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오후 5시에 페북에서 6시에 이정배 교수가 안산에서 열리는 세월호10주기 예배에서 성찬식을 집례하기 위해서 오고 있다는 글을 보고 급히 집을 나섰다. 물어 물어 버스, 전철, 택시를 타고 늦게마나 행사장에 도착했는데 500여 명이 모여서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에배 의식 보다 나에게 인상적인 것은 소명학교 정승민 선생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희생자를 크게 만들었던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당시에도 그것이 가장 안타까웠다. 아이들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었다. 고등학교 2 학년이라면 정신적으로는 미숙한 면이 있어도 육체적으로는 이미 성인이다. 그런 아이들이 물론 배가 빨리 기울어지기는 했지만 어떻게 그렇게 수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을까? 즉 3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배가 심하게 기울어도 선실에서 나오지 않고 참변을 당하도록 만들었던 정신적 배경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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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재난이나 재앙이 닥쳤을 때 당하는 당사자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최선의 행동을 해야 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위기 상황에 대처해야 하고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선 당사자가 책임질 수밖에 없는 부분은 분명히 존재한다. 여기에는 나이나 어떤 구별도 한계도 없다. 오직 생사의 기로에 직면한 당사자의 판단만이 유효할 뿐이다.
그런데 잘못된 메시지를 신뢰하고 기다렸다. 비록 혼란이 오더라도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구명쪼기를 입고 바다로 뛰어들기만 했더라면 좀 더 많은 숫자가 살 수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절대 절명의 순간까지 그렇게까지 순종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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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에 당시에 내가 살던 호주 사회에서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면 세월호의 학생들처럼 수동적으로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백인들은 조금이라도 자기편에서 이해가 되지 않거나 불이익이 돌아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일부 외신들 가운데서는 이번 사고의 원인에 대해 독립적 사고와 자립적인 결정이 낯설고 어려서부터 나이가 더 많은 사람들이나 높은 위치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 듣고 따르는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나온 결과라고 논평을 한 곳들도 있었다.
집회가 끝나고 이 교수 부부와 식사를 한 후에 택시를 타고 초지역으로 갔다. 9시 30분 쯤 초지역에서 나는 서해선을 타고 이 교수 부부는 4호선을 타고 숙소인 부암동으로 간다고 헤어졌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그만 방향감각을 잃어 4호선이 아니라 수인선을 타서 인천으로 가서 인천에서 다시 1호선을 타고 12시가 넘어서 집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어이 없는 일이 벌어졌을까? 4호선의 안산 시흥 구간은 4호선과 수원 인천을 연결하는 수인선이 같이 사용하는 노선이다. 안산 인근에 살아보지 않아 이 방면에서 전철을 탈 일이 전혀 없었던 이 교수 부부는 즉 직접 경험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선험적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서울 방향이 아니라 인천행 전철을 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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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초지역에서 나와같이 서해선을 타고 대곡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서 홍제역에서 내리면 목적지로 가장 빨리 도착하는 것이었다. 초지역에서 애초에 내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야기를 했었지만 우리 모두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노선이어서 어쩐지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4호선을 타고 가기로 했던 것이다. 즉 선입견이 개입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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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해프닝을 현상학적으로 해석하자면 선험적 지식의 부족과 선입견의 개입으로 판단중지를 하지 못한 탓이었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판단중지를 뜻하는 `에포케(epoche)'는 고대 그리스어로 `정지, 중지, 보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현상학에서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판단을 보류하거나 중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상학적으로 세월호 사태를 본다면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이 1986년도 출판해서 사회과학에 유성의 충돌 같은 충격을 주었다는 ‘위험사회’가 도움이 된다. 그 책에서 울리히의 벡은 “부는 상층에 축적 되지만, 위험은 하층에 축적 된다.”고 했다.
‘위험사회’에서 울리히 백은 말한다.
“1차 근대화와 2차 근대화가 있다. 기술개발과 경제성장 그리고 양적인 안전을 추구한 게 1차 근대화다. 기술이 경제를 살리고 안전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던 시대이다. 과학이 종교를 대신했고 과학자의 얘기는 신앙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방사능, 유전자조작식품 등 과학기술이 야기한 불특정한 위험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2차 근대화에 들어서 이제 사람들은 어떤 기술을 선택하고 무엇이 좋은지 성찰적으로 반응을 보인다. 이를테면 유전자 조작식품에 대한 반응은 1차 근대화와 2차 근대화가 다르다.
과거에는 원전을 지지하는 전문가만 있었지만 이제는 이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전문가도 나온다. 성찰적 근대화의 조건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보장되느냐의 여부다.
성찰적 근대화의 과정은 다양한 대항 담론과 대항지식의 형성을 촉구한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세월호 사건은 한국 사회의 총정리판이었다. 한국 국민은 아직 성찰적 근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호에 이어 이태원 참사는 아프리카의 어느 신생 국가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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