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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제 원문보기 글쓴이: 박미진
홍순칠
출생 1929년 1월 23일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울릉군
사망 1986년 2월 7일 (57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보훈병원
사인 지병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직업 군인
배우자 박영희
자녀 1남 3녀
홍순칠(1929년 1월 23일 ~ 1986년 2월 7일)은 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경력이 있는 군인으로 1953년 4월 20일 일본의 독도 침탈에 맞서기 위해 군인 출신의 주축으로 모집하여 자비로 결성된 민간부대인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여 독도를 수호하는데 활약했다.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
1.2 독도 의용수비대 활동
1.3 만년
1.4 사후
2 평가와 논란
3 상훈
4 주석
5 같이 보기
6 바깥 고리
생애
생애 초
1929년 1월 23일 경상북도 울릉군에서 태어났다. 해방직후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군인이 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이 함경북도 청진(淸津)까지 진격했으나 원산 근처에서 그는 부상을 입어 1952년 7월 특무상사로 전역하였다.
독도 의용수비대 활동
그는 조부인 홍재현으로부터 독도에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한다. 어느 날 경찰서 마당 한 쪽에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이라는 표목이 놓여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독도를 수호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1952년 가을부터 부산에서 무기 등에 장비를 구입한 뒤, 이듬해 2월 27일 미국이 독도를 포격 훈련지에서 제외한 직후인 같은 해 4월 20일 경기관총 2정, M2 3정, M1소총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0.5t 보트 1척 등의 장비와 15명으로 구성된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모두 45명으로 구성딘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였다. 3명을 제외한 대원들 모두 한국 전쟁에 참전 경력이 있는 군인들이었다.
부산에서 독도로 돌아온 독도의용수비대는 1953년 6월 독도로 접근하는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을 귀향 조치하는 한편 7월 23일 독도 해상에 나타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PS9함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총격전을 벌여 격퇴시켰다. 그 후 체계적인 독도 수호를 위해 박격포를 구입하는 등 장비를 보충하고, 같은 해 8월 5일에는 동도(東島) 바위 벽에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밝히는 '韓國領(한국령)' 석 자를 새겨 넣었다.
1954년 8월 23일 일본 순시선을 격퇴하고, 같은 해 11월 21일에는 1,000t급 일본 순시선 3척 및 항공기 1대와 총격전을 벌여 일본의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 뒤에도 마지막까지 남은 수비대원 32명과 함께 계속 독도를 수호하는 활동을 벌이다 1956년 12월 30일 무기와 임무를 국립 경찰에 인계하고 울릉도로 돌아갔다.
만년
1956년 "푸른국토가꾸기운동"을 벌이면서 독도에 나무를 옮겨 심었고 대형태극기를 설치하였다. 1966년 독도 수호에 공적을 인정받아 5등 근무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1966년 9월 서도(西島) 몰골에 급수장 시설을 설치하고 1986년 2월 사망까지 독도 지키기, 독도가꾸기 등에 활동을 벌였다. 1985년 폐암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이사한 뒤에도 잡지 "학부모"에 독도에 대한 연재를 해왔다. 하지만 1986년 2월 7일에 사망했다.[1] 저서로는 잡지에 연재한 1997년 수기 《이 땅이 뉘 땅인데》가 있다.
