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狂宗)(연호:조지) 부시 8년(戊子年)에 조선국 서공(鼠公)
이명박이 쌓은 성으로 한양성의 내성(內城)이다.
성(城)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당시 육조거리에 막아놓은 기대마벽(機隊馬壁)이 백성들에 의해 치워지매,
그에 대신하여 보다 더 견고한 철궤로 쌓아올린 책(柵)에 불과하다.
이는 당시 서공(鼠公)의 사대주의 정책과 삼사(三司:조선,중앙,동아) 언관들의 부패를 책하는 촛불민심이
서공의 궁(宮)으로 향하는 것을 두워워 만든 것이다.
무자년(戊子年) 유월(六月) 패주(敗主) 두환을 몰아낸 일을 기념하여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자
한성부 포도대장 어(魚) 아무개의 지시로, 하루 밤낮만에 쌓아올려져서 길 가던 도성의 백성들이 실로 괴이하게 여겼다.
한편으로는 그 풍경을 관람코저 모여든 백성이 그 머릿수를 헤아리매 팔만(포도청 추산)이 넘어,
도성 내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될 날이 머지 않았다고도 전한다.
['조선의 달인 16']中, 땜쟁이 명박
광종/狂宗, ( 연호 조지 ) 부시 조선국 서공 땜쟁이-명박
본디,
이명박 ( 성은 二 씨요, 본명은 목숨 명/命에 핍박할 박/迫이라 )은 양철냄비 땜쟁이였으나
광종의 삼고초려/三顧草慮'에 마음/心이 동하여, 철궤의 땜질을 진두지휘/陣頭指揮' 하니 그 이름이 명박산성/命迫山城이라.
비록
형상은 뱀의 눈깔과 쥐의 주둥이를 닮았으나,
타고난 성품이 부지런하여 16년동안 자시/子時'에 조식을 겸하고 축시/丑時부터 땜질소리가 주야없이 청야에 울리니,
사람들은 그를 땜빵의 달인이라 칭송했다 한다.
이처럼
소문이 한성을 넘어 전국을 떠돌아,
광종( 狂宗 ) 부시가 가무백희에 땜쟁이 명박을 초청하야 그의 잔재주를 즐겨하시며 박장대소하시니
땜장이 명박은 부시의 성은에 감복하여 제주삼다수 같은 눈물로 읍/泣한다, 이것이 광종/狂宗 부시 5년의 일이렷다.
광종이 땜쟁이 명박에게 이르기를,
"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 이런 젼차로 어린 백셩을 궁휼히 여겨
소한마리욜/牛 샹으로 듀니/賞 눈뮬을 /淚 거두라 " 하시며 친히 하사품의 이름을 명/名 하시니,
그 소를 미친-소/美親牛'라 부르라 " 하셨다.
이에,
삼사언관응모는 조선 공보를 통해 이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으니,
'나도 밤새워 들었는디 임금의 자애와 땜쟁이의 통곡이 어우러졌을 때
서로 몸을 대지 않고도 상대편을 희롱하고 어쩔 때는 서로 몸을 보듬고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동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5대 기서 ['조선의 달인16']中, 땜쟁이 명박 편은 여기까지이다.
그 후 땜쟁이 명박은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는다.
다음은 김봉남의 [ 광종패망기 ] 18장 1818페이지 18줄 내용이다.
광종, 무자해 팔년 유월 열하루, 축조된 철궤 명박산성은 다음날 가랑비에 무너진다.
병마사 병관 호통 기갑이 붕괴의 원인은 공사비를 절감하기 위해서
아크용접이 아닌 촛농으로 땜질을 한 것이라 질타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촛농사건이다.
이에 땜쟁이 명박은 항소하나 패하매,
임금 광종은 옛정을 생각하야 쥐약을 명하지는 않고 낙산 포조리로 귀향보냈다 한다.
그 후, 땜쟁이 명박은 이곳에서 독을 짓고 살았는데,
현종/賢宗 16년, 그는 불의의 사고로 그만 독 안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땜쟁이-명박은 [일어서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는] 괴병에 걸려있던 터라,
4년 9개월을 홀로 독 안에 갇혀 쓸쓸히 굶어 죽어간다.
이때부터,
후대의 사람들'은 부지런하나 어리석고 욕심많은 사람들을 가리켜 '독 안에 든 쥐' 라고 말했다 한다.
'독 안의 든 쥐'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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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네이ㅂㅓ블로그&본인수정
첫댓글 광종. 서공....ㅠㅠ....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이네요. 원글 작성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사마천의 "사기"보다 더욱 훌륭한 역사기술입니다. 기술방법은 "탄핵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