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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37회>
씬 1 송악 황궁/대전
지난회와 연결된다. 서로를 바라보는 궁예와 종간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궁예 위기라... 내게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종간 그러하옵니다, 폐하. 소신은 참으로 염려가 되옵니다, 다 이루신 제국을 파국으로 이끌고 가실 수도 있는 일이옵니다. 폐하의 대제국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옵니다.
궁예 (노기) 허... 듣자하니 너무 지나치시구려. 제국이 무너지다니? 왕건이 때문에?
종간 폐하, 소신을 믿지 못하시옵니까? 신은 사람들의 불행을 볼줄 아는 예지를 갖고 있사옵니다. 그것은 빗나간 적이 없었사옵니다.
궁예 그만두시오. 왕건은 내 의형제이자 충직한 신하요. 그 사람은 나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주었소이다. 그것은 비단 그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아비인 왕륭과 더불어 2대에 걸친 충정이었소. 그리고 지금은 나의 충직한 장수가 되어 나라의 영토를 넓혀가고 있소이다.
종간 그것은 진정한 충성이 아니옵니다.
궁예 충성이 아니라? 허면 내원이 말하는 충성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양길이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내원은 잊었소이까? 그 의심병 때문이었소. 지금 내원의 모습 또한 양길과 다를 바가 없구려.
종간 폐하, 그들이 폐하께 송악을 내어준 속셈은 따로 있었사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탐내고 있는 것은 바로.... 폐하의 자리이옵니다.
궁예 허허... 이보시오, 내원 그럴리가 있소이까?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이 자리에 집착하지 않소이다. 사람이란 때가 되면 늙거나 죽는 것이오, 그리되면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이 자리를 물려줘야 할 것이 아니오? 그것이 내원인들 어떠하며, 왕건인들 어떠하겠소?
종간 당치 않은 말씀이옵니다, 폐하. 이 나라는 폐하의 나라이옵고, 천년만년 폐하의 후손이 다스려 나가야 할 나라이옵니다. 아무도 폐하의 위엄에 가까히 할 수는 없사옵니다.
궁예 (한숨) 그만두십시다. 도무지 끝이 없겠구려. 더이상 왕건이에 대한 일로 내원과 언성을 높히고 싶지 않소이다. 차후로는 거론치 마시오.
종간 하오나 폐하..
궁예 어허... 그만하라 하지 않았소? 이건 황명이외다. 그래도 이를 거역할 셈이오?
종간 .......송구하옵니다. 소신이 불민하여 폐하께 큰 결례를 한 것 같사옵니다. 용서하시오소서.
궁예 .........그만 일어나시구려. 내원과 왕장군은 이 나라의 두 기둥이오. 서로 힘을 합하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소? (달래듯) 내원께서 먼저 마음을 열어보시오. 내가 보기에 내원은 지금 그 관상학에 너무 깊히 빠져있는것 같소이다. 너무 그런 것에 연연하지 마시구료. 그런 것들은 다 삿된 것들이올시다. 이 세상에 진리의 눈을 속일 것은 아무 것도 없소이다. 나는 진리요, 하늘이외다. 누가 나를 속이고 내 눈을 가리울 수 있단 말이오.
종간 ..........
궁예 지금쯤 왕장군이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게요.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하시오. 아마 달리 보일 겝니다.
종간 .........(답답하다. 너무도 답답하다.)
씬 2 길
멀리 하늘 위로 구름 한 점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왕건이 금대, 장일과 함께 호위군사들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
왕평달 (E) 건이 조카가 돌아오고 있어?
씬 3 동 집 안
왕평달과 왕식렴, 왕신, 변사부, 마사부가 둘러앉아 있다.
왕평달 아니 어째서...? 전선에 나가 있는 사람을 왜 갑자기 소환하신다는 것이냐?
왕식렴 폐하께오서 순행길에 건이 형님을 동행시키신다 하옵니다.
왕평달 조카를? 순행길에 동행?
왕신 예, 아버님.. 내군장군과 형님께서 폐하를 보좌하신다 하옵니다.
마사부 참으로 파격적인 조처가 아니옵니까? 다른 여러 장수들을 제쳐놓고 굳이 그 먼 곳에 계시는 주군을 부르시다니요?
변사부 폐하께오서 우리 주군을 얼마나 신임하시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옵니다.
왕평달 허허허... 그런 것 같구만..
왕식렴 하지만 좋아할 일만은 아닌 것 같사옵니다. 폐하께오서 형님을 신임할수록 시기하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옵니다. 벌써부터 그런 소리들이 주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하옵니다.
왕평달 그래? ....(생각) 하긴, 그럴만도 하겠구나..
변사부 어찌 됐건 주군께서 돌아오고 계시다니 맞을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사옵니까?
왕평달 그래야겠지.. 집안도 깨끗히 치워놔야 할 것이고, 장사일과 그동안 식렴이가 은밀히 추진해 온 일들에 대해서도 점검을 해야 할 것이야.
왕식렴 알겠사옵니다, 아버님..
씬 4 황궁/어느 전각 외경
박지윤(E) 순행 준비를 바짝 서둘러야겠소이다.
씬 5 동 안
박지윤 부자, 유장자, 장자1, 2 등이 모여있다.
박지윤 여러 가지로 챙겨야 할 일이 많소이다.
유장자 그렇구 말구요.
박지윤 폐하께서는 왕장군이 오는대로 곧 출행을 하신다 하오이다. 아무튼 순행이란 것이 폐하의 위엄을 천하에 드러내는 의식이니 만큼 의장병과 근위부대도 세세히 살펴야 할 것이고....병부와 내봉성의 관료들이 긴밀히 의논들을 해야할 겝니다.
유장자 짐들을 운반할 군사들도 따라 붙여야 겠습지요?
박지윤 아 여부가 있겠습니까?
