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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백팔고찰순례단 원문보기 글쓴이: 청원
우리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이 전국에서 천년 이상된 고찰만 108사찰을 선정하여 작년
5월 24일 선재동자가 불법을 깨우치려 53선지식을 찾아가는 마음가짐으로 108천년고찰순례를 시작하여, 제1차로 선암사, 송광사, 대원사를 순례하고, 송광사에서 송광사 교무스님의
집전으로 입재식이 있은지 1년이 다되어 이번에 제12차 고찰순례를 진행하였다.
매월 4째주 일요일에 3사를 순례하였고, 당초 계획된 사찰에서 1사찰의 순례를 시간
관계상 다음으로 미루고, 3사찰을 추가하여 이번 제12차 수덕사, 개심사, 부석사 순례로
1년간 38사찰을 순례하였다.
지금까지 불보살님의 가피와 가호로 고찰순례가 원만히 진행되었고, 남은 2년 엮시
불보살님의 가피와 가호가 함께하여 원만하고 여법하게 회향할 수 있기를 두손 모아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간 여러 고찰순례단원님들의 협조로 보다 여법한 순례가 되어가고 있음에
우리 고찰순례 단원들은 서로 서로에게 고마움과 감사를 표한다.
선(禪)의 중흥도량 수덕사 (修德寺)
수덕사(修德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서,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德崇山)에 자리한다.
운수납자(雲水衲子:구름과 물처럼 수행처를 돌아다니며 수행하는 스님) 들의 수행정진터,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5대총림(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의 한 곳이다.
일반적으로 수덕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절로 알려져 있다.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엽에 숭제(崇濟) 스님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 설을 뒷받침할
만한 또다른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 일설에는 599년 지명법사가 창건, 원효가 중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의견이 분분한 것이다. 다만, 《삼국유사》
<혜현구정(惠現求靜)> 조의 기록을 통해 수덕사가 백제시대에 이미 창건된 사찰임 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백제 말에 창건된 수덕사는 근·현대에 들어서서 경허 성우(鏡虛 惺牛) 스님을
비롯해 만공 월면(滿空 月面)· 수월· 금오 태전(金烏 太田) · 벽초 경선(碧超 鏡禪)· 대의(大義)·
청담 순호(靑潭 淳浩)· 묘리 법희(妙理 法喜)· 일엽 하엽(一葉 荷葉) 스님 등의 고승이 주석,
선(禪)의 중흥지로 뿌리내려져 있다.
1984년에 덕숭총림(德崇叢林)을 개설한 수덕사는 종합수도도량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혜암 현문(惠庵 玄門)스님이 초대 방장에 추대되었다. 수덕사의 산내암자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선원인 견성암을 비롯하여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선풍을 휘날리던
정혜사와 금선대 등이 있다.
벽초 경선(碧超 鏡禪)· 원담 진성(圓潭 眞性)스님 등이 방장으로 주석하면서 수선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이어오고 있다. 또한 1996년에는 승가대학을 개설하였다.
대웅전 / [국보 제 49호 ]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건축물로 고려 충렬왕
34년 (1308)에 건립되었다. 안동 봉정사 극락보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 나라에
존재하는 최고의 목조건물이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 4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의 중간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측면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가 만들어내는 구도는 수덕사 대웅전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수덕사 종무소 청정행 보살님의 협조로 육법공양물 운송을 위해 봉고버스를 주차장까지 보내
주어 나와 이교수님은 봉고버스에 탑승하여 대웅전 앞 까지 바로 오게 되었다.]
목조삼세불좌상 / 만공대선사가 전북 남원에 있는 만행산 ‘歸政寺’로부터 옮겨 온 불상이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약사불, 왼쪽에는 아미타불이 자리하고 있다.
