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의 복음화, 좁아 보이는 문
에페 6,1-9; 루카 13,22-30 /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2024.10.30.
우리가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는 구원의 객관적 목표는 세상이 하느님 나라에로 변화될 수 있도록 고통받는 이들을 도움으로써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것이지만, 그 주관적 목표는 이러한 이웃 사랑을 통해 부활한 삶을 살게 됨으로써 우리 자신이 최고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객관적 목표와 주관적 목표가 일치할 때 명실상부한 인생이 될 수 있고 형식적 위선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신 바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노력이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처럼 키우는 동안에, 그분으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는 군중 안에서 믿음이 누룩처럼 자라났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서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처럼 자라날 것이고, 그러는 동안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부활의 은총도 온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처럼 부풀어 올라 우리의 삶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일은 고통을 수반하고 희생을 치루는 일이기에 십자가로 다가옵니다. 이 십자가가 없이는 사랑이 불가능하고, 하느님 나라가 불가능하며, 부활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손쉽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이 십자가를 피하려고 넓어 보이는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비록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바람에 좁아 보이기는 하지만 십자가를 통한 길로 구원의 문에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아 보이지만 좁은 문은 아닙니다. 하느님깨서 구원에 이르는 문을 구태여 좁게 만드셨을 리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멸망에 이르라고 그 문을 심술궂게 넓게 만드셨을 리도 만무합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지어내신 모든 사람들이 멸망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라고 질서정연한 우주와 그 안에서 유일하게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지구 별을 아름답게 조성하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당신의 뜻을 빛처럼 비추라고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서 예언자들을 시켜 계시하신 성경 역사도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던 이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죄에 물들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주셨고, 십자가로 부활하는 길을 몸소 보여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러한 강생 구속과 부활의 신비야말로 인류에 대한 하느님 자비의 극치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보증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부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뒤를 따라 가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부활을 보증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을 만큼 사랑에 투철하다면 그 삶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처럼 커 가는 것이고, 부활의 은총도 누룩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의 영광으로 새로이 창조된 교회는 새 인류로서, 옛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을 반면교사로 삼아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치와 섭리가 바로 부활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반으로 하는 우리의 부활은 죽은 다음에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기 시작한 때부터 함께 시작됩니다. 믿음이 약하고 어릴 때는 마치 겨자씨처럼 보잘것없이 부활의 은총도 작을 수 밖에 없지만, 믿음이 자라남에 따라 그 행함도 십자가의 사랑을 본받게 되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수 있게 되고 더불어 부활의 은총도 누룩처럼 우리네 온 삶을 부풀어 오르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나 이를 통해 덤으로 얻어지는 부활의 은총이 눈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 당시에 그분이 행하시는 각종 기적들이 그분이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징표였던 것처럼,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부활의 은총을 살아간 앞선 이들이 성인 성녀로 드높여지는 것으로 말미암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을 먼저 살아간 성인 성녀들의 행적 외에도, 우리 마음에 느껴지는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 환희와 분노 등 감정의 신호들을 통해서도 하느님 나라와 부활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네 영성생활은 이 흐름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이에 맞추어 기도하고 생활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부모와 자녀 간에서나,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나 주님을 섬기듯이 서로 섬기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는 사실상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우리의 부활을 증거하라는 뜻입니다. 인간관계를 복음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선교의 기본입니다. 하지만 무리할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둘이나 세 사람이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마음을 모아 기도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고 보증하셨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복음화시키는 열쇠는 정성어린 헌신과 일관성 있는 처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수의 사람들과의 인연 안에서 이 헌신과 처신을 증거하면, 이러한 노력이 이미 선교의 겨자씨와 누룩으로 작동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교우 여러분!
시월 한 달 동안, 우리는 '로사리오'(rosario), 즉 장미의 꽃다발이라 불리는 묵주알을 굴리며 성모 마리아와 함께 기도를 바치면서 선교라는 주제의 방대한 곁가지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이래로 선교에 있어서 이토록 좋은 기회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와 그 신자들을 둘러싼 안팎의 환경이 선교를 위해서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한 상황입니다. 순교로 신앙을 증거한 선조들이 우리의 선교를 재촉하는 듯 합니다. 우리가 피를 흘렸으니 여러분은 땀이라도 흘리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피어린 박해의 엄혹한 시절에도 용감하게 신앙을 지켰으니 다가오는 호시절에 더욱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여 꽃 피우고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 진리를 위해 귀한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이 역시 신앙 진리를 위해 일생을 바치라고 호소하는 듯 합니다. 우리의 부활은 우리가 행하는 선교적인 노력으로 더욱 생생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