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땝니다.
총각팀원이 있었는데 도대체 장가갈 생각을 안 하고 어영부영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게 안쓰럽게 보여, "니 장가가고 싶나?" 내가 참한색시 중매 함 해볼까 하니까 싫은 기색이 아니더러구요.
그때 좀 수다스러운 8촌 형수가 구포에 살았었는데 어쩌다 우리 집에 오면 자기 여동생 자랑을 시도 때도 없이 해대었습니다. 나보고 중매를 함 해보란 소리로 흘러 듣고 있던 찹니다.
총각이야 3년을 매일 붙어 다니며 함께 근무했으니 미주알고주알 알만큼 알지만 처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어요. 중매를 한번 해보기로 마음먹고 집사람더러 처녀신상을 자상하게 물어보라 했습니다.
8녀 1남의 여덟 번째 딸이니 미루어 짐작되는 것이 있지요? 벌써 집안이 보통은 아니다는 데 한 표를 찍고 넘어가야 합니다.
처녀 직장은 김해공항에서 탑승객 보안검색을 하는 공안원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그런 직종에 근무하려면 외모나 교양이 있어 보여야 했답니다.
우리 형수의 인물도 그만하면 중상은 되니까 일단 외관은 무리 없이 통과되었답니다.
총각은 어떠냐.
체격 좋고 인물 준수하고 매너 좋아 보이고 겉모양은 흠잡으려야 잡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아버지가 한 살 때 군에서 전사하시고 홀어머니를 모신다는 겁니다. 이쯤에서 이 총각이 설흔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간 이유가 서서히 나타나지요.
이 어머니는 청상과부가 되어서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친정집 동네인 명지에서 살았답니다.
명지는 낙동강 하구언 아래에 있는 모래벌 동네라 예부터 파농사를 주업으로 했어요.
친정아버지가 물러준 파밭과 품팔이하며 모은 파밭이 무려 3천 평인데, 그곳이 녹산공단옆이라 고급 주택지로 바뀌면서 파전벽해 되고 있었거든요
그 당시 시가로 30억은 족히 될 거라고 우리끼리 얘기했답니다.
온천장에 있는 동래관광호텔 커피숍 예비신랑 신부 첫인상을 탁 보니까 됐다 싶으데요.
총각어머님도 흡족해하고 8촌 형님, 형수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니깐요.
집에 들어가신 형님께서 고맙다고 인사전화까지 했으니 이제 일사천리로 결혼식 날짜만 잡으면 될 줄 알았어요.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오늘 이 글 제목을 "중매는 아무나 하나" 안 씁니다.
며칠 후 둘이서 데이트를 한번 했나 보더러구요. 여기서 사달이 났는 겁니다. 처녀가 보니까 남자가 너무 철이 없고 여자 다루는 것도 미숙하고 한마디로 눈에 차지 않았나 봅니다.
며칠 후 딸을 여덟이나 출산하여 일곱을 결혼시킨 예비장모님이 영덕에서 막내사위될 놈을 검증하려고 구포로 출두하시어 총각을 불렀답니다.
이 총각 그 과정에서 그만 낙제점을 받고 퇴짜를 맞은 겁니다. 사위를 일곱이나 보았으니 김서방, 이서방, 박서방, 무슨 서방이 다 있을 거 아니요. 먼저 본 사위들과 비교하니 너무 철딱서니가 없고 들은 거 본 것도 없다시피 한 시답잖은 총각이 영 마음에 안 찬 거지요. 총각을 보내 놓고 가족회의에서 이번 혼사는 없던 걸로 한다고 결정하고, 그 집 다섯째 사위인 박서방이 중매쟁이한테 통지하라고 했답니다. 박서방은 중매쟁이인 나의 8촌 형님입니다.
형님이 전화기에 대고 미안하게 됐다며,
"이 혼사는 장모님이 완강하게 반대해서 안 되겠다" 하는 거예요
"형님요 이유가 뭔데요"내가 물었어요
"총각이 너무 철이 안 들었다 안카나"형님이 난처하게 중얼거렸습니다.
"그 문제라 하면 내 책임집니다. 그거는 이유가 안됩니다"내가 언성을 높였습니다.
"내일 쉬는 날인데 구포로 넘어갈 거니까 장모님 잡아두고 계시소"하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옛말에 중매하다가 달면 지딸 준다는 말이 있어요. 당해봐야 이 말을 실감합니다.
다음날 아침 마누라를 동행하고 구포 형님집으로 쳐들어 갔습니다.
사장어른께 정중히 큰절 인사드리고 총각이 좀 철이 덜 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찍부터 편모슬하에서 성장하다 보니 그렇지 인간성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형님을 봐서라도 총각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제가 책임진다고 호언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혼사는 성사될 테니 그리 아시라고 큰소리치고 형님집 대문을 나셨습니다.
