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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쉴 새 없이 울려대는 경쾌한 비트의 음악과 미친 듯이 쏟아지는 화려한 조명에 불나방처럼 모여든 젊은 남녀들은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술과 음악과 조명에 몸을 맡긴 채 자신들의 몸을 흔들며 서로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연의 거대함 속에 외롭게 떠있는 초라한 돛단배처럼 구석진 자리를 차지한 지훈이 딱 그 모습이었다. 그런 지훈과는 달리 벨은 신나서 어깨를 들썩이며 홀짝 홀짝 술을 마셨다. 처음에는 쓴 맛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잠시 후 취기가 올라오자 마시는 속도가 빨라졌다.
“무슨 천사가 그렇게 술을 좋아하냐? 너 그러다 하늘에서 벼락 내리는 거 아냐?”
“그래서 하늘에서 쫓겨났나 봐. 아저씨, 나 이런 분위기 넘 좋아. 아저씨도 이렇게 몸을 흔들어 봐. 마음이 붕 뜨고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아.”
지훈은 왠지 웃고 있는 벨의 얼굴에서 슬픔이 스민 것처럼 느껴졌다. 지훈은 오늘은 벨을 위해서 함께 술을 마시기로 했다. 지훈은 금방 훅 달아올라 얼굴이 빨개졌다.
“와~ 우리 지훈씨. 술 잘 마시네.”
“뭐? 지훈씨? 나 아직 안 취했거든.”
“내가 나이가 많다니까. 이제 아저씨라고 안 부를래. 지훈씨라고 부를래. 아님 지훈아.”
“너 내가 봐주니까.”
“웃기네. 내가 봐주고 있거든.
벨은 혀를 내밀어 메롱 하고 지훈의 팔을 붙잡고 스테이지로 올라가 다른 사람들과 섞여 춤을 추었다. 벨은 뇌쇄적이고 자극적인 몸짓으로 지훈을 유혹했다. 지훈은 얼굴에 불이 난 것처럼 뜨거워졌고 마른 침을 계속 삼켰다. 벨은 클럽안의 어떤 여자보다 더 아름답고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했다. 음악에 몸을 맡긴 벨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주위에 침을 흘리는 늑대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지훈이 엉거주춤하는 사이 응큼한 남자들이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며 벨을 조였다. 부비부비를 시도하는 남자들도 있었고 시선이 가슴과 엉덩이와 다리에 고정된 늑대들도 있었다. 특히 세련된 클럽댄스로 무장한 깍아 지른 외모의 한 간지남이 벨과 정면으로 마주 본 채 뜨거운 눈빛으로 벨을 유혹했다. 점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거의 입술이 맞닿을 지점에 와서 흔들어 댔고 한 손은 벨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지훈은 이미 튕겨져 먼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응큼하고 지저분한 미친 늑대에 둘러싸인 벨은 눈빛으로 지훈에게 구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훈은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폭력을 써서 어떻게 할 수 도 없고 ‘내 여자니까 건들지 마’라고 얘기하기도 어색했다. 지훈은 테이블로 가서 술을 벌컥 벌컥 들이키고는 다시 스테이지로 올라갔다. 몸이 뜨거웠는지 웃옷을 벗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동안 숨겨왔던 키 182의 다부진 몸에서 뿜어 나오는 매력에 더해 하우스 댄스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현란한 스텝과 리드미컬한 웨이브는 클럽마니아들도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벨도 지훈의 그런 모습에 한동안 넋을 잃었다. 지훈은 벨에게 붙어있는 간지남을 떨쳐 내고 커플로 춤을 췄다. 벨의 섹시한 댄스와 지훈의 리드미컬한 하우스 댄스는 클럽이 생긴 이후 최고의 날을 장식하기에 충분했다.
밤하늘의 별들은 오늘따라 유난히 밝았다. 약간 취한채로 지훈은 벨을 업고 길을 걷고 있었다. 벨은 꽤 많이 취한 채 지훈의 등에 업혀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벨. 왜 넌 항상 집에 갈 때면 나한테 업히니? 이제 다 컸잖아.”
