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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7.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월요일. - 저는 죄인입니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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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7.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에 대해 수시로 판단을 내리고 단죄를 합니다. 심지어 영화나 텔레비전의 극을 보면서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여 열을 올립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에 화를 쌓아 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가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고 삽니다. 남의 티끌은 유난히 잘 보면서도 자기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단죄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여인을 단죄하기보다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고자 하는 속셈이 더 컸습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예수님께서 그를 단죄하면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헛된 것이요, 단죄하지 않으면 전통의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하십니다. 그리고는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요한 8,9).
자리를 떠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한 말씀에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사실 자기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을 알게 된 사람들은 결코 돌을 집어 들 수 없습니다.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죄인을 만나게 됩니다. 잘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고발하고 단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몸을 굽히시어 죄인의 처지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즉각 판단을 내리지 않으시고 여유를 주셔서 자신의 속을 보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자신의 속을 보고도 돌을 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남의 허물에는 엄격하면서도 자신의 허물에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더 큰 자비가 필요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렸다’(로마5,20)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허물이 많은 우리에게 주님의 충만한 은총이 주어지길 빕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어라고 쓰셨을까요? ‘너 자신을 알라! 아니면,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죄목들’을 나열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7,3) 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되길 기도합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마태5,45) 아버지 하느님, 당신이 보내주신 아드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요한 8,11).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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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7. 사순 제5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제부터는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오늘 사순 5주 월요일의 주제는 죄인을 살리시는 주님입니다.
그리고 살리시는 주님은 죽이려는 우리 인간과 비교됩니다.
그러니 오늘 얘기는 같은 죄인인 우리는 죄인을 죽이려 하는 데 비해
죄 없으신 주님은 우리 죄인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제부터’라는 주제로 나누려고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주제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죄짓지 말라고 주님께서 하셨으니
이제부터 해야 할 것은 죄짓지 않는 것이 되겠지만
어떤 죄를 짓지 말아야 할지 생각해봄이 좋을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남을 단죄하지 말아야 하고 죽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자기를 반성하지 않는 죄인이 남을 단죄하기에
우리는 남을 단죄하지 않기 위해 먼저 자기반성을 하는 사람이 돼야겠습니다.
그리고 반성과 단죄는 서로 반대되는 것임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단죄하면 죽이게 되는데
반성하면 회개하게 되고 같이 살게 한다는 점도 알아야겠습니다.
둘째로 이제부터는 자기 죄를 감추거나 합리화하려고
남의 죄를 들추고 키우는 비열한 자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람들이 죽이려고 한 것에 비해
주님께서 살리려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죄 있는 사람이 오히려 죽이려고 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게 바로 자기 죄를 감추거나 합리화하기 위함이지요.
나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쟤도 있다고 하는 것이요,
내 죄보다 쟤 죄가 더 크다고 하는 것이요,
내 죄가 아니라 쟤 죄로 시선과 화살을 돌리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죄짓지 않는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내가 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아무리 죄짓지 않으려고 해도 죄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우리 인간이고,
죄짓지 않을 수 있더라도 고작 죄짓지 않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요.
죄짓지 않는 것으로는 사랑을 이룰 수 없고,
죄짓지 않는 것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고,
사랑으로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사랑합시다.
그리고 이제부터 행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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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7.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11,7)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고발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11,7)
혹시 가슴에 돌덩이 한 두 개 정도 품고 살아가지는 않나요?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돌덩이 말입니다. ‘화’라는 돌덩이, 상처와 미움의 돌덩이, 원망과 심판의 돌덩이 말입니다. 사실, 그것은 스스로 들게 된 돌덩이든, 타인들이 들려주어서 들게 된 돌덩이든, 사실 그 돌덩이는 타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짓누르고 있고 자신을 무겁게 할 뿐입니다.
