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출판계 전설 여든에 처음으로 책 쓰다
박맹호
"책 만들며 흘러온 50년, 책으로 기록하고 싶었다"
허윤희 기자 /조선일보 : 2012.12.12.
첫 책 '요가' 대박, 두 번짼 쪽박… 아내가 빚 갚다 쓰러지기도… 민음사가 펴낸 책 5000종 넘어… 시집판형 개발·가로쓰기 도입 "출판 상황 어렵지만 쇠퇴 안해"
1966년 여름, 혈기방장한 청년이 서울 청진동 옥탑방에 출판사를 열었다. 첫 책 '요가'는 대박. 1만5000권이나 팔렸다. 하지만 두 번째 책은 대실패. 순식간에 3000만원 빚더미에 오른다. 약사 아내가 새벽까지 10원짜리 활명수를 팔다 쓰러졌다. 사업가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찼다. "그까짓 책들 휴지로 갖다 팔면 몇 푼이나 나오겠냐! 고향 내려와서 정미소 일이나 도와라."
박맹호(79) 민음사 회장이 팔순을 맞아 생애 첫 책을 펴냈다. 자서전으로, 제목은 '책'. 옥탑방 한 칸서 시작해 반세기 만에 국내 대표적 단행본 출판사를 키운 '출판 장인' 땀방울의 기록이다.
"그동안 여러 신문에서 과거를 회고하는 에세이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지만 모두 고사했습니다. 하지만 출판 위기론이 확산되는 지금, 팔십 먹은 내가 세상에 보태주고 갈 게 있지 않을까 해서 출간을 결심했습니다. 책이나 만들면서 흘러온 인생, 책으로 기록해두자는 뜻도 있고요."
▲ 한때 소설가를 꿈꿨다는 박맹호 회장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작품을 읽으며 절망한 나머지 소설가의 꿈을 접었고, 차라리 다른 천재를 발굴하고 싶어서 출판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민음사 제공
11일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출판을 시작한 초반에 고생했던 게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첫 책이 성공해 출판업을 쉽게 생각했지요. 다음 책은 쉽게 만들었다가 대번에 박살이 났어요(웃음). 충격을 받고 인생을 돌아보게 됐지요."
그가 출판업을 결심한 것은 서울대 문리대 재학 시절. "문학청년이었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죄와 벌' 등을 읽으며 '소설은 천재가 쓰는 거지, 나 같은 둔재가 쓸 게 아니구나' 하고 절망했습니다. 차라리 다른 천재를 발굴해야겠다 싶어 출판에 뛰어들었죠. 소설가의 꿈을 포기한 것이 살면서 가장 잘한 일 같습니다." 전쟁 후 일서(日書) 일색이던 시절, '읽을만한 우리 책을 만들자'는 생각도 있었다고 했다.
반세기 동안 5000종 넘는 책을 펴낸 그의 출판 전략은 "반 발짝만 앞서가자". 1974년 '오늘의 시인 총서'를 낼 땐 '국판 30절' 판형을 개발했다. 전지 한 장을 30등분 했을 때 나오는 크기다. 종이가 잘려서 못 쓰는 부분이 전혀 없어 '원가절감'에 큰 도움이 됐다. 이후 창비와 문학과지성사에서도 다른 시집보다 20%쯤 작은 이 판형으로 시집을 발간하면서, 우리나라 '시집 크기'로 굳어졌다. 모두 세로쓰기를 고집하던 시절에 가로쓰기를 본격 도입한 것도 그였다.
그가 만난 사람, 그가 함께 일한 사람은 그대로 한국 출판 역사의 한 페이지다. '서론 없는 본론'처럼 만나 '혈연관계'처럼 통했던 동갑 시인 고은, 민음사에선 '공간의 기호학' 딱 한 권만 냈지만 평생 지기로 지내온 이어령, 관철동 시절 남재희 전 장관과 의기투합해 '미스 리'에게 건물 1층에 문화인들의 사랑방격인 술집 '사슴'을 열도록 도와준 일화 등이 풍성하다.
박 회장은 2005년 대한출판문화협회장으로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를 준비하던 중 간이식 수술 때문에 정작 자신은 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암)수술 후에 내가 좀 더 유연해진 것 같다고 한다. 사람들 대하는 태도는 유연해졌을지 모르나 삶에 임하는 자세는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트위터를 배우고 아이폰으로 모바일에 재미를 붙이는 중이다. 이 나이에는 스스로 포기해 버리면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70에 죽으나 90에 죽으나 죽을 때까지는 의식이 또렷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242쪽)
민음사는 현재 비룡소, 황금가지, 사이언스북스 등 자회사를 두고 문학과 인문을 넘어 아동, 과학을 아우르는 출판그룹으로 성장했다. 최전선에선 물러났지만 박 회장은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내게 고문"이라 했다. '영원한 현역'으로 남겠다는 것.
"출판은 늘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쇠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1960년대엔 2만부만 나가면 베스트셀러였지만, 1970년대에 30만부, 1980년대부터 밀리언셀러가 등장했거든요. 지금도 해마다 수많은 책이 쏟아져서 출판의 주류를 이루고 있어요." 박 회장은 또 이렇게 말했다. "책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우리 인간의 DNA입니다. 인간은 책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