약사불이 왼손을 위로 하고 오른손을 아래로 하여 중품하생인의 수인을 맺고 있으며 오른손
바닥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데 비해, 아미타불은 약사불과 손의 좌우가 바뀌고 약그릇이 보이지
않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전란이 남긴 상흔으로 인해 무병장수를 염원하는 조류를 반영하게 되면서
삼세불을 조성하는 예가 많아진다. 삼세불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의미를 융합시켜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이 공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공간적 개념으로서 삼세불은 사바세계의 석가모니불, 극락정토세계의 아미타불
유리광정토세계의 약사불을 나타내고, 시간적 개념으로서의 삼세불은 현세의 석가모니불,
과거불인 약사여래불을 미래불인 아미타불을 의미한다.
[우리가 대웅전에 도착했을때는 사시불공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사시불공이 끝난후
수덕사 총무국장이신 정암스님이 우리 고찰순례단을 위하여 '크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
'보시란 남는 것을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보시여야 한다'는 요지의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법문을 들은뒤 우리고찰순례단원들은 총무님의 죽비에 맞춰 108배를하고
공양간으로 향했습니다.]
대웅전 뒤 / 봄꽃과 새싹이 피어오른 뒷산에 700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목조 건물의 古色蒼然함이
어우러지니 극락정토가 여기인듯 하다.
수덕사에서의 점심공양은 각종 산나물 및 버섯무침으로 너무도 만족스런 웰빙식이었다.
우리 순례단원들은 만족하고 감사해하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오늘은 우리 단원들의 식복이
좋은 날인 것 같다. 저녁에는 옥천의 이름난 맛집인 '마당 넓은 집'에서 새싹비빔밥으로
고택에서 고풍스런 분위기속에 우아하게 저녁공양을 하였으니......
일주문 / 석재기둥을 사용해 지어졌으며 기둥의 형태는 안정감이 돋보이는 배흘림이다.
소전 손재형이 쓴 '德崇山修德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글씨는 1962년에 쓴것으로,
唐楷의 뼈대위에 전서의 劃法을 담은 素筌 특유의 圓潤한 행서이다.
금강문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 / 나라연과 같은 힘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입니다.
나라연은 천상의 역사로서 그 힘은 코끼리의 백만배나 된다고 합니다.
금강저(vajrapani, 벼락을 상징)를 들고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벌린 입은
산스크리트어 데바나가리 표기에서 첫 음소 “아(अ)”를 상징한다.
밀적금강(密蹟金剛) / 밀적금강은 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입니다.
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한사적을 모두 듣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웠으므로
'밀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
산스크리트어 데바나가리 표기의 마지막 음소(म) “흠”을 상징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다.
그리스 문자 알파와 오메가가 사물의 처음과 끝을 의미하듯이 “아”와 “훔”도 사물의 시작과
마지막을 의미한다. 둘을 합친 옴(ॐ)은 산스크리트에서 “절대성”을 상징한다.
금강역사를 쉽게 구분할려면
입을 '아' 하고 벌리고 서있는 역사가 나라연 금강
입을 '훔' 하고 다문 역사가 밀적 금강입니다.
천왕문에 들어서는 자 만사가 여의형통(如意亨通) 길상할 것이며,
참선지자(參禪之者)는 정각을 이루고
간경지자(看經之者) 혜안이 대진(大振)하며
염불지자(念佛之者)는 왕생극락이요,
기도지자(祈禱之者)는 대성(大成)할 것이라고 한다.
서방의 광목천왕(廣目天王) , 북방의 다문천왕(多聞天王;毘沙門天王)
서방의 광목(廣目) 천왕은 눈이 매우 큽니다. 그리고 여의주와 용을 쥐고 있습니다.
커다란 눈은 현재에 깨어있어 불선한 일은 하지 않고 선한일을 할 수 있는 안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한 중생에게는 용에게 여의주를 물리는 것처럼 상을 주고
불선한 일을 하는 중생에게는 그 큰 눈으로 바르게 알고 볼 것을 호령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북방의 다문 천왕은 보탑을 들고 계십니다.
