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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시를 사랑하는가 - 정호승
우리들은 누구나 가슴에서 치솟아 오르는 시의 덩어리들을 하나씩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순간 그 자체가 하나의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정도의 감격이 있는 시를 우리가 평생 동안에 한편이라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것을 보면서 문득 몇 년 전 백두산 천지에 갔을 때 일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1989년경 중국 땅을 통해서 백두산 천지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지를 바라보면서 '아! 이 천지는 절대자가 쓴 시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우러났습니다.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면서, 북한이 우리들에게 준 어떤 감동과 같은 것이 가슴속에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화작가 정채봉 씨가 쓴 짧은 시가 있습니다. 그 역시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를 본 다음 '이렇게 큰 산도 눈물샘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노래했지요. '슬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부제는 백두산 천지에서)는 제목의 시인데, '이렇게 크고 웅대한 산도 가슴속에 눈물샘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하는 감동이 표출된 시입니다. 어느 긴 시보다도 정채봉의 짧은 시가 제 가슴을 울렸던 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백두산을 항상 민족의 상징으로만 생각하고 분단과 통일의 상징으로만 여겨 왔습니다. 시를 쓰는 제 경우에는 '절대자가 쓴 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가 '천지는 백두산이 흘린 눈물샘이다'라고 노래하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돌아보면 시의 소재는, 사실은 우리 일상 어디에나 널려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현재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정치·경제적으로 급변하는 삶의 환경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저는 1970년대에 20대를 보냈고, 1960년대에 중학생이었고, 195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여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저의 중고등학생 시절과 지금 중고등학생들의 삶, 그리고 제가 이십대를 보낸 경험과 오늘 이십대들의 삶의 형태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필요 없으리라고 생각해 왔던 휴대폰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 출근길에 휴대폰을 집에 놔두고 왔을 때면 하루종일 마음이 불안합니다. 또 사무실 책상 위에 휴대폰을 놓아둔 채 퇴근이라도 했을 때에는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다시 가서 가지고 올까', '꼭 만나야 할 사람에게 걸려올 전화를 놓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뭔가 불안하고 허전합니다. 이것은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계 친화적인 삶을 철저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는 저는 팩스 세대였는데, 할 수 없이 저도 이메일(e-mail)을 통해서 원고를 보내고, 이메일로 원고가 도착된 것을 확인하는 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모르는 사람과의 채팅에도 도전하여, 야후(YAHOO) 사이트를 통해서 들어가 보기도 했습니다. 채팅 방에서 「'나는 오십대 아저씨입니다'라고 솔직하게 밝히면 쫓겨나겠지. 그러면 20대라고 그럴까. 이름을 뭐라고 대지」 하는 궁리에 부산한 적도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 삶의 형태는 짧은 기간 안에 너무나 바뀌어 버렸습니다. 우리들이 지나치게 기계 친화적이고 정보 친화적인 삶 속에 몰입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기계에 매여 있는 삶에서 벗어날 때
제가 처음 전화를 걸어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입니다. 은행원이셨던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갑자기 급하게 연락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심부름을 시켰는데, "아무개 집에 가면 전화가 있다. 그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전화를 드려서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전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말대로 그 집에 갔더니, 정말 안방에 전화기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심부름을 가면서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전화를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르쳐준 대로 다이얼을 돌렸더니, 한참 후 수화기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호승입니다!"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생각해도 놀랄 만큼 제 목소리가 무지무지하게 컸습니다. 어찌나 크게 고함을 질렀던지 옆에 있던 주인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셨습니다. 제 목소리가 아버지한테 들리지 않을 것 같아 목청껏 높여 전화를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이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제 소원은 줄곧 전화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가진 직장이 숭실고등학교 교사 자리였습니다. 시동인 활동을 하면서 주소와 이름을 교환했는데, 가장 기뻤던 것은 저의 연락처인 전화번호가 찍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각자 전화기를 하나씩 가지고 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화선을 통해서 인터넷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죠.
