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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대전일보 > 문화 > ART(공연·전시) / 편집 2014-01-14 22:16:26 / 2014-01-15 13면기사
한국현대미술작가 시리즈 '최종태'전
11월 29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대전 출신인 원로작가 최종태의 화업 60여년을 총망라하는 전시다. 국공립미수로간에서는 10년만에 처음으로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선 작가의 시기별 주요 작품, 비공개 초기 작품과 수채, 파스텔, 판화, 소묘 등의 평면작품을 포함 총 20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1932년생인 최종태는 유년기에 일제강점기와 해방기를 보냈고 청년기에는 4·19와 5·16 등을 겪었다.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는 "최종태는 이성적 논리보다 영성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태도를 지키며 순수조형을 실천해왔고 이러한 그의 삶은 '구도(求道)의 여정'으로 일컬어진다"며 "한국 교회 조각을 주도하며 현대 조각에서 하나의 지류를 형성했다"고 설명했다.
최종태는 1960~70년대에는 추상이 주류를 이루던 미술계에서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허무는 조형작업을 보여줬고, 1980-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교회 성상 조각을 활발히 전개했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자 서울대 명예교수인 그는 우성김종영기념사업회 회장,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 이동훈기념사업회장 등을 맡고 있다. 원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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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은 2015년 9월 1일부터 2015년 11월 29일까지 한국현대미술사를 정립하고자 추진한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의 일환으로, 조각 부문 대가인 최종태의 작품세계를 집중 조명하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작가 최종태는 한국 현대조각계의 원로로, 교회조각의 현대화와 토착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번 전시는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그의 작업세계 전반을 총망라해 보여줌으로써, 최종태의 삶과 예술을 조망하고자 한다. 이는 작가 개인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일 뿐 아니라, 한국 현대조각 내 또 하나의 지류인 현대 성상 조각을 우리 관객들에게 새롭게 환기시키는 계기가 된다.
● 1932년 대전에서 태어난 최종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에 유년시절을 보냈다. 암울하고 혼란스러웠지만 최종태에게 그 시절은 영감의 원천과도 같은 시기이다. 그의 조각 중에 「회향(懷鄕)」이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이 있다. 이는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을 기억하며 잠시나마 불안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다. 저 먼 곳에 시선을 둔 채 두 손을 모으고 서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최종태의 삶과 예술이 뿌리내리고 있는 근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시절을 늘 그리워한 작가는 이후 예술을 통해 근원, 근본으로의 회귀를 지향한다.
● 삶, 종교 그리고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평생의 과제로 삼은 최종태는 대학시절 불교 사상에 심취했고, 민화, 장승 등을 포함, 한국 전통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58년 대학졸업 후,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된 1960-1970년대 그는 줄곧 인간의 형상을 조각했고, 절제된 표현방식을 취했다. 사실 이 시기는 한국 미술계에 추상이 주류적 흐름으로 자리하던 때였다. 추상의 영향력은 당시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거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다. 그 한가운데서 최종태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구상의 또 다른 변주가 아니라 오히려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허무는 조형작업을 펼쳤다. 지속적인 형식 탐구와 형태 실험은 1980년대에 이르러 그만의 확고한 조형어휘 구축을 가능하게 했다.
● 영원과 본질에 대한 그의 예술적 고뇌는 현실 속 스승이 해결해 줄 수 없었다. 여러 가르침과 만남을 통해 자신의 물음에 해답을 구하고자 한 최종태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후 종교는 그에게 삶의 지향이자 예술의 또 다른 표상이었다. 1970년대에 이어 1980년대 본격적으로 성상 조각을 전개한 최종태는 한국 가톨릭 교회조각의 토착화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를 가능하게 한 데에는 타 종교, 특히 불교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 그리고 반가사유상이나 석굴암 불상과 같은 불교 예술의 조형미에 대한 경외가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최종태가 이 토착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특정 종교, 교회의 관습적 영역에 갇히기를 거부한 바로 그 지점에 있다.
