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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독에 빠진 역대 정권이 만들어놓은 의료법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고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특히 교육과 문화, 예술 분야에서는
동양 3국 중에
스스로가 가장 우수한 문명국임을
세계에 선전하기 위해 저마다 혈안이 되어 있다.
중국은 이미 알려진 대로 고구려의 역사까지
자기들의 것으로
삼으려고 동북아공정을 펼치고 있고,
일본은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선언하고
국경분쟁에서 이기기 위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려는 국제적 로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현대에 와서도 이렇게
한국의 역사를
거리김 없이 왜곡하고 있는 실정이니,
과거에는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을까.
할아버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역사 이야기들에도
잘못된 점이 무수히 많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진시황이란 이름을 많이 들어서 알고 있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제주도까지 내려왔다고 하잖아.
그런데 이 진시황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나서 행한
커다란 국책 사업이 바로 만리장성이야.
지금 만주라고 불리는 땅은 고조선 이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대대로 살던 땅이에요.
우리로부터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진나라는 한시도 안심할 수 없었겠지.
그래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 만리장성이야.
내가 만리장성에 가보니
우리나라의 역사는 뒤로 감추어진 채
이것이 중국을 대표하는
문명으로 일컬어지니 마음이 안타까워.
조상들을 뵐 면목이 없어요.
진시황이 한 일 중에서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분서경유야.
제 나라의 정책과 문화를 유지하려고
그 이전의 문화와 사상을
담은 책들을모 조리 불태우고
그에 반대하는 선비들을 파묻어 죽였잖아.
누구나 정권을 잡으면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앞선 것들을 매도해서
불 지르거나 법으로 금지시킨다고 .
고려 때는 호국볼교라더니
조선에서는
억불숭유 정책으로 바뀌듯이 말이야.
분서갱유가 그 당시 지식층에 만연되어 있던
동이족의 사상과 문화와 역사를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돼!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 되려면
뒤바뀐 역사부터 복원해야 해.
의술도 마찬가지야.
<황제내경>을 중국의 의서라고 우겨서
동양의 모든 의학이
중국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하지만
<황제내경>에서 황제 헌원을 가르치는
기백도인이나 자부선인은
바로 동이족의 성인이야.
우리나라 선도를 대표하는 깨달은 도인 분들이지.
그러니 <황제내경)>의 내용은 바로
동이족의 의술이고 문화이고 철학이야."
다행히 세계보건기구는
침술의 기원이 한국이었음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반도에서 출토된 돌침이나 뼈침 등의
연대가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1928년 산둥성 장구현 용산진 성자애의
용산문화 유적에서는 뼈침이 발견되었다.
또 산시성 하현 14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서음촌의신석기 유물 중에서는
인공적으로 쪼개서 실을 뽑아 낸 듯한
반쪽고치껍질과
돌이나 도자기로 만든 물레가 발견되었다.
우리는 민족의 기원을 삼국시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일제의 조선사편수회가 철저히
왜곡한 역사관을 반성은커녕 그대로 답습해온
강단 사학자들의 매국적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에 의해서
국조 단군마저 신화로 둔갑되었으니,
단군 이전 환웅천황의 배달한국 시대는
아예 전설속의 나라가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조금씩이라도
문헌이나 유물로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이 드러나
실증사관을 고수하는 강단사학자들의 입장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실지로 유라시아를 지배했던
우리 선조들의 문명은
지구상의 어느 민족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찬란했다.
특히 의술의 수준은
누구도 넘보지 못할 만큼 높았는데,
어리석은 후손들이 조상의 슬기를 이어받지 못해
언젠가부터
동이족의 의학이 중국의 의학이 되어버렸다.
물론 현대에 들어와 한나라의 의학이
대한민국의 의학으로 명칭은 바뀌었으나,
여전히 우리의 젊은 한의학도들은
주체적인 동의학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중국의 의서에만 매달려 있는 실정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 나라의 한韓의학이
한恨의학이 되었음을 통곡하고 계실지 모른다.
지금의 한의사들은
독창적인 치료법을 연구하지 않아.
그러니 자신만의 의술이 없어요.
어떤 한의사는 간병을 잘 고치고
또다른 한의사는 암을 잘 고친다면,
아픈 환자들이 굳이 나에게까지 오겠어?
그들이 못 고치니
나 같은 면허 없는 사람을 찾아오는 거지.
내가 일부러 돌팔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병든 사람들이 새벽 2시, 3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니 난들 어떻게 하겠냐고.
한의사들도 중국 의서만 공부하지 말고,
자연의 이치도 관찰하고 육경신 마음수련도 하고
신통도 열어서 환자를 고칠 생각을 해야 해.
그런 결심을 하고 공부하면
자연히 인술을 펼친다고 존경받는 의원이 돼요.
자격증이 있다고 그것을 평생 우려먹으려면
차라리 다른 직업을 선택해서 먹고 사는 것이 나아.
