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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 홍익대학교
십수년 쯤 전인가?
내 나이 56(?)살 무렵.
북한산 숨은벽 하산길
주차한 곳에서 비에 젖은
등산복을 갈아입고 귀가 중에
누구인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혹시 지갑
잃어버리지
않으셨는지요?"
"아! 그렇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선생님 지갑을 주은 사람인데
홍대 앞에서 카페를 운영해요."
"아! 감사합니다.
제가 그리로 가죠."
.
젖은 등산복을 갈아 입을때
지갑을 차 지붕에 올려놓고
깜빡 잊고 그대로 출발했기에
지갑을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것.
그 사람은 내 차 곁에
주차한 청년이었는데
거기서 내 지갑을 발견.
그래서, 홍대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해 간 적이 있었다.
1970년대와 많이 달라진 캠퍼스.
.............
.............
몇년 전인가?
홍대 앞에 갔었다.
知人의., 카페 개업식.
.
그곳은 '별천지' 같이
또 다시 변모해 있었다.
'카타리나' 찻집
여기 쯤 이었는데
언제쯤 사라졌을까?
반세기 전, 캠퍼스 라이프.
그때 그 시절., '추억의 거리'
내 희미한 기억 속에서만.,존재.
.
그때 그 시절
추억 속.,그때 그 시절.
2019.01.14 '홍대거리' 한국관광 100선 선정
........홍익대학교(弘益大學校).........
1946년 4월 홍익인간의 창학정신 아래
서울 용산구 원효로 흥국사(興國寺)에서
홍문대학관(弘文大學館)으로 설립되었다.
입학생 131명 문과 법과 설치,
초대 학장 양대연(梁大淵) 취임
당시 교수 및 강사는 22명이었다.
1947년 6월 대종교재단(大宗敎財團) 인수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으로 교사를 이전했다.
1948년 8월 재단법인 홍익학원
홍익대학관으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문학과· 법학과·사학과, 부속 전문부 설치
12월에서울 용산구 문배동으로 교사를 이전
1949년 6월 홍익대학으로 교명 변경
법과·정치과의 법학부, 국문과·영문과·
사학과·미술과의 문학부, 법률과·정경과·
국문과·미술과의 초급 대학부로 편성했다.
1951년 법학부와 문학부로 개편하고,
부산 피난지 제1회 졸업생 59명 배출
1953년 종로구 누상동에 대학본부를 두고
중구 남산동과 종로구 인사동에서 분산수업
1954년 3월 미술학부를 신설하였고,
1955년 4월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수동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 이전하였다.
당시 재정난으로 학교 경영 위기
이도영(李道榮)씨가 재단을 인수
사재 10억 환을 투자해 시설 확충
및 대학 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때 도서관, 강당 등을 건립,
부속초·중·고등학교와 원주분교,
병설공업전문대학 등을 설립하였다.
1958년 3월 대학원 석사과정을 개설
1961년「대학정비령」에 따라 일시
홍익미술대학으로 개편된 이듬해 2월
다시 '홍익대학'으로 환원하였다.
1964년 2월 상경학부·미술학부·공예학부·
건축학부에 10개 학과로 편성하였으며,
1966년 건축학부를 공학부로 개칭하고
이듬해에 교육학부를 신설하였다.
1971년 10월수도공과대학(首都工科大學) 합병
같은 해 12월 종합대학교인 홍익대학교로 개편.
초대 총장에 이항녕(李恒寧)이 취임하였으며,
'이공·상경·미술' 3개 단과대학, 20 학과 편성.
1972년 산업미술대학원과 야간대학 신설
1973년 대학원 박사과정을 설치하였으며,
1978년 사범대학을 신설하였다.
1977년 1월 사범대학부속학교 설치인가를 받아
홍익국민학교를 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국민학교,
홍익여자중학교를 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자중학교,
홍익중학교를 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홍익여자고등학교를 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자고등학교,
홍익고등학교를 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1978년 이공대학을
공과대학으로., 변경.
1980년 문과대학·환경대학원,
1981년 교육대학원을 신설했다.
1978년 국제경영대학원을 신설하였고
상경대학을 경영대학과 법경대학으로 개편
1988년 산업대학의 설립인가를 받았고,
1988년 10월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신안리(세종시 조치원읍 신안리)에
조치원캠퍼스 설립을 인가받았다.
2011년에 세종캠퍼스로 명칭 변경.
1991년 세종캠퍼스 산업대학을
과학기술대학과 조형대학으로 개편
서울캠퍼스에 산업정보대학원 신설인가
1992년 상경대학, 1993년 세무대학원,
1995년 산업대학원(세종캠퍼스) 신설.
