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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제1차 세계 대전을 치른 시기의 대통령으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19세기 엽관제를 비판하며 나온 현대 미국 행정학의 창시자로도 평가받는다.
후술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19세기에서 20세기로 들어서며
성향이 보수에서 진보로 변해가던 시기,
보수적인 면모와 진보적인 모습이 공존하던 민주당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2. 약력
버지니아주 스탠튼에서 스코틀랜드계 아버지 조지프 윌슨과
아일랜드계 어머니 자넷 우드로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버지니아 스탠튼에서 목사로 일하다가
우드로 윌슨이 2살이 되기 전에 조지아주 오거스타로 이주했고,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북장로회에서 독립하여 남장로회를 창설하였다.
1870년부터 1874년까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에서 가족들이 살았을 때
컬럼비아 신학교 교수를 맡기도 했다.
아버지는 윌슨이 자신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기를 바랐으나
윌슨은 19세기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에게서 정치를 배운 뒤
정치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데이비슨 칼리지에 입학했다가 1년 후 프린스턴 대학교로 반수해서 1879년 졸업했다.
이후 버지니아 대학으로 가서 1년간 법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886년에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정치학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 명예 박사학위가 아닌
본인의 학문적 성취로 박사 학위를 딴 사람은 윌슨이 유일하다고 한다.
사실 이 시기 윌슨은 앤드루 잭슨 이후 19세기 말까지
미국 정치와 관료 사회를 좌지우지하던 엽관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행정을 정치 권력적 현상이 아닌 경영,
관리 기술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정치행정이원론을 주장했다.
그는 1887년 《행정의 연구(The Study of Administration)》라는 저서를 통해 이러한 이론을 발표했는데, 이는 미국 내에서 행정학을 정치학으로부터 독립된 개념의 학문으로 본 사실상 최초의 이론이었기 때문에 우드로 윌슨은 지금도 행정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이후 정치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여러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02년 46세의 나이로 모교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910년부터 1911년까지 미국 정치학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정치학자로서 정치 현안에 자주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윌슨을 미국 민주당이 영입해 1910년 뉴저지주 주지사로 지명받아 주지사로 재직했다.
윌슨의 정치적 입장은 대체로 좌파 자유주의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민주당은 윌슨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고 마셜을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그런데 민주당을 상대해야 할 공화당은 윌리엄 태프트와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립하는 바람에 적전 분열이 일어났고,
윌슨은 공화당의 분열을 틈타 득표율 41.8%, 선거인단 435표를 득표해
대통령에 당선된다.
참고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유타 주와 버몬트주에서만 이겨서 8표라는 결과를 얻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88표를 득표했다.
3.2. 대통령으로서
대통령 취임 후, 윌슨은 국내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했다.
1기 임기 동안 그는 끊임없이 하원의원을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자신의 정책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런 노력이 효과를 봐서 네 개의 주요한 법안이 통과했다.
첫 번째는 "언더우드 관세법안 Underwood Tariff"으로, 보호무역 정책으로 높았던 미국의 관세를 낮추고 대신 수정 헌법 16조에 근거하여 연방소득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두 번째 법안은 1913년 12월 23일에 서명된 "연방준비법 Federal Reserve Act"으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Federal Reserve Board)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1914년에는 연방무역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가 창설되었다.
이 세 법은 모두 연방정부의 힘을 강화하는 바탕이 되었다.
또한 1914년에는 "클레이턴 독점금지법"이 통과되어 파업과 보이콧 행위를 합법화하고, 노사분규 시 정부가 강제금지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다만 복구불능의 파괴행위가 예견될 때는 금지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이전 공화당 정부의 패권주의적 정책을 대체로 답습해 중남미 국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이들 지역의 반발을 불렀다.
특히 윌슨은 중남미를 통제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자 멕시코를 침공하여 베라크루스를 무력 점령,
당시 멕시코의 우에르타 정권을 몰락시켜버렸고,히스파니올라 섬의 두 나라도 보호국화했다.
3.2.2. 2기
1916년에는 재선을 위해서 다시 한번 선거에 출마했다.
상대 후보인 찰스 에반스 휴스는 연방대법관을 재임하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임하고 나온 후보였다.