사후
1996년 보국훈장 삼일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 "자랑스러운 한국인상"에 수상되었다.[2]
평가와 논란
독도 수호에 대해서 높이 평가를 받고 있으나, 내용 면에서 논란이 있다. '전시라지만 민간인이 총기를 구입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당시 의용대가 갖고 있던 무기는 울릉도 경찰이 빌려준 것이다', 또 '일본 순시선을 격퇴한 것은 울릉경찰서 독도순라반이다'라는 등의 반론이다. 실제로 2007년 대한민국 감사원은 1950년대에 활동한 독도의용수비대 생존대원 11명의 증언을 종합해 본 결과, 실제 독도에 가서 활동한 대원은 33명 가운데 17명뿐이고 나머지 16명은 독도에 가지 않았던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여기에 울릉경찰서 소속 경찰이 독도를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홍순칠 대장의 수기를 사실로 인정해 민간인인 의용대가 독도를 지킨 것으로 인정되면, 한국전쟁 직후 정부가 독도를 실효적 지배를 하지 못했다는 논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3]
상훈
1966년 5등 근무공로훈장
1996년 보국훈장 삼일장
1996년 자랑스러운 한국상
주석
↑ 독도경비에 일생바친 홍순칠씨(59) 1986년 2월 8일 경향신문
↑ 독도수비대장 고 홍순칠씨「자랑스런 한국인상」수상 1996년 4월 2일 동아일보
↑ (취재파일) 독도에서 일본과 교전이 있었을까? SBS 뉴스 2012년 8월 18일
독도밀약이란 정일권-고노 이치로의 '미해결의 해결' 이라는 대원칙 아래 1965년 1월 11일 서울특별시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우노 소스케 자유민주당 의원이 한일정상회담 에서 한일기본조약 체결 과정 중 큰 문제였던 독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합의한 밀약이다.[1][2]독도밀약은 다음 날 박정희에게 재가를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김종필 전 총리의 친형 당시 한일은행 전무인 김종락인 것으로 알려졌다.[1] [3] 김종락은 월간중앙과 인터뷰에서 "대한민국과 일본이 독도 문제를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한다. 일단 해결로 간주한다는 아이디어는 내가 냈다"고 밝혔으며 박정희 군사정부는 독도밀약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인정과 함께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고 평가했다.[1] 김종필과 독도밀약을 폭로하다가 통역관의 실수로 실패했다고 밝혔다. [3] 고노 이치로 등 당시 독도밀약 과정에 참여한 일본 정치인들은 독도밀약을 맺었다고 증언하였으나 현재 일본 정부는 독도밀약을 부인하며 비밀리에 영유권 관련 밀약을 맺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가능 하다고 밝혔다.[4] [3] 민족문화연구소가 공개한 미 중앙정보국(CIA)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민주공화당 창당과정에서 북한 공산당의 비밀자금이 쓰였다고 폭로되었으며 [5]당시 박정희 정권은 군사쿠데타를 한 1961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밖에도 일본에 쌀을 수출하는 과정에서 김종필이 재일 한국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았다. [6][7]
독도의용수비대장 홍 순 칠
직업병이란 것이 있단다. 방송하는 사람은 몇 초간이라도 정적이 흐르면 자신도 모르게 진땀이 나서 그 침묵을 어떻게든 깨려하고 개그맨들은 그 순간 어떻게든 사람들을 웃게 하고 싶어진단다. 역사를 공부하는 나에게는 아마 ‘시대 순‘이란 병이 있나보다. “영토를 지켜낸 인물“은 왠지 우리의 역사가 쓰여진 처음부터 훑어 봐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한사군,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비문을 차례로 얘기하였다. 나의 답답한 걸음새에 문득 책 한 권을 보게 되었다. {이 땅이 뉘 땅인데!} (1997년 혜안 출판)라고 책제목으론 다소 선언문 같은 거친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대장 의 수기였다.
홍순칠(洪淳七)대장은 1929년 생이다. 홍대장의 집안은 3대에 걸쳐 울릉도에서 살았다. 할아버지 홍재현(洪在現)이 울릉도에 자리잡은 것은 1883년 (음력) 4월8일로 강원도 강릉에서 한 10년쯤을 예정으로 낙향하였다가 대대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당시 울릉도 주민은 두 가구뿐이었다. 높은 산에 올랐다가 문득 또 하나의 섬을 발견하곤 1897년 6월에 울릉도에서 향나무 한 그루를 가져가서 독도에 심었다. 돌아올 때 바다사자를 잡아와서 이웃주민과 그간 부족했던 지방질을 공급받았다. 다음해에 다시 부족한 지방질을 위해 독도에 갔다가 일본인 무라카미(村上)를 만나 일본까지 동행하여 일본인의 독도 출입을 금지할 것을 당부한 무용담이 전한다.