장자2 승려들과 동남동녀들도 대동하신다 들었사옵니다. 참으로 볼만하지 않겠사옵니까?
박지윤 나라를 세우시고 첫 순행길에 오르시는 것이외다. 더구나 백제를 건국한 견훤왕보다 늦은 만큼 그들보다 더욱 성대하고 또 장엄하게 치뤄져야겠지요.
장자1 (한숨) 그나저나.. 그 모든 경비들을 마련하자면 등꼴이 휘겠습니다, 그려..
유장자 그런 소리 마시구려.. 왕장군과 송악에 비한다면 우린 아직 멀었소이다. 그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이루어 온 그 수많은 곳간들이 모두 텅텅 비어나갔다 하더이다. 폐하께 모두 바친 거예요.
모두들 ......(말이 없다)
박지윤 하긴 그렇소이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보세요. 폐하께서 얼마나 왕장군을 신임하고 계시오이까? 다 뿌린대로 거두는 겝니다. 작고한 왕성주도 그런 것을 안다면 후회가 없을거예요.
유장자 (회고하듯) 참으로 왕륭 그 사람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아직도 한가지 이해가 가지 않은 일이 있소이다.
박지윤 .......?
유장자 황후마마 말씀입니다. 어째서 혼인을 미루다가 일을 그렇게 만들어버렸는지......
박지윤 (주위를 경계하며) 허.. 그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내십니까? 그 일이 페하께 알려지면 어찌 된다는 것을 모르신단 말이오?
유장자 이야기가 그렇다는 겝니다. 말을 하다보니...그만 ...그 얘기가..나와버렸구료..허허허.... 뭐.. 이젠 다 끝난 일이 아니오이까? 허허허...
유장자의 그 모습에서 길게 디졸브 되면..
씬 6 황후전 외경
대전 내관이 막 황궁전 쪽으로 가고 있다.
씬 7 동 황후전 안
연화가 서책을 건성으로 넘기고 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뜻 모를 한숨을 짓는다. 슬이가 그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고 있다.
제조상궁 (E) 황후마마, 대전 내관이 왔사옵니다.
연화 ....? 들라 하게.
내관이 들어와 읍을 한다.
연화 무슨 일인가?
내관 폐하께오서 대전으로 뫼셔오라 하셨사옵니다.
연화 나를 말인가?
내관 예, 마마.. 이번 순행길에 폐하와 더불어 행차하실 일에 대하여 말씀이 계실 줄로 아옵니다.
연화 나도 간단 말인가?
내관 그러하옵니다, 마마. 왕건 장군이 돌아오는대로 순행길에 오르시게 될 것이옵니다.
연화 (놀라) 왕장군도 함께 가신단 말인가? 그 분은 지금 충주에 계시지 않는가?
내관 폐하께오서 이미 소환을 하셨사옵니다.
연화 .........
내관 어서 대전으로 가시오소서.
연화 .....알았네. (일어나다가) 참, 후원에 계신 북원부인도 이번 순행에 함께 가신다던가?
내관 폐하께오서 따로 하명하신 것이 없사옵니다.
연화 (생각하다가) 알겠네. 가세.
연화가 앞장서 가면 내관이 뒤를 따른다.
씬 8 후원/미향의 처소
미향이 오체투지(불교의 절하는 방법의 하나)의 예를 드리고 있다. 미향의 온 몸은 온통 땀투성이다. 그 뒤 문 밖에서 월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있다.
월이 마님, 오늘만 벌써 천 번이 넘었사옵니다요. 마님.......
그러나 미향은 대답이 없다.
월이 그만 하시오소서. 오늘도 아무 것도 드시지 않았사옵니다. 이러시다가 큰 일 나옵니다.
미향 물러가 있으라 하지 않았느냐?
월이 마님..?
미향 아버님과 숙부님들의 극락왕생을 빌어들이는 일이니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
월이 하지만 마님.....
미향 모두가 다 내 죄니라... 나 때문이니라..
월이 무엇이 마님때문이라 하시옵니까?..마님이야말로...아무 죄없이..
미향 아니니라.... 태어난 것 자체가 죄 아니더냐? ..불쌍한 분들.... 저 불쌍한 분들이 원귀가 되어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계시는구나. 다 보인다... 원귀들이 보여... 저 불쌍한 원귀들이............
월이 마님... 무슨 원귀가 보인단 말이옵니까?
미향 불쌍하신 분들이시다.... 내가 아직 살아 있으니 부처님게 빌어드려야하지 않겠느냐? ....나무관세음 ....나무 석가모니불............
월이 ............. (어쩐지 무섭다)
미향은 곧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오체투지의 예를 멈추지 않는다.
씬 9 동 밖
내관 하나가 멀지감치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사라진다.
씬 10 대전
종간과 궁예가 마주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궁예 진시황의 고사라... 계속 해보시구려.
종간 폐하께오서 행하실 그 순행을 그 옛날 진의 시황제도 했사옵니다. 시황제는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다섯 차례에 걸쳐 드넓은 중원대륙을 순행하였사옵니다. 결국 순행이란 것은 제국을 창업하는 제왕들의 필연적인 절차라 할 것이옵니다.
궁예 (끄덕인다).......
종간 허나 시황제는 전 국토를 순행하며 백성들 앞에 지나치게 자신의 업적을 스스로 찬양하게 강요하고 공덕비를 세우는 등, 많은 어리석음을 범하였고, 결국은 순행길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사옵니다.
궁예 참으로 이번 순행길에 귀감이 될만한 이야기요. 순행이란 너무 잦아서도 아니될 것이요, 위엄만을 내세워서도 안될 것이고, 백성들을 위무하고 시찰하는 길이 되야 할 것이외다.
종간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기왕에 시황제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이옵니다마는... 진시황제와 천록비요라는 예견서에 관한 고사를 알고 계시온지....