●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최종태는 변함없이 군더더기 없고 간결하며 단순한 선, 정면성을 갖는 입체 조형,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초월한 형태 등을 핵심적인 조형어법으로 삼고 있다. 조각뿐 아니라 파스텔화, 소묘, 판화, 먹그림 그리고 수채 등 다양한 평면작업에서도 탁월한 예술성을 보여주는 그는 여지없이 관습적이고 타성에 젖은 구분의 논리, 배제의 논리를 경계한다. 최종태의 예술세계는 흔히 구도(求道)의 여정으로 비유된다. 끊임없이 회자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우울, 강박과 절망, 그 정신적 황폐함과 극단적 광신, 이 시대 예술이 봉착해 있는 존재론적 위기, 그 개념적 허상 등 우리에게 답을 구하도록 요구하는 여러 현상들을 떠올려보며, 최종태의 작품세계 속에 묵직하게 내려앉은 영성적 가치와 깊이를 통해 삶의 이면을 마주하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1. 형식실험, 형태탐구(1960-1970년대) 1960년대 이후 한국현대미술계에 나타난 추상 경향은 점차 화단의 지배적 흐름으로 자리했고, 많은 예술가들이 추상으로 전향했다. 그 한가운데서 최종태는 당시의 주류적 경향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실험을 추구했다. 조금은 늦은 나이에 입학한 서울대 조소과를 1958년 졸업하고 1967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기 전까지 거의 대부분 고향인 대전에서 지냈는데, 최종태는 그 곳에서 조용하고 평온한 생활하며, 급격히 발전하는 도시적 환경이나 당시 주류 화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최종태는 미술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주제인 인체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기본적으로 간결함과 단순함을 추구했다. 그리고 주로 소박하고 둔탁하지만 순수함을 지닌 소녀와 여인의 모습에서 삶과 예술의 근원을 구하고자 했고, 또한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재현적 기교보다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단순하면서도 엄격한 조형원리를 근간으로 하였다. 직육면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인물상은 주로 팔을 몸에 밀착하고 곧게 서 있는, 움직임이 극히 제한된 형태이다. 이처럼 최종태의 작품은 부동성과 정면성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이성적 논리보다는 영성적 가치를 중시하는 이집트 미술이나 중세의 성상, 성당건축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관심과도 연관이 있다.
2. 서사의 개입(1980년대) ● 1970-1980년대 우리나라의 사회적·정치적 혼란은 작가의 창작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의 불안은 '고요한 엄숙함'을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삼고 있는 최종태의 예술세계조차 요동케 했다. 두상 조각이 대표적인 예이다. 납작하게 눌리고 사방이 베일 듯 날카롭게 처리된 두상은 도끼를 연상시킨다. 이 당시 두상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조형적 특징으로 작가는 시대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통렬히 표현한 것이다.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거나 교차하고, 손가락을 다 벌려 위로 뻗고 있는 등 강한 움직임이 나타나는 입상 역시 이전의 정적인 자세와는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이와 같이 강렬하고 격정적 감정의 표출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의 본성과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방식이라 판단하고 이내 묵직하게 가라앉은 듯 한 형상 표현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움직임, 처절한 몸짓 속에는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과 고민이 담겨 있다. 언젠가 회고하길, 작품을 만들었던 당시에는 미처 몰랐지만 여러 해 지나고 난 뒤 작품들을 보니 고뇌와 슬픔을 담고 있는 얼굴이 가득했다 한다. 최종태는 그때부터 우울함과 처량함이 배어 있는 작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 1980년대는 1973년 서울 양화진 성당 절두산 성지에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을 제작한 이후 1980년 한강 성당에 「십자가상」을 세우는 것을 기점으로 성당, 성지 등에 본격적으로 성상조각을 세우기 시작한 때이다. 이 시기에 성상조각을 비롯하여 최종태의 도상적, 주제적 태도가 정립되었다. 청년시절부터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불교사상과 예술은 최종태의 독자적인 조형어휘 구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시기부터 두드러지게 등장한 앉아있는 인물상은 표정이나 자세가 반가사유상을 떠올리게 한다. 예술 내외부의 다양한 경험과 기억을 통해 작가는 삶과 예술에 대한 상념을 떨쳐내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확립시켜갔다.