“난 아저씨 등이 좋아. 따뜻한 온기가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거든.”
“넌 나 보다 더 따뜻하잖아. 너무 뜨거워서 탈이지.”
“아저씨. 우리 멀리 도망갈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갑작스런 벨의 말에 지훈은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그냥. 아저씨 잃어버리기 싫어서.”
“날?”
“아저씨. 약속해줘. 반드시 약속해야 돼.”
벨은 지훈이 등에서 내려와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 취한 눈동자에 힘을 주어 맑고 투명하게 만들었다.
“무슨 약속인데 그래? 너 많이 취했지.”
“아저씨. 절대 변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겠다고 약속해.”
“내가 변신 로봇이니? 변하게.”
“농담 아니야. 아저씨! 절대 변하면 안 돼.”
벨이 이렇게 진지하고 단호한 적이 없었다. 지훈은 어리둥절했지만 벨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벨이 변하지 말라면 변하지 말아야 지. 나 절대 변하지 않아.”
벨은 지훈에게 안기며 키스를 했다. 지훈은 순간 놀랐지만 헤어 나올 수 없는 기쁨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촬영은 도시 한 복판에서 이루어졌다. 거리 주변엔 바쁘게 움직이는 스텝과 구경나온 사람들로 혼잡했다. 스텝들은 어지럽게 이리 저리 돌아다녔지만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촬영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촬영장에 마련된 간이 분장실에서 지훈은 톱스타 오정혁으로 변신 중이었다. 덕분에 수줍은 성격에 가려져 미처 발견하지 못한 도시적인 세련미가 물씬 풍겨나왔다. 특히 차가우면서도 우수에 젖은 눈망울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훈은 분장한 자신의 모습이 어색한 지 거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자! 자! 시간이 없습니다. 십 분 뒤에 촬영 들어가니까 모두 준비를 끝내주세요.”
시간이 깊어지자 조감독은 스텝과 배우들을 재촉했다. 설화로 분장한 수아는 추운 겨울밤이지만 얇은 옷으로 볼륨있는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조명과 음향 설치가 모두 끝나자 배우들이 하나 둘 모였다. 매니저와 함께 등장한 수아는 수수한 모습의 설화로 분장해도 그 미모가 송곳처럼 뚫고 나와 감탄을 자아냈다. 특히 순수한 모습가운데 발산되는 뇌쇄적인 섹시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어제처럼 연기만 된다면야 은지보다 수아가 훨씬 낫지. 안그래 조감독?”
카메라로 비치는 수아의 모습에 주감독은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죠. 솔직히 은지야 자타가 공인하는 신들린 연기파지만 비쥬얼은 수아가 훨씬 낫죠.”
주하성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을 했다. 그때, 또 한명의 배우가 카메라 앵글에 들어왔다. 세련되면서도 우수에 젖은 눈을 가진 지훈이었다. 주감독은 갑자기 머리에 망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어지러웠다. 카메라 속의 두 배우가 아주 완벽한 조합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걸작인데요. 둘의 비율이 정말 딱 맞아 떨어집니다.”
카메라 감독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지훈의 눈을 봐봐. 부드럽지만 촉촉한 눈빛이 수아의 미칠 듯 한 섹시함을 받아주면서도 은근히 그 매력을 증폭시키잖아. 그래, 그랬어. 지훈이 저 녀석이 번개처럼 머리에 떠오른 이유가 있다니까. 잘하면 이 바닥에 새로운 조합이 뜨겠는 걸.”
혼자서 신이난 주감독은 횡설수설하며 박수를 쳤다.
촬영은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추위와 허기로 피로가 누적됐지만 주감독 특유의 카리스마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촬영으로 인해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 없었다. 하지만 날카롭게 찔러대는 겨울 바람에 얇은 옷을 입은 수아는 마음과는 달리 점점 힘이 빠졌다. 처음과는 달리 NG 횟수도 늘어나고 정신도 많이 흐트러졌다.