궁예 알고 있소이다. 그 예견서에는 진나라를 망칠 사람은 호(胡)라고 쓰여있었는데 시황제가 그것을 오랑캐 호라 오인하여 만리장성을 쌓았으나 결국 진나라를 망친 것은 오랑캐 호가 아니라 시황제의 둘째 왕자인 호가 아니었소?
종간 그렇사옵니다. ........진나라에 천록비요라는 비서가 있었다면 이 나라에는 도선비기가 있을 것이옵니다.
궁예 도선비기라..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소?
종간 허나 몇 구절만은 항간을 떠돌아 다니고 있사옵니다. 송악은 청솔이요, 계림은 황엽이라 한 것이 바로 그것이옵니다.
궁예 들은 적이 있소이다. 계림이 신라라면 송악의 청솔은 바로 우리 고려를 일컫는 것이 아니겠소?
종간 소신도 이제까지는 그렇게 여기고 있었사오나... 왕장군을 말한다는 소문도 있사옵니다.
궁예 허허허... 그렇소이까? 송악의 청솔이 왕건이라... 거 재밌는 소문이구려. 헛허허허허허...
종간 .........(웃을 일이 아니구마하는...)
궁예 결국은 또 왕건의 걱정이시구료. 제발 그 걱정의 끈을 놓으시구려. 나는 시황제처럼 어리석지 않소이다. 허나 진시황의 잘못된 고사는 내가 꼭 기억해 두리다. 그러면 되겠소이까?
종간 ............망극하옵니다 폐하. 신의 뜻을 헤아려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궁예 허허허.....이런...
내관 (E) 폐하, 황후마마께서 오셨사옵니다.
궁예 오, 드시라 하라.
연화가 들어온다.
종간 (일어나며) 오셨사옵니까, 황후마마..?
연화 .........
종간 허면 소신은 이만 나가보겠사옵니다.
궁예 그렇게 하시구려.
종간이 예를 드리고 밖으로 나간다.
연화 불러 계셨사옵니까?
궁예 그렇소이다. 자, 그리 앉으시구려.
연화 ......... (앉는다)
궁예 내관에게 대충 들으셨을 것이오만.... 곧 짐과 함께 순행길에 오르게 될것이오.
연화 예. 그리 들었사옵니다.
궁예 먼 길이 될 것이니 각별히 준비에 신경을 쓰셔야 할 것 같소이다.
연화 후원의 북원부인도 함께 가는 것이옵니까?
궁예 .............
연화 북원부인도 함께 가느냐 여쭈었사옵니다.
궁예 보살은 지금 기도중이오. 같이 갈 수 없을것이외다.
연화 폐하, 언제까지 북원부인을 저 깊은 후원에 유폐해 놓으실 작정이시옵니까? 북원부인은 죄인이 아니옵니다.
궁예 황후의 지극한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 허나.........
연화 북원 부인을 함께 가게 해주오소서. 너무도 딱하옵니다. 저리 방치하시는 것은 폐하의 도리가 아닌줄로 아옵니다.
궁예 허허...이런....
연화 그리해 주시오소서. 아니면 신첩도 걸음이 어렵사옵니다.
궁예 허허허... 그거 참.... 황후께서 어렵다 하시면 아니될 말이외다. (사이) 짐이 한 번 생각해보리다.
연화 고맙사옵니다, 폐하.
궁예 .......
씬 11 송악 황궁 대문
왕건들이 막 황궁 문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곳을 지키던 군사들 모두가 군례를 올린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내군장군 은부가 그들을 맞는다.
은부 어서 오시오, 왕총사...
왕건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군.
은부 허허허.. 폐하께오서 왕장군이 언제 오시는가 여러번 물어 오셨소이다. 그래서 소장이 나와 있었소이다. 가십시다.
왕건 예.
은부 폐하게오서 장군을 기다리시는 것이 마치 신랑이 각시를 기다리는것과 같아 보이더이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를 입고 계시오...부럽소이다. 허허허...
왕건 그리 말씀하시니 몸 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왕건과 은부가 안으로 향하면 내군의 군사들이 그들을 따른다.
씬 12 대전
왕건이 궁예와 연화에서 군례를 올린다. 연화는 애써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려는 듯 무표정하다.
왕건 신 왕건, 폐하의 부르심을 받자와 촌각을 지체치 않고 달려왔사옵니다.
궁예 하하하. 어서오게. 어서와. 불과 몇 달 사이가 마치 몇 년이 지난 것 같구먼. 그간의 전공에 대해서는 익히 듣고 있었어. 청주와 충주, 괴양을 넘어 사벌주를 압박하고 있다니 참으로 대단한 성과였네.
왕건 과찬이시옵니다. 소신은 아직 사벌주를 점령치 못하는 불충을 저지르고 있사옵니다.
궁예 아니야, 아니야. 아우가 아니였다면 그나마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야. 더구나 사벌주성은 견훤의 아비인 아자개가 버티고 있는 곳이 아닌가?
왕건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그 만큼 공도 세웠고 하니..... 어떤가? 이번 순행길에 이 형님을 보좌해주지 않겠는가? 아우가 곁에 있어야 내 마음이 든든할 것 같네 그려. 그래서 보자 하였어.
왕건 황은이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궁예 허허허..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지. 전쟁터에서 돌아오자마자 잠시도 쉬지 못하게 자꾸 영을 내리니 말이야. 아니 그렇소 황후?
연화 ........(어색한 미소).......
왕건 ........
그 때 밖에서 내관이 아뢴다.
내관(E) 폐하, 주안상 대령이옵니다.
궁예 어서 들이거라.
시녀들이 다과상을 들여온다.
궁예 아우가 온다기에 준비해 두라 일렀네. 오늘은 마음껏 마셔보세.
