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옥 초대 회장님 시절 문학기행을 "단속사 정당매"를 보러 갔습니다. '옛선인들이 유독 매화를 사랑함이 뭘까?' 그 때 문학이 뭔지를 크게 깨닫고 그 후에 제가 아래 작품을 썼습니다. 그리고 홀로 매화향연을 즐기려고 고향 밭에다 100여 그루를 심었습니다. 사방을 대나무 숲으로 둘러 막았습니다.(자연적으로 난 대숲이지만). 올해는 엄청 많은 매실이 달려서 집행부 간사선생님들께서 따가시기도 했는데, 신명이 오르면 "춘야연 도리원 서"를 흉내내어 보고 싶어서, 내년 봄에는 매화밭 야연을 벌이고, 풍류와 낭만을 아는 수필가 선생님들을 모실까 합니다. ^^ ====================================
매화차를 달이며
멈추지 않고 내리는 눈발아래 흰 꽃과 붉은 꽃이 주렴으로 피어난다. 방문을 열고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꽃이 핀 듯도 하고 눈이 핀 듯도 하다가 어느 덧 꽃인지 눈인지조차도 잊어버릴 즈음에 나는 깊은 매향 속으로 빠져든다.
‘만물이 움츠려 있을 때 가장먼저 봄을 알리는 매화-’ 나무에서 열매로 개체에서 개체로 생명이 옮겨가는 과정에서 오는 필연의 희생이 피워내는 향기. 역사에서 역사로, 암흑에서 광명으로 이어가는 그 아픔을 홀로 삭인 듯 안으로 오그라들며 피어난 꽃-. 나는 지금 눈 속에 피는 매화 앞에서 한 잔의 차를 끓이며 역사 속에 묻힌 비정한 아픔들을 본다. 매향을 따라가니 자명고를 찢은 낙랑공주의 은장도를 만나고 천관의 옥수를 뿌리 친 유신 화랑의 검을 만난다. 원술을 내친 지소부인의 눈물도 만나고, 불 꺼진 사비성에서 처자식의 생명을 거둔 계백장군도 만난다.
매향에 젖어드니 거꾸로 말을 타고 선죽교를 건넌 포은의 노랫소리도 들리고, 겨우 열 두 척뿐이면서 아직도 열두 척이나 있다고 장계한 이순신 장군의 붓도 보인다. 매향 속에는 야곱에게만 복을 빌어준 이삭의 침묵이 있고, 씨라도 남겨 달라며 찾아온 어미를 내쳐버린 성철 큰스님의 돌팔매질도 있고, 아무것도 공양할 게 없다고 어린자식을 내어준 에밀레 어미의 시주까지도 그 속에 잠들었다고 종소리로 피어난다.
매향에 실린 보이는 아픔은 단심(丹心)이지만 내가 매향에 끌리는 이유는 단심(丹心)에 숨겨진 단심(斷心) 때문이다. 그러한 냉정함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너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철저히 자신에게 진실 할 수 있는 인간만이 차마 벨 수 없는 자신을 끊어 낸다. 나는 그 비장한 결단을 사랑한다.
개인의 연정이든 우국의 충정이든 인간의 구원이든 그 모든 절연에는 근원을 향한 간절함이 있다. 자신을 묶고 있던 질긴 인연들을 ‘죽으면 살리라’는 차가운 확신으로 스스로를 베어버린 냉혹함 들이 꽃으로 피어난다. 아름답고도 애달프고 그윽하면서도 비정하다. 그것이 매화의 슬픔이고 진실의 슬픔이다. 아니 그것은 큰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필부로 한 생을 살아버린 내 슬픔이기도 하다. 모든 꽃들이 그냥 숨죽여 엎드려 있어도 봄은 온다 하지만 나는 매화가 피지 않으면 봄이 오지 않는다고 믿는다. 설사 날이 풀리고 햇살이 따사롭더라도 제 살을 깎아내는 아픔이 없는 봄은 남국의 봄처럼 죽은 봄일 뿐이다. 새로운 한 세상을 열기 위해서 끊어야만 하는 또 다른 이 세상.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냉정함이 지금 저 눈 속에서 꽃으로 피고 있다. 날이 아직 한참 차가운데 겨울과 절연하고 호된 눈보라를 맞을 줄 알면서도 피어나는 그 향기는 세상의 어떤 말로도 표현 할 길이 없다. 그래서 매화를 보는 내가 더 서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꽃을 보길 원하듯이 나는 이런 비장한 마음들을 만나고 싶다. 현실에서 만날 수 없으면 역사 속에서라도 만나고 싶다. 감히 내가 다다를 수 없는 그 격조 높은 마음, 정극감지(情極感至)한 마음들에게 한 잔의 따뜻한 차라도 대접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차를 달이는 보람이다.
뜨거운 물에다 아직 채 피지 않은 꽃봉오리 서너 개를 띄우자 피멍이 풀리는지 푸른 빛이 우러나와 방안에 감돈다. 고독한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차가운 꽃술에도 훈훈한 기운이 흘러 가지에 쌓인 눈 한 덩이 녹아서 툭 떨어진다. 천년의 기운을 담아오는 붉은 마음 한 자락, 서늘한 향기가 저 홀로 아득하다. (졸저 <꼴찌로 달리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