바다사자는 우리나라에서 독도에서만 발견되는 세계적 희귀 동물이다. 인간이 독도를 발견하여 지금까지 그 영토권을 두고 싸움을 하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얼마나 먼 시기에 그곳에서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바다사자는 진정한 독도의 주인이다. 그런 까닭인지 바다사자는 독도수비대에게 여러 모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독도를 지키는 수비대가 첫발을 이 섬에 내디딜 때 200여 마리의 바다사자가 그들을 열병하여 큰 소리로 맞아주어 우리네 땅을 지키겠다는 의지 외에 너무나 열악하기만 했던 40여명의 수비대에게 깊은 인상과 용기를 주었다. 실질적으로는 무기를 구할 수 있게 한 군자금이었고 3년 간의 무인도 생활에 해산물과 함께 주요 식량이었다. 바다사자와 수비대의 이런 관계로 몇 년 전 자연보호 학자들의 국제회의에서 큰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일본측 대표가 희귀종인 바다사자를 한국 측 경비대원이 모조리 잡아 멸종 상태에 놓였다고 발표한 때문이었다. 이에 우리측 대표가 사실확인을 홍 대장에게 요청하였고, 불가피한 사정으로 3년 반 동안 20여 마리만을 잡았을 뿐임을 설명하였다. 오히려 일본 오키(중) 어장에서 바다사자를 대량 포획한 1955년의 증거를 입증하여 이를 국제회의 사무처에 보고하여 그 오명을 씻었다.
홍순칠대장은 1949년에 육군 독립기갑연대에 입대하였다가 6.25때 원산부근에서 심한 부상을 입어 오랜 병원 생활 후 4년 만에 울릉도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온 고향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였다. 경찰서 마당 한쪽에 있는 길이 6척이나 되는 일본영토 표목 이었다. 일본은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島根縣) 고시(告示) 제40호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 칭하며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2차 대전을 종결하는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의 지역적 범위는 1945년 11월 1일 일본 점령 및 관리를 위한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기본적 지시에 의해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의 4개섬 이외에 쓰시마섬을 포함한 약 1천 개의 인접제도‘라고 국한되어 독도는 일본으로부터 완전 분리되었다.
해방과 함께 되찾은 독도였지만 독도의 고통은 계속되었다. 미국 공군의 폭격연습기지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48년 6월 독도에 출어 중이던 어민 30명이 미군의 폭격연습에 희생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우리정부의 항의에 따라 1953년 2월27일자로 독도를 미공군 연습기지로부터 제외시켰고 1951년 6월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가 세워졌다. 독도가 미공군 연습기지에서 제외되고, 한국이 6.25사변을 치르느라고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일본은 1953년 몇 차례씩 독도에 상륙하여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본영토표식을 하고 갔다. 일본측 표식은 독도에 출어한 울릉도 어민들에 의해 발견되어 경찰서장은 그 대응조치로서 ‘한국 울릉도 독도‘란 팻말을 꽂았는데 그 후로도 이와 같은 팻말 바꿔치기가 여러 번 있었다. 한편 독도에 미역을 따러 간 어민들이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PS함의 위협으로 작업을 중단하고 울릉도로 쫓겨 돌아오기도 하였다.
나라를 송두리째 잃었었고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치른 홍순칠 에게 할아버지 때부터 삶의 터전이었던 독도에 대한 일본의 침입은 이순신 장군이 물리쳤던 왜군과 같았고 나라를 다시 빼앗는 절대적 침입과 같았다.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좌우명처럼 듣고 자랐던 ‘멋스런 삶‘을 생각하였고 독도에서 그 멋이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6.25전에 군이 자원 입대하여 부상을 입고 귀향한 울릉도 출신 장병은 1952년 말경 40여명이나 되었다. 홍대장은 울릉도 출신 향군을 규합하여 ‘독도사수 특수의용대‘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경찰서장의 협조로 경찰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대여 받아 합숙훈련을 하였다. 경북 병사구 사령부에서 소총 몇 정과 권총, 경기관총 1정을 압수하고 부산 ‘양키‘시장에서 바다사자 1마리를 대가로 권총과 소총을 얻을 수 있었다.