왕건 예, 폐하.
연화 .........
씬 13 동 밖 황궁의 부감 (저녁노을)
씬 14 다시 대전 밖
어느새 어두워졌다. 궁예의 웃음 소리가 터져나온다.
궁예 (E) 하하하..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씬 15 다시 대전
궁예 (웃음) 그 박술희라는 친구는 생긴 것 만큼이나 엉뚱한 사람이로구만.. 견훤의 여동생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허허허... 거 생각할수록 재밌는 일일세 그려..
왕건 .........(미소)
궁예 그토록 간절하다면야 도리가 있겠는가? 우리가 혼례를 치뤄주도록 하세.
왕건 하오나 서로 칼과 창을 맞대고 있는 적이 아니옵니까?
궁예 찾아보자면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을 것이야. 상사병이 나서 유능한 장수를 잃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아니 그런가? 하하하..
왕건 (미소)....
궁예 박술희도 그렇지만 아우도 이제는 짝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른 노릇을 해야지 언제까지 미장가로 있을 셈인가?
연화 ........!
왕건 (당황하며) 소신은 폐하의 장수로서 아직 할 일이 많사옵니다.
궁예 그 일은 그 일이고, 장가는 가야지. 지금까지 마음에 둔 처자도 없었단 말인가? 답답한 사람 하고는....아, 나처럼 장가를 가보아... 그래서 인생의 별다른 재미도 맛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왕건 .......
궁예 이런... 쑥맥같은 사람 같으니라고.. 불제자인 나도 장가를 들었는데 아우같은 헌헌장부가 배필이 없다니 말이 되겠는가? 아니 그렇소이까, 황후?
연화 .........
궁예 (술병을 드는데 비었다) 허 이런... 술이 떨어졌구먼..
연화 그만 하시오소서. 많이 드셨사옵니다, 폐하.
궁예 아니오.. 아직 멀었소이다. 이보게 아우, 우리끼리 이럴 것이 아니라 내원도 부르고 장수들도 부르도록 하세. 정자로 나가서 한 잔 더하세 그려. 여봐라, 밖에 환관 있느냐?
환관 (E) 예, 폐하...
환관이 대답 하고 들어 선다.
궁예 가서 병부령에 일러 황궁 가까이 있는 장수들을 들라 하고 술상을 다시 보라 이르라.
환관 ......예, 폐하..
궁예 자, 우리는 먼저 가서 한 잔 다시 하세. 그리고 그 장가 얘기 말일세, 사실 나는 별 재미를 모르겠네 그려. 신료들 때문에 억지 장가를 가서... 우리 황후만 딱하게 되었어. 그런 면에서는 황제라는 것도 겉추장스럽네 그려. 장가를 가고, 아니 가고도 마음대로 못하다니 말일세. ...자 가세. 가서 마셔보세, 허허허
연화는 좌불안석이다. 흐뭇하게 웃는 궁예의 모습에서......
씬 16 궐 밖 정자 (밤)
깊은 밤이다. 정자 안으로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다. 궁예와 연화를 중심으로 왕건, 종간, 은부, 환선길, 이흔암, 복지겸, 김언, 종희 등이 둘러 앉아있다.
궁예 자, 모두들 잔을 드십시다. 왕장군의 전공과 무사귀환을 축하하도록 하십시다.
모두들 잔을 들어 마신다.
종간 그동안 노고가 많으셨소이다, 왕장군.
왕건 고맙사옵니다.
종간 현재 충주의 사정은 어떠하오이까?
왕건 상주의 관문인 조령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곳의 산세가 매우 험준하고.... 견훤의 아비인 아자개가 버티고 있어서...
궁예 그 일은 너무 마음쓰지 말게. 아직까지는 상주 공략에 전력을 다할 이유가 없네. 무리해서 그곳을 넘는다면 필시 견훤과 부딪쳐야 할테니 말이야. 아직은 견훤과 만날 때가 아닐세.
왕건 .............
종간 그렇사옵니다. 부자지간인 견훤과 아자개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사옵니다. 그 때문에 견훤의 힘이 아직 상주에 미치지 못한다 들었사옵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견훤이 그것을 빌미삼아 대군을 몰아오면 오히려 낭패를 볼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지금 그대로 적당히 놓아두어 완충지대로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은부 내원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지금은 내실을 기해야 할 때이옵니다. 더구나 폐하께오서는 곧 순행을 떠나시지 않사옵니까?
궁예 그렇소.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광활한 중원의 영토를 장악했던 당나라도 황소의 난이 일어난 이후로 힘없이 무너져가고 있소이다. 당나라 중앙군 10만 명이 황소에게 한꺼번에 몰살 당했다고 하니 나라의 기틀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알만한 일이오.
복지겸 우리의 형제국인 발해가 흔들리는 것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왕실과 귀족들은 나태와 안일 속에서 사치를 일삼고 수탈을 견디디 못한 백성들은 나라밖으로 도망을 치고 있다하옵니다.
이흔암 뿐만 아니라 그 발해국과 대치하고 있는 거란에는 야율라보기라는 영웅이 나타나 군부를 통합하고 강력한 통치체제로 국가를 재편하고 있다 하옵니다. 아마도 머지 않아 발해로 향할 것이옵니다.
궁예 강자가 약자를 취하는것은 생존의 본능이라 하였소이다. 우리도 그와 같은 이치를 명심하고 힘을 더윽 크게 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오. 보시오. 천 만년 갈것 같던 저 당나라도 바람 앞에 등불이올시다. 우리가 좀더 때를 일찍 만나고 기회를 잡았다면 어찌 당나라인들 취하지 못하겠소이까? 꿈을 가지십시다. 미륵의 큰 꿈을 가져보십시다. 그리하여 저 중원대륙을 우리가 살아서 우리 땅으로 만들어 보십시다.