애꿎은 환자들만 괴롭히지 말고."
중국 의술로부터 우리 의학의 기초를 다시 세운
이제마 선생은 독특한 사상의학을 창시했고
더 나아가 인술을 펼쳐 병든 우리 백성을 구했다.
이제마는 우리 한의사들이 의학을
밝혀감에 있어
인술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령 만호萬戶나 시는 고을에 질그릇 굽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다면 그릇이 부족할 것이요,
백호가 사는 마을에 의원이
한 사람만 있으면
사람 살려내는 일손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널리 의학을 밝혀서 집집 마다
의학을 알고 사람마다 병을 알게 하면,
가히 세상 사람들은 장수하고 원기元氣는 보존될 것이다
.--- -<동의수세보원>
중국의 역사 왜곡과
더불어 찾아온 시련이 바로 일본의 침탈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하자마자
우리 역사서를
불온서적으로 간주하여 일제히 압수수색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관보에는
약 1년 2개월에 걸쳐
압수한 책이 20만 권이라고 실렸으니,
그때 빼앗긴 우리의 역사서와
의서들은 지금 어디에서 통곡하고 있을까.
여기에다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심으니,
우리 민족의 얼은 제자리를 잃고
일본의 군국주의 아래 숨죽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우리 민족은
세계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무저항 독립운동을 펼쳤으니
그것이 바로
비폭력 운동의 효시인 1919년의 삼일운동이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외에서 비판을 받게 된
일본은 사이또 총독을 통해
자신들의 폭력을 감추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조선을 유린하고
조선의 얼을 빼앗을 간교가 숨어 있었으니,
그 전모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일본의 행태에
대해서도 치를 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이또는 1922년 조선사람을
반半일본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시책을 발표했는데,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이 글을 읽고 과연 어떤 느낌을 받을까.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가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 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친일 교육도 많이 접할 수밖에 없었다.
철저하게 계획된 목표에 맞추어
일선의 교육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온 할아버지는
일본의 말살정책에 따라 행해진 우리 문화의 왜곡이
아직도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고 개탄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어.
본래는 사촌이 땅을 사면 그땅에 줄 거름을
조금이라도 더 만들려고
변을 누고자 배가 아프게 된다는 뜻이야.
친족 간의 우애를 표현하는 말이었지.
그런데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 사람은 시기심이 많아
사촌이 땅을 사면 시기해서
배가 아프다는 뜻으로 바꾸어버렸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
그런데 해방이 된 지 60년이나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여전히
일본 놈들이 만들어놓은 뜻만 알고 있어.
사촌 간에도 그렇게
우애가 있었다는 뜻인지를 전혀 몰라요.
사촌이면 아버지만 다를 뿐이지 형제야.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지내 잖아.
학자들이 틀려먹어서 그래.
전부 자기 배만 부르면 되는 줄 알고
옛 것을 되살려놓지 않아요."
할아버지는 농담으로라도
--- "사촌이 땅을 샀나, 왜 배가 아프지?"
하는 말을 쓰면 안 된다고 한다.
우리가 일본이 심어놓은
의도대로 계속 조종 당한다면
땅만 되찾았을 뿐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실지로 우리 문화와 예술 그리고 더 나아가
민중의술을 천시하는
풍토가 된 것도 일제 교육의 결과이다.
일본의 체제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오늘날 한국의 교육은
그 방향부터가 심각하게 어긋나 있다.
국악보다는 서양음악이, 한국화보다는 서양미술이,
창극이나 판소리보다는 오페라가 중요시되며,
민중의술은 아예
의학의 한 분야로 끼워주지도 않는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명맥이 이어져온 전통 문화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인내해은 한두 사람의 헌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나라의 정신을 바꾸려면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해야 해.
일본은 그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언어를
바꾸고 그 의미를 퇴색시키려고 했지요.
그 중 꼭 고쳐야 할 것이 있어요.
사람의 삶 중에서 가장중요한 것인 혼인婚姻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혼인이라는 말을 좀 생소하게 들을 겁니다.
수천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써오던 친숙한 말인데,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철저하게 변조되어
우리말이면서도 잘 쓰이지않게 됐어요.
결혼이라고 해야 쉽게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결혼은 일본말이고
혼인이 우리말입니다.
그게 그말 아닌가 생각하면 큰일 나요.
뜻이 엄청나게 다릅니다.
혼인이라는 말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을
전제로 남에게 알리는 절차입니다.
그래서
남자가 장가가는 것을 혼婚이라 하고
여자가 시집가는 것을 인姻이라 하지요.
그런데
결혼이라고 하면, 단순히 혼을 맺는다는 뜻으로
누가 누구와 혼을 맺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아요.
심지어는 남자와 남자가 혼을 맺는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니 일본은 결혼문화가 난잡합니다.