1996년 광고홍보대학원·
교육경영관리대학원·
미술대학원을 신설하고,
산업정보대학원을 정보대학원과
산업기술대학원으로 분리하였다.
1999년 지식재산법무대학원을 신설
테크노경영대학원을 정보대학원으로
통합하고, 강남교육원을 개원하였다.
2004년 영상대학원을 신설하고,
2005년 국제 산학협력 프로그램인
PACE와 산학협력 체계를 구축했고
세종캠퍼스에 홍익아트홀을 준공했다.
2006년 건축대학 신설
홍문관을 준공하였다.
2007년 법경대학을 법과대학과 경제학부로 개편
2008년 상경대학을 상경학부로 개편하였으며,
국제경영대학원을 경영대학원으로 변경하고
대학로캠퍼스 기공식을 가졌다.
교훈은 ‘자주·창조·협동’
1968년에 기획실을 창설하고,
1972년에 교수 및 직원의 공개채용제를
도입한 것은 국내최초로 시도하여 성공
특히, 미술과 건축 분야는 여타 대학에 비해
강점을 보여 국전, 대학미전을 비롯한 각종
공모전에서 거의 매년 최고상을 차지하고 있다.
..............................................................
혜화동 대학로.,홍익대학교 아트 센터.
벽을 뚫는 남자
마치,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 입구
조각을 옮겨 놓은듯.,
.
2014.03.12 홍대 대학로 캠퍼스.,그림자 像
2013.08.20 대학로
홍익대학교
1970년대 캠퍼스
'그때 그 시절' 같다.
'대학로~낙산공원'
누가 그린 벽화들일까?
'이화동~낙산' 벽화마을.
2018.05.05 이화동
벽화마을로 가는 길.
대학로에서
낙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담장마다.,벽화.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
화가들의 거리를
연상하게 하는 풍경.
.
1970/80년대
'홍대 캠퍼스'를
거닐던 느낌이 든다.
.
그래서 추억 속
캠퍼스 라이프가
생각나면 찾게 된다.
'10대 /20대'
청춘남녀들이
주로 많이 찾는
낙산 벽화마을은
사랑이 꽃피는 곳.
.
이미 동남아
관광객들에게는
명소가 된 벽화마을.
.
동대문에서부터
낙산 성곽 길을 따라
곧바로 올라와도 만난다.
낙산 벽화마을은
1950년 6.25 전후
형성된.,피난민촌.
서민들의 애환이
가득한 산동네가
벽화마을로.,변모.
가난한 화가들 또는
화가 지망생들에 의해
국제적 관광명소로 변모.
.
개인적으로는
캠퍼스 시절이
그리울때 찾는다.
아주 작은
카페 음식점 등.
그리고, 생맥주집.
나를 반기는 단골집들.
.
낙산.,벽화마을
대학로에서 올라오면
훨씬 더 많은 벽화들을
계단, 담에서 만날 수 있다.
.
벽화따라 낙산에 오르면
'천사의 날개'가 반겨준다.
탐방객들에게 기념촬영 명소.
.
이화동 벽화마을은
낙산 조각 조형물들은
홍대 동문들 흔적 아닐까?
.
캠퍼스 라이프.
첫 사랑 시절이
떠오르는.,낙산.
야경이 아름다운 카페
홍대산악회 2019.2.9 토 - 213회 산행 '기자촌능선'
겨울 산행지로
가장, 인기 높은.,
북한산 기자촌능선.
기자촌능선 산길을 걷다보면
가까이 진관사 능선이 보이고
그뒤로는 의상봉능선이 보이고
그 뒤로는 '염초봉능선 ~ 백운대'
마치, 북한산의 남릉선
전망대 같은 기자촌능선.
'구파발역~진관공원(이말산)~
기자촌공원(한국 문학관 부지)~
기자촌능선~대머리능선~비봉능선.'
.
대머리능선.
기자촌능선에서 본.,족두리(수리)봉
비봉으로 이어지는.,기자촌능선.
발걸음마다 동양화 같은 비경지대
...................................
홍대산악회 213차 정기산행
일자 - 2019년 2월 9일 오전 10시
만남의 장소 - 구파발역 1번 지하
준비물 - 중식, 방풍의, 개인 기호품.
....................................................
회장 : 안득현(010-9068 -0357)
총무 ; 옵션(010-7324-7377)
홍익대학교총동문산악회
정기산행에는 누구나 함께
참여할 수 있으며.,'회비 萬원'.
.
기차촌능선 들머리
들머리에서부터
능선에 이르기까지
경사 급한 암릉이지만
오르막은 쉼터라 여기고
가급적이면 천천히 오르자.
땀이 흐르지도
마르지도 않게
숨가쁘지 않게
계단을 가급적 천천히
올라간다고 여기다 보면
어느덧, 능선 위에 도달한다.
