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까치수염
유월의 산하는 온통 녹색이다. 녹색은 눈의 피로감을 들어주는 색상이다. 알록달록한 꽃송이나 울긋불긋한 단풍은 짧은 한 철로 끝내야 한다. 이런 주홍색 계열은 눈을 쉬 피로하게 한다. 인터넷 홈페이지는 여러 바탕색이 쓰인다만 녹색 화면이 가장 안정감 있어 널리 통한다. 신록이 짙어 녹음이 우거진 유월의 숲은 숨 가팠던 생태계가 잠시 숨을 고르면서 쉬고 있는 즈음이다.
늦은 봄에서 초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는 무렵 산기슭에선 아카시꽃이 은물결로 일렁이며 진한 향기를 날렸다. 이어 높다란 오동나무가 자주색 꽃을 피워 우아한 자태를 뽐내다 저물었다. 그러자 허연 밤꽃이 피어 한동안 꿀벌들을 바쁘게 했다. 아카시나 오동나무나 밤나무에서 피어난 꽃들은 멀리서 바라다본 야산의 풍경이다. 이런 꽃들이 지고 나면 시야에 두드러진 꽃은 드물다.
그런데 초여름 산속에 들면 지지 않은 찔레꽃이나 인동꽃을 볼 수 있다. 찔레꽃은 하얗고 금은화라고도 하는 인동꽃은 처음엔 하얗게 피었다가 나중엔 노란색으로 바뀐다. 하얀 개망초꽃은 어디든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르게 핀 요염한 산나리꽃은 주황색 바탕에 검은 점들이 박혀 있다. 낮은 키로 자라는 쥐똥나무에서도 쌀알 같이 하얀 꽃이 핀다. 북한에서는 검정알나무라 한다.
내가 산행을 즐겨 가는 편이지만 유월에 들면 발길이 뜸한 편이다. 유월은 농사철이라 시골에 일손을 도우러 가야기에 틈을 내기가 어렵다. 산나물들도 쇠어 버려 채집하는 시기가 아리나 산을 오를 일 드물다. 고작 산딸기나 돌복숭을 딴다고 근교 산자락으로 잠시 잠깐 올랐다가 내려오는 형편이다. 거기다가 장마가 오면 습도가 높고 비가 잦아 산행 중 후줄근한 땀이 흐른다.
아마 일 년 중 등산객이 산을 가장 적게 찾는 때가 유월이지 싶다. 앞서 지나간 유월의 두 번 일요일에 올랐던 산에서 아름답게 핀 야생화가 있어 뒤늦게 소개해 보련다. 나는 유월 둘째 일요일엔 구산면 봉화산에 올랐다가 옥계마을로 내려간 적 있다. 그때 응달 북사면에서 통통한 노루 꼬리처럼 생긴 꽃송이에 하얀 꽃이 군락을 이룬 곳을 발견했다. 예전엔 예사로 지난 꽃이다.
그리 높지 않은 봉화산이었다. 워낙 인적 드문 곳이라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도 누구 한 사람 거들떠보는 사람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송이송이 꽃 덤불을 어루만져주었다. 꽃차례 아랫부분이 둥글다가 점점 가늘어지는 것은 꽃이 아래서부터 점차적으로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이 꽃 이름이 기억 저편 아슴푸레해서 떠오르질 않았다. 어디선가 식물도감에서 본 바가 있었다.
구산면은 내가 사는 생활권과 떨어진 곳이라 자주 찾지 않는 데다. 초여름 날 그런 산기슭에서 본 꽃이라 무척 반가우면서, 꽃 이름이 떠오르질 않아 아름답게 피어난 꽃에게 상당한 결례를 한 셈이었다. 언제 틈을 내어 도서관에 들려 그 꽃 이름을 반드시 알아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바삐 지내다가 도서관을 찾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다 일주일 지났다.
이제는 내가 자주 찾는 작대산 가는 길로 향했다. 북면 외감마을을 지나 남해고속도로 지선 창원터널 곁 숲으로 들었다. 구고사를 앞둔 양미재 근처에서 앞주 봉화산 북사면에서 보았던 하얀 꽃 덤불을 또 발견했다. 나는 숙제를 못다 하고 학교로 간 게으른 학생처럼 그 꽃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꽃은 역시 그늘진 응달에 무더기 무더기 피어나 우아한 자태를 보여주었다.
유월 마지막 주였다. 정기고사 문제를 출제하느라 며칠간 고심했다. 고사원안을 제출할 때면 언제나 신경이 쓰인다. 서술문항은 출제 시 채점 기준 틀을 완벽하게 만들어 놓으려니 더욱 힘들다. 고사원안을 제출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학교 도서관에 들려 ‘황소걸음’에서 펴낸 ‘주머니 속 풀꽃 도감’을 펼쳤다. 앞서 이름이 떠오르질 않아 끙끙거렸던 그 꽃은 ‘큰까치수염’이었다. 13.06.26
첫댓글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군요 참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