환선길 하하하. 참으로 크고 높으신 이상이시옵니다. 어떤 영웅호걸을 감히 대왕폐하께 견줄 수 있겠사옵니까?
궁예 허허허. 모두가 경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외다. 허허, 이거 술마시자 해놓고 말이 길었소이다. 술자리에서 말이 길면 재미가 없는 법이지. 자, 다들 오늘은 밤을 세워 마셔 보십시다. (자신의 잔을 건네며) 이보게 아우 잔을 받게나.
아우라는 말에 모두들 행동을 멈추고 궁예와 왕건을 쳐다본다.
왕건 아니옵니다. 신이 먼저 잔을 올리겠사옵니다.
궁예 어허 이런, 이런. 사사로운 자리일세. 형님이라고 부르게. 그렇게 하기로 약조하지 않았던가? 형님이라고 말이야.
왕건 ........
종간,은부 ................?
궁예 우리는 의로 맺은 형제일세. 자 아우님, 잔을 받으시게.
왕건 폐하..... 취하셨나보옵니다.
궁예 핫하하하.... 왜? 대중이 있는 자리에서 형 아우를 했다 그말인가...?
왕건 폐하.....
궁예 세상에 비밀은 없네. 비밀을 지키자고 할 때 그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라고 하였어. 또오...우리 일이 그러허게 비밀일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형 아우가 된 것이 그리 못된 일이란 말인가...? 이보시오... 환장군, 그런 것인가?
환선길 폐하, 그럴리가 있사옵니까?
이혼암 폐하, 망극하옵니다. 이만한 미담이 천지에 어디 있겠사옵니까? 왕장군, 어서 폐하의 잔을 받으시오. 영광중에 영광이오.
복지겸 그렇소이다.이만한 은혜가 어디 있겠소이까? 어서 받으시오.
궁예 자, 아우, 어서 받게.
왕건 참으로....폐하...망극 하옵니다....그럼.. 형님의 잔을 아우가 받겠사옵니다.
종간 ........................
궁예 그러시게, 아우. 이 밤은 이 형님이 모두 책임질 것이네.
은부 ........
궁예가 왕건에게 잔을 따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종간과 은부의 눈길이 곱지 않다. 그리고 연화 또한 복잡한 표정으로 그들을 그렇게 바라본다. 디졸브.
씬 17 왕건의 집 외경
왕평달 (E) 송악으로 오자마자 궁으로 갔다하더니 ...자리가 길어지는 모양이로구먼...
씬 18 왕건의 집 사랑
평달과 식렴, 두 부자가 함께 해 있다.
평달 하기사 순행에 동행하시려 불렀다 하였으니... 논의 할 일이 많이 있겠지....
식렴 논의라기 보다도.... 오랫만에 만나시는지라 폐하께서 주연을 베푸신것 같사옵니다. 궁 밖에 있던 여러 장수들이 함께 자리를 하였다 들었사옵니다.
평달 그래.....?
식렴 새벽이 되었는데도 아니 오시는걸 보면 아마도 밤을 꼬박 새우시는 모양이옵니다.
평달 그런것 같구나.....
씬 19 황궁 안
순라를 도는 내관들이 딱다기를 치며 궐 안을 돌고 있다.
씬 20 대전 안
어둠 속으로 꺼질 듯, 촛불 한 개만 타고있다. 대전의 침상에 누워있던 왕건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앉는다.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듯 고개를 마구 흔들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면 누군가 구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여 온다. 촛불에 보여오는 그는 참선에 들어있는 궁예이다. 다시 정신을 수습하며 주시하여 보면 그는 틀림없는 궁예이다. 참선의 무아지경에 들어 있는 것이다. 왕건, 너무도 놀라 숨이 멎는다.
왕건 폐...폐...하.....?
그러나 궁예는 아무 기척이 없다,왕건이 황송하여 고개를 숙인다.그러다가 더욱 놀란다. 자신이 입고 있는 것은 황제의 평상복이다.
왕건 아니...이..이런...?
왕건이 놀라 조심스레 궁예를 보며 휘장 박으로 나간다. 궁예는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이다.
씬 21 대전 밖
왕건이 나오자 내관들(대전내관, 내관1.2)이 대기하고 있다.
대전내관 깨어나셨사옵니까?
왕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왜 내가 이곳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말인가?
내관 간밤에 많이 취하시어 이곳 대전에 드셨사옵니다.
왕건 뭐라? 내가.. 취해 무례하게도 폐하의 침전에서 잠을 잤단 말인가?
내관 폐하께오서 이리 뫼시라 명하셨사옵니다.
왕건 (멍해 있다가) ......이 용포는 무엇인가....?
내관 장군의 옷이 술에 젖어 폐하께오서 갈아 입히셨사옵니다..
왕건 무어라.... 오 이런... 폐하의 용포를 입고.... 폐하의 침전에 누웠다니.... 이렇게 불경스러울 데가.....
내관 모두 폐하께오서 손수 챙기신 일이옵니다.
왕건 내원과 다른 장군들은.....?
내관 내원님과 장군들께서는 왕장군께서 엎혀오실 때까지도 그곳 정자에 계셨사옵니다.
왕건 이 사람만 혼자 그리 됐단 말인가? 이 사람만...... 오 이런 낭패를 보았는가? ....이보게 어서 내 옷을 가져다주게.... 어서....
왕건은 큰 실수를 하였다는 듯 큰 한숨을 내쉰다.
씬 22 황궁 일각
종간이 근심스러운 듯 어두운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은부가 조심스레 말을 건네온다.
은부 밤이 늦었사옵니다. 그만 처소로 드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종간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네. 폐하께서는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왕건이를 아우라 부르셨어. 마치 보란듯이 말일세. 그리고는 대전에까지 데리고 가셨네.