기자촌능선에 올라서면
전망 좋은 비경지대 연속.
마치, 裸女 같이 헐벗은.,능선.
그 아래로 펼쳐지는 서울의 풍경
북한산 기자촌능선은
1968년 1.21사태 당시에
북한 124군부대에서 남파한
무장간첩 31인이 38선을 넘어
청와대 침투를 위한.,마지막 루트.
31인이 각각 30kg 군장을 메고
시간당 평균 10km 속도로.,산악 행군.
번번히 아군 저지선을 뚫고 이미 지나갔다.
청와대 앞 500m까지 침투.
1968년 1.21사태(김신조 사건)은
그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국민들에게
크나큰 충격과 두려움을 안겨 준.,사건.
그로 인해 예비군 제도가 생기고
1.21사태 공비 침투로였던 노고산에
예비군 훈련장이 생기고 예비군 제도
창설을 비롯하여, 학교에 교련과목 신설.
북한에서 남파된 무장간첩
침투로마다 군사시설을 강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았다.
.
1969년 11월 첫 입주 시작
1974년 3월 분양이 완료됐다.
입주 초 430여 가구 분양
그 아래쪽에 독립유공자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광복촌’ 조성.
기자촌은 북한산 자락
장마에는 물이 들이치고
겨울에는 난방이 잘 안됐다.
.
기자촌 초창기에는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하루에 한번 트럭으로
물을 실어오고 기자들이
퇴근 후에는 우물을 팠다.
대중교통시설도 낙후
20분 넘게 논길을 걸어
구파발로 나가 버스 탑승.
.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취재경쟁에서 벗어나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선후배들이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업무가 끝난 기자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고
체육대회를 열기도 했던 곳.
언론탄압이 심하던 70년대,
기자촌은 저항정신의 산실.
80년대 ‘기자촌은 불이
꺼지는 날이 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시대의식 품은 공간
고흥길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
오전식 전 경향신문 정치부장,
이청수 전 KBS보도국장 등
내로라하는 언론인들이
젊은 날을 보낸 곳.
1970/80/90~2000년대., 기자촌
400가구 넘는 기자촌은
2006년 철거 당시 40가구의
은퇴 기자들 만 남아 살았다.
결국 이 지역은 2006년 은평뉴타운
개발 지역에 포함, 철거되어 사라졌다.
.
2010.12.7. 기자촌 근린공원.
2018.11.08 연합뉴스
한국문학 진흥의 핵심 거점이 될
국립한국문학관 건립이 본격화한다.
선정에 난항을 겪은 부지는
북한산 자락 기자촌 터로 결정.
정부와 은평구는 국립한국문학관
인근에 예술인마을을 조성하는 등
기자촌공원 일대를 문학과 문화예술,
자연이 어우러진 문화공간으로 개발 구상
.
문화체육관광부는 8일 서울 광화문 근처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국립한국문학관 건립부지로
서울 은평구 기자촌 근린공원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문체부 산하
국립한국문학관
설립추진위원회는
지방자치단체에서
공모한 24개 부지와
국유지 2곳 등 모두
26곳을 심사한 뒤
문화역서울284,
파주시 출판단지 부지,
은평구 기자촌 근린공원 부지,
파주시 헤이리 부지.,4곳 후보지
제반 여건을 확인, 심도 깊은 토의
은평구 기자촌 근린공원을 최종 낙점.
.............화의군 묘역..............
1425(세종 7)∼? 조선 전기 왕자.
..........은언군(1754~1801) 묘 터...............
조선 영조 손자이자, 사도세자(장조)의 서장자
정조 이복동생이며, 은전군과 함께 살아남았다.
철종 할아버지이며 철종 아버지는 그의 서자(3남)
..................................................................
'철종 할머니' 송마리아(은언군 부인).
왕족으로는 조선 최초 천주교도 순교자
절두산 묘지에 안장된 회의군 & 송마리아.
.
은평구., 기자촌 근린공원
'기자촌., 한국문학관'부지.
기자촌능선 민둥능선
2019.01.10
기자촌능선
1950년대 대표문인.,박인환
'윤형주 & 송창식' 트윈 폴리오.
봄비 박인수
.......신중현...........
1938. 1. 4, 서울 출생
1968년 '자매 듀오' 펄시스터즈
데뷔 음반을 제작했던., 프로듀서
님아, 커피 한 잔, 떠나야 할 그 사람.
1968~73년, 박인수가 부른 〈봄비〉
1969년, 김추자 〈님은 먼 곳에〉
1970년 김추자 〈거짓말이야〉
1971년 장현 〈미련〉
1972년, 김정미 <봄〉
............................
