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 오랜만에 전철을 타고 외출을 했다.
퇴직 후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한편으로는 고궁 해설도 하는 아주 학구적이고 반듯한
친구를 가끔씩 만나 세상사는 얘기를 나누곤 하는데 그날의 몇 가지 풍경을 적어 본다.
1. 경상도 상인
전철에서 물건을 파는 '잡상인' 이 없어진 줄 알았더니 아직 있었다.
경상도 사투리가 뼈에 박힌 70 쯤으로 뵈는 자그마한 사내가 팔토시를 파는데 얼마나
빈궁해 보이는지 그의 말투와 복장에 자꾸 눈이 갔다. 그는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체구가 작은 사람이 빈궁하면 더 안쓰러워 보이는 이유를 나는 글로는 설명할 수 없어
그냥 그날 느낌만을 간직할 뿐이다. 그는 내가 탄 칸에서 팔토시 한 개도 팔지 못했다.
2. 충청도 상인
이어서 내 고향 충청도 특유의 촌스런 말투를 전혀 고치지 않은 상인이 들어왔다.
돗자리를 파는 그의 설명은 촌스럽기도 하거니와 전혀 의사전달이 되지 않아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한여름에 싸구려 등산화를 신은 그는 매우 고단해 보였다.
사람이 어려워지면 모든 자세가 구드러지기(경직되기) 마련인데, 그는 그 전형이었다.
오천원 짜리 돗자리 하나를 팔고 옆 칸으로 넘어가는 그의 어깨가 많이 굽어 있었다.
3. 전라도 할매들
내 옆자리에 70 중반으로 보이는 전라도 할매들 둘이 탔는데, 오랜만에 만난 사이인지
엄청 시끄럽게 떠들어 짜증이 났지만 참았다. 그런데 그들이 내린 자리에 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전철은 떠났고 할매들은 저만치 멀어지는데 지갑을 열어 보니 현금이 백만원쯤
들어 있었다. 돈이 많은 할매인가 보다. 전철역에 신고하니 연락처를 달라 한다.
친구는 인문학 측면에서 나를 압도하는 풍부한 지식과 식견을 가지고 있다.
세상 사는 이야기,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찌 써야 하는지, 건강은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등을 얘기하다 교보문고에 들러 책을 둘러보다 들어왔다.
귀가하는 길 전철에서 황학주 시집을 읽으며 기분 좋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의 시가 너무 좋아서 그랬다.
그리고 지갑을 찾은 전라도 할매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고맙다고 했다. 내가 되레
감사하는 하루였는데.
요즘 말로 기.승.전.감사 이다.
2024.08.05
Anchorage
첫댓글 만난 사람들의 말투로 사는 지역을 알아내시고
글을 쓰셨네요.
전철안의 잡상인들을 보면 그분들의 입장을
생각 해 보게 되더군요.
사는 사람이 거의 없던데 그래도 ...
덕분에 ' 감사' 하는 하루였음을
깨닫습니다 .
아무리 감추어도(?) 말투를 듣고 출신지를
알아내는 건 저에게는 아주 쉬운 일입니다.
충청도 출신으로 전라도에 10년, 경상도에
3년을 살다가 서울로 왔으니까요 ^^
종교는 없지만 자기 전에 늘 감사 기도를 합니다.
고령인 분들의 삶이 넉넉하고
풍요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세월이네요.
현금 백만원 씩이나 지갑에 넣고 전철을 타신
할매들은 우선 남 보기에는 즐거운 듯 표현이 되었네요.
요즘은 거의가 카드로 쓰는데 푼돈 정도만
넣어 다니는 것이 상례이고...
아무튼, 내용이야 어떻든 돈은 있고 볼 일인데,
노후가 준비되지 않는 노인들은 힘겨운 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 노인들이 더워서 집에서 시간 보내느니
냉방이 잘 된 지하철을 타고 활동을 하기 위한 노인들이었으면
하고... 바래봅니다.ㅎ
더운 여름,
건강 잘 지키시고 재미난 시간 보내셔요.
노후가 고단한 분들 많지요.
그런데 삶이 곤궁한 분들은 대개가 젊어서부터
어려웠던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팔자인가...
여름 잘 보내고 있습니다 ^^
저는 대개 그냥 무심히 눈감고 머릿속으로 내릴 곳을 어림잡고 다니곤 하는데....
참으로 세심하게 일상의 관찰로 여러가지를 배우게 하십니다.^^
어제 낮에 아들 삼실에 아내랑 나갔다가 며느리랑 넷이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한적한 전철 안 맞은편에
어리디 어린 한 쌍이 앉아 계속 애정행각을 하는데 눈 둘 곳이 없어 동네까지 오는 내내 아주 불편했었네요~ㅎ
어딜 가든 무심한 듯 꼼꼼하게 주변을 살피고
기억하는 게 제 특기입니다 ^^
젊은이들의 애정 행각은, 공항에서 근무하느라
일찍이 단련(?)이 되었지만 여전히 불편합니다.