그런데 고발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이 많은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 돌을 손에 든 채로 갔는지, 땅에 내려놓고 갔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차마 지금은 던지지 못하고 나중에 적절한 시기에 더 큰 돌로 더 세게 내리치려고 그냥 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여인을 구실로 삼아, 이미 예수님에게도 여인에게도 ‘돌’을 던진 이들입니다. 단지 더 이상 돌을 던지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피하였을 뿐입니다. 죄송하다고 말하지도 않고, 용서해달라고 말하지도 않고, 단지 떠나갔을 뿐입니다. 아마 그들을 또 다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는 예수님이 말씀에 그들은 ‘나이 많은 이’부터 돌아갔지만, 진정으로 회개한 이들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는 단지 심판하지 않고 돌을 던지지 않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돌 맞은 이의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고, 쓰러진 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신의 죄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용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를 위하여 그에게 선을 베푸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지은 여인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돌 맞은 그의 상처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며, 또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의 표시입니다. 곧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도와주고 기도해주고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우리 주님께서는 죄인은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새롭게 살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주십니다. 도와주시고 이끌어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주님!
제 가슴에 돌덩이를 품고 살아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돌덩이로 오히려 저 자신이 짓눌려 있지 않게 하소서.
돌덩이를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고 만지작거리게 하소서.
위하는 마음을 품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위로하고 축복하고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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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7.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우리는 ‘수산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산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음욕에 가득한 원로 둘이 수산나를 욕보이려고 했지만 수산나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원로 둘은 수산나를 법정에 세웠습니다. 사람들은 원로들의 권위와 원로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수산나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습니다. 수산나는 하느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고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젊은 다니엘의 영을 깨워서 수산나가 무죄임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교활하고, 음욕에 가득한 원로 둘은 하느님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더 이상 억울한 사람의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권력에 취해서 약한 이를 괴롭히는 이들이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로움입니다. 성서는 솔로몬을 통해서도 억울한 어머니의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거짓 어머니는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아이를 둘로 나누자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생모는 가질 수 없을지라도 아이를 살리려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아이의 생모에게 아이를 찾아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역사에는 ‘기시감(旣視感)’이 있습니다. 탁치니까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하면서 대학생의 죽음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생은 공안들의 물고문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렇게 사건은 종결되는 것 같았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지 않는 사회에서 경제의 성장은 부익부와 빈익빈을 더욱 키우기 마련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지 않는 사회에서 경제의 성장은 절대 부패를 가져오기 마련입니다. 부정과 부패는 국민을 더 깊은 가난의 수렁으로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명동 성당에서 학생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시국미사가 있었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긴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억울한 학생의 죽음은 거세게 타오르는 빛이 되었습니다. 권력에 취한 자들이 진실을 가리려고 하였지만 권력에 맞선 이들에 의해서 거짓은 밝혀졌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대통령을 우리의 손으로 뽑는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진실을 왜곡했던 세력들이, 총과 칼로 권력을 잡았던 이들이 진실의 법정에 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역사에는 기시감이 있습니다. 일본은 ‘위안부와 강제징용’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식민지배에 대해서 ‘대동아 공영’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과거는 더 이상 묻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인도, 태평양 전략을 이야기하면서 자위대의 해외 파견을 기정사실로 만들고 있습니다. 평화헌법을 개정하여서 군사력을 더욱 키우려고 합니다. 과거 자신들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또 다시 군사력으로 아시아의 패권 국가가 되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실효적으로 우리의 땅인 ‘독도’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수산나를 욕보이려고 했던 욕망의 원로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권력에 취해서 무죄한 이들을 고문하고 죽였던 세력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독일은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자신들의 잘못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사자와 역사 앞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도 지난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할 때 비로소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위에 하느님의 정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는 잘못한 이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잘못한 이가 ‘나는 용서 당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돌아온 아들처럼 회개가 있을 때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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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7.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저는 머리가 좋지 않습니다. 학창 시절, 머리 나쁜 저 자신을 탓하곤 했는지 모릅니다. 육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부모님의 좋은 유전자를 받지 못한 것 같았고, 대신 그 좋은 유전자는 모두 제 위의 형과 누나들에게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머리 나쁜 제가 과연 신부로 살 수 있을지를 걱정하고 의심했었습니다.