2012.04.22
2010.08.12 사망.,'앙드레 김(김봉만)'
'구파발' 출생.,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2009.07.09 사망.,마이클잭슨
'앙드레 김' 의상을 즐겨 입었다.
.
1970년대 대학산악부
'기자촌능선'은 일명.
"북한산 그랜드 캐년"
.
큰형님 윤정부.,명예회장.
2016.10.09 185회 춘천 드름산
2017.03.05 190회 청계산
2017.04.02 191회 바라산
196回 관악산
198회 용마산
200 回 남산
201회 북한산 원효봉
2018.03.04 202회 청계산
2018.04.07 203회 안산
2018.05.06 204회 인천 무의도
2018.12.02., 211회 족두리봉
.
'
북한산.,기자촌(記者村)능선
.
.
구파발 진관동 폭포동
은평뉴타운에서 바라본
'기자촌능선 & 선녀폭포'
.......
.......
구파발(舊把撥)
벽제관으로 가는
옛 파발이 있던 곳.
마고정(馬雇亭),
우물골, 폭포동(瀑布洞),
기자촌(記者村), 제각말,
상림(桑林) 등의 지명이
오늘날, 은평뉴타운.
기자촌은 1969년~1974년까지
기자 전용으로 조성된 주택단지
기자촌능선
........기자촌(記者村).........
은평구 진관외동 175번지 일대
기자들의 집단거주 마을이었다.
196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
기자들의 내 집 마련을 위해
땅을 내주면서 집단주거지 조성
1969년 11월 입주 시작
1974년 3월 분양이 완료
입주 초기 420여 단독가구
현재 44가구 만 남아 있어
'외딴섬'이라고도 불리운다.
......................................
제각말은 철종이 은언군 묘를
이말산에 모신 뒤 제각(祭閣)을
세웠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북한산 둘레길.,이말산
......은언군 (恩彦君).............
사도세자 서자 10세에 은언군 봉군
1771년(영조 47) 행실이 바르지 못해
은신군 진과 함께 관직 기용 불허 처벌
이어 시전 상인들에게 진 빚을 갚지 않아
은신군과 함께 충청도 직산에 유배되었다.
이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774년 풀려났다.
1776년 영조 사후
수릉관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흥록대부.
당시 실권자 홍국영이
은언군의 맏아들 담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이라 하고 왕위를
잇게 하려 했으나 담은
홍국영과 틀어져 오히려
모반죄로 몰려 유폐되고,
1786년 독살되었다.
이 일로 은언군도
정조의 명에 따라
강화도로 옮겨져
살게 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처 송씨와 담의 처인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도라 하여
붙잡혀 죽고, 그도 사사.
1849년 손자 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자
신원되었다.
................
.
'상림'은 마을에
수백년 수령 향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유래한 지명
폭포동은
인근 골짜기에
향림폭포가 있어 유래.
폭포동 이곳의 폭포는
"선녀폭포"라고 불리우며
'기자촌능선'으로 이어진다.
폭포동에서 본.,기자촌능선
'구파발역~ 폭포동 선녀폭포~
기자촌능선 ~ 비봉'으로 가는 길.
구파발역에서 가까운.,폭포동계곡
이곳은 인근
옛 주민 일부만
즐겨 찾는.,아지트.
약 5만평 넘는
소나무 군락지.
북한산 최대 규모.
소나무숲 산림욕
선녀폭포 음이온욕
필자가 건강목적으로
즐겨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앉아있으면
주변 5만평 소나무숲
향기가 바람에 실려온다.
.
등산로 입구
찾기가 애매모호.
하여, 인적이 드물다.
이곳에서 정상을 향해
쮹 올라가면.,기자촌능선.
이곳보다 좀 더 멋진
비경지대를 간상하려면
계곡 등산로로 올라야 한다.
2017.03.18. 구파발 폭포동
계곡 등반로는
암릉으로 이어져
일반 등산객들에겐
오르기 매우 험한 곳,
옛 주민 만
즐겨 다니는
암릉 바위길.
2017.03.18. 선녀폭포
2017.03.18.
선녀폭포 가는 길.
암릉도 올라야 한다.
일반 등산객들은
여기서 더 못 가고
돌아서는 지점이다.
.
그러나, 여기만 통과하면
놀라운 비경지대가 열린다.
'북한산에 이런 곳도 있었나?'
이곳 폭포동 선녀폭포는
북한산 최장 폭포 아닐까?
선녀폭포는 약 100여 m UP.
크고 작은 폭포가
연이어진 비경지대
선녀가 목욕할만한 곳.
.연이어진
폭포 곁으로
신선노름 쉼터들.
폭포동 선녀폭포
그 위로., 보이는
'기자촌능선' 암릉.
