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백발의 노인이었다. 유난히 맑은 눈을 제외하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통 흰 빛이었다. 노인의 글썽이는 눈빛을 대하자 나는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여긴 무서워서 어째왔누?" 그는 대사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었다.
좋은 스승은 말로 가르치지 않는다. 스스로 행동해서 제자들을 따르게 한다. 제자들 역시 마음이 동해야 스승을 따르게 된다. 예술가들이 살아가기 어려운 나라에 태어나, 그나마 발자취를 남긴 스승들을 그리워하고, 나 또한 그렇게 살기를 원하며 지금 한 스승님을 생각한다.
내가 처음 고암(顧菴) 이응로 선생님의 작품을 본 것은 1980년대 중반, 마로니에 잎들이 떨어지는 가을, 파리 ‘샹제리제 거리’에서 가까운 ‘그랑팔레라’는 전시장에서였다. 수많은 낮선 컬러들이 물결치는 작품들 속에서 까만 점들이 찍힌 거대한 수묵화를 발견하고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두껍게 배접되어진 한지에, 표구도 없이 그대로 걸려있는 그림 한 장이 주는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까만 점들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형상이었는데, 군중들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손에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며, 그 앞에 서있는 나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화제(畵題)도 없는 수묵화 아랫쪽에 얼핏 영어와 한문으로 된 사인이 있었는데 "이응로"라고 쓰여 있었다.
"음... 이 분이셨군!"
나는 한동안 그 그림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당시 이응로 화백은 대사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교민들의 접촉이 불허되고 있었다.
빠리 북쪽의 외곽도로(뻬릭뻬릭) 바로 안쪽에 위치한 작은 언덕, 그곳의 '프레 셍제르베'는 대낮에도 한가할 만큼 조용한 동네다. 지하철역에서 발걸음으로 5분 남짓한 고암 선생의 작업실은 차도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골목 안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마음먹고 찾는다면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큼 그 집은 특이한 집이었다.
쇠 난간들이 골목 중앙에 박혀있는 길의 이름이 '성뜨-데-꼬르네뜨'였는데(이름으로 보아 어느 성인의 이름을 빌린 듯), 그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다 보면 우측에 청죽(靑竹)이 빼곡히 심어져 있는 집이 나온다. 그 집의 담장은 온통 테라코타(흙을 낮은 온도로 구은 것)와 도자기 파편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나가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담 안쪽의 작은 공간에 심어진 청죽들은, 동양에서 온 대가가 이곳에 계심을 알리는 문패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온통 붉은 기왓장을 깨어 켜켜이 쌓아올린 집벽은, 미니멀화시킨 한 편의 잔잔한 시(詩)인 듯 섬세하면서도 정성스럽게 보였다.
초인종을 누르며 순간적으로 나와의 만남을 거절하시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두려웠다. 잠시 후, 하얀 백발의 노인이 나오셨다. 유난히 맑은 눈을 제외하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통 흰 빛이었다. 선생님의 글썽이는 눈빛을 대하자 나는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여긴 무서워서 어째왔누?"
흰 담요를 잘라 조끼를 만들어 입으신 모습은, 산사에서 객을 맞는 고승 같은 느낌이었다. 선생님 뒤켠에는 역시 하얀 백발의 박인경 여사가 소녀와 같은 수줍은 미소를 보내고 계셨다.
하늘이 보이는 천장을 통해 햇빛이 은은히 들어오는 실내로 들어서니 묵향이 코를 찔렀다. 집을 구경시켜 주시는데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토템기념비 같은 나무 조각들,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작업실 여기저기에는 그림들이 넘치고 있었다. 책장에 그려진 그림들, 식탁, 심지어는 화장실 벽에조차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작은 식기들에까지 선생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문간방은 판화와 목조각을 하는 목공실이었는데, 여러 가지 공구들과 나무 파편들이 가득했다(요즘 다시 목판화를 시작한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작업하시던 선생의 작품들을 떠올리며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고암 선생은 외국인 학생들을 가르치시고 계셨다. 이후로도 찾아 뵐 때마다 그 댁에는 항상 제자들이 있었다. 선생은 그들 모두를 각별히 대해주는 인자한 분이셨다.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실습하셨다. 행함으로써 깨우칠 수 있다… 몇 해전 전시회 때문에 파리에 갔을 때, 미망인 박인경 여사 집에 걸려있는 커다란 "佛"자를 보고 떠올린 생각이다. 선생님은 스스로 행하신 분이다.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으리라.
나는 선생님과 52년의 격차가 있는, 그야말로 손자뻘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우리들과 통했고, 선생님의 말씀은 늘 재기에 넘쳤고,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언젠가 해금의 무드를 타고 서울에서 기자들이 방문했을 때, 기념 휘호를 하시면서 그린 뱀의 모습이 하도 귀여워모두들 웃던 일이 생각난다. 즉석에서 둥근 벼루에 먹을 갈아 붓에 듬뿍 찍은 후, 메기며 수탁이며 나무며 생각나는대로 그리시던 모습은 정말 순수하고 멋진 모습이었다.
유명을 달리 하시던 날, 나는 연말 연휴로 친구들과 길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더 오래 계실 줄 알았는데... 이국 땅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는데... 며칠간의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은 그동안 선생을 외면했던 많은 한국인들도 조문을 했다. 대사관에서는 끝내 꽃 한 송이 보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선생님을 정성껏 보내드렸다.
수많은 외국 제자들과 화가들이 운집한 가운데, 선생님은 "뻬르라쉐즈(예술인들이 많이 묻혀있는 묘지, 에디뜨삐아쁘, 아폴리네르, 보나르 등...)"에 모셔졌다.
그림을 그리면서 작품들이 하나씩 생겨날 때마다, 나는 자주 선생님을 떠올린다. 고암 선생님은 내 그림에 뼈를 넣어주신 분이시다. 갈 곳 몰라 헤매고 있던 젊은 나에게 용기를 주셨고 방향을 주셨던 분이다. 또한 나는 고암 선생님을 통해 따뜻한 '인간상'을 보았다. 스스로 즐기면 다른 이들도 같이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걸 그분은 몸소 보여주셨다. 뿐만 아니라 예술과 조국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법을 실천으로 가르쳐주신 분이다.
나는 북한산 보현봉과 형제봉이 보이는 마을에 살고 있다. 그곳에
선생님의 미술관이 생겼다. 가신 지 오래지만 아직 내 곁에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