은부 ........
종간 큰일일세. 폐하께서 저렇게 사람에게 빠지시는 것은 처음 뵙는 것 같네. 언제나 냉철함을 잃지 않으신 분이셨는데 말이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일이야. 알 수가 없어......
은부 이제 그만 왕장군에 대한 근심은 털어버리시오소서. 폐하의 영토는 왕장군과 그 군사들에 의해 하루가 다르게 넓어지고 있사옵니다. 이 만한 장수를 얻기도 쉽지 않은 일이옵니다. 왕장군과 같은 이가 견훤이 아닌 폐하의 수장으로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 아니옵니까?
종간 허.... 내군장군마저 왕건을 두둔하는 겐가?
은부 돌이켜 생각해보면 너무도 가혹한 처사였사옵니다.
종간 그게 무슨 말인가?
은부 황후마마를 뫼신 일 말이옵니다. 소장은 영 그 일만은 마음에 걸리옵니다.
종간 (꾸짖듯) 답답한 사람이구먼. 그리 말을 해도 말을 못 알아 듣겠는가? 우리는 송악의 왕기를 끊기 위해 그리한 것일세. 그 물줄기를 돌려놓으려고 말이야.
은부 ......
종간 (한숨) 허나....... 아직도 안심이 아니되네. 안심은 커녕.....불안의 그림자가 갈수록 커져가고 있어. 자네마저 이러하니....
은부 소장은 그저.........
그때 대전 쪽에서 왕건이 걸어오고 있다. 종간과 은부가 말을 멈추고 그쪽을 본다. 왕건은 다가와 그들 앞에 고개를 조아린다.
종간 허허허.. 이제 술이 좀 깨셨소이까?
왕건 소장이 만취하여 그만 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종간 그래, 대전에서는 잠을 청할만 하오이까, 왕장군?
왕건 (붉어지며) 소장이 씻지 못할 불충을 저질렀습니다.
종간 폐하께서 그리하라 하신 것이 아니오? 어서 처소로 돌아가 보시구려.
왕건 그럼.........
왕건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다. 그렇게 왕건이 사라질 즈음......
은부 내원께서도 그만 주무시오소서
종간 글쎄..... 오늘은 잠이 안올것 같구먼.....
씬 23 궁궐 마당(낮)
연화와 슬이가 그곳 뜰을 거닐고 있다. 뒤로 조금 떨어져 제조상궁과 시종들이 따라오고 있다. 어디에선가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온다. 연화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뭇가지 위를 쳐다본다.
연화 ......저리 구슬프게 우짖는 것을 보니 저 새도 짝을 잃은 모양이로구나.
슬이 ........
연화 가여워라. 참으로 가여워......
슬이 소녀의 귀에는 즐거워 노래하는 것 같사옵니다요.
연화 그래? 이상도 하지. 내 귀에는 그리 들리지 않으니 말이다. 그저 슬퍼서 우는 것만 같구나.
슬이 궁궐에만 갇혀 계시다보니 황후마마의 마음이 울적하셔서 그런 것이옵니다. 조금만 참으시오소서. 이제 궁궐을 떠나시면 달라지실 것이옵니다. 소녀의 마음은 벌써부터 설레이옵니다.
연화 (한숨같은) 나는 조금도 기쁘지가 않느니라. 도무지 내키지가 않아.
슬이 ..........그 분 때문이 아니시옵니까?
연화 ......... (움찔한다)
슬이 마마께오서는 아직도 그 분을 잊지 못하시는 것이옵니다. 아직도 사모하고 계신 것이옵니다.
연화 (부정하듯) 아서라... 옛이야기를 부질없이 하고 있구나..... 이미 내게 그런 것은 없느니라.
슬이 마마께서는 평생 그 분을 가슴 속에 묻어두실 것이옵니다.
연화 그만 하거라.... 쓸데없는 말을 자꾸 하다가 경을 치고 싶은게냐......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하였느니라..... 다음부터는 그런 말 꿈에도 입에 올리지 말아라.... 자, 그만 가자. 북원 부인의 처소로 가보자꾸나.
연화가 앞서간다. 슬이 그런 연화의 모습을 보다가 바로 뒤따라간다.
씬 24 후원
불경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모든 것을 털어내어 버리려는 듯 간절하다. 연화가 슬이가 그곳으로 들어서다가 그 소리에 멈춰선다.
미향 (E)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연화가 열려진 문으로 안을 들여다 본다. 미향은 미친 사람처럼 불경을 반복해 읖조리며 계속 큰 절을 올리고 있다. 슬이는 어리둥절해 있고 곧 월이가 연화의 앞으로 뛰어온다. 미향은 연화가 온 지도 모른채 계속 같은 불호를 외며 불공에만 열중하고 있다.
월이 이른 아침부터 어인 일이시옵니까, 마마?
연화 부인께서는 사람이 온 것도 모르시는 것 같구나.
월이 하루 종일 저러고 계시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소서. 소녀가 들어가 아뢰겠사옵니다.
연화 되었느니라. 그냥 놔두거라. (사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쳤으면 저리할꼬. 얼마나 사무쳤으면........
월이 자꾸 헛것이 보이시나보옵니다.
연화 .............
월이 돌아가신 분들이 보이신다 하옵니다. 마님의 아버님이 보이신다고도 하시고.. 또 어떨 때는 멀리 보낸 아기씨도... 보인다 하시옵고.........
연화 차마 못 볼 일이다. 못 볼 일이야. (돌아서며) 그만 가자꾸나.
그렇게 돌아서 걷는 연화의 얼굴이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가득하다.
씬 25 대궐 마당
연화가 그곳을 빠져나오며 크게 심호흡을 한다.
연화 (걸음을 옮기며) 저리 두어서는 정말 아니 되겠구나.
슬이 ............?