독도수비대의 편성은 전투대,예비대,보급대 등이었다. 전투대는 현지에 주둔하였는데 2조로 나뉘었고 각 조의 인원은 15명씩이었다. 또한 울릉도 보급 연락소의 3명과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총 45명이었다. 이중 보급선의 선원과 연락소의 3명만이 군 출신이 아니고 그 외는 모두 6.25 때 각 전선에서 용감히 싸운 전력이 있었다. 처음 독도에 진주할 때의 장비는 경기관총 2정, M2 3정, M1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현지에서 쓸 0.5톤 보트1척 등이 고작이었다. 수비대는 처음 구성에서 3년 후 국립경찰에 수비업무를 인계하기까지 전적으로 수비대내의 사비로 이루어졌고 활동하였다. 보수는 생각할 수 없었고 보급선의 경우도 겨우 기름 값을 어느 정도 지원하는 정도였으며 수비대에 지원되는 식량 등도 대부분 울릉도 민의 기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1953년 4월 20일 밤 12시에 언제 돌아올지 모를 장도에 올랐다. 수비대라는 군대와 같은 체계와 명칭을 띠었지만 그들이 가진 것은 오직 우리 땅을 일본군이 침입하도록 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만 이었다. 그들이 탄배는 10년이 훨씬 넘는 5톤 미만의 오징어잡이 배로 수비대의 전함이었고 유일한 보급선이었다. 당시 일본 경어정은 1천 톤이 넘었다.
수비대는 독도에 상륙한 후 바로 태극기를 게양하며 애국가를 우렁차게 합창하였다. 수비대의 하루 일과 중 몸을 햇볕에 쪼이고 물 속에 뛰어들어 짠물에 적신 후 다시 햇볕에 쪼이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는 모기보다 더 독한 ‘깔따귀‘란 벌레에 대비하여 피부를 가죽처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수비대원들은 주로 알몸으로 활동하였는데 부족한 의복이나 식수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그들의 최선의 방법이었고 오히려 그들을 단합시키는 동지애로 발전하였다.
1953년 7월 23일 새벽 5시에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PS 9함이 진격해 왔다. 잠시 당시 수비대의 마음이 되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느꼈을 공포와 그만큼의 용기를 느낄수 없기 때문이다. 좁은 섬에 40여명이 가 있고 일본 함정이 그것도 1천 톤이 넘는 큰 함정이 다가오는 것이다. 가진 것은 소총 몇 자루가 전부이다. 일본 경찰은 독도를 이미 자신의 땅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몇 번에 걸쳐 표식까지 세운 참이다. 그들이 수비대를 체포하여 험하게 다룬들 무엇이 주저될까. 이미 어부들의 어로 활동마저 막아오던 참인데 말이다. 그런데 수비대는 그들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 나라에서 시킨 것도 아니다. 나라는아직 독도를 지킬 어떤 경비대도 보내지 않았다. 모두 수비대원들의 온전한 자기 의지였고 영토사랑이었다. 수비대의 항쟁은 목숨을 모두 내건 싸움이었다.
수비대는 각자가 가진 소총과 보트에 설치된 경기관총으로 전함을 집중 공격하였으나 함정 철판이 너무 두꺼워서 구멍이 나지 않았다. 갑작스런 공격에 일본 함정은 멀리 동쪽으로 도망쳤다. 홍순칠대장은 이때 직사포의 필요를 느꼈다. 단지 도망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함을 침몰시키겠다는 다부진 의지로 경북 병사구 사령부에서 바다사자를 미끼로 M2정과 노획한 소련제 직사포 한 문, 그리고 조준대가 없는 박격포 한 문을 얻었다. 그러나 실탄은 없었다. 또한 당시는 미군정이 ‘무장단체 불허용‘의 내용 등을 담은 법령 28호를 발효한 때라 필요한 무기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군자금으로 현금 200만 환과 바다사자 수놈 생식기 1개를 가지고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무기를 수집하였다.
홍순칠대장은 중화기를 보완하자 수비대가 있던 서도보다 동도 가 경비 상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동도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때 짐을 가득 실은 전마선 이 동도 와 서도 중간쯤에서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다. M1소총 10여 자루와 탄약들이 물에 빠졌는데 수심 15m나 되는 물 속에서 별다른 장비도 없이 모두 끌어 올렸다. 동도에 야영천막과 중화기의 진지구축을 마친 후 독도에서 영주할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 했다. 이는 울릉도 경찰서장과 군수의 도움으로 소나무 삼천 본의 벌채 허가와 장정 300명의 모집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장정을 모집함에 오징어잡이 배의 선장과 기관사는 제외하였는데 이는 그에 딸린 선원 20명과 가족 100여 명이 굶게 될 것을 걱정해서였다.
