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RTING MACHINE
역자는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으로 번역했다. 능력주의가 문제라면 해답은 뭐냐? 명문대를 능력주의적 기관으로 보고, 목표는 ‘가장 재능 있는 학생을 배경 불문 모집하고 훈련시켜, 사회 지도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란 시각은 1940년대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에서 나왔다. 당시 명문대는 “부유하고 경박한 젊은이들이 하인을 데라고 교정을 누비며, 파티와 스포츠가 위주지 공부가 아니었다. 졸업 후 주요 로펌, 월스트리트 은행, 외교부, 연구병원, 대학교수진 등을 장악했다. 비민주적인 미국의 엘리트를 쫓아내고 새 엘리트로 배경 불문 충원하여 ‘이 나라의 리더십 집단과 사회 구조에 대담한 변혁을 가져오려는 공학적 시도, 다른 말로 조용한 쿠데타 계획”이 코넌트의 시도였다. 먼저 유망한 고교생을 찾기 위해 공립학교를 대상으로 장학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우수 학생을 선발하는 SAT 시험을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SAT는 전국 대학의 입학을 좌우하는 시험이 되고 만다. 하버드에 몇 명을 보내느냐가 미국 국민을 유능자와 무능자로 판별하는 선별기가 되었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부모보다 높은 수준으로 올라설 수 있다는 자신감 “적어도 한 두세 대 후에는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는 일 없이 극적인 고용 분화와 현저한 경제 지위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권력과 특권은 불균등할 수 있는데, 매 세대가 끝날 때 자동으로 재분배될 것이다”라고 코넌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하버드 총장을 20년간 하면서 추구한 능력주의는 이상에 못 미쳤다. 엘리트 기숙학교 출신은 우대를 받았고, 공립학교 출신은 SAT로 능력을 입증해야 했고, 사립고교 출신은 장학금이 필요 없는 상류층이라 손님이었다. 상류층은 아직도 아이비리그에 먹힌다는 뜻이고 유대인이 많아지면 상류층 개신교 자제들이 하버드 등록을 꺼리는 두려움이 반영되고 있었다. 여성과 인종과 민족을 구별하지 않고 학생을 선발하는 것은 한참 후 미래였다.
돈 따라가는 SAT 점수 즉 소득 사다리가 한 계단 오를수록 SAT의 평균 점수는 높아진다. 주요 대학의 응시자는 부잣집(연 소득 20만 달러) 출신으로 1,600점 만점에 1,400 이상은 1/5인데 가난한 집(연 소득 2만 달러 이하)는 1/50이다. 이유는 과외비가 많이 들어도 부자는 공부를 시키고 학원 등 사교육은 고소득의 사업이 되었다. SAT 점수를 중시하면 특권층 자녀에 유리하고 불우한 가정 자녀들에 불리해진다. 여기서 소득과 부의 불평등은 1950년대 이후 커졌고, 코넌트가 계층화된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고 여긴 사회적 이동은 도출되지 않았다. 앵글로 섹슨-개신교-백인 부자 출신은 이제는 주류가 아니었다. 상류 기숙 학교 졸업생을 우대해온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의 관행은 1970년대에 소멸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상위 20%에 들 소득자로 성장한 학생의 비율을 조사하니, 고등교육은 사회적 상승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 하버드 1.8%, 프린스턴 1.3% 졸업생이 소득순위 최하위에서 최상위 등급으로 올라갔다.
과보호 학부모는 “과도하게 개입하고, 막대한 시간을 투입하고, 통제적 육아 방식이 지난 30년의 널리 퍼진 방식”인데 가장 심한 것이 불평등이 커진 것이다. 대표적 나라는 미국과 한국이다. 스페인과 일본은 불평등이 덜 불거진 나라이고 극성 부모도 적었다. ’물질적인 풍요에서 내 아이를 지키는 법‘의 저자 ’레빈‘은 특권층 젊은이에 나타나는 정신질환 증후군이 풍요로움과 부모의 지나친 간섭이 불행하고 깨져버리기 쉬운 인간이 되었음을 알게 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집단의 아이는 부유하고 잘 교육 받은 집안의 아이들이라 지적한다. 우리는 생각하고 탐구하고,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 가치 있게 살아갈 것인가를 숙고하면서 대학 생활을 보내지 못하고, 싸우고 싸우다 정신건강에 이상을 겪는 것이다.