2017.03.18. 신선바위
누구나 반할 만한 쉼터.
바로 곁에는 샘터가 있다.
그 곁으로는 개울이 흐른다.
선녀폭포
근원지는 여기다.
사진에 나오지 않지만
신선바위에서 본.,
은평뉴타운 폭포동.
여기가 폭포동 진원지.
신선바위 곁으로는
무성한 숲과 숲 사이로
숨겨져있는 또 하나의 계곡.
그 위로는
기자촌능선.
2017.03.18.
'누가
쌓아놓은
돌탑일까?'
.
2017.03.18. 기자촌능선 가는 길.
2017.03.18.
2017.03.18.
기자촌능선
7부능선 안부
암벽연습장 곁
쉼터 겸 야영터.
2017.03.18.
이 길을 따라 곧바로 가면
야영장 쉼터가 몇군데 있고
그 곁 바위벽은 암벽연습장.
암장 지나 바위길을 통해서
암벽연습장을 우회하여 오르면
기자촌능선 허리로 올라서게 된다.
기자촌능선은
비봉능선으로
이어지는 암릉.
2017.03.18. 비봉
2017.03.18. 비봉 정상부
2017.03.18. 비봉 정상
.............등산(登山 : mountaineering)...........
산을 오르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산악지대에서
높은 지점에 올라가거나 정상에 오르려 애쓰는 운동.
훈련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위험한.,mountain climbing.
...........................................................................
방향감각조차 잃게된다.
기자촌능선.,"전두환 바위"
왜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다.
풀 한포기 없는 곳은.,사막 같다.
기자촌능선 전두환바위
.................124군 부대...............
이들 무장공비들은 청와대 폭파를 목표로
서울에 침투한 북한민족보위성정찰국 소속
124군부대는 침투지역에서 게릴라 전 유격대.
북한이 무장공비를 남파한 것은
1·21 이후 대남공작 실패를 만회하고
남한 민중봉기 유도 거점 마련이 목적.
나가서 미국의 월맹에 대한 북폭중지와
파리평화협상회의의 진전에 따른 월남전
종식에 초조해져 한반도 긴장조성을 통한
중국·소련의 군사원조 획득과 대대적인
정치위기 은폐 의도에서 감행되었다.
남파 무장공비들은
15명씩 8개 조로 편성되어
10월 30일, 11월 1일, 11월 2일
3일간 야음을 타고 경북 울진군
고포해안에 상륙, 울진·삼척·봉화·
명주· 정선 등으로 침투하였다.
무장공비들은 군복·신사복·노동복
등의 갖가지 옷차림에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지닌 채 주민들을 집합시켜
북한책자를 배포, 북한의 발전상을 선전
정치 사상교육 ‘인민유격대’ 가입을 강요.
울진군 북면 고숫골의 경우,
11월 3일 새벽 5시 30분 7명 공비
“경북경찰대에서 주민등록증 사진을
찍어주러 왔다.”라며 주민들을 모은 후,
사진을 찍고 위조지폐를 나누어 주며
사상선전 유격대지원 청원서 서명 요구,
.
이때 이 마을에 나타난
양양군 장성읍에 거주하는
전병두(32세, 노동)를 대검으로
찔러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다른 지역에서 만행도 잇따랐다.
삼척군 하장면 산간마을에서는
80세 노인, 52세 며느리, 15세 손자
등 일가 세 사람이 난자당하였으며,
평창군 산간마을에서는 10세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절규와 함께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공비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신고하자, 당국은 11월 3일
오후 2시 30분을 기하여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 ‘을종사태’를 선포
대간첩대책본부의 지휘 아래 군과
향토예비군을 출동시켜 소탕전.
소탕작전 결과 11월 16일까지
사살 31명, 생포 2명의 성과를
올렸으며, 연말까지는 침투했던
공비 대부분이 사살되었다.
이 사건으로 공비에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과
소탕작전중 전사자 18명
생포된 공비의 증언에 따르면,
일당은 1968년 7월부터 3개월간
유격훈련을 받고 10월 30일 오후
원산에서 배로 출발하여 그 날로
울진해안에 도착하였으며, 복귀 때
무전지시를 받기로 하였으나 실패
독자적인 육상복귀를 기도하였다.
한편, UN한국통일부흥위원단은
이 사건이 한반도의 긴장을 초래,
UN 평화통일노력을 방해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UN총회에 특별보고
북한의 이러한 대담한
대남교란행위는 국민의
반공태세를 다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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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군부대
민족보위성
정찰총국 소속
..........
...........