지금도 당연히 머리는 좋지 않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이름 역시 잘 외우지 못합니다. 약속도 자주 잊어버려서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한 적도 많습니다. 하지만 신부로 사는 제게 사람들은 저의 머리가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강론할 때 원고를 외워서 하고 있고 긴 시간의 강의 때도 거의 원고 없이 한다면서, 머리가 나쁜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십니다.
이 부분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강론이나 강의 원고를 외우고 기억할 수 있는 머리를 하느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잘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았습니다. 강론이나 강의를 통해 집중해서 신부로 기쁘게 살 수 있고, 부족한 몸으로도 하느님의 영광을 조금이나마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저를 그래도 쓸모 있게 만들어 주셨으니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감사한 일투성입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못한 이유를 찾는데 더 힘을 기울이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감사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자기 삶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감사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도 주님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습니다. 율법을 따라 돌을 던져 죽여야 할지, 아니면 용서해야 하냐는 것이었지요. 용서해야 한다고 하면 율법을 어긴다면서 고소할 것이고, 죽이라고 하면 이제까지 강조했던 사랑은 어디 있냐고 따질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십니다. 누군가를 심판하는 권한은 죄 없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떠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큰 용서를 받은 이 여인은 어떠했을까요? 큰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면서 자신이 할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감사할 일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우리의 많은 죄에도 계속 용서해주시면서 기회를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당연히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감사함을 통해 자신 역시 성장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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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는 것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만 못하다(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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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7.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지혜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새벽에 읽은 카톡 메시지가 “말의 지혜”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 나눕니다.
-첫째, 사람이 자신을 좋게 고치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한다. 타인은 궁극적으로 내가 고칠 수 없다.
둘째, 말을 했는데, 듣는 상대방이 자각하지 않거나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함구해야 한다.
셋째, 말할 때를 따지지 않고, 그리고 말을 하면서 더 할지 멈출 지를 판단하지 않고 계속 말하는 자는 문제를 가지게 된다.-
참으로 말 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혜인지 깨닫습니다. 또 하나 “건강의 지혜”에 대해 소개힙니다. “건강의 기초 뒷짐 산책 요법”이란 내용입니다.
-“과거 조선시대 선비들은 하루종일 방안에서 정좌하며 글 읽고 쓰기를 반복하면서도 하루 일과중 꼭 한가지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하루 세 번을 어김없이 밖으로 나와 뒷짐을 지고 고개를 들고 먼 산천을 향해 깊은 호흡을 하면서 마을을 천천히 걷는 것입니다.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뒷짐을 지고 걸었습니다.
이는 땅의 기운을 받고 하늘의 기운을 받아 오장육부의 활동을 자유롭게 하고 소화를 촉진시키는 뒷짐 산책 요법입니다. 왜 이 좋은 건강법이 전수되어 내려오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랬다면 한국은 선비의 나라요, 세계 장수국에다 더 날씬하고 아름다운 민족이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공감이가는 건강의 지혜라 나눴습니다. 그러니 얼마전 나눈 “만세 부르기”와 더불어 “뒷짐지기” 건강요법 수행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새삼 지혜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를 생각합니다. 지혜 역시 훈련입니다. 지혜의 훈련, 얼마나 멋집니까! 오늘은 사랑의 지혜에 대한 묵상입니다.
이에 앞서 간음이, 색욕의 결과가 얼마나 무섭고 사람을 내외적을 파괴하는지 주의를 환기하고 싶습니다. 예전 “남녀칠세 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란 말을 한 때는 고리타분하게 생각했는데 새삼 깊은 지혜의 소산임을 깨닫습니다. 무수히 벌어지는 근친상간의 범죄가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 친히 산상설교 6개의 대당명제중 두 번째 항목의 엄중한 가르침입니다.
“‘간음해서는 안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간음한 것이다.”