그 사건 후 총각의 눈치를 보니 철없이 덤벙대다가 뒷발길 차였다 싶은지 소금에 절인 배추 같더라고요. 처녀가 전화를 해도 안 받아주고 그러니 아예 맛이 갔더라고요.
니 장가가고 싶냐니까 평소 내색을 안 하던 녀석이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이더라고요.
그럼 됐다. 내 코치대로 하라고 정신무장을 시켰답니다.
그 처자가 퇴근할 시간에 맞춰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낚아채서 박력을 함 보여줘라 했지요.
용감한 자가 아니면 미인을 못 구한다는 서양격언도 그때 써먹었지 싶어요.
이 친구 비 오는 날 그 집 대문 앞에서 두 시간을 기다린 끝에 짠한 감동을 줬는지 고압전기가 통했는지 마음이 조금 돌아갔는가 봐요.
그리고 달포쯤 지나서 드디어 남북통일되었답니다. 양복 한 벌도 받았습니다. 중매 성공한 것 맞지요?
한번 하지 두 번 할 건 못 되는 게 중매더군요. 그런데 중매는 한번 하면 세 번은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어요.
달리 생각해 보면 중매만큼 좋은 일도 없을 것 같아요. 한 번에 여러 사람을 구제했잖아요.
결혼식장에서 다시 뵌 사장어른의 입은 함지박만 했답니다.
이 부부 결혼 하자마자 아들만 내리 셋을 낳고 큰 놈은 포항공대에 특별장학생이 되고, 명지파밭은 고층아파트단지가 되었는데 돈이 얼 만지는 안 물어봤고요.
첫댓글 중매 한다고 신경 쓰셨습니다
끝이 좋으네요
다행입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케이스가 많지않을,겁니다
@장고 중매 힘들어요
위의 글을 읽으니 나도 내 중매 보던 시절이 생각 납니다
나는 중매를 10 번 이상 보고 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중매로 만난 여인 중 맘에는 들었는데 거절한 여인이 두명 정도 됩니다
한분은 중매쟁이가 맘에 안 들어서
또 한분은 처녀의 오빠가 맘에 안 들어서 거절 했습니다
두 처녀 다 내가 맘에 들었다는데?
나만 오케이 하면 교제를 계속 하게 되고 결혼 하게 되는 케이스 였었는데?
과연 내가 거절 한게 잘 한거 였는지?
지금도 아리송 합니다
사실은 많이 아쉽습니다
그 분들 여기 5060을 통해서 라도 만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만나게 되면 내가 거절 한거를 사과 하고 싶습니다
!@#$%^&*()
남자 입장에서는 중매로의 만남도 자주 못 하겠습디다
부족한 용돈으로 중매 처녀와의 데이트비가 나가는거?
그거 무시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매로 내 마누라 만나서 아들 둘 낳구 44 년 11개월을 잘 먹구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아내들 이시여
남편에게 바가지 좀 긁지 마세용
충성 우하하하하하
긴댓글 잘 읽었습니다
글감이 많을듯 한데 중매소재로 글함써보시지요
저는 천생배필이 있다고 봅니다
하늘이 미리 정해준 짝을 말입니다
우리세대는 중매결혼이 대세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중매 어려운거지요.
내 눈에는 95점인 거 같지만,
본인의 눈에는 차지 않아요.
소위 젊은 이들은 필이 와야 된다고 합니다.
인생을 덜 살았기 땜에, 삶이 뭔지
배우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어설프기 때문이지요.
그나저나, 장고님의 글에 나오는 부산 지명이
차례로 들어 왔다 갑니다.
개발의 붐이 일고 명지 땅부자들 살판 나던 때 이지요.
그리고,
글 속에 부산 사나이의 기개가 조금씩 보이지요.
남의 일인데도...
어리숙하지만, 남자다운 면모와 의리 있는 그 총각을 위해
자신의 일인 양 나서서 성사 시키는 장고님에게
엄지 척 합니다. ^^
법륜스님 즉문즉설을 들어보면
결혼은 상대에게 덕보려는 것이 라는데,
별걸 다 따져야 하니 성사률이 떨어지겠지요
요새는 소개팅이 대세이지만 그때는 중매쟁이의 역할이 지대했어요
속이기도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속고 결혼했는데 잘사는 부부도 많아요
콩깍지 끼어 결혼한 사람보다도요
술술 꾸밈없이 글 재미있게 쓰십니다.
중매는 요즈음 세상에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교민이 적은 동네에서 살고있는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래 잠수했다가 돌아온지 얼마안되어 단풍님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단풍님 글이 너무 많아 조금씩 읽어보겠습니다
연배도 비슷하고 자주 뵙겠습니다
미국에서도 중매결혼이 있나 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