글만 쓰고 지내다가 얼마 전 '현대문학사' 출판부를 맡아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제 직장에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직원이 두 명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오후 두세시만 되면, 그녀들이 자기 책상에 앉아서 휴대폰을 들고 막 누르는 거에요. 20분도 좋고 30분도 넘게 그러는 걸 보면서, "직장에 와서는 휴대폰을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니다."고 나무랐습니다. 하지만 제 말에 그들이 얼마쯤 야속해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전화는 우리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전화기 저쪽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전화를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요즈음에는 아무리 멀리 있는 사람이라도 지척인 듯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화상 전화기까지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급변하는 기계 친화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기계 친화적이고 정보 친화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얼마 전 중앙일보에 나온 한 기사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이버 결혼식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결혼한 지 1년 내지 2년 된 신혼부부인데 여자 쪽에서 이혼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혼 전에 남자가 컴퓨터에 미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 심할 줄은 미처 몰랐다는 것이 여자 쪽에서 제기한 이혼의 사유였어요. 그런데 남자는 사이버 공간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어떤 여대생과 결혼해서, 사이버 공간 속에서 둘이 여행도 가고 같이 잠도 자고 하면서 꼬박 밤을 새우고 뜬눈으로 출근하는 게 다반사였답니다. 퇴근해 돌아오면 또 사이버 공간 속의 그 여대생과 만나서 신혼살림을 살고 애도 낳고 그렇다는 겁니다. 남자의 부인이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참다못해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이혼 판결이 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듯 사이버라는 제3의 공간은 우리들에게 혁명의 공간입니다. 그 가상의 공간이 현실의 공간에 사는 우리의 삶을 침범하여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유년 시절에 팽이도 직접 제 손으로 만들고 썰매도 만들었습니다. 전승현이라는 분이 우리 나라 최초로 스케이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분의 스케이트를 보고 얼마나 그게 타고싶었는지, 제가 직접 나무를 가지고 발 밑에 철사를 대어서 서서 탈 수 있는 스케이트를 만들어서 타곤 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놀이기구를 직접 만들고 제기나 연도 직접 만들고, 여름에는 여치집조차도 만들었습니다. 자연 친화적인 놀이를 통해서 유년 시절을 보냈는데, 요즈음 아이들은 변신 로봇을 갖고 놀기를 더 좋아하고, 좀더 나이가 들면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곤 하죠. 자동차만 해도 우리는 검정 고무신을 두 개 포개어서 자동차라고 생각하면서 앵앵하는 소리도 직접 내면서 놀았는데, 지금은 리모콘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가지고 놀지 않습니까. 또 컴퓨터 게임에 푹 빠져서,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젊은 세대들이 부쩍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두 아들의 아버지입니다. 저는 막내아들이 중학생입니다. 그 애가 노는 것을 보면 책과는 거리가 멉니다. 심지어 아버지인 제가 쓴 책도 읽지 않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른이 읽는 동화집 '항아리'를 내게 되어, '사랑하는 아들 후민에게'라는 사인과 함께 아들 방에 놓아 두었습니다. 어느 날 너 '항아리'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안 읽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너 너무하다'며 섭섭한 마음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들녀석은 컴퓨터 게임은 자기 반에서 제일 잘한다고 저한테 자랑합니다. 녀석이 즐기는 스타크레프트 게임을 옆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게임의 내용이란 게 정조준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 살인입니다. 그리고 폭파하는 것을 즐기는 거예요. 그래서 한창 게임에 빠져 있을 때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면, 컴퓨터 앞을 떠나 총 쏘는 흉내를 내면서 옵니다. 거기에 젖어 있는 거예요. 한번은 아들녀석이 애니메이션을 같이 보자고 해서 동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애니메이션이란 게 일본에서 밀수입된 CD 4개짜리였습니다. 「십지훈검」이라는 건데 굉장히 감동적이고 재미있다며 함께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빠도 고마워할 거라면서 부추기는 아이에게 이끌려 보기 시작했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첫 장면이 열리자마자 '이 애니메이션은 조금 잔인하지만 애니메이션의 극화(劇化)를 위해서는 불가피하므로 이해하고 보시기 바랍니다'라는 글자가 나왔어요. 내용은 일본의 어느 검객의 가족들이 몰살을 당했는데. 간신히 살아남은 한 소년이 나중에 검객이 되어서 원수를 갚는다는 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을 보고 저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칼을 가지고 사람을 찌르면 장면을 너무 리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가슴을 찌르면 가슴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게임에서도 정조준해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그대로 나옵니다. 죽이면 굉장히 통쾌한가 봅니다. 사람의 목을 자르는 장면에서는, 목이 또르르 굴러가는 것을 이제까지의 영화에서는 본 적이 없을 만큼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성장하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가득 차 있을까, 매우 염려스러웠습니다.