1950년 북한이 6・25 남침 당시
중공군 제164사단 출신 조선인
1만명을 기반으로 1949년 8월에
나남(羅南)에서 창설된 124군부대
DMZ에서는 그들 공작조에 의해
살해된 11명을 포함 사살자 총 25명
그들은 도주하면서 또 다시 군인 12명,
예비군 1명, 경찰관 1명을 희생시켰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탑동리에서는
송이채취 주민 3명과 민간인 4명 살해
그들은 일정 루트 따라 칠성산으로 도주
발왕산, 계방산,
오대산, 내린천,
소양호 상류,
인제 용대리,
진부령으로 도주
그보다. 28년전 또 한무리가
같은 루트로 도주하고 있었다.
1968년 10월 30일~11월 2일
북한 민 족보위성정찰국 예하
124군부대 소속 120명 8개조로
나뉘어 경북 울진군 고포해안에
상륙, 울진・삼척・봉화・명주・정선 침투
대간첩 대책본부는
11월 3일 오후 2시 30분
경북과 강원도 일부지역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군과
향토예비군을 출동시켜 소탕작전
11월 16일까지 31명 사살
2명 생포, 연말에 작전 종료
이들은 1968년 7월부터 3개월간
유격훈련을 받고 10월 30일 오후
원산에서 배로 출발하여 그날로
울진 해안 도착한게 밝혀졌다.
퇴각 때 무전지시를
받기로 하였으나 실패
독자적으로 각자 육상복귀
그들이 그때 시도한
육상복귀 루트가 28년 후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때
다시 한 번 답습된 것이다.
그러나 이 루트는
즉흥적으로 개척된
것이 아니다. 북한군은
1948년 11 월부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백두대간을
인민 유격대 남파 통로로 이용
1950년 6・25 남침 직전에는
유격대 60명 오대산, 계방산으로
침투시켜 아군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전투 병력의 분산을 유도하고 후방지역
교란을 꾀하다가 아군의 토벌작전으로
55명이 사살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 루트의 지형, 지물을 숙지함으로서
6・25 남침에서부터, 후퇴 무장병력
침투와 퇴로 확보에 이르기까지
그후에도 매우 유용하게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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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의 건설을
혁명 전략으로 내세워
중공업 우선 정책을 채택
하지만 1961년
남한 군사정권 등장,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및
중소분쟁 표면화로 국제정세변화
북한은 위기의식을 갖게 된다.
1962년1964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1966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 대혁명
결과적으로 북한의
과도한 군사비 지출은
7개년 계획 실패를 낳았다.
이로 인해 경제건설이 지체
갑산파숙청되면서 갑산파의
<경제·군사 병진노선> 반대는
사실 상, 북한 내 마지막 집단적
문제제기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경제 전반적인 위기가 심화되었다.
1968년 1,21 사태 깃점으로
남한이 경제적으로 북한을 추월.
위기감과, 불안감을 느낀 북한 당국.
우월한 군사력으로 남한체제 전복 시도.
그러나, 잘못된 오판으로
1968년 1.21사태 이후부터
북한은 국제사회에서.,고립
세계 No 1.,빈민국으로 전락.
1.21 사태 실패
김일성에게 준
교훈은 없었다.
그해 1968년 11월 2일에
124군부대 무장공비 120명을
울진 삼척 지구에 침투시켰지만
몽상에 가까운 유격전은 실패했다.
1.21 사태는 청와대 인근에서 발생
일반 국민들에게도 큰충격을 줬으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가 많다.
당시 수경사령부 참모장
전성각 장군도 잘 알고 있다.
수경사령부는 서울지역을 관할.
당시 30 경비단장
전두환 중령을 통해
1.21 사태를 되짚어본다.
“1968년 1월21일 밤 10시 쯤
퇴근 후 집에서 쉬고 있을 때
수경사 상황실에서 긴급 연락
청와대 입구 바로 옆 효자동에서
무장공비와 교전 중이란 긴급보고.”
서둘러 부대로 복귀 도착해보니
수경사 상황실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상황장교에 의하면 일단의 공비들이
버스를 탈취, 자하문고개까지 이르러
여기서 경찰과 약간의 총격전을 벌이다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상태라는 것이었다.
전 중령은 단화를 벗고
전투화로 갈아신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한다
수경사 상황실 장교들은
이 긴박한 와중에서 어떻게
태평스러울 수 있느냐 표정들
“이놈들아 뭐가 이상해!
너희들은 실전경험이 없지.
전투에서 침착하지 않으면
모조리 죽는 것이야.” 전 중령.
전 중령은 완전무장을 마친후
지프를 타고 30경비단으로 갔다.
이미 최우근 수경사령관이 도착.
사실 수경사령부는 며칠 전부터 비상
무장 괴한들이 미2사단 경계망을 뜷고
서울로 남하했다는 보고가 있었기 때문
전 중령은 베트남전 경험이 풍부.