연화 폐하께 다시 간청을 드려야겠다. 순행길에 저 여인을 떼어놓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니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야. 저리도 병이 깊은 것을 왜 진작에 몰랐던고?
슬이 하오나....... 마마... 마마께오서.. 그리하실 것 까지는.......
연화 잔말 말고 어서 따라 오거라.
그들 그렇게 간다.
씬 26 왕건의 집 외경
왕평달(E) 이렇게 건강한 조카의 얼굴을 보니 그저 부처님과 용왕신께 감사 드릴 따름이네.
씬 27 동 왕건의 처소 안
왕건을 비롯해, 왕평달, 왕식렴, 왕신, 마사부, 변사부 등이 모여 있다.
왕건 모두가 숙부님과 사부님들, 그리고 아우들이 염려해주신 덕분이옵니다.
왕식렴 형님께서 돌아오시니 집안에 활기가 넘치는 것 같사옵니다.
왕건 아우가 고생이 많았다지?
왕식렴 고생은요?
왕건 신이 아우도 잘 있었는가?
왕신 예, 형님.
왕평달 그간 이곳 사정이 어떠했는지 많이 궁금할 게야.
왕건 그렇사옵니다. 장사일은 어찌 되어가고 있사옵니까?
왕평달 조카가 없는 동안, 식렴이가 예전의 상권들을 모두 회복했네. 아직 형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만큼은 아니지만 서남해의 목포와 서라벌까지 길을 열어 두었네.
왕건 목포라면... 백제의 영토가 아니옵니까? 금성에 속해 있는.....
왕평달 맞네. 그곳은 소금의 산지로 유명한 곳일세.. 밀무역인 셈이지..
왕건 밀무역은 국법으로 엄히 다스리는 것이 아니옵니까?
왕평달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장사 때문만은 아닐세. 그것보다도 훨씬 더 값진 것이 있네. 바로 그곳의 사정을 알고자 하는 일이야.
왕식렴 그렇사옵니다. 백제 또한 세작들을 보내 이곳의 일들을 낱낱이 캐어가고 있사옵니다. 형님께서는 고려 최고의 장수이시옵니다. 앞으로 그들과 큰 전쟁을 치루시자면 저들의 사정들을 알아내어 크게 활용해야 할 것이옵니다.
왕평달 그 모든 것을 식렴이에게 맡겼네. 물론 신이도 도울것이고. 앞으로 두 아이는 조카의 수족처럼 움직일 걸세.
왕식렴 그동안 많은 장사꾼들을 통해 백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염탐해 왔사옵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형님께 아뢰겠사옵니다. 지금 백제의 견훤은 군사를 모아 대야성(합천)을 곧 칠 준비를 하고 있사옵니다. 형님께서 아시다시피 대야성은 큰 성이옵니다. 아마도 머지않아 대단히 큰 전쟁이 그곳에서 벌어질 것이옵니다.
왕건 ....(끄덕인다).......
왕식렴 견훤의 주위에는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사옵니다. 첫 번째가 바로 그곳의 호족들이옵니다. 그들은 견훤의 과도한 과세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사벌주의 성주이자 부친인 아자개와의 관계이옵니다. 이는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한 듯 싶사옵니다. 거의 절망적이라 할 만큼 부자의 관계는 회복이 어렵다 하옵니다.
왕건 많은 것을 알아냈구먼..
왕식렴 그러고 보면 무작정 상주를 점령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것일 수도 있사옵니다. 부자의 관계를 적절하게 이용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옵니다.
왕건 대단하네.. 참으로 놀랍네 그려..
왕평달 이 모든 것이 형님께서 안배해 놓으신 것이네. 신이를 당나라에 유학시킨 것도 그렇구... 후일 크게 쓸 일이 있다 하셨지.
왕건 아버님께서요.....?
마사부 돌아가신 주군께서는 참으로 멀리 내다보셨사옵니다.
왕평달 이 미련한 사람은 그 크나큰 뜻을 이제서야 깨달았지, 뭔가? 허허.
변사부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왕공께서는 송악의 모든 것을 통괄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송악을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마사부 이를 말씀이십니까? 하하하.
왕건은 이 모든 준비가 그저 놀랍고 탄복스러울 뿐이다. 왕건의 그 환하고 맑은 눈빛에서.......
씬 28 대전 (밤)
연화가 궁예 앞에 앉아 묵묵히 궁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궁예는 눈을 감고 한참동안 생각에 빠져있다.
연화 폐하..... 가납해주시오소서. 신첩의 소원이옵니다. 북원부인을 데려가시오소서.
궁예 ............. (말이 없다)
연화 그리해 주시오서, 폐하.
궁예 ........그 일 때문에 여기 까지 오셨단 말씀이오?
연화 폐하...? 폐하께오서는 아직도 대답을 아니주셨사옵니다.
궁예 황후의 고집도 어지간 하시구려.
연화 그리해주시오소서. 이미 병이 깊어져 있사옵니다. 폐하께오서 마음을 써주시지 않으시오면 세상 천지에 누가 살피겠사옵니까?
궁예 (한참 생각하다가) 황후가 그리 청하니 알겠소이다. 그리 하십시다.
연화 (밝아지며) 진정이시옵니까?
궁예 황후야말로... 보살의 마음을 가지셨구려. 오래오래 그 마음을 간직하도록 하시구려.
연화 고맙사옵니다, 고맙사옵니다, 폐하..
연화의 그 모습 위로.
미향(E) 나는 아니갈 것일세.
씬 29 후원 미향의 처소
미향이 단호하게 앉아 있다. 슬이가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다.
미향 지금은 기도 중일세. 나는 만일 기도를 작정 하였어. 중도에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야.
슬이 황후마마께서 이 일 때문에 밤낮으로 노심초사하셨사옵니다. 가시오소서. 가셔야 하옵니다.
