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월지·동궁 발굴이후 신라 천년 왕궁 전체 윤곽 드러나
신라는 676년 삼국을 통일한 후 동북아의 중심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 시기 서라벌은 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이나 이슬람의 바그다드와 도시의 규모, 문명의 수준에서 견줄 만 했다.
서라벌은 BC 57년에 건국된 후 935년 태조 왕건에 패망하는 1천년 동안 신라의 수도이자 왕경이었다. 한 도시가 1000년 넘게 일국의 수도로 존재한건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드문 사례로, 고대 로마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과 중국의 장안(長安), 일본의 교토 정도가 ‘천년 수도’ 기준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천년 고도 경주엔 뚜렷한 왕궁과 왕성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그동안 학계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물론 고대의 사서(史書)에는 ‘월성(또는 반월성)에 궁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많이 나타나지만 이를 확인해 줄 고고학적 자료가 나타나지 않아 의문을 더했다.
1985년 경주문화재연구소가 월성 외곽에서 발굴 조사를 벌이던 중 왕궁터를 감싸던 해자(垓字)를 발견하며 신라 천년 왕궁터에 대한 존재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또 앞서 발굴된 월지(月池:안압지)와 동궁(東宮), 월정교도 신라의 궁성을 구성하는 건물이었음이 밝혀지며 왕도 전체 윤곽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신라 천년 비밀을 간직했던 신라의 궁성 경주 월성 속으로 들어가 보자.
◆935년 신라 멸망 이후 경주는 폐허 도시로=월성은 신라 50명의 왕들이 통치하고 삶을 마감했던 곳이다. 일국의 최고 수장들이 머물렀던 공간인 만큼 신라 최상위층들의 생활, 문화, 사상이 녹아있는 곳이다.
그런데 경주에는 왕궁 유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뭘까. 과학적인 이유로는 긴 세월을 견디기 힘든 동양의 목재문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가장 큰 이유는 신라의 멸망이다. 935년 신라 경순왕은 백관들을 거느리고 개경까지 가서 고려에 신라를 양도했다.
최고 지도자가 떠난 서라벌엔 비운과 허무만 남았다. 사람들은 경주를 버렸고 왕도를 떠났다. 고려 왕조도 경주의 왕궁, 왕경을 따로 챙기지 않았다. 고려에게 경주는 청산해야할 대상이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뒤부터는 신라의 유산과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동궁의 전각들을 강제로 훼철하기 시작했다.
1204년에 벌어진 ‘신라 부흥 운동’과 복위(復位) 운동의 실패도 경주 몰락을 부추겼다. 고려 신종 이후 경주에서는 ‘김사미-효심의 난’ ‘동경민란’ ‘경주 별초군의 난’ 등이 잇따라 일어났다. 이런 부흥 운동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경주의 몰락은 더 가속화되었다. 한때 수도였던 경주는 반란의 소굴로 여겨졌고 강등과 격하를 거듭하며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1238년 몽골 침략 때에도 경주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기록에 보면 황룡사구층탑, 황룡사 대종 등 중요 유적들이 이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1985년 월성 해자 발굴 이후 월성 실체 드러나=왕성, 왕궁의 유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경주에 왕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수많은 역사서들이 ‘금성 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불렀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랜드마크급 궁궐 유적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신라 건국 초기의 특수한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 초기부터 월성은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초기 소국(小國) 단계에선 대규모 왕성 건물을 건축하기 보다는 최소한의 방어기능만 갖춘 소규모 집무, 생활공간으로 왕궁 기능을 대신했을 것이다.
더욱이 월성이 800년 넘게 궁성으로 존속하면서 신라 정부는 왕성을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 보다는 그때그때 개·보수와 증·개축을 통해 공간 수요를 해결해나갔던 것이다.
1985년부터 시작된 월성 발굴은 월성이 명실상부한 신라의 왕궁이었음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월성 외곽에서 대규모 해자(垓字)를 발굴했는데 이 유적이 월성을 감싸던 군사, 방어시설임이 밝혀지며 그 수비대상인 왕궁에 대한 윤곽이 밝혀지고 있다.
이 발굴작업은 38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와, 토기, 목간(木簡) 등 9만여 점의 유물이 발견돼 신라왕궁에 대한 전체 윤곽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한때 기러기, 오리가 놀던 유원지로 알려진 안압지(雁鴨池)가 왕실 귀족, 외국 사신들이 향연을 즐기던 공간이었고, 옆에 들어선 동궁(東宮)은 태자가 거주하던 별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하 레이더 탐사 이후 월성 실체 뚜렷=월성 내부에 대한 본격 조사가 시작되면서 2007년 획기적인 조사장비가 도입되었는데 이 장비가 바로 ‘지하 레이더 탐사’ 즉 ‘GPR’이다. 레이다 탐사 원리는 병원 진료시 CT, X-레이, MRI를 통해 병변을 정확히 진단하고 최적화된 치료를 진행하는 것과 유사하다. 탐사팀은 11만㎡에 이르는 월성 전 지역을 레이더로 탐사해 데이터를 축적했다.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는 전 구간을 14구역으로 분화하고 누적거리 225km에 이르는 지하유물 지도를 DB화했다.
전문가들이 주목한 지역은 월성의 동북단인 14구역이었다. 건물 초석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었고 그 건물터가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건물터는 서쪽 1구역보다 15~20m가 높아 왕성 내부가 한눈에 조망되는 포인트에 위치해있다. 더욱이 이 터는 동궁이 있던 월지(月池)와도 가장 가깝다.
경주시 관계자는 “14구역은 왕궁과 동궁, 월지, 월정교가 한 동선으로 연결돼 공간적 밀집도가 뛰어날 뿐 아니라 고지대에 위치해 왕실의 존엄과 권위를 나타내기에 좋은 위치에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지자체, 1조원 투입 신라 왕경 복원=2014년 해자(垓字) 발견과 지하 레이더 탐사 기술 등장으로 이제까지 각종 추측, 설로만 나돌던 왕성에 대한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신라멸망 이후 폐허가 되었던 경주의 지하에 이런 숨은 왕궁, 왕경 유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도 큰 성과이자 건축, 생활 등 문화, 사상사면에서도 의미 있는 발굴로 평가받고 있다.
정부와 자치단체는 2025년까지 사업비 9천450억원을 들여 신라왕경을 복원 한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우선 월성 복원을 위해 국비·지방비 2천700억원을 투입한다. 또 황룡사복원에 2900억 원, 동궁과 월지복원에 630억 원, 쪽샘지구 발굴정비 1545억 원 등 8개 사업을 펼치고 있다.
2019년엔 김석기 의원이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이 법 제정이후 8개 유적이었던 왕경범위가 14개 유적 15개 사업으로 확대됐다. 사업비도 당초 9450억 원에서 1조 150억 원으로 늘어났다.
경주시 관계자는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은 신라왕궁, 황룡사, 동궁·월지, 월정교, 대릉원, 대형고분, 신라방, 첨성대 주변 등 8개 권역으로 나눠 진행된다”며 “복원정비 사업장별로 발굴·출토된 유물들은 분야별 전문가의 철저한 고증과 자문을 거치게 된다”고 말했다.
월성 전경. 경주시 제공
월성 해자 복원 조감도. 경주시 제공
동궁과 월지 야경. 경주시 제공
월정교는 신라왕궁인 월성과 남산을 잇는 대표적 다리로 신라왕경의 규모와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경주시 제공
신라왕경 복원도. 경주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