이 선거에선 1:1 구도다 보니 49.2% : 46.1%로 제법 아슬아슬하게 이겼는데, 선거인단은 277:254였다. 이때 윌슨은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 생각하고,
행정에 공백을 만드는 것을 피해야 한단 자신의 신념에 따라 정식 취임일 이전에
미리 편법적으로 휴스에게 대통령 직을 승계시키려는 계획을 짜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먼로 독트린의 전통에 입각해 될 수 있으면
유럽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의 무차별 상선 공격으로 루시타니아 호 침몰 사건이 발생해
미국 내에 반독감정이 격화된 상태에서 결정타로 독일 제국이 멕시코에게 미국과의 전쟁을 일으킬 것을 제안한 치머만 전보가 폭로되자, 결국 윌슨은 1917년 4월 6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1916년 재선을 위한 유세에서는 전쟁불참을 내세워서 당선됐는데,
취임 한 달 만에 모든 게 뒤집힌 것이다.
다만 윌슨은 전쟁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다하긴 했다.
그는 연합국과 독일을 중재하려 노력하며 평화협상을 여러번 제안했다.
그는 1917년 1월, 그 유명한 '승리없는 평화'를 연설하며 모든 인류가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이미 전쟁 중인 유럽은 눈깔 뒤집힌 지 오래였고,
멕시코에 대한 독일의 개입이 여러 번 드러나면서 참전 여론이 강해지는 와중에도
윌슨은 카이저의 황화론 개드립까지 꺼내가며(...) 참전에 반대했다.
그러나 치머만 전보가 공개되자 그런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갔고
미국도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전시 와중엔, 진보적 성향의 윌슨이었지만 국가가 일치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확신으로, 광신적 애국주의자들이 모인 극우 단체들을 이용해 반전운동가나 노동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어두운 면을 보이기도 했다.
3.2.2.2. 전후 처리
1918년 1차 세계 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
그리고 윌슨은 독일에 대해 관대한 처벌을 주장했는데,
이유로 '독일의 경제 악화로 인한 사회 혼란, 이로 인한 전쟁 재발 우려'를 들었다.
그는 경제적인 압박이 사회 혼란과 전쟁 재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정확히 예견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우드로 윌슨의 견해가 정치학자들에게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당대에는 착한 척하는 몽상가 취급을 받으며 씹혔다.
이제껏 겪어본 적이 없는 엄청난 피를 흘려 분노한 영국과 프랑스에겐 뒤늦게 참전한 주제에 관대한 처분을 주장하는 미국이 아니꼬왔다.
다만 아무리 주변의 상황이 안좋았다지만 독일의 처벌을 줄이는 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고 결국 사태를 초래했다는 점에선 오십보백보란 의견도 있긴 하다.
우드로 월슨의 소극적인 태도하에서,
1차 대전의 주축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독일에 청구된 어마무시한 배상금은
결국 2차 대전의 빌미를 제공했다.
사실 영프 입장에선 전쟁 손실이 얼만데 뜯어먹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이는 당시 윌슨이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기도 해서 외교적 입지가 탄탄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실제로 당시 우드로 윌슨은 자신의 바램이 담긴 베르사유 조약 중 국제연맹 창설 딱 하나만 살릴 수 있었다.
한편,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카톨릭 독재'라 혐오하는 등 개인적인 반 카톨릭, 반 오스트리아 감정 때문에 동맹국들과의 협상 조건으로 황제의 퇴위와 민주 정부 수립을 내걸었고,
결국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군주정은 붕괴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이는 장기적으론 필요했을지 몰라도 단기적으론 혼란을 초래했고
그 결과가 발칸반도의 피바다와 나치의 집권이었던 것을 보면,
사회혼란과 전쟁 재발 방지를 근거로 관대한 처벌을 주장했던 그였기에 묘하긴 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전후 처리를 위해 모인
1919년 6월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윌슨은 소위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한다.
그중 "민족 자결의 원칙(혹은 민족자결주의)"은
당시 전 세계 식민지 민중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처럼 들리기도 했다.
허나 그것은 패전한 동맹국 측 식민지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였고,
승전국인 연합국의 식민지들은
자신들의 알짜배기 식민지를 내놓을 리가 없었으므로
그 주인의 지배에서 대부분은 벗어나지 못했다.