기계 친화적인 삶을 사는 오늘의 젊은이들과 달리 저는 물고기도 잡고 나무와 포옹하면서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만든 연도 날리고, 언 손을 불며 눈사람도 많이 만드는 등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았던 저와, 오늘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점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정보와 기계로 가득 차 있다고 할 때 과연 인간은 정보와 기계로만 만들어져 가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상당히 늘어날 전망이라고 합니다. KBS에서 방영하는 '일요스페셜' 시간에 인간의 수명과 노인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국에서 나온 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평균 수명이 130에서 140세고, 현재의 40대나 50대는 평균 수명은 80이나 90세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인류는 앞으로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수명이 연장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의 형태는 보다 더 기계화되고 정보화되는데,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될까요. 앞으로는 복제된 장기가 우리의 건강을 더 지켜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명은 더 연장되는데 인간은 계속 기계화될 것인가. 제 견해로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인간에게는 육체만이 아닌 고귀한 영혼이 있다
인간은 육체만으로 존재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고, 인간에게는 가장 중요한 영혼의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을 한 그루의 나무라고 생각해 본다면, 나무가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땅 속에서 뿌리를 통해서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야 인간이라는 나무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라는 나무의 수분과 영양분은 나무의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나무의 육체일까요? 그 나무의 영혼일까요? 그 나무의 육체를 통한 영혼이겠지요. 그런데 그 인간이라는 나무가 실뿌리를 통해서 필요한 정보만을 빨아올린다고 한다면 그 나무는 과연 살 수 있을까요? 인간은 기계로서의 삶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장차는 영혼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 오늘의 삶에서 어느 부분에 중요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 저는 그것은 서정(抒情)의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용필도 좋아하고 최진희씨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조용필 씨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면 그 가사 속에는 서정이 있습니다. 부산항이라는 항구도 있고 갈매기도 있고 동백섬도 있고 서정이 있습니다. 오늘날 십대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보면 서정이 거의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욕으로 이루어지는 노랫말의 시대입니다. 그것은 서정이 말살된 산문(散文)의 시대라는 뜻입니다.
제 견해로는 인간이 정보에만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서정성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서정성의 회복이 필요할 때에, 저로서는 시를 통한 서정성의 회복을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쩌면 산문의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산문의 시대에도, 운문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건물의 벽돌이라는 고체화된 물질이 산문이죠. 담쟁이 넝쿨이라는 운문이 감싸고 어루만져 주고, 물을 공급하고 다시 생명의 피를 공급하는 것을 그렇게 느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름날의 나무 한 그루가 서울에 없다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이 뜨거운 여름에 서울 시내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바로 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소에 사람은 누구나 다 시인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아름다움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고자 하는 기본적인 정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정서가 아름다운 것을 만나면 아름답다고 느끼는 서정을 갈구하는 마음의 바탕입니다.
저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봄날 아침에 일어나서 냉수를 한 잔 마시러 가다가 창밖을 봤더니, 갑자기 눈이 막 내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눈이 내릴 철이 아닌데 웬 눈이지 하면서 다시 보니까, 창 밖에 백매화가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분부시게 하얀 백매화를 보고, 하얀 눈으로 착각했던 거지요. 말을 못하고 입만 탁 벌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아! 내가 저 백매화가 핀 것을 보고 봄눈이 내렸다고 생각했구나. 역시 인간은 형편없는 존재야.' 하는 탄식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왔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 그 자체가 바로 시인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지 그 시를 발견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자기 자신을 기계화된 인간, 산문화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시가 가득 들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누르기만 하면 시가 나올 것입니다. 물이 가득 들어 있는 통에 구멍을 내고, 약간의 자극만 주어도 물이 쫙 나오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온몸이 시로 가득 차 있는데, 여러분들은 자극을 주지 않고 그냥 눈과 마음을 통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만 생각하기 때문에, 시심이 솟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슴속에 가득 차 있는 시를 한번 자극해 보십시오. 그러면 한없이 많은 시들이 나올 것입니다. 시를 발견하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시를 끄집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슴속의 시를 끄집어내는 능력 있어야
제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어느 날 퇴근을 해서 집에 갔더니 제 처가 시장에서 무지개떡을 사왔습니다. 무지개떡을 보니까 '아! 무지개떡 옛날에 엄마가 많이 사주셨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으면서 '무지개떡 참 맛있다. 마누라가 사주니까 더 맛있다. 잘 먹었어.' 하고 말면 그 속에는 시가 없다는 거죠. 무지개떡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무지개가 들어 있지요. 무지개떡을 먹을 때는 무엇을 먹었습니까? 저는 무지개를 먹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짧은 시를 하나 썼습니다.