국회는 1953년 7월 울릉도 경찰서 소속 경찰관을 경비대로 독도에 파견하여 상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경비임무를 맡은 인원은 5명뿐이었고 상주를 위한 숙소는 독도수비대에 의존하였고 준비된 장비는 칼빈 소총 한자루와 약간의 식량, 간장, 된장 그리고 소주 몇 상자뿐이었다. 당장 비좁아진 잠자리며 부족하기 만한 보급품에 수비대내에서는 경찰관을 쫓아내자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명색이 정부에서 파견한 경찰관이라 귀신소동으로 귀여운 항변을 한 후 동도 에서 다시 서도로 장비 일체를 옮겼다. 서도로 옮긴 다음날 새벽, 일본 해상 보안청 소속 순시선 PS 11정이 동서 양도사이 300m 위치에 나타났으나 새롭게 정비된 중기와 경기로 물리쳤다.
1953년 8월 해병함정에 300명의 해병이 와서 등대를 세우는데 수비대도 함께 하였다. 함장이 내무반, 통신실, 대장실 등을 살피며 지침서가 붙어 있지 않은 것에 의아해 하였다. 단지 화장실 내에 ‘용변 볼 때 바람에 주의, 대장.‘이라는 주의사항과 절벽 몇 군데 바위에 ‘허가 없이 상륙하는 자는 총살‘이라는 흰 페인트 글씨가 전부였다. “우리의 독도에서 일본놈을 몰아내겠다“는 한 가지 외엔 기약도 없는 독도수비대의 생활이었다.
1954년 11월 21일 1천 톤급 일본함정 PS 9, 10, 16함이 비행기 1대와 함께 독도를 포위하듯이 접근하였다. 홍순칠은 접근하는 일본함정을 보며 임란 때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며 그때보다는 더 나은 전력임을 위로하였고, ‘독도를 그냥 버려 두면 일본놈이 표류목처럼 주워 가는가‘라고 힐난하던 힐책을 떠올리며 진정한 의미를 알리기 위해 승전을 다짐하였다. 박격포가 PS 9함에 명중되었고 PS 10함은 중기에 치명상을 입어 먹구름 같은 연기를 뿜어내며 도망갔다.
그러나 일본측은 정오뉴스에 한국 경비대의 발포로 일본 함정들이 피해를 입고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보도를 하였고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항의 각서를 제출하고 독도우표가 첨부된 우편물을 한국으로 반송시켰다. 본 해상 보안청의 함정은 정기적으로 20일에서 23,4일 사이 출현하였다. 이를 파악한 홍순칠은 앞으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우선 부족한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경상북도 지사로부터 도움을 받아 구호양곡에서 200표(俵)를 출고할 것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미군 고문관 소령은 한국과 일본이 서로 자국 영토임을 주장하는 독도분쟁에 미국의 식량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식량을 마련하지 못하고 무기도 구하기 어려워지자 가짜 대포를 생각 해냈다. 포구 직경이 20cm, 포신이 자유롭게 돌고 미제 에나멜로 단장된 신형대포로 독도의 ‘목대포‘로 불렸다. 목대포는 후에 일본에서 발간된 {킹}이란 월간지에 ‘독도에 거포 설치‘ 란 기사까지 나게 할 정도로 진짜 같았다. 목대포를 설치한 다음달인 1953년 8월 24일 일본측 함정이 나타났지만 그전처럼 근접하지는 않고 먼 곳에서 배회만 할 뿐이었다. 목대포는 수비대가 3년 후 정부에 독도 수비를 인계할 때까지 일본 함정과의 총포전을 막아준 큰 역할을 하였다.
무인도에서 겨울나기는 어느 곳보다 지루하고 길었다. 대원들은 바다사자를 잡아 기름은 자연굴에 보관하여 연료로 사용하였고 고기는 삶아 소금에 절여 부식으로 충당하였다. 대원들 대부분은 초등학교도 못 다닌 상태였는데 책을 읽어 무료함을 달래며 3번의 겨울을 지내는 동안 한문을 빼고는 글을 읽는데 어려움이 없게 되었고 초등학교를 나온 대원은 중학이상의 실력으로 향상되었다. 시간이 지나 수비대원들이 반백이 넘은 나이가 되어 오징어도 못 잡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을 때 쉬운 소설책 등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을 한치의 땅도 남에게 줄 수 없다는 우리의 땅을 지키겠다는 신념에 대한 훈장으로 생각한다는 회고가 정겹고 더없이 소박하다.