십계명도 2개 항목이 이와 관계됩니다. “7.간음하지 마라, 9.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그 유명한 성군聖君이라 칭하는 다윗도 이 죄의 유혹에 빠져 보속하노라 산전수전 위험을 겪었고 오늘 제1독서에서 두 원로도 수산나를 간음하려다 참 수치스럽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예전 조선시대 위대한 성리학자 화담 서경덕 선비의 말도 생각납니다. “세상에 영재들이 많으나 나이가 들고 힘이 강해지면 머리를 숙이고 세속에 빠지는 자가 매우 많소. 학자들이 다른 것은 다 이겨 내고 있으나 여색(女色)만은 초탈하지 못하고 있소. 학문의 근본은 신독(愼獨; 혼자 있을 때 조심함)에 있는데 여색에 빠지는 것은 신독을 못하는 것이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 그리고 다니엘 예언서의 다니엘과 수산나가 경우가 아주 흡사합니다. 여기서도 약한 여자가 피해자가 됨을 봅니다. 왜 간음한 주범인 남자는 빠지고 불쌍하고 힘없는 여자만 혹독한 시련을 겪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꿰뚫어 통찰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지혜가 참으로 놀랍고 고맙습니다. 우리에게 큰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하느님 눈에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야말로 무자비한 죄인들이요, 이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온 백성들 역시 이면을 들여다 보면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를 모르는, 회개가 절실한 무지(無知)에 눈먼 자들입니다. 어찌보면 오늘 복음은 이들의 진정한 회개를, 독자들인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상황 처리에서 빛나는 사랑의 지혜입니다.
예수님 역시 적대자들의 진퇴양난의 덫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간음하다 잡힌 여자나 참 위태한 상황입니다. 율법의 잣대로 사형에 처하라면 무자비하다 비난을 받을 것이요, 풀어 주라 하면 율법을 어긴자라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침묵중에 땅에 무엇인가 쓰는 동안 군중은 잠시 멈추어 흥분을 진정시킨후 자신을 뒤돌아 보았을 것이며 주님은 사랑의 천상 지혜를 찾아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의 화신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사랑의 지혜가 진짜 “상생(win-win)”의 지혜임에 경탄하게 됩니다.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씀이 예수님도 살렸고, 모두를 회개에로 인도함으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살렸고, 그리고 여기에 있던 모든 군중들도 살렸고, 참으로 가련했던 여자도 살렸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에서 나온 천상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이 말씀에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가는 장면은 얼마나 통쾌하고도 아름다운지요. 그림처럼 펼쳐지는 회개의 장면입니다. 아무래도 나이 많은 자들이 죄도 많았을 것이니 스스로 알아 떠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예수님과 가련한 여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은 이 죄녀 한 사람이며,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미 철저한 회개가 이뤄졌을 것입니다. 마지막 주님의 말씀은 가련한 여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는 오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핵심단어가 “이제부터”입니다. 이미 회개한 이들의 과거는 묻지 않는, 불문에 붙이는 자비하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오늘 지금 여기서, 이제부터 잘 살면 됩니다. 주님도 단죄하지 않는데 누가 누굴 단죄합니까? 참으로 회개한 이들에게 언제나 앞길을 열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다니엘서의 수산나의 처지가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여기 주목할 것은 수산나의 평소 하느님 경외의 삶입니다. 수산나 하니 요즘 샛노랗게 한창 피어나는 파스카의 봄꽃 수선화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형제는 자기 외할아버지가 딸인 자기 어머니 수산나를 수선화라 불렀다는 재미난 일화도 문득 생각납니다. 저 역시 수산나 하면 수선화가 연상되어 그렇게 부르고 싶네요.
‘수산나는 매우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었다. 수산나의 부모는 의로운 이들로서 그 딸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교육시켰다.’