그래서, 우선 작전참모를 별실로 불러
무장공비 소탕작전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전 중령은 최우근 사령관에게
소탕계획을 간단히 브리핑 했다.
최 사령관은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전 장군은 우선 수경사 예하
33경비단을 불러 청와대 북쪽
외곽을 담당케 하고 특전사 예하
공수여단 전병력을 구파발 지역에
출동시켜 공비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그리고는 육본 헌병대를 불러
청와대 중심 남쪽 외곽 경계 지시
청와대가 기습위기에 놓인 이상
30경비단 (단장 전두환 중령)은
임시로 마련된 지휘부였다.
수도권 인근 군부대는 모두
30경비단 상황실 지휘를 받았고
작전은 전 중령 지시대로 움직였다.
한밤중이었지만 청와대 중심으로
서울 일원은 공비를 소탕하기 위한
병력으로 일사불란하게 에워싸였다.
전 중령은 날이 새기 만 기다렸다.
30경비단 상황실 창문까지 아침햇살
30경비단 소령으로부터 긴급 무전연락.
“참모장님,
공비 3명 발견
어떻게 할까요?”
적을 발견했다는 기쁨보다
무전기 목소리가 베트남 전때
그가 같이 참전했던 부하였고
게릴라전에 능한 소대장이었다.
그런 소대장은 이러한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잘 알았다.
“야, 건져봐.”
“알겠습니다.”
잠시 후 전 중령 앞에 놓인 무전기에
빨간 불과 함께 ‘삐’ 부저음이 울렸다.
그 소대장이었다. “참모장님, 아무래도
해치워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피해도
예상됩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알았다. 사살하라!” 전 중령.
그로부터 10분 뒤 공비 4명 사살
상황 끝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전 장군은 베트남전 베트콩 사살때
그 소대장 모습과 무장공비를 사살한
지금의 모습을 번갈아 떠올려보며 미소
공비 토벌은 시간문제라는 자신을 가졌다.
전 중령 예상대로 속속 상황보고
6군단 상황실에서 공비 1명 생포
침투한 무장공비는 모두 31명이며
청와대 침투가 목적이었다는 보고.
결국, 1월22일 아침 김신조 만 생포
나머지 전원 사살되면서 상황은 종료.
이 같은 일목요연한 상황전개는
전 중령에 의해서 보고자료 작성.
박 대통령에게 신속하게 보고됐다.
이어 전 중령은 상황 종료 뒤
사살된 공비 시신을 30경비단
연병장에 모아놓고 각 부처 장관과
기자들에게 공개했으며 이 때부터
수경사 30경비단은 청와대를 지키는
핵심부대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
1·21사태 당시 군경합동 토벌대는
31명 북한 남파 무장간첩을 잡는데
2000 장병을 지휘하는 연대장이 희생
그러나 북한군 처지에서 보면
그 작전은 더 더욱 실패한 작전
당시 사살된 124군부대 시신들을
송추초등학교 운동장에 늘어놓고
유일한 생포자 김신조를 데리고 가
무장간첩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 시행.
16절지에 이름을 써서
운동장에 늘어놓은 시신
위에 올려놓고 확인 대조.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3명은 도주한 것으로 결론
이들 리더로 추정되는 시신에서
가위로 잘라 둘둘 만., 군사지도
그 지도는 청와대까지
남북으로 길게 침투 경로
그 경로를 벗어난 `좌우'는
`필요 없는 것' 절단된 상태.
침투로 만 있고
도피로는 막아버린
`막다른 지도'였던 셈.
이들은 고도로 훈련받은
특수부대원들이지만 그들의
체제상 약점을 고스란히 내포
이들은 지휘체제가 한번 와해되자
전혀 갈피를 못잡고 방향감각을 잃어
송추에 있다가 포천에 나타나기도 했다.
이리저리 도망쳤지만
좌우로 분산해 도주할
지도가 없다보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좌충우돌할 뿐.
이들은 리더가 함께 침투한
31명 중에 동료였기 때문에
작전 지휘권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노고산 일대에서
우씨 형제와 맞닥뜨렸을 때 일부는
죽이자고 한 반면 일부는 살려주자
갑론을박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씨 형제가
지서에 신고하게 된 것.
이들이 북에서 훈련받을 때
`남한은 이미 공산주의 사상이
상당히 전파되어 내려가기만 하면
열렬한 환영을 받을 것'으로 알았다.
이와 같은 사례는
공산체제의 가장 큰
약점인 동시에 획일성과
맹목적인 복종이 인민군의
운용에도 그대로 강요되고
있다는 것을 노출시킨 본보기
실제로 그해 11월 울진·
삼척지구 침투 무장공비들
산간 고립부락에서 공공연히
주민을 모아놓고 입당 권유 연설
.
