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이 1921년 연재를 시작해 1922년 끝낸 중편소설 <아Q정전>을 이해하려면 중국의 시대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한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는 거듭된 실패에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과거 영웅주의에 빠져 있었다. 국민들 역시 민족적 위기를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신해혁명이 일어나지만 공화정을 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중국 현대 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루쉰은 1881년 1만 여 평의 논을 소유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과거 합격을 위해 부정을 저지르다 수감되고, 연이어 아버지가 병사하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루쉰은 고향에서 냉대를 받으며 사회 비판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02년 일본으로 유학, 고분학원을 거쳐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의학교에 다닐 때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서 멍한 눈빛을 짓고 있는 중국인들의 영상을 본 루쉰은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한다. 이후 몸을 고치는 것보다 정신을 고치는 게 시급하다는 생각에서 ‘국민정신의 개조를 위한 문예 활동’에 전념한다.
당시 루쉰의 눈에 비친 무기력한 중국인은 비겁하고 노예근성에 젖어있으면서 소영웅주의에 빠져있었다. 그러한 현실을 형상화하여 아Q라는 인물에 대입한 것이 <아Q정전>이다.
‘아Q’라는 이름부터가 궁금하다. 아(阿)는 중국인들이 성이나 이름 앞에 붙여 친근감을 나타내는 글자에 불과하다. Q는 앞머리와 옆머리를 깎아 내고 남은 머리를 뒤로 땋아 늘인 변발을 암시한다. 루쉰이 성도 제대로 붙여주지 않은 아Q는 집도 없이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인물이다. 일이 없을 때는 노름판과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차림새도 보잘 것 없다. 그럼에도 자존심만큼은 무척 강해서 “나도 옛날에는 너보다 훨씬 잘 나갔어. 네가 뭐 대단하다구!”라며 웬만한 사람은 다 무시한다.
다만 변발한 머리에 또렷하게 박힌 나두창 자국을 부끄러워해 조금만 놀려도 노발대발한다. 그래봐야 두들겨 맞기 일쑤지만. 수모를 당해도 아Q는 “자식에게 맞은 셈 치자. 요즘 세상은 정말 개판이야”라며 오히려 의기양양하다. 아Q는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정신적 승리법’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자신을 위로하며 하루하루 의미없이 산다.
노예근성과 영웅주의
어느 날 짜오 영감댁의 하녀를 건드리려다 마을에서 쫓겨난 아Q는 성내로 들어갔다가 몇 달 뒤 번듯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을 사람들은 괜찮은 물건을 판매하는 아Q에게 호감을 갖지만 곧 도둑패거리의 심부름꾼이라는 게 드러나자 다시 무시한다.
혁명이 일어나자 아Q는 혁명 당원이 되어 웨이주앙 마을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벌벌 떨게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늦잠을 자고 일어난 다음날 혁명은 짜오 영감의 아들을 비롯해 구지배 계층의 자제들이 이미 주도해버렸다. 그러다 짜오 씨 집에 도둑이 들자 아Q는 통쾌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을 느낀다. 나흘 뒤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된 아Q는 제대로 된 항변 한 번 못하고 본보기로 총살당한다.
루쉰이 당시 중국인의 성향과 중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버무려 넣은 ‘아Q’라는 인물은 노예근성에 젖은 무기력함 자체였다. 또한 매사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영웅주의에 빠져 있었다.
루쉰은 1936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소설과 산문을 통해 중국사회에 드리워진 암흑의 근원을 파헤치는 데 혼신을 바쳤다.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마오쩌둥은 루쉰을 개혁과 혁명적 변화의 선동가로 추앙하며 자신의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아Q를 거울로 삼으라
<아Q정전>은 근대중국문학 초기걸작으로서 수많은 언어로 외국에 소개되어 극찬을 받은 루쉰의 대표작이다. 프랑스 작가 로맹롤랭은 “이 풍자적이고 사실적인 작품은 세계 어디서나 통한다. 프랑스대혁명 때도 아Q는 있었다. 나는 고뇌에 찬 아Q의 얼굴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루쉰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나라 원망을 입에 달고 살면서 “나도 왕년에 한가락 했는데…”라고 말하는 이들과 ‘흙수저와 헬조선’에 미리 기가 질려있는 젊은이들에게서 “아Q가 보인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루쉰의 작품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활용한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아Q의 부족함과 잘못'이라는 거울에 스스로를 비춰보면서 깨달음을 얻는 데 쓰면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