연합군 측 식민지의 독립운동가들은 윌슨에게 거하게 낚인 셈.(...)
그리고 국제연합기구를 만들자는 주장에 의해 국제연맹이 창설되었지만,
정작 미국은 당시 고립주의를 고수한 야당 등 상당수 의원의 반대로 상원 2/3 찬성을 얻지 못해 국제연맹에 가입하지도 못하는 황당한 사태를 겪게 된다.
국제연맹 가입을 의회가 지지해주지 않자 윌슨은 여론의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8천 마일에 달하는 거리를 누비며 수십 회의 유세를 하는데,
충격적이게도 1919년 9월 25일 콜로라도 주 푸에블로에 방문하던 중 뇌졸중을 일으켜
10월 3일 반신불수가 돼버리고 만다.
멀쩡하게 연설하다가 갑자기 말하는 것이 멈췄다고 하는데,
사실상 대중들 앞에서 연설하다 뇌경색이 일어난 수준일 듯.
참고로 1919년 윌슨은 국제 연맹 창설과 유럽 평화에 기여한 공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3.3. 갑작스런 반신불수와 아내의 직무 대행
윌슨 대통령은 의사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세를 돌다
갑자기 반신불수가 되어 집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된다면 상식적으로 당시 부통령인 토머스 마셜이 대통령직을 정식 승계하거나,
최소한 직무대행을 하는 것이 맞는 처사였다. 그런데 이때 윌슨의 부인인 이디스 윌슨은 이를 숨기고 윌슨의 남은 임기 동안 국정을 자신이 처리하는 간 큰 행보를 보인다.
사족으로 이디스 윌슨은 우드로 윌슨의 2번째 부인으로,
1번째 부인이 사망한 이후 우드로 윌슨이 임기 도중 청혼해 결혼에 성공한 케이스다.
이디스 윌슨도 이미 한번 결혼했으나 과부가 된 케이스로,
윌슨 대통령은 이디스를 만난 지 채 두 달도 안 되어 청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윌슨의 청혼에 망설이던 이디스에게 윌슨은 각종 국정 사안들을 알려주며 정치에 관심없던 그녀를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로 만들려 했다는데,
결국 둘은 만난 지 9개월 만인 1915년 12월 18일 조용히 결혼식을 올린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평소에도 국정 사안을 논의하던 사이다 보니
윌슨이 반신불수가 된 이후에도 이디스 자신이 국정에 참여해도 되겠다는,
어찌보면 간 큰 계획을 실행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엔 당시 이디스와 백악관 보좌진들이 마셜 부통령과 심한 불화를 겪고 있었고, 마셜 본인도 관련 규정의 애매한 내용 등으로 인해 사태를 조기 수습하지 못한 것도 한몫했다.
실제 당시엔 부통령의 승계 원칙이 조금 모호했다.
당시 미국 헌법에서 대통령이 사망했을 경우 부통령이 승계한다는 원칙은 명문화했지만, 대통령이 생존해 있으나 직무 수행이 불가능할 경우 언제 어떤 근거로 부통령이 승계할지에 대해선 명문화하지 않았다.
마셜 부통령도 이 부분을 이유로 대통령직의 승계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참고로 이 부분은 1967년 수정 헌법 25조를 제정하면서 비로소 명문화한다.
윌슨의 행정부 2기 후반부, 윌슨의 소망은 반은 이루어지고 반은 이뤄지지 않았다.
1919년 금주법, 즉 '볼스테드 법(Volstead Act)'이 윌슨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다. 1920년 8월에는 수정헌법 19조 통과로 일부 주에서 시행하고 있던 여성의 투표권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물론 1965년 선거권법이 확립되기 전까지는 일부 주 선거에서 알게 모르게 현실적인 제약들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이디스는 여성 참정권을 반대했다고(...). 참고로 미국의 참정권은 백인 남성 한정으론 1828년 재산에 상관없이 모든 주에서 보통선거가 확립되었으며, 1870년에 수정헌법 15조를 통해 흑인 남성들에게도 보통선거가 확립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워런 하딩의 취임식을 앞두고 증상이 호전되어 참석했다.