엄마가 사오신 무지개떡을 먹었다
떡은 먹고 무지개는 남겨 놓았다
북한산에 무지개가 걸렸다
마누라가 사온 무지개떡을 먹었다고 하면 재미가 없는데, '엄마가 사온 무지개떡을 먹었다'라고 표현한 데 시의 비밀이 있습니다. 시적 화자가 소년의 마음이 된 거죠. 떡은 먹고 무지개를 남겨놓을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이 내 마음속에 있는 시를 그냥 자연스럽게 밖으로 내보낸 거죠. 제가 무지개떡을 먹으면서 시를 발견한 겁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의 눈 속에도 시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이 다 있는데, 스스로 가지고 있는 마음의 눈을 활용하지 않기 때문에 시를 발견하지 못한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린 왕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거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즉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의 눈을 가진 때에는, 모든 사물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지개떡이니까 분명히 그 속에는 무지개가 있듯이….
얼마 전에 '종이학'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종이학은 저의 큰 아이가 군에 입대를 하게 된 것을 계기로 씌어졌습니다. 녀석은 군에 입대하기 전날 술에 취해서 제 방에 천 마리의 종이학이 담긴 커다란 유리 항아리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아빠, 제가 제대할 때까지 이걸 잘 좀 보관해 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대답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이 종이학을 제대하는 그날까지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잘 보관했다가 너한테 돌려주겠다." 그런데 녀석이 입대한 후 천 마리의 종이학이 유리 항아리 속에서 사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너무 불쌍해 보였습니다. 아! 저 종이학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갑갑한 항아리 속을 뛰쳐나가서 저 푸른 하늘 속으로 날아가고 싶을 텐데…. 종이학은 비상의 꿈을 끊임없이 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잘 간직하라는 말만 듣고, 명색이 시인인 아버지가 종이학들을 날려보내지도 않고 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직무를 방기(放棄)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유리 항아리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서 종이학을 날려 보낼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인으로서 가장 치졸한 방법이었습니다. 아주 물리적인 방법이라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시인이 종이학들을 날려 보내는 방법으로 택한 것은 시였습니다.
시를 썼는데 어떻게 하면 종이학이 날아갈까요? 시인이 종이학이 날아간다고 하면 날아가는 거에요. 시인이 꽃이 웃는다고 하면 꽃이 활짝 웃는 거에요. 꽃이 핀 것을 보고 시인이 '꽃이 운다.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을 떨군다.' 하면 꽃이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그것은 시인의 힘입니다. 그래서 내가 '종이학이 날아간다'고 썼더니 종이학들이 막 날아갔습니다. 유리 항아리를 뛰쳐나와서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왕이면 멀리 날려 보냈으면 해서, '관악산을 넘어서' 하고 생각하다가 너무 가까운 것 같아서, '지리산으로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종이학이 날아간다. 지리산으로 날아간다'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지리산을 향해서 날개에 힘을 싣고 천마리나 되는 종이학이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걱정이 되었습니다. 비가 오면 어떡하지? 종이학이 날아가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 어떻게 됩니까? 종이학이 다 젖어서 떨어져서 죽을 것 아닙니까? 종이학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간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비가 오면 종이는 슬쩍 남겨두고 날아간다.' 라고 쓴 거죠. 그러자 비가 와도 아무런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좁은 항아리 속에 갇혀 있던 종이학 천 마리를 날려보냈습니다.
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느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여러분들과 제 가슴속에는 누구에게나 시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 가득 들어 있는 시를 발견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제가 무지개떡과 종이학을 빌어 말씀드렸습니다.
제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1, 2학년 때 저녁 시간이 되었는데 골목에서 '고등어 사려. 금방 바다에서 가져온 싱싱한 고등어 사려!' 하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저녁에 고등어나 좀 지질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등어를 사러 나갔는데, 자기 아들이 골목 쪽 창문을 열고 내다보더니, 고등어 장사 아저씨한테 "아저씨, 고등어 얼굴 예쁜 걸로 주세요." 하고 말하더랍니다. 그 말을 들은 제 친구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고등어의 얼굴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이 "얼굴이 예쁜 고등어로 달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서, 친구는 너무너무 감동을 받아서 이 아이를 낳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답니다. 친구는 자기 아들의 말 한마디가 바로 시라고 했습니다. 금방 양념이 발라지거나 해서 죽어버릴 고등어이지만, 소년의 마음속에서 이왕이면 예쁜 얼굴인 걸로 달라고 하는 마음이 바로 시의 마음입니다.