그뒤 귀순한 김신조는
야생동물처럼 쫓기다가
잡힌 직후의 모습과는
몰라보게 변모하였다.
고민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더니
두 가지 고민을 고백.
하나는 자신의 발언이
생방송으로 전국에 방영
어디에 가든지 사람들이
알아보고 에워싸는 통에
노이로제 걸릴 지경이란 것
다른 하나는 자수가 아니라
도주 중에 붙잡혔기 때문에
자신의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언제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
유명세는 오직 시간 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고민거리.
생명의 위협에 대해서는
“내 인격을 걸고 장담하건대
너 하나 죽여 대한민국이 얻을게
뭐가 있겠느냐”며 “대한민국은
그렇게 옹졸하지 않다” 라는
우리나라 정보 담당 관계자
답변으로 김신조 불안감 해소.
2016.02.22 1.21사태 당시 '김신조 심문관'의 회고
1.21 사태는 북한이
대남적화공작을 위한
본격적 유격전 전개에 앞서
시도한 탐색행위로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향토예비군
창설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21 사태는 북한에서 게릴라전
무장간첩 31명이 1968. 1월 13일
북한의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 지시를 받고, 18일
자정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은뒤
야간을 이용해 20일 10시 경 서울
세검정 고개의 자하문 초소까지 잠입.
초소에서 검문을 받은 그들은
정체가 탄로나자 검문경찰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 난사
지나가던 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많은 시민을 살상했다. 이날 밤 현장을
지휘하던 최규식(崔圭植) 총경이 전사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 민간인 5명이 살해되었다.
사건 후 곧바로 출동한
군경합동수색진에 의해
31일까지 28명이 사살되고
김신조(金新朝) 1명을 생포
2명은 도주해 북한으로 월북
송추 초등학교
'1월 22일~1월 29일' 까지
흩어져 도주한.,무장공비들
인왕산 부근에서 김신조 체포.
인왕산 부암동 북악산, 도봉산
송추 파평산 일대에서 27명 사살.
3명 도주한 중에 1명은 시신 발견.
15일 간 무장공비 소탕작전 중
아군 피해 전사 43명, 부상 6명.
도주한 이는 조선인민군
대장인 박재경으로,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역임하고 2000년,
2007년에 방한때 송이버섯 선물.
당시 유일하게
인왕산에서 생포된
김신조 이름을 따서
일명.,'김신조사건'.
북한산.,기자촌능선
북한산.,기자촌능선
기자촌능선에서 본 주변 풍경
전,답, 초가 몇채 뿐인 농촌마을이었다.
1960년대 중반 강남개발 남서울계획 발표
그무렵, 가설된 제3한강교(한남대교)
남서울개발보다는 군사적 필요성 때문
6.25 당시 2 교량이 '제1한강교와 광진교'
수많은 피난민들이
한강다리을 못 건너
공산치하를 겪은 탓.
제 3 한강교
강남개발보다는
서울시민 도강용'
..........
..........
용산구 한남동에서
강남구 신사동 연결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 진입 역할
경부고속도로 계획과 함께
착공된 한강 위의 4번째 교량.
건설 당시에는 제3한강교
1985년 한남대교로 바꿨다.
1966년 1월 19일 착공
1969년 12월 25일 완공
다리 길이 915m, 폭 27m
보도 4m 차도 23m 교각 27개
...................
....................
당초 설계는 20m 4차선 교량
당시 북한 대동강 25m폭 교량
제3한강교는 6차선 27m폭 교량
제3한강교 착공 전까지
평당 200원 정도 하였던
압구정,신사,잠원동 땅값
제3한강교 착공 후 3천원.
말죽거리 일대는 4~5천원.
...................................
기자촌능선은
사모바위까지
또는 비봉까지
올라가고 나서
구기동으로 하산
'비봉남릉선'
하산길 비경지
비봉.,진흥왕순수비
비봉.,거북바위
이곳 거북바위를 올라타면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꿀 만한
아들을 낳는다.'는 옛말이 전한다.
그래서일까?
등산객마다
이곳에서
기념촬영.
비봉에서 바라본.,비봉남릉선
'비봉남릉선' 그 아래가.,구기동
승가사., 가는 길
그 길가 아래 숨은 계곡.
구기동 입구까지 이어진다.
승가사 샘터~ 구기동계곡
구기동계곡
'간천엽 & 두부' 서비스
첫댓글 선경나라님이 꼼꼼하게 챙겨주시어서 산행길이 환하게 보이네요...
뒤풀이까정....맛있는 음식점 안내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