3. 경계의 초월(1990년대)
● 1990년대 최종태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전개된 작가만의 조형적, 도상적 태도의 진수가 드러난다. 그는 기본적으로 수직적 발전논리보다는 수평적 포용을 지향한다. 독특한 조형어휘와 대표적인 도상들은 시기구분 없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동양과 서양, 타 종교 간의 만남 등 표면적으로 구분되고 얽히고설킨 복잡한 관계를 거슬림 없이 유연하게 자신의 작품 속에서 풀어낸다. 최종태의 인체조각을 보자. 때로는 티없이 맑고 순수한 소녀로 때로는 상념에 잠긴 듯한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소녀, 여인을 표현하기 까지 최종태는 무수히 많은 형상적 실험을 전개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 전통의 현대화 또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1970년대 초 국전 추천작가상 수상과 더불어 부상으로 가게 된 세계여행에서 수많은 예술작품을 접하고 난 뒤 돌아와 한국에서 우연히 반가사유상과 석굴암 불상을 감상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최종태는 서구 미술로 경도된 한국 미술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자신 역시 한국현대미술가로서 자기다운 조형언어를 찾아야겠다 생각한 것이다. 동서양의 미술사를 두루 섭렵하고 그 경계를 넘어서는 자기 수련의 과정을 통해 한국적인 것을 현대화하며 자신만의 예술관을 성립했다.
4. 본질로의 회귀(2000년대)
● 최종태는 정제된 형태를 통해 '인간'을 표현하려 했고, 삶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졌다.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 중심과 주변, 예술과 종교 등을 갈라서 나누지 않고 끌어안는 그의 태도는 관습적 구분과 배제를 거부한 결과이다. 영원과 본질의 탐구, 영성적 가치의 추구 등 손에 잡히지 않는 거대한 주제는 작가의 정신적 지향과 예술적 구현을 마주하는 순간 충분히 공감을 얻게 된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단순한 선, 평면성과 정면성을 갖는 입체 조형,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초월한 형태 등은 최종태가 언급한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見性)이나 그리스도교에서 주장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근원적 본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라는 태도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하는 핵심적 조형방식이다. 삶과 종교, 그리고 예술이 궁극에는 하나임을 이야기하는 최종태의 작업은 끊임없는 반복과 자기 반성을 통해 전개되었다. 이는 시각예술의 경계구분 혹은 상호배타적인 조형어휘에 대한 관습 또한 거슬림 없이 넘어서게 한다. 최종태는 궁극적으로 예술적 실천을 통해 본질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 다가가고자 긴 시간을 겪어냈다.
●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 삶의 뜻이 무엇인가. 이것이 나의 큰 숙제입니다. 어찌됐건 나는 여기에다 한 생을 다 바쳤습니다. 조각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이며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참으로 알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 큰 나의 원(願)이 겨우 감이 잡힐 듯싶은 지금 나는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이 숙제는 끝내는 데에 목표를 둘 것이 아니로구나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5. 두상
● 최종태는 작품 활동을 전개하면서 어려움에 봉착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이끌어내야 할 때 두상을 조각했다고 한다. 또는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 손을 풀어 익숙하게 하기 위해 두상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조형어법을 구축하는 경로 안에서 두상을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그로 인해 그의 두상 조각은 다른 소재들보다 훨씬 다양한 조형적 변이를 보인다. 재현에 가까운 구상성을 보이는 두상이 있는가 하면, 볼륨감이 살아있는 추상적 구상성을 갖는 두상 시리즈도 있고, 아예 얼굴의 측면을 강조하며 거의 평면에 가까운 추상적 형태도 있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1980년대 불안하고 우울한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두상은 직선이 강조되었고 날카로우며 경직된 형태가 부각되어 재현적 표현은 거의 남기지 않아 추상성이 강조되었다. 다만 최소한의 구상적 요소를 통해 얼굴임을 인지시켰다. 이후 1990년대에는 평면성이 강조된 이전의 두상에 비해 양감이 가미되고 눈, 코, 입이 두드러지는 형태의 두상도 제작되었다. 2000년대는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무화(無化)하거나 아예 그 경계를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이에 재현적 구상성이 드러나는 두상도 제작하였다. 최종태의 두상 작업을 통해 그의 독자적인 조형어법과 그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다.