“컷! 수아씨, 조금만 쉬자.”
주감독도 금방 낌새를 채고 잠깐 휴식시간을 가졌다. 매니저가 주는 담요를 덮은 수아는 벌벌 떨며 밴으로 들어가 몸을 녹였다.
“무슨 날씨가 이렇게 추워. 정말 추워 죽는 줄 알았네.”
“수아 너 그러다 감기 걸리는 거 아냐. 대표님이 몸 관리 잘하라고 했는데, 저 주대가리가 널 함부로 대하고 지랄이야.”
“오빠! 주대가리가 뭐야. 주감독님한테. 그래도 내가 존경하는 분이니까 말 함부로 하지 않았음 좋겠어.”
평상시와는 달리 수아가 대뜸 주감독 편을 들자 매니저는 뜨끔했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
담요를 덮고 덜덜 떨고 있던 수아는 갑자기 한 곳에 시선이 멈췄다. 분장트럭에 기대 대본을 열심히 훑고 있는 지훈이었다. 한참 촬영 중일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두근거림이 지금에서야 수아의 심장에 울려댔다. 마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히사이시조의 더 레인은 수아의 감정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밴의 앞 유리는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지훈을 비추었고 그 모습이 수아의 눈에 클로즈업 되는 느낌이었다.
“오빠, 저 배우있지. 내 상대 배우.”
수아는 매니저가 앉아있는 앞좌석에 달라붙어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내 밴으로 불러줄래?”
“누구? 저기 키 큰 애? 책보고 있는 놈?”
수아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할려구?”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이번 영화에 대해서 서로 의견도 교환하고 호흡도 다시 맞춰보고 하려는 거지. 오빠 빨리 안 들어가고 싶어?”
“설마 호흡 맞춘다고 그 이상한········?”
“오빠! 이상한 상상 하지 마.”
“안 돼. 대표님이 너 잘 지키랬어. 조금이라도 흠이 나면 안 된다고.”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야. 그냥 일이라니까.”
수아는 이제 성질을 부리며 매니저를 다그쳤다. 한 번 수아가 토라지면 최소한 일주일은 머리가 지끈해진다는 걸 아는 매니저는 차에서 내려 수한에게 다가갔다. 매니저와 몇 마디 나눈 지훈은 밴으로 걸어왔다. 수아는 재빨리 거울을 보고 입에 립스틱을 살짝 바르고 머리카락과 옷을 정리했다. 밴이 열리고 수한은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제대로 못 나눴네요.
“아· 네. 안녕하세요. 많이 춥죠. 들어오세요.”
“아닙니다. 제가 그러면 미안하죠. 죄송해요. 이런 기회는 처음이라 촬영장 분위기가 익숙치 않네요. 수아씨에게 폐를 끼칠까봐 걱정입니다.”
“아니에요. 지훈씨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덕분에 많이 배워요. 제가 좀 부족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그때 손에 쥐고 있던 거울이 수아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수아가 거울을 집기 위해서 몸을 자연스럽게 숙이자 하얀 속살의 풍만한 가슴골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지훈의 시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훈은 민망해 하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좀 쉬세요. 많이 추울텐데. 저 때문에 쉬지 못하고 문을 열어 놓았네요.”
지훈은 인사를 꾸벅하며 돌아서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옆에 맨 가방에서 보온 물병을 꺼내 수아에게 건넸다.
“이건 제가 직접 탄 커피예요. 몸이 좀 따뜻해 질거예요.”
지훈은 뒤를 돌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수아는 순진한 지훈이 마음에 들었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수한이 건네준 커피를 컵에 따라 한 모금 마셨다. 지금까지 맛 보지 못한 부드럽고 은은한 향이 수아의 몸을 부드럽게 맛사지 해주었다.
‘지훈? 괜찮은데.’
지훈은 수아의 마음에 깊숙이 박혀버린 이름이 되었다.
첫댓글 지훈아.. 변치마라~~ ^^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