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전 金祐銓(1922 ~ 2019)】「한국광복군훈련반 졸업, 제3지대 활동」
본관은 연안(延安), 본명은 김우전(金祐銓)이며 호는 극재(克齋)이다. 이명으로 원경(元景), 원경(元卿)이 있다. 1922년 2월 12일(음)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갈산면(葛山面) 광동리(光東里)에서 아버지 김응수(金應叟)와 어머니 이전인(李全仁)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미소와 곡물무역상을 하였다. 고향에서 고덕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16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京都)에 있는 세에미네(聖峰)중학과 오타니大谷중학교를 거쳐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을 졸업하였다.
1944년 1월 20일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평양에 있는 일본군 제42부대에 입대하였다. 중국으로 파견되어 쉬저우(徐州)에 있는 일본군 중지(中支)파견군 산하 제7995부대에 배속되었다. 이 부대에는 장도영(張都暎)을 비롯하여 학도병 50여명이 있었다. 같은 해 5월 28일 일본군을 탈출하였다. 중국군 제4전구 정진사령부에 도착하여, 광복군 징모 제6분처 초모공작원으로 나와 있던 김국주(金國柱), 그리고 일본군을 먼저 탈출한 김용민(金容旻)과 박승헌(朴承憲)을 만났다. 징모 제6분처는 1942년 4월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거점을 마련하고, 쉬저우·귀덕(歸德)·제남(濟南) 등 산시성(山西省) 일대에서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김국주는 징모 제6분처에서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파견한 지하공작원이었고, 쉬저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김국주의 안내로 6월말 린취안(臨泉)에 도착하여, 한국광복군훈련반(한광반)에 들어가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한광반은 징모 제6분처 주임 김학규(金學奎)가 중국군 제10전구 사령관 탕언보(湯恩伯)와 교섭하여 임천에 있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단을 특별히 설립한 것으로, 징모 제6분처에서 초모해 온 한인청년들과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도병들을 집결시켜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였다. 1944년 11월 한광반을 졸업하였다. 장준하(張俊河)·김준엽(金俊燁) 등 졸업생 상당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重慶)으로 떠날 때, 김용민·한성수(韓聖洙)·윤창호(尹昌浩)·전이호(全履鎬) 등 12명과 함께 푸양에 남았다. 이후 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동하였다.
김학규 지대장의 명령으로 린취안에 있는 중국군에 파견되어 연락병의 임무를 맡았다. 1945년 1월 린취안에서 미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통신대 버치(J. M. Birch) 대위를 만나 광복군에 무전훈련을 실시하는 문제를 협의하고, 이를 지대장 김학규에게 보고하였다. OSS측과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1945년 3월 김학규 지대장과 함께 OSS본부가 있는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으로 갔다. 미공군 제14항공대 첸놀트(C. L. Chennault) 장군과 만나 무전훈련에 대해 합의를 이루고, 충칭(重慶)으로 가서 주석 김구(金九)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김구 주석으로부터 기요비서(機要秘書)라는 임명장을 받았다. 1945년 4월 25일 곤명으로 돌아왔다. 김학규 지대장으로부터 OSS본부에 연락장교로 근무하면서 무전훈련에 대한 교재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고 곤명에 머물렀다.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한국어에 능통한 윔스(Clarence N. Weems) 대위와 함께 활동하면서, 무전훈련에 필요한 한글 암호표를 만들었다. 쿤밍에서 일제의 항복을 맞았다.
1945년 8월말 충칭으로 갔다. 광복군에게 중국에 이주한 한인 청년들과 일본군에 있는 한적 사병들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 확군 활동(擴軍活動)과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가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쿤밍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김학규 지대장이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주호판사처(駐滬辦事處, 주상해 판사처) 처장에 임명되어 상하이로 진주하였을 때, 부관 참모로 임명되었다. 한인 청년들과 일본군에 있던 한적 사병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자, 이들을 호강대학(滬江大學)에 수용하여 상해잠편지대(上海暫編支隊)로 편성하였다. 1946년 2월 김학규 처장이 주호판사처를 해산하고 제3지대 본부가 활동하고 있던 쉬저우로 철수하자 함께 따라 갔다. 다음 달 3월 상하이로 와서 첫 번째 난민귀국선인 미군 수송선 LST를 타고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3월 경교장으로 들어가 선우진(鮮于鎭)과 함께 김구 주석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이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서기로 복무하였고, 1948년 남북협상에도 김구 주석을 수행하였다. 6·25전쟁 시기 부산에서 한양운수 사업을 시작한 이래, 해운공사 등 전문경영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광복회 회장과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