어느 봄날 여수까지 가는 기차를 타고 여수역에 내렸습니다. 역에 내린 순간 '아니 왜 기차가 여수역에서 더 가지 않고 멈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수역에서 기차가 멈추지 않고 여수 앞바다에서 오동도로 한 바퀴 휙 돌고 저쪽 바다로 기차가 계속 가면 될 텐데 왜 여기서 멈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제 머리 속에서는 기차가 여수역에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바다속으로 달리는 장면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탄 승객들이 기분이 좋아서 창문을 열고 갈매기들과 손짓도 하고 바다 속으로도 기차가 은하철도 999처럼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물고기들도 함께 타고….
기차를 타고 수평선 위를 달리는 기차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현실 속의 기차는 부산역이나 목포역이나 여수역에서 더 이상 앞으로 달리지 못하지만, 우리 마음속의 시는 그 기차를 얼마든지 수평선 위로 달리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내리고 빈 기차가 달리면, 바다 속에 있는 물고기들이 전부 자기들이 승객이 되어 차창에 기대어 애인 물고기들끼리 서로 손을 잡고 서로 사랑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시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시를 표현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바꾸어서 말하면, 인간의 눈으로만 사물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시를 어떻게 하면 잘 끄집어 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보다 자극을 주어서 끄집어 낼 수 있을까요. 그 가장 좋은 방법은 눈이 아닌 인간의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는 어떤 현상만을 바라보지 말라는 말씀을 여러분들한테 드리고 싶습니다. 시계가 있다고 하면, 이 시계의 마음으로 인간을 바라보면은 인간의 모습이 달라지고 시계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안도현이 쓴 「연탄재」라는 짧은 시가 있습니다. 아마 이런 내용이었을 겁니다.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말아라.
당신은 언제 이 연탄재만큼
뜨겁게 누구를 사랑해 봤느냐?'
그런데 이 시에 감동이 있습니다. 이 시는 어떻게 쓰여졌을까요? 인간의 눈으로 연탄재를 바라보고 썼을까요? 아닙니다. 연탄재의 눈으로 연탄재의 마음으로 쓴 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연탄재가 뜨겁게 누구를 사랑했다'고 쓴 겁니다. 항상 우리는 인간의 눈으로만 사물을 바라보지 말고 사물의 마음이 되어서 인간을 바라보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우리 마음속에 가득 들어있는 시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고 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시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지요.
시는 은유의 세계입니다. 시는 은유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기본입니다. 은유는 시의 본질입니다. 은유를 이해해야만 시가 쉬워집니다. 먼저 국어사전에서 은유를 찾아보면 '비유법의 하나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은 전봇대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키가 큰 것을 전봇대로 비유한 것이 바로 은유입니다.
백마디의 말보다 한 송이 장미가
한번은 신사역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가다가 어떤 젊은 남녀를 보았습니다. 여학생이 개찰구 표를 넣은 다음 남학생을 쳐다보면서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는데, 남학생이 "선영아!" 하고 불렀어요. 그러자 여학생은 "서로 인사해놓고 왜 불러?"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그녀는 남학생 쪽으로 갔습니다. 이윽고 그 남학생은 감추어 놓았던 한 송이의 장미꽃을 내밀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눈만 쳐다보면서 주었더니, 갑자기 선영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막 피어나면서 아무 말 없이 장미꽃을 받아든 채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남학생은 기분이 좋은지 입이 벌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남자가 선영이한테 장미꽃을 전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했을 때와 말 없이 장미꽃을 건네줬을 때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을 했을 때는 산문의 세계고 말없이 장미꽃을 건네줬을 때는 운문의 세계, 즉 시의 세계입니다. 그 장미꽃을 건네주는 행위 자체는 은유(隱喩)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것에 대한 은유죠. 그리고 그 장미는 하나의 은유물입니다. 그런 은유의 행위를 여러분들의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유의 세계이고 시의 바탕이 되는 세계입니다.
건물을 뒤덮고 있는 담쟁이와 같은 것이 시입니다. 여름날에 쏟아지는 소나기가 바로 시입니다. 만일 바다가 보이는 곳에 창이 하나도 없는 곳에 있으면서, 바닷가에 있는 건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바닷가에 있을 때,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여러분 모두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십시오.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사물이 말을 하게 할 때 시심은 무르익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의 꽃은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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