개혁의 접근법은 SAT의 의존도를 줄이고 동문 자녀, 체육특기자, 기부금 입학자를 없앰이 명문대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폭을 키울 것이다. 매년 4만 명이 하버드와 스탠퍼드에 지원하는 데 입학정원은 2천 명이다. 수학능력이 불가능한 1만 5천 명은 솎아내고 나머지 2만5천 명은 누가 와도 수학능력이 충분하다면 그냥 제비뽑기로 합격자를 뽑으라 주장한다. 이 대안은 능력주의를 아주 부정하지는 않으나 현실적 타당성이 있다. 18세 소년이 어느 누가 훌륭한 경력을 쌓았는지 판별하기 어렵다. 우리가 재능을 높이 평가해도 대학입시에서 재능은 모호하기 때문이다. 야구에서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하나인 ’라이언‘은 18세 때 드리프트가 12바퀴 돌 때까지 지명을 받지 못했다. 그 앞에 294명이 먼저 지명을 받았다. 재능을 누가 우수한지는 이렇게 예측력이 떨어진다. 이것이 능력주의 오만에서 거품을 빼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일들 사이에 무엇이 높은 평가를 받는가를 재고해야 한다. 브래드 대학에 등록한 학생의 명예를 드높이고, 지방대나 기술 직업학교 등록자의 명예는 별로 쳐주지 않는 명망의 위계질서를 뒤엎어야 한다. 배관공, 전기기술공, 치과위생사 등은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과정을 존중해줘야 한다. 그냥 공부 못해서 명문대에 못 가는 사람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하는 과정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능력의 경쟁자는 ’우리가 우리 운명의 주인이며 뭐든 우리가 얻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고, 이 경쟁자가 “우리 운명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고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다른 누군가에게, 가령 신이거나, 운명의 장난이거나, 순간의 선택에 따른 예상 밖의 결과 등에서 좌우된다”라는 생각이다. 저자는 중등교육을 1960년대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퍼시픽 팰리세이드‘에 다녔다. 동기생 2,300명에서 우반 중 우등반, 30~40명에 속해서 8학년 내내 공부 잘하는 학생과 지내야만 해 친구가 부족한 모양이다. 매일 시험을 봐서 그날 성적대로 자리 배치를 다시 해, 경쟁을 유발하는 방식에 지친 중고등학교 생활을 했고, 14살 먹은 소년은 학교란 원래 이런가보다 여기며 지냈단다. 이것이 저자가 능력주의와 마주한 최초의 순간이었단다. 학생은 모두 성적에 목을 맸고, 석차에 열을 올린 나머지 지적 호기심 자체가 없었단다.
트럼프의 당선은 분노의 정치가 한몫한다. 가난한 백인은 백인특권을 비웃는 능력주의 질서 아래서 돈과 명예를 얻으려 발버둥을 친 데, 그들을 무시하는 엘리트에 대한 반감이었다. 교외지역민은 자격 없는 사람에 과도한 세금과 정부 관심이 간다는 믿었고,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복지 혜택을 받는 소수 인종 즉 흑인 유색인종이다. 또 책상에서 괴으름 피우며 책이나 쓰는 저자 같은 사람들에 생산도 안 하는 도시 전문직업인을 뜻한다, (백인은 유색인종과 일자리 정부 지원금을 야금야금 빼앗기고 아메리칸드림을 참고 기다리는 데 흑인, 여성, 이민자, 난민 등이 새치기를 하고 있다고 여기고 분개하는 데 엘리트 민주당에서 백인들을 인종주의자, 보수 꼴통, 백인 쓰레기라 비하하니 트럼프를 확 지지해 버린 것이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났기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 폭정을 넘어, 더욱 덜 악의적이고 더욱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저자는 마지막 말로 적었다.
2020.02.23.
공정하다는 착각-3
마이클 샌델 지음
와이즈벨이 간행
첫댓글 유명한 대학이 인재의 선별기로 인식되니
더욱 갈등이 고조되기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