윌슨은 반신불수가 되어서도 3년 넘게 살다가, 퇴임하고 머물던 워싱턴 D.C의 자택에서 1924년 2월 3일 수면 도중 뇌졸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디스의 국정 처리도 윌슨 사후에야 밝혀졌는데, 덕분에 그때까진 막연하게만 있던 대통령 유고 시 대통령직 승계 원칙에 대한 규정을 확실하게 한 미국 수정헌법 제25조가 이후 만들어지는 계기도 된다.
4. 선거이력
5. 평가
우드로 윌슨은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 미국을 관통하던 혁신주의와 제국주의라는 큰 흐름 속에서 그의 행적을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우선 그는 학자 시절 정치행정이원론을 주창하며 당시 횡행하던 엽관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행정에 실적주의를 도입하여 현대 미국 행정학의 시초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실제 행정학상 최초의 논문인 '행정의 연구(The Study of Administration, 1887)'를 발표하여 지금도 행정학 교과서 및 수험서에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또 진보적인 리버럴 성향을 띠고 있던 윌슨은 국내 정치에선 여러 진보적인 개혁들을 추진했고, 웬만하면 유럽에 직접 개입하지 않던 기존 미국의 입장을 선회해 1차 대전에 참전하여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한 것이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한편, 윌슨은 국제 외교에서 '힘의 균형' 원리에 대립되는 '도덕주의'와 '이상주의'를 내세웠으며, 이런 이념을 바탕으로 독일에 대해 연합국의 도덕적 명분과 이상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역시 제국주의라는 당대의 트렌드 앞에서 말로만 이상을 떠들었지 현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이전 공화당 정부처럼 군사력 중심의 패권주의로 일관한 위선자였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윌슨의 이런 이중적인 행보는 노동 문제에서도 나타났는데, 클레이턴 독점금지법을 통과시키며 파업과 보이콧 행위를 합법화해줬지만, 세계 대전 당시엔 또 노동운동을 탄압하기도 했다.
윌슨이 주장한 14개조 평화 원칙과 그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 역시
어디까지나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지배 아래에 놓인
폴란드, 알바니아, 세르비아 등 동유럽과 발칸반도에 있는 유럽 국가에 한해 적용되었지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식민지는 알 바 아니었다.
상기했듯 아이티와 도미니카를 보호국화하고
쿠바, 파나마, 러시아 등에 파병하며 자결주의와는 거리가 먼 내정 간섭을 이어가기도 했다. 다만 윌슨은 미국의 글래드스턴으로 불릴 정도로 전쟁에 꾸준히 반대해왔으며,
전후에도 자신의 입지와 무관하게 이상주의자란 욕을 먹으면서도 14개조 평화 원칙과 국제연맹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고 미국령 필리핀의 자치권을 확대시켜주는 등 마냥 제국주의자로만 몰기엔 다른 모습을 제법 보인 것도 사실이다.
여러모로 다양한 면모를 보인 인물. 특히 그가 주창한 공개조약, 자유무역, 민주주의,
반내셔널리즘 같은 것은 당시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기도 했다.
윌슨은 베르사유 조약 당시 회의장에서 패전국 관련해 가장 관대한 조건을 제시한 연합국 리더였다. 하지만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특히 '호랑이'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로 강경했던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가[18] 관대한 조치에 격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조약은 윌슨의 의향과는 달리 가혹하게 변모했다.
하지만 이런 전후 사정을 잘 몰랐는지, 당시 영국 재무부 대표로 협상에 참여했던 경제학자 케인스는 윌슨을 "세계 최고의 협잡꾼"이라고 까기도 했다.
케인스는 독일에게 부과된 가혹한 배상금과 징벌이 또다른 비극과 전쟁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조약의 위험성을 윌슨에게 경고했다.
물론 베르사유 조약을 강경하게 만든 건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이니 윌슨은 억울할 것이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에게도 그렇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한다.
기존의 유럽을 지배하던 세력균형이라는 국제질서를 무너뜨리고 국제연맹이란 집단안보체제를 만들었는데, 상당히 현실적인 제약점들이 있었다는 것.