홍순칠은 독도수비를 정부에 인계한 후 독도에 물이 난다면 ‘생산하는 독도‘로 육성시킬 수 있겠다는 신념으로 10년 동안 탐수 작업을 벌여 결국 1966년 식수를 발견하여 수조탱크를 설치 근해에 출어하는 어민이 여기에서 급수하도록 하였다. 1983년 6월에 독도 정상에 대형 태극기를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1986년 2월 척추암으로 5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독도본부 소식지 탑골인 밝은이 2002年 4月(이선희, 한국사)
독도본부 www.dokdocenter.org
안용복, 홍순칠, 최종덕… 독도를 지킨 위인들
대한민국의 보물 독도는 그냥 지켜진 것이 아닙니다. 독도라는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조상들은 피와 땀을 흘리며 싸웠습니다. 역사적으로 독도를 지킨 위인은 안용복 장군과 홍순칠 대장입니다. 17세기에 부산에서 태어난 안용복 장군은 독도와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일본에 확인시킨 애국자입니다. 일본말에 능통한 안용복 장군은 대마도주를 만나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확인을 받아왔습니다.
오늘날 독도 분쟁에서 안용복 장군의 거룩한 희생이 없었다면 독도 영유권 주장이 그다지 힘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못한 일을 해낸 안용복 장군은 당시 조정에서 환영을 못 받고 오히려 울릉도에 들어가고 국경을 허락 없이 넘었다는 죄로 사형시켜야 한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어부로서 나라를 위해 누구도 못한 장한 일을 한 대가로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홍순칠 대장은 독도의용수비대를 구성해 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독도를 자국 영토로 완전히 복속시키려는 흉계를 정면으로 깬 애국자입니다. 그는 1953년 울릉도 출신 전역군인들을 이끌고 ‘마지막 의병’이 돼 일본과 무력으로 싸웠습니다. 일본은 한국전쟁 기간에 우리 행정력이 못미치는 점을 악용해 독도에 일본령이라는 한자 표지를 세웠습니다.
이에 홍순칠 대장은 박격포와 중기관총으로 무장한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해 독도에 주둔했습니다. 일본은 군함 세 척을 끌고 독도를 무력으로 침공했으나 독도의용수비대의 용감한 저항으로 격퇴됐습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6년까지 3년 동안 독도를 침략하려는 일본과 50차례나 전투를 치르며 독도를 지켰습니다. 만약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자신있게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말하기가 곤란했을 것입니다.
독도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최초 거주자인 최종덕 선생입니다. 최종덕 선생은 1980년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자 단 한 명이라도 독도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겠다며 1981년 10월 울릉읍 도동 산 67번지 서도 벼랑으로 주민등록을 옮겼습니다.
인간이 살지 않는 무인도를 유인도로 만들고 거주하는 동안 가혹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선착장·가옥 등을 만들었습니다. 최종덕 선생은 1987년 9월2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러한 조상들의 피나는 노력은 이제 우리 후손들이 이어받았습니다. 바로 사이버 외교사절단인 반크, 가수 김장훈, 서경덕 교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반크는 ‘독도를 가슴에 품고 세계인 가슴 속에 대한민국을 심는 일’을 하기 위해 사이버 독도 사관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수 김장훈은 독도 지킴이를 자처하며 독도에서 콘서트를 여는 등 독도가 대한민국 땅임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홍보전문가인 서경덕 교수는 “독도는 한국 영토로 동해에 있습니다.”라는 광고를 세계 주요 언론에 게재해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서 교수는 민간인이 광고를 내 해외 사람들한테 큰 반향을 일으키는 전략으로 독도를 알리고 지키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처럼 독도는 용감한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과 숨어 있는 애국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지킨 섬이랍니다.
[우리는 독도를 얼마나 알고 있나요?]
[하이브리드 시대… 최고의 무기는 상상력!]
[스마트폰은 최고의 하이브리드 생산품!]