보탑은 부처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모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많이 듣고 배운다는 뜻의 다문(多聞)천왕입니다.
동방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동방의 지국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습니다. 지국이란 나라를 유지한다는 뜻으로
백성들이 비파를 들고 항상 노래를 부른다면 백성들의 심신이 편안한 것입니다.
남방의 증장천왕은 금강 검을 들고 있습니다. 증장이란 지혜를 증장한다는 뜻입니다.
그가 들고 있는 칼은 금강석 같은 지혜를 상징하는 금강반야 검으로
즉 제법의 무상, 고, 무아라는 법을 직관하는 지혜로
모든 번뇌, 탐진치, 아상을 깨뜨려 버리는 금강 검을 상징하며,
금강 반야 검이 깨뜨리지 못하는 번뇌는 없습니다.
황하정루(黃河精樓)
수덕사의 가람조성은 산지형(山地型)이라 조금씩 올라가야 한다. 천왕문을 진입해서도 계단을
오른다. 대웅전과 마주하여 전면에 지어지는 누각이 있는데, 황하정루가 보인다. 강당누각을 가진
사찰에서 중심 불단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2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하나는, 누하출입으로 루(樓) 밑을 통과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우각(隅角)출입으로 루(樓)
옆으로 돌아가서 진입하는 것이다. 수덕사는 누각강당을 설치하여 누하(樓下) 진입형식을 취했다.
가람의 규모를 자랑하는 사찰에서는 대체로 천왕문을 지나면 불이문을 설치하는데 수덕사는
불이문은 두지 않았다. 황하정루를 진속의 경계로 보는 것이다.
'선지종찰수덕사' '덕숭총림'이라는 한자 현판이 걸려 있는데 수덕사 방장이신 원담 圓潭
진성 眞性(1926 ~ )스님께서 쓰신 글씨이다.
관음전
삼층석탑 / 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 원효대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지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지닌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명부전
고목사이 법고각 일부입니다
八萬四千地獄門 팔만사천 온갖 모든 지옥문이
仗秘呪力今日開 신비스런 주력으로 오늘 열려지이다.
수덕여관 / 일주문 왼편에 있는 수덕여관은 고암(顧庵) 이응로(李應魯, 1904~1989) 화백이
1944년 구입하여 작품 활동을 하던 고택으로 이응로 화백이 1959년 이화여대 제자였던
박인경과 함께 프랑스로 가기 전까지 머물렀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월간지<삼천리>1934. 8월, 9월호 '이혼고백서'중에서-
'이혼고백서'로 1934년 8월 경성을 발칵 뒤집은 조선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씨가
삼년간 기거하였다. 대표적 신여성으로 수많은 '최초'를 남긴 여성인 나혜석은 해방 몇 년전
일엽스님을 찾아왔다가, 수덕사 조실 만공스님 에게 출가를 요청했으나 “중노릇할 사람이
아니다”고 거절당한 뒤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찾아오는 예술인들과 소일했다.
이 수덕여관에 얽힌 여러 사람..... 사연......
일엽 스님과 아들의 모자상봉...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씨와... 이응로 화백...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그 수덕여관에서 생을 마친 본처.
2007년 수덕사에서 이응로 화백의 손자로부터 수덕여관을 증여받아서, 옛 수덕여관의 원형을
복원하여 지금은 각종 문화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개심사로 향하기전에
경허스님의 법을 계승하고 선지종풍(禪旨宗風)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는 만공스님의 일화를 소개함으로써 수덕사 순례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1930년대 말, 만공 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에 주석하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당시 만공 스님을 시봉하고 있던 어린 진성사미(오늘의 수덕사 원담 노스님 이라는
설도 있다)는 어느 날 사하촌(寺下村)의 짓궂은 나뭇꾼들을 따라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재미있는 노래를 가르쳐줄 것이니 따라 부르라는 나뭇꾼의 장난에 속아 시키는 대로
‘딱따구리노래’를 배우게 되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집 멍터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아직 세상물정을 몰랐던 철없는 진성사미는 이 노랫말에 담긴 뜻을 알 리 없었다.