미향 .......황후마마께는 고마운 일이기는 하나...
슬이 폐하께서 이미 영을 내리셨사옵니다. 가시고 싶지 않아도 이젠 가야만 되옵니다.
미향 ...........
월이 마마, 그리하시오소서. 이대로는 아니되옵니다.
미향 (한숨) .......어디로 간들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질긴 목숨... 왜 이리도 오래 붙어 있는고.......
미향의 한숨에서 디졸브 되며......
씬 30 송악 궁성
궁예가 호사스럽게 꾸민 백마를 타고 순행길을 떠나고 있다. 선두에는 선남선녀들이 등을 들고 행차를 이끌고 있고 궁예의 좌우로는 왕건과 은부가 호위를 맡고 있다. 이어, 황후가 탄 마차가 뒤따른다. 또 그 뒤로 범패를 높이 부르는 승려들, 장수들, 수레 등 엄청난 행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거리와 거리에는 이 행차를 보기 위해 나온 사람들의 물결로 가득 차 있다. 군중들이 사방에서 "대왕폐하만세"를 외치고 있다.
씬 31 성루 위
종간이 몇몇 장수들과 함께 그 행렬들을 굽어 보고 있다. 수많은 기치창검과 오색천들이 울긋불긋하게 보여온다. 그 성대한 행렬에 만족한 듯 종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씬 32 길
궁예들의 행렬이 길을 따라 계속 가고 있다.
은부 폐하, 드디어 견훤왕이 대군을 일으켜 동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하옵니다. 그들은 곧 거창을 거쳐 대야성(합천)으로 향할 것이옵니다.
궁예 대야성이라..... 대야성..... 그곳이 무너진다면 신라 최후의 방어선이 뚫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은부 그렇사옵니다. 낙동강을 통한 모든 보급로가 백제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옵니다.
궁예 음....... 왕장군은 어느 쪽에 승산이 있다고 보는가?
왕건 .....아마도 어려운 전쟁이 될 것이옵니다.
궁예 .......?
왕건 대야성이 천혜의 요새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서 신라는 지금 궁지에 몰린 쥐와도 같사옵니다. 마지막 보루라 생각하면 아마도 죽을 힘을 다하여 저항할 것이옵니다.
은부 허나 백제의 군사력은 엄청나게 강하오. 견훤의 정예부대라 할 수 있는 철기군까지 이 전쟁에 참가하고 있소이다.
왕건 신라 역시 모든 힘을 그곳 대야성에 집중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볍게는 아니 될것입니다. 신라는 천년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이옵니다. 대야성이 바로 그 신라의 마지막 자존심이 아니겠습니까?
궁예 허허허.. 신라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암, 곧 죽어도 자존심은 살아 있어야지. 그래야 천 년의 역사를 그나마 인정 받을 수가 있는 것이아닌가...하하하하...
궁예의 그 호탕한 웃음에서.......
씬 33 인써트
견훤이 대군을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전진하고 있다. 군사들의 대오가 정연하고 걸음걸이도 힘차다. 견훤의 좌우로는 두 아들이 견훤을 보좌하고 있다.
해설 견훤의 대야성 정벌. 대야성은 백제의 견훤이 신라로 갈 수 있는 가장 지름길인 낙동강의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견훤으로서는 이 싸움에 이겨야만이 신라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얻는 매우 중요한 일전이었다. 견훤은 사실 조금 성급했다. 그는 궁예가 점점 강성해지자 그보다 먼저 신라의 상징인 서라벌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최승우의 반대를 무릎 쓰고 군사를 몰아 오고 잇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견훤은 이 싸움을 자신의 아들들을 시험하는 무대로 삼으려 했다. 그랬다. 그는 벌써 자신의 후계자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을 견훤다운 방법으로 점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건의 예상대로 그것은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니었다.
씬 34 길 (임시 군막) 밤
행군중임이 들어난다. 군사들과 많은 승려들, 동남 동녀들이 부산하게 서성거리고 있다.
씬 35 동 관아 안
궁예와 왕건, 은부, 연화, 미향이 둘러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은부 견훤왕이 그야말로 온 전력을 쏟아부을 모양이옵니다. 두 아들까지 앞세우고 있다 하옵니다.
궁예 어린 아이들이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은부 그래도 범의 새끼가 아니겠사옵니까?
궁예 허허. 그것도 범 나름일 것이야. 그 아들들은 아직 너무 어리지... 어지간이 서라벌이 갖고 싶었던 게로구먼...
연화 죽을지도 모를 전쟁터에 어린 자식들을 데려 가다니 견훤이란 사람은 욕심이 대단한듯 싶사옵니다.
은부 욕심이라기 보다도 견훤왕은 다음 대통을 이을 재목을 골라내려는 것 같사옵니다. 폐하께오서도 왕자님을 보시게 되면 그리 하실 것이옵니다.
궁예 나는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네.
모두들 .............?
궁예 나 하나 살고 가면 그만인 것일세. 다음 생각은 다 욕심이야.
은부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허면 폐하의 뒤를 누가 잇는단 말이옵니까?
궁예 사람이야 많지.. 여기 아우도 있고.. 내원도 있어.
왕건 .....(강하게 고개를 든다)....?
궁예 내가 자식을 얻는다 한들 아우나 내원보다 낫겠는가? (왕건을 보며) 아니 그런가?
왕건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폐하? 그 말씀은 거두어 주시오소서. 황망하여 들을 수가 없사옵니다.
궁예 허허허. 내가 언제 실언을 하던가?
은부 폐하.....?
궁예 자식에 연연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야. 내가 죽거든 아우가 하게. 자네는 나보다 더 잘 할 수가 있어. 아니 그런가 아우? 자네도 황제가 되어보는 것이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대 고려국의 황제말일세. 하..핫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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