과 비빔밥으로 알려졌으나, 역사와 영화와 국악을 알고나니 새롭게 보였다. 그리고 다시 이 작은 소도시가 자꾸 더 궁금해졌다. 내주 금요일밤 제2부를 기다리는 이유다. 지방방송들은 기획을 하려면 이런 기획을 하라. 내 고향을 윤택하고, 반짝반짝거리게 하는, 다른 동네 사람들의 시선조차 사로잡을 수 있는, 살아있는. <범 내려온다>는 기찬 춤과 노래를 만든 친구들이 ‘전주’를 대상으로 했는지도 궁금하다.
<M 프로젝트>의 M은 막걸리의 약자라고 한다. 삼천동-서신동 등에 퍼져 있는 막걸리집은 전국에서 따라올래야 따라올 수 없는 노하우들을 갖고 있다. 막걸리 한 주전자에 육해공군 안주만 20여가지, 싸도 너무 싸 서울촌넘들은 바가지썼다며 도망갔다고도 한다. 아무리 위축되었어도 40년만의 전주는 변해도 많이 변했다. 지방신문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언론인선배가 “죽어가는 도시에 뭘 볼 일이 있다고 중앙일간지 기자가 내려오려 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하지만, 어찌 천년의 고도가 죽어갈 수 있단 말인가. 연전에 전라감영 구경을 한 적이 있었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단상 21/전라감영]전주全州를 깊이 알게 된 날 - Daum 카페 태조 이성계의 원적(전주 이씨 이안사는 원나라에 망명했다가 고려말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로 다시 망명했다)이 전주 아니던가. 어진을 모셔놓았던 경기전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도 보았다.
임진왜란때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 어느 굴로 옮겨놓지 않았다면 우리는 조선 전기의 역사를 전혀 알 수 없다. 우리 조상들은 기록유산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가치를 알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지은지 100년이 더 된 전동성당도 보아라. ‘혼불’이라는 대하예술소설을 혼신의 힘을 다해 쓰고 가버린 ‘최명희기념관’도 가볼 일이다. 이성계가 황산전투의 빛난 승리후 일가친척들을 초대해 잔치를 베푼 이목대와 오목대에 올라 고즈넉한 한옥 700여채를 바라보아라. 완산칠봉에도 올라보자. 고려 왕건은 전주천이 역천逆川이라며 호남인을 차별했다던가. 웃기지 마라. 전주는 얌전하게 살아있다. 중앙무대에서 자꾸 무시를, 차별을 하고 있어도, 맛과 멋으로 가득찬 풍류의 고장, 전주를 이제 더 이상 무시하지 마라. 어쩌다가 양반들도 화를 내면 무섭다. 그러니 차별하지도 마라. 정여립과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대동세상大同世上이고, 밥이 하늘인 그런 세상을 꿈꾸었다. 내 친구가 쓴 <전라도 천년>이라는 책을 들어보셨는가? 전라도, 그중에서도 특히 전북, 거기에서도 더 나아가 전주의 예찬론을 읽어보시라. 예찬이 아닌 ‘사실찬’임을 알 수 있을 터. 전북은, 전주는 자꾸 재발견되어야 한다. 자꾸 ‘새만금’만 말하지 말라. 첨단과 혁신만 말하지 마라. 전통은 계승되고 발전되어야 한다. '오래된 미래'라는 형용모순의 관용구를 아실 것이다. 한옥韓屋, 한복韓服, 한지韓紙, 한식韓食으로 대표되는 전주는 무궁무진 그 자체가 될지니.
깊어가는 가을, '관계인구'들을 위해서라도 그냥 한번, 이렇게라도 제2의 고향인 전주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혜량하시길. 흐흐 인구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상주인구, 교류인구, 관계인구. 관계인구가 중요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