게다가 자기가 제안해놓고 의회 비준을 못 받아서 정작 미국은 국제연맹에 가입도 못하는 코미디스런 일도 벌어진다.(...) 물론 윌슨도 의회 욕하면서 열심히 여론 조성하려 뛰어다니긴 했다만, 그 와중에 뇌경색이 와 리타이어하고 말았으니.. 하여튼 그 결과 독일의 폭주를 방치하게 되는 결말을 낳았다고 평가한다. 한마디로 1차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허술하게 짰다'는 것. 다만 그가 제시한 집단안보체제는 이후 FDR-트루먼 시대 들어 유엔 안보리와 유엔군으로 어느정도 실현되긴 했다. 여기도 집단안보체제의 취약성을 어느정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냉전 등 위기 속에서도 세계대전급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게 통제하고 있으니 분명 평가할 점은 있다.
일본 우익진영에서 일본이 인종차별철폐 제안을 내놓자 윌슨은 반대했으니 인종차별주의자다 라는 주장이 있는데, 일본의 제안은 일본 국익을 대변하려는 의도가 강했으므로 인종차별주의자란 주장의 적절한 논거가 될 수 있는 사례는 아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일본은 국제연맹 규악을 결정하는 회의에서 '국제연맹에 참가하는 나라는 각국 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삽입하고자 했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선 본토로의 동양인 이민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 중국인과 함께 일본인은 이미 이민 제한을 받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주 같은 경우는 아예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임차를 금지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일본 외무성은 노골적인 이민차별철폐 규정을 내세우는 대신 반대하기 어려워 보이는 인종차별철폐를 국제연맹 조약 규문에 넣으려 한 것이다. 물론 의도를 간파한 규약 작성 위원회 의장 우드로 윌슨은 안건의 중요성을 이유로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를 주장하였고, 그 결과 찬성 11, 반대 5로 이 제안은 부결되었다. 즉, 일본의 제안은 인종차별을 표면에 내세운 자국이익을 위한 주장이었으므로 이에 대한 반대 또한 윌슨이 인종차별주의자이기에 그런 것이라고 볼 순 없는 것이다.
오히려 미국 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인종차별주의자 우드로 윌슨 논쟁에 뛰어들어 인종차별에도 앞장선 '아름다운 일본'이란 이미지을 슬쩍 덧씌우려는 추악한 편승에 불과하다.
물론 이러니저러니 해도 윌슨 자체는 현대에도 중간 이상은 가는 대통령으로 평가받긴 한다.즉, 우드로 윌슨이 인종차별주의자를 등에 업은 혁신가였다는 견해다.
진보주의와 행정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평가 이면에는 Ku Klux Klan(KKK)단을 이용해
상하원에 정치적 세력을 불린 현실이 있었다.
이는 그의 배경을 살펴봐야 좀 더 이해가 되는데, 당시만 해도 민주당의 텃밭은 지금의 북부가 아닌 윌슨의 고향이기도 한 남부였다.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를 옹호한 주가 많던 그 남부 지역 말이다.
덕분에 19세기만 해도 민주당은 지금의 리버럴함과는 상당히 결이 다른 보수 성향의 정당이었으나[25], 윌리엄 J. 브라이언 이후 20세기 들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해 FDR 시절 뉴딜, 이후 민주당 정부의 흑인민권운동 지지, 이 틈새를 노린 공화당의 남부 전략 등이 겹쳐져 지금의 텃밭, 성향 체인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아직 이런 성향이 남아있던 민주당과 남부 시절을 겪은 윌슨이 짬뽕된 성향을 가지는 것도 어찌보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윌슨은 일생동안 백인 우월주의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히 인종적인 태도였다.
자신의 저서인 '미국인들의 역사'에서 노예제를 인도적인 제도로 옹호하고,
남북전쟁의 원인이 노예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재건시대는 "어리석은 흑인들의 표로 유지된 정부"가 백인들을 괴롭힌 걸로 규정하고, KKK단을 정의의 사도로 묘사했다. KKK단을 미화한 영화 <국가의 탄생>이 개봉했을 때는 백악관에서 보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윌슨 대통령은 자신의 대학 클래스메이트가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잘 만든 영화[27], 불행한 점은 이게 잔인하게도 사실이라는 거다(it is like writing history with lightning. And my only regret is that it is all so terribly true)."라는 말을 남겼다고 알려져있는데, 조사에 의하면 후대에 덧붙여진 말로 실제 윌슨은 영화를 보고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으며, 별다른 감상평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남북전쟁 후 최초의 남부 출신으로 대통령이 되자마자 재건시대 이후 몇안되는 결실들을 되돌리고자 노력했다. 20세기가 시작됬을 때 연방정부 공무원들의 10%는 흑인이었다. 윌슨 행정부는 우체국에서 내무부, 재무부, 해군, 인쇄소까지 광범위한 연방정부 기관에 남부식 짐 크로법을 적용시켜 사무실과 식당, 화장실을 인종별로 분리시키고, 흑인들을 승진에서 제외시켰다. 연방 공무원은 당시 흑인들이 가질 수 있던 몇 안되는 고소득 직장이었는데, 윌슨 탓에 워싱턴 DC의 흑인 주택 보유율이 떨어졌다. 흑인들이 예전처럼 연방정부에서 일하게 된건 수십년이 지나서였다.