[나무는 경제다! 나무를 심자!]
[탄소배출권은 21세기 최대의 경제과제입니다!]
< 조규민 기자 / info@ahaeconomy.com > 2011-04-17 00:39 >
박정희 정권은 왜 독도지킴이의 손을 부러뜨렸나
등록 : 2012.08.15 20:17 수정 : 2012.08.15 21:35
[곽병찬 칼럼] 독도 밀약, 이제는 말해야 한다
군사독재 정권이나 보수정권이 가장 거론을 기피했던 문제는 희한하게도 독도였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면 일쑤 들고나와, 반일감정을 자극해 국면을 전환시키곤 했지만, 이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무관심이었다. 이걸 모르고, 정치적 퍼포먼스에 말렸다가 선의의 피해를 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다.
역사적으로 독도를 지킨 건 국가가 아니라 민간인이었다. 조선조 울릉도와 독도에서 왜구를 내쫓은 건 민간인 안용복이었다. 해방 후 독도를 지킨 건 예비역 특무상사 홍순칠과 33인의 민간인이었다. 홍씨는 전쟁을 틈타 독도를 제집 드나들듯 하던 일본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정부 지원도 없어, 가산을 처분하고 의연금을 모아 기관총·박격포 등을 구입하고 의용대도 모집했다. 수비대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함정의 침범을 두 차례나 격퇴하고, 가짜 해안포를 설치해 일본 함정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기지도 발휘했다.
문제는 그 열정이었다. 수비대에서 물러난 뒤에도 1969년, 1972년 독도개발계획서를 경상남도에 제출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도록 재촉했다. 박정희 정권은 부담스러웠다. 홍 대장은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 동안 고문을 당했다. 중정의 요구는 더 이상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그의 오른손을 부러뜨리기도 했다고 부인 박영희씨는 전했다. 학교 조례 때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떠들도록 한 정권이 왜 그러는지 홍 대장은 알 수 없었다.
전두환의 신군부에서도 똑같았다. 신군부는 1980년대 초 그가 독도 지킴이로 북한 방송에 소개되자, 그를 즉각 체포해 극렬한 고문을 가하여 간첩 조작을 하려 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홍 대장은 1986년 숨졌다. 전두환 정권은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민간인 출입을 막았고, 심지어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독도
1965년 1월11일 서울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의 홈바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 우노 소스케 의원이 하나의 메모에 사인을 했다. ‘미해결의 해결’이란 원칙에 따라 성안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독도밀약이었다. 첫째,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반박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둘째,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 모두 독도를 기점으로 획정하되,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셋째,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증축은 하지 않는다.(노 다니엘 저 <독도밀약>) 결국 미해결 상태를 해결로 간주하고, 독도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주일 뒤 1년 넘게 교착됐던 정상회담 예비회담은 재가동됐고, 6월22일 한-일 협정이 체결됐다. 함께 발표된 한-일 어업협정은 독도 주변 해역을 공동규제수역으로 규정했다. 밀약 내용 그대로였다. 공동규제수역 혹은 중간수역 규정은 지금까지 지켜진다. 임기 말에 돌연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며 일전불사를 외쳤던 김영삼 정부도 독도 인근 해역을 잠정적 조치수역(중간수역)으로 수용했다.
밀약도 밀약이지만,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일본 정부와 민간에게서 막대한 정치성 자금을 받아 썼다. 박정희는 청구권 자금 이외에 1965년까지 5년 동안 6개 민간기업으로부터 6600만달러의 정치자금을 받았고, 전두환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일본 나카소네 정부로부터 40억달러의 차관을 받았다. 그러니 독도를 물고 늘어지는 홍 대장을 가만두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에 대한 공세를 높이고 있다. 일왕까지 거론했다. 물론 뒷감당도 못하면서 쏘아대는 말대포라는 시각이 많다. 실제 박종우 선수는 그 피해자였다. 그러니 진정성이 있다면 밝혀야 한다. 독도밀약의 진상과 파기 여부를 말이다. 그래야 ‘독도 쇼’니 정치 선동이니 하는 소모적 논란을 막고 홍순칠, 박종우 같은 어이없는 희생도 막는다.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이명박과 일본에게서 독도를 지켜내야 할 주인은 대한국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