이런 수산나 였기에 죄의 함정에 빠지는 대신 죽음을 택했고 죽음의 상황에서 바치는 기도가 눈물겹습니다. 말그대로 두 사악한 원로의 완전승리요 완전범죄인 듯 악의 승리인 듯 여겨지는 상황입니다. 바로 여기서 진가를 발휘하는 수산나의 믿음이자 기도입니다.
‘수산나는 눈물이 가득한 채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마음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수산나의 감동적인 기도입니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감추어진 것을 아시고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 아십니다...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수산나가 기도하자 주님께서 수산나의 목소리를 듣고 다니엘 젊은이를 통해 신속히 개입하십니다. 다니엘에게 거룩한 영을 깨우시니 바야흐로 사랑의 지혜가 발휘되기 시작하는 통쾌한 순간입니다. 수산나의 믿음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하느님의 눈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살려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시편 화답송 후렴이 이를 요약합니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이어지는 하느님의 사람, 다니엘 젊은이의 사랑의 지혜가 정말 놀랍습니다. 수산나와 관계하는 자들을 어느 나무아래에서 목격했느냐는 질문에 두 원로의 즉흥적 두 다른 대답으로 완전히 거짓임이 탄로됩니다. 한 원로는 “유향나무 아래요.” 대답했고 다른 한 원로는 “떡갈나무 아래요.”대답함으로 수산나의 무죄가 입증됩니다.
마침내 이를 목격한 온 회중은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였고, 사악한 두 원로는 이웃을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그 방식대로 처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합니다. 사필귀정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살린 예수님의 사랑의 천상지혜처럼, 억울하게 죽게 될 무죄한 수산나를 살린 다니엘의 사랑의 천상 지혜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오늘의 말씀이요, 회개한 우리들의 순수한 마음에 사랑의 천상 지혜를 선물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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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7.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을 도구로 우리 주님을 시험합니다. 죽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잘못이 없으니 풀어주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분명 그녀에게는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 우리 주님은 바닥에 무언가를 쓰십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의 죄목을 쓰셨다 하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글을 쓰셨다고 합니다만 정확히 무엇을 쓰셨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잠시 후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한마디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을 혼란에 빠뜨리십니다. 또한 마음속 양심을 건드리십니다. 아마 사람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 여자는 참으로 큰 죄를 저질렀지. 그래서 우리가 저 여자의 죄를 심판해야 해. 그리고 나는 저 여자 같은 큰 죄를 저지를 적이 없으니 나는 심판할 자격이 있어. 저 여자보다 나는 깨끗하니까.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요. 우리가 모두 주님 앞에 죄인이거늘,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이 오만함을 일깨워주십니다. 그리고는 그 여자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나는 저 사람보다 깨끗하니까 단죄할 수 있고, 손가락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혹시 내가 단죄한 사람의 죄는 드러났고, 나의 죄는 드러나지 않았기에 쉽게 깨끗한 척하며 단죄의 칼을 빼 드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드러나지 않은 그 모든 것을 말입니다.
낙타의 보호막
낙타는 참으로 신비한 동물입니다.
걷는 것도 그렇고 등에 있는 혹도 그렇고….
그리고 낙타가 가진 또 다른 장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썹입니다.
낙타는 길고 두꺼운 두 겹의 눈썹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눈썹의 역할은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도
낙타가 묵묵히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세상이 허투루 생겨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낙타의 눈썹과 같은 사람이 있을까요?
모래바람 속에서
세상 회색 바람 속에서
시베리아 칼바람 속에서
우리를 걷게 해주는 그런 전재 말입니다.
어쩌면 그런 존재가 지금 우리를, 오늘 하루를 살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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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7.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밤과 낮>
- 밤이 지나고 낮이 시작되는 이른 아침에
성전에서 만난
예수님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묵상하며 -
밤이
모두에게
어둠만은 아닙니다
낮 동안 이룰 살림을
정성껏 준비하는 이에게
밤은 찬란한 빛이기 때문입니다
낮이
모두에게
빛만은 아닙니다
밤새 도모한 죽임을
기어이 이루려는 이에게
낮은 참혹한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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