이러한 태도를 분리주의(racial separatism)이라 부르는데 윌슨 당시에도 인종차별이냐,
아니냐로 사회적 이슈가 될만한 행동이었으며, 오늘날은 반박불가 수준의 인종차별 중 하나이다. 결국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윌슨의 인종차별적 면모가 부각되자,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교는 '우드로 윌슨 공공정책국제문제대학원'과 기숙사에서 기념되던 윌슨의 이름을 빼버렸다.
윌슨과 동시대를 산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공화당을 지지하다 1916년 재선거 무렵에는 윌슨을 지지했는데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한편, 윌슨은 스페인 독감을 세계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인물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많은 학자들은 스페인 독감의 기원으로 미국 캔자스 주를 지목하고 있는데,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선언하고 파병을 준비하던 시점에 이미 독감증세를 보이던 병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의사들은 독감증세를 보이거나 의심증세를 보이는 병사들은 파병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으나 윌슨은 이를 무시하고 모든 병사들의 파병을 강행했다고 한다. 결국 매주 수천명의 미군병사들이 대서양으로 파병되었고 열악한 전선의 사정과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엄청난 확산을 일으키고 말았다는 주장.
이러한 점들에서 윌슨은 역사학자들과 일부 일반인들 사이에서 평가가 제일 많이 차이가 나고 있다.
6. 여담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영향을 받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무단 통치에 반발한 3.1운동이 펼쳐지게 되고,
이 영향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제국은 1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긁어 부스럼 만들기도 뭐하고 해서 다른 식민제국인 열강들이 획득한 식민지들처럼 합당하다고 간주되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후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사실 한국에 영향을 미친 민족자결주의는 윌슨 뿐만 아니라 소련의 레닌이 주창한 것도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개념 자체가 "주의"와 같은 사상 체계는 아니기 때문에 레닌 역시 먼저 제창했다고 볼 순 없고, 이미 민족주의로서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윌슨의 시대 때 떠돌던 민족자결주의의 근원은 당시 국제 공산주의 연합이었고, 윌슨은 프로파간다를 교묘히 잘 이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당시 여기에 영감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은 호치민.
여러 기록을 가진 대통령이기도 한데 사상 최초로 유럽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자, 앞에서 봤듯이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대행한 것이 아닌 부인이 대통령직을 대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동시에 의회에 보내는 첫번째 메시지를 직접 의회에 나가 읽음으로써 제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 이래 사라졌던 관습을 다시 부활시킨 인물이기도 했다.
소위 '연두교서'라 일컬어지는 행위로 현대 미국 정치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훗날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에게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 학위를 준 사람
역시 윌슨이었다. 우드로 윌슨이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으로 있을 때에 그는 이승만의 은사로서 국제 질서에 관한 그의 신념과 관점은 이승만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둘의 관계는 사적으로도 상당히 각별했는데, 이승만은 총장인 그의 집에 빈번히 찾아가 그의 가족과도 자주 어울렸으며 그들은 이승만이 감옥에서 겪은 수난과 앞으로의 독립에 대한 계획과 포부에 대해 퍽 감동과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또 그는 가끔 교내에서 이승만을 방문객에게 소개하면서 "장래 한국 독립의 구원자"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곤 하였다. 윌슨은 그에게 여러곳에서 연설할 기회를 베풀기도 했는데 1908년 12월 15일, 윌슨은 이승만을 위해 써 준 추천서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1912년 6월 5일, 일제의 탄압으로 도미한 이승만은 윌슨의 둘째 딸인 제시 윌슨(Jessie Wilson Sayre)을 만나 라이트하우스(Lighthouse)에서 모임을 가졌고,
자신을 감리교 총회의 한국 대표자 자격으로서 부친을 만나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912년 6월 19일, 마침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논문이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앤드류 웨스트(Andrew F. West) 학장에게서 그것을 한 권 받아가지고 그 날 오후 4시 50분, 당시 뉴저지 주 주지사였던 우드로 윌슨이 기거하고 있는 주지사 여름 별장(cottage)이 위치한 시 거트(Sea Girt)로 향했다.