6. 성상조각과 종교미술
● 중학교 시절에 읽었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사랑과 헌신, 인간애를 깨달았던 최종태는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면서 삶과 예술, 종교가 접목되는 지점을 찾고자 했다. 사회, 정치적 격변과 혼란의 시기를 거치며 살아온 최종태에게 종교는 안식처였다. 작품 활동을 전개하던 시기 국내 화단에서는 추상미술과 민중미술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 등이 주류적 흐름으로 자리했다. 그러나 최종태는 이러한 이슈들로부터 비껴 나와 인물조각, 성상조각에 몰두했고,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형상이 아닌 현실 너머의 세계에 있는 형상을 추구했다. 그는 조형 탐구를 통해 근원, 궁극의 지점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래서 최종태의 예술세계는 '구도의 여정'으로 표현된다. 소녀, 여인, 어머니, 아이와 같은 현실의 존재를 성모, 성인, 성모자로 바꿔 놓음으로써 소박한 모습에 성스러움과 영원함을 담아 종교적으로 승화시켰다. 종교를 통해 미의 본질을 찾고 인간 정신의 궁극을 추구하였다. 최종태는 작품을 통해 영성적 가치를 드러내고자 하였고, 그것이 보편 지향적이기를 바랬다. 그로 인해 그의 성상조각은 종교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 최종태는 1973년 서울 양화진 성당 절두산 성지에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을 세우며 본격적으로 종교 조각을 시작했다. 이후 한강 성당,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명동 성당 등에 「십자가상」, 「성모상」, 「성모자상」, 「십자가의 길」과 같은 교회 미술로 일컫는 작품들을 제작해 놓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수많은 성당, 성지, 수도원 등에 작품을 설치했다.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 조각의 현대화, 토착화를 이야기할 때 최종태는 그 정점에 위치한다. 그를 기점으로 이전의 성상 미술은 초상학적으로나 조형어법에 있어 대부분 정형화된 서구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성모, 예수 등 주요 도상들의 외형은 서구적 이미지를 고수했다. 최종태가 오랜 기간 설득과 공감의 과정을 통해 한국 가톨릭 성상 미술을 자리 잡게 한 데에는 강한 종교적 신념과 더불어 한국적 가치, 전통에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당시 한국 현대미술작가로서의 정체성 또한 맞물려 작용했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단순한 선, 평면성과 정면성을 갖는 입체 조형,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초월한 형태 등은 최종태가 언급한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見性)이나 그리스도교에서 주장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근원적 본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라는 태도를 구체화하는 핵심적 조형방식이다. 결국 최종태가 독자적인 조형어법을 통해 가톨릭 교회미술의 토착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특정 종교, 교회의 관습적 영역에 갇히기를 거부한 바로 그 지점에 있다. 그는 예술과 종교, 예술과 삶, 종교와 삶을 구분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활동을 포괄적이고 총체적이다라고 본다. 이로 인해 그의 예술은 구체적 재현에서 보편적 형상으로, 종교적 지향에서 보편적 신념으로 풀어낼 수 있다.
● "위대한 예술작품은 종교적인 품격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예술이 가치세계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고 결국은 절대를 향해서, 초월경을 향해서 그 문을 열려는 찾음새이기 때문이다." "예술, 종교, 인생, 그것은 나에게 있어 한 덩어리입니다. 내게서는 모든 경전들이 다 나의 예술론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는 예술도 종교도 따로 떼 놓을 수 없습니다." (최종태)
7. 평면작업
● 최종태의 현상에 대한 통찰적 사고는 시각예술장르의 경계구분 혹은 상호배타적 조형어휘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볍게 넘어선다. 작가는 파스텔화, 소묘, 판화, 먹그림 그리고 수채 등 다양한 평면그림 작업에서도 탁월한 예술성을 보여준다. 최종태에게 평면작업은 단순히 조각을 위한 밑그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된 작품이다. 그가 평면작품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1976년 문헌화랑에서 나무 부조 작품을 전시했는데 이를 판화로 찍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은 이후이다. 나무 부조에서 판화로 연결하여 먹그림, 수채화, 그리고 파스텔화 등으로 매체를 변화시키며 작품을 이어온 최종태는 평면작업이 조각을 해나가는데 있어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방편이었다고 한다. 조각을 하면서는 동서양 미술사에 짓눌리기도 하고, 또 생각할 일이 너무나도 많아 자유로울 수 없었던 부분들이 있었지만 평면작업에서는 그러한 긴장감이 덜하였다. 그에게 조각이 존재 탐구와 구도(求道)의 과정으로써 일종의 고행이었다면, 인체, 풍경, 정물 등의 다양한 소재를 취하고 여러 매체를 다루는 평면은 보다 자유로운 예술세계를 펼치는 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인 표현보다는 절제되고 선적이며 평면화된 최종태 조각의 기본적인 특성은 평면작업에서도 지켜지며 단순화된 형태와 선이 강조된 평면성의 절정을 보여준다.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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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소식.최종태전.국립현대미술관과천관.네오룩.
[출처] 최종태 展.|작성자 다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