기분 좋은 절망감?! 을 이럴 때
쓰는구나! 싶어
무릎을 칩니다ㆍ
좋은 시를
읽을 때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이었고
여전히
지금도 느끼고 있지만
저는
그 기분을 갑자기 가난해졌다 ! 로
표현했거든요
확실히
앵커리지님은
독서인이란 걸 느껴지게
하는 대목입니다ㆍ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풍경들은 윗층 분들의 댓글로
대신하면서
요새도
돈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함뫈(할머니)가 있었네요잉!
하여님은 이제 '가난해졌다' 고 느끼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남을 가난하게 느끼게 할 만큼
넘치는 재능으로 글을 쓰니까요. ^^
언능 가을이 오믄 좋겄소.
전철의 잡상인은 불법 이랍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볼때에는 안타까웁디다
저렇게 해서 돈을 벌면 하루에 얼마나 벌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지갑을 찾아주셨으니 좋은 일을 하셨네요?
나도 지갑을 두번 이나 잊어 먹었다가 찾았습니다
한번은 전철역 사무실에서 , 또 한번은 파출소에서 연락이 와서 찾았습니다
찾아 주신 분이 누구인지 몰라서 고맙다는 연락도 못한게 아쉽습니다
충성 우하하하하하
불법인 걸 알면서도 그들을 미워할 수 없는 건
그들의 형편이 눈에 보이기 때문일 겁니다.
지갑을 찾은 할매들은 부자였나 봅니다.
그래도 5만원짜리가 제법 들어있는 지갑을 보니
조금 욕심이 나긴 했었습니다 ㅋ ^^;;;
전철 타신 시간이 사람들로 꽉꽉 찬 시간은 아니었나 봅니다.
사람들을 찬찬히 지켜볼 수 있고 돌아오시는 길에는 시집 감상도 하시고. 친구분과의 유익한 만남도 하시고... 멋진 하루를 보내셨네요.
여름날 길 달리면 팔이 너무 타서 긴팔티를 입고 다니는데, 하나도 못 팔고 다음칸으로 넘어가신 그 경상도 아저씨의 토시 하나 사드리고 싶습니다. ㅎ
앵커리지님, 건강하시지요?
미리 알았더라면 제가 팔토시 한 개 사놓았다가
마음님께 드릴 것을 그랬나 봅니다 ^^
오랜만에 코드가 맞는 친구와 느긋하게 밥먹고
차 마시고 서점에 들러 여유를 즐겼습니다.
전철 안에서의 몇 개의 풍경이
마음 짠하게 와닿네요.
요즘 전철안에서 파는
물건들을 사는 사람들도
없을 텐데, 안타깝기만 합니다.
전라도 할매들 지갑을 찾았더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다시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가
봅니다.
건강하시고요~!!
이베리아님의 댓글 베풀기(?)는 여전하군요.
변함없는 그 모습이 늘 부럽고 보기 좋습니다.
이베리아님도 건강 잘 지키십시오.
@앵커리지 고맙습니다.
전철의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가더군요.
잘 읽고 갑니다 .
어기서든 마음을 열고 보는 풍경은 오래 기억에
남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 사람과 관계된 기억은 말입니다.
경상도 상인에게 팔토씨 하나 사주셨으면....
지하철 안에서 잡상인 물건 사지 마라고 하는데,
나는 가끔 사오기도 합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날은 그런 여유와 주변머리가 없었네요 ^^;;
돈을 백 만원 씩이나 주우시고
금 캐러 가시면 몇 자루 가져
오시겠습니다.
복눈을 가지셨습니다.
요즘도 잡상인이 있네요.
별 걸 다 팔던 시절이 있더란
기억이 납니다.
푸핫~~~^^
꿈보다 해몽이 백 배는 더 좋습니다.
금 캐러 갈 자루 준비 해야겠어요.
저도 전철 내 행상이 아직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여여하시리라 믿습니다.
사실적 묘사가 뛰어나서
함께 전철을 탄 기분이 듭니다.
전라도 할매들
왜그리 크게 말씀 하셨을까요.
조근조근하게 하시지ㅋㅋ
앵커리지님
선행상 받으셔야겠어요.
착하신 앵커리지님에게
박수로 선행상을 대신합니다.^^
앗 제라님, 겁나 반가워요 ^^
잘 지내셨지요?
전라도 할매가 아니라도 모든 할매들은 대개
목소리가 크니까 그러려니 했습니다 ㅋ
선행賞은 제라님이 댓글 달아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경제력 없는, 나이 들어서의 여유와 한가함은
실로 고문임을 대도시 변두리 동네에 살면서
절절 느낍니다
토시 두짝, 우의 한벌, 선풍기 덮개 파는 지하철
의 그 비자발적 불법자들을 보면서는 품목은
다르나 밑바닥에서 내것 팔아 남의 지갑 여는
같은 행상꾼으로서의 동병상련을 저는 가끔
감출 수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불법을 떠나 그들을 탓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대개 나이들고 곤궁한 사람들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한 생애를 늙히는 일은 쉽지 않다' 라는
김훈 작가의 말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