오후 6시 44분, 목적지에 도착하여 윌슨을 찾아가 자신의 논문 단행권을 선물로 드린 후, 찾아온 뜻을 말하니 그는 여간 반기지 않았다.
이승만은 그가 보고 온 한국의 참혹한 실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일본의 제국주의가 얼마나 동양의 평화를 해하고 있는지를 프린스턴 은사였던 그에게
강력히 피력하였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름 유명한 러시모어 산 네 명의 대통령 얼굴에 들어갈 뻔 하기도 했다.
이걸 만들 당시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은 쉽게 결정되었고 실제로 처음엔 저 세 명의 얼굴만 새기려고 했지만 빈 바위가 남아 있어서
그 바위에 새겨질 주인공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윌슨이 경합을 벌였던 것.
그러나 루스벨트가 20세기 초 본격적으로 미국을 세계무대에 등장시킨 대통령으로 당시엔 좀 더 평가되는 바람에 루스벨트에게 밀렸다.
그래도 이후 미국 최고 액수 지폐인 미국 10만 달러 지폐 초상화 모델로 선정되긴 했다.
지금은 10만 달러 자체가 통용되지 않는 게 함정이지만.
친구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부인에게 대통령직 대행을 맡긴 이유도 부인만큼 가까운 사람이 없어서였다고...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까지 지낸 엘리트 학자이고 외모로만 보면 상당히 냉철하고 쌀쌀맞은 인물로 보이지만 의외로 깨는 면이 많고 익살스러운 인물이었다. 가족들과 가장 즐겼던 놀이가 '셔레이드(Charade)'라고 해서 바디랭퀴즈 몸짓으로 단어를 알아맞추는 놀이였는데, 그는 가족들과 이 놀이를 할 때면 '도도한 귀족 미망인'이나 '외알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영국인'을 너무 리얼하게 흉내내서 가족들을 경악시켰다고 한다. 가장 잘 흉내냈던 것이 술 취한 사람의 휘청거리는 모습[38]의 흉내를 잘 내서 지인들을 많이 웃겼다고.
노래나 춤에 대한 개인적 취향도 우울하거나 엄숙한 노래보다는 매우 경쾌하고 통통 튀는 종류의 밝은 음악을 선호했다고 한다. 비사교적인 성격이었다고는 하지만 아예 위트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으로 사석에서 윌슨을 만나본 사람들은 생각보다 인간미가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치킨 샐러드를 좋아했으며 대식가였다.
윌슨이 죽었을 때 당시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떠돌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가 죽어서 천국에 갔을 때 모세를 만났다.
모세가 윌슨을 보고 "자네가 바로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인가? 안됐구만.
자네가 제안한 14개조 평화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들었네."라고 말했는데
윌슨은 "뭐 그렇죠.
하지만 모세께서 직접 지상에 강림하셔서
"인간들이 십계명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를 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라고 받아쳤다고. 이 이야기는 당연히 떠돌던 이야기지만 인간들이 십계명의 정신을 훼손한 것을 보면 자신의 평화원칙에 대한 폄훼는 견딜만 한 것으로 여긴 윌슨의 면모를 잘 나타내는 이야기다. 실제로 윌슨은 자신의 평화원칙을 십계명에 견주기도 했다.
땅콩농장을 소유하고 있어서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당시 조선에서 그의 땅콩을 수입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릴 적 조지아 주 오거스타에 살던 시절, 집 앞에서 노는데 지나가던 행인 한명이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곧 전쟁난다!"라는 말을 외치고 다녔다고 한다.
윌슨이 KKK단과 친분이 있던 것도 이러한 당시 남부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