그래서 진성사미는 나중에 절안을 왔다갔다 하며 구성지게 목청을 올려 이 해괴한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진성사미가 한창 신이 나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마침 만공 스님이 지나가다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 스님은 어린 사미를 불러 세웠다.
“네가 부른 그 노래, 참 좋은 노래로구나, 잊어버리지 말거라.”
“예, 큰스님.”
진성사미는 큰스님의 칭찬에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봄날, 서울에 있는 이왕가(李王家)의
상궁과 나인들이 노스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청하였다. 만공 스님은 쾌히 승낙하고 마침
좋은 법문이 있으니 들어보라 하며 진성사미를 불렀다.
“네가 부르던 그 딱따구리 노래, 여기서 한 번 불러 보아라.”
많은 여자 손님들 앞에서 느닷없이 딱따구리 노래를 부르라는 노스님의 분부에 어린
진성사미는 그 전에 칭찬받은 적도 있고 해서 멋들어지게 딱따구리 노래를 불러제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자알 뚫는데….”
철없는 어린사미가 이 노래를 불러대는 동안 왕궁에서 내려온 청신녀(淸信女)들은
얼굴을 붉히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 때 만공스님이 한 말씀했다.
“바로 이 노래 속에 인간을 가르치는 만고불력의 직설 핵심 법문이 있소.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사람은 딱따구리 법문에서 많은 것을 얻을 것이나,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이 노래에서
한낱 추악한 잡념을 일으킬 것이오. 원래 참법문은 맑고 아름답고 더럽고 추한 경지를
넘어선 것이오.
범부중생은 부처와 똑같은 불성을 갖추어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뚫린
부처씨앗이라는 것을 모르는 멍텅구리오. 뚫린 이치을 찾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오.
삼독과 환상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중생들이라 참으로 불쌍한 멍텅구리인 것이오. 진리는
지극히 가까운데 있소. 큰 길은 막힘과 걸림이 없어 원래 훤히 뚫린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가깝고, 결국 이 노래는 뚫린 이치도 제대로 못찾는 딱따구리만도 못한 세상 사람들을
풍자한 훌륭한 법문인 것이오.”
만공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그제서야 청신녀들은 합장배례했다.
서울 왕궁으로 돌아간 궁녀들이 이 딱따구리 법문을 윤비(尹妃)에게 소상히 전해 올리자
윤비도 크게 감동하여 딱따구리 노래를 부른 어린 사미를 왕궁으로 초청, ‘딱따구리’노래가
또 한 번 왕궁에서 불려진 일도 있었다.
일화출처http://blog.naver.com/nobopark?Redirect=Log&logNo=40021761603
광복 다음해 1946년 어느날 76세의 노스님은 저녁 공양을 맛있게 들고
거울을 앞에 두고 독백하기를 ......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년 동안 동고동락 해왔지만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동안 수고했네"
하고는 요를 펴고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세속인은 얼마큼 수행을 하고 도를 닦아야 스님처럼 초연하게 이승을 하직할 수 있을까?
첫댓글 어렸을적 참으로 많이 가던곳이네요.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의 오솔길이 참으로 아름다웠는데.이응로화백님의 동생이 홍성에서 사진관을 했었지요.수덕여관에 들어가보면 돌에 새겨있던 이응로화백의 작품이있엇던것이 기억나네요.가을밤에 수덕여관에 묵으면 참으로 운치가 있었지요. 벌써40년전 이네요
대웅전 측면 5개의 기둥이 만들어내는 4칸 벽면과 맞배지붕의 조화도 유명하다네요.
제가 갔을때는 몰라서 맞배지붕만 담아왔거든요.
뒷쪽 관음보살입상 바위에서 들리는 쨍그랑거리는 동전던지는 소리도 참 재미납니다.
소원성취하려는 사람들의 끝없는 노력(?).....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