아무하고나 혼을 맺고 형제나 사촌끼리도 결혼하지요.
결혼이라는 말을 쓰면 자꾸 그런 문화가 활개를 칩니다.
우리는 어서
혼인식, 혼인날로 말을 바꾸어 써야 해요.
그래야 좋고 아름다운 가정을 꾸릴 수가 있습니다.
요즘 이혼을 많이들 하고
애도 잘 낳지 않는다니 내 속이 아파요.
앞으로 미래를 열어가려면
똑똑하고 슬기로운 자손들이 있어야 하는데,
부모가 어떻게 교육을 받아서인지
저들 편하자고
애를 안 낳으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모두 일본 놈들이 노리는 수작입니다.
인구가 적어도 1억 명은
되어야 중국이나 일본이 넘보지를 못해요.
할아버지는 불임여성들에게 특히 애정을 쏟는다.
서양의학은 불임을 해결하지 못해
시험관 아이 외에는
마땅한 해결책이 없는 실경이다.
그러나 음양오행의 이치로 진찰을 해보면
아이 못 낳는 원인이
바로 보이기에 쉽게 아이틀 갖게 할 수 있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이야말로
곧 국력이고 미래의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을 세계 으뜸으로 만들려면
건강한 자녀들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불과 20년 전만 해도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인구억제 정책을 폈다.
그러다가 이제는 셋 이상 낳으면
보조금도 준다며 출산장려 정책을 펴니,
어느 정부가 이렇게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조삼모사 식으로 말을 바꿀 수 있을까.
일본식 교육을 너무 받아서
우리 문화와 전통을 천대하고 낮잡아 보는
식민지 근성이 뿌리 박힌
지식인들 때문이라면 너무 억측일까.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으로
천대받고 희생된 다른 예가 바로 민중의술 이다.
많은 민중의술가들이
일본식 법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은
우리 정부의 의료법에 의해 희생당했으며,
그 희생은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자신의 의술을 민중에게 시술하여
죽어가는 동포를 구했다고 법정에 세우는 나라,
그리고 민족 고유의 의술을
법으로 막아 발전시키기를 차단한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오늘의 한국이며
그 뒤에는 일본 식민교육의 영향력 이아직도 미치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할아버지는 돈이 없어
이런 일본의 교육을 단 한 번도 받을 수가 없었다.
일본의 교육을 받았다면
오늘날의 할아버지도 없었을 것이다.
그 교육의 덕택으로 자격중을 땄을 것이고,
그러면 결국 인술보다는
안전하게 치료하는 상술을 택했을 것이다.
재판중에 할아버지와 판사가 나눈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격중의 유무만읍 따지는 재판정의 무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판사가 나에게 이렇게 묻더란 말이야.
--- '왜 면허증을 따지 않았냐'
그래서 내가 대답했지.
--- '내 나이가 이제 백 살이 넘었소.
일제 때에 가난해서 초등학교도 못 갔고,
귀동낭이나 하려고 학교 마당에 가서 뱅뱅 돌면
일본 선생이 너희 같은 놈들은
배울 자격이 없다며 두들겨 패며 쫒아냈지.
그러니 내가 배울 기회가 어디 있었겠소?
해방이 되니 내 나이가 벌써 마흔이 넘었는데
그때 자식들 틈에 끼어서 공부를 하겠소?
먹고 살고 뒷바라지하느라 정신이 없었지.
그런 세월에 어디 가서 면허증을 딸수 있었겠소?' --
일본 놈들이 활개치던 시절에도
내가 아픈 사람들을 많이 고쳐주었는데.
그때도 이렇게 푸대접을 받지는 않았어요.
멀쩡히 내 나라에 살면서
아픈 사람 고쳐주었다고 이렇게 사람을 잡아가니,
이것이 어디 제대로 된 나라의 법이랍니까?
나는 내가 고쳐주겠다고 나에게 오라고 광고하지 않았어요.
모두들 병원에서 못 고친다니
할아버지가 제발 고쳐달라며 사정사정하는데,
그 불쌍하고 측은한 꼴을 어떻게 그냥 두고 봐요?
왜냐하 면 나는 그 아픈 것이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하면 나을지가 뻔히 보여.
그러니 내가 그 아픈 사람의
고통을 안 돌봐줄 수가 있겠는가?
그런 나에게 면허는 무슨 면허여.
길 가던 손님이 들어와 목 말라 죽겠으니
물 한 바가지만 달라고 하면
물을 떠주어야 할 게 아닌가 말이야.
통사정하는 사람에게
물 한 바가지 주었다고 나라가 잡아갈 수 있어?
물을 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고 하니 물을 준 것이지,
그냥 물 한 바가지 내놓으라는 거였으면
나도 다른 데 가서 알아보라고 내쫓지.
나에게 찾아온 사람들도 그런 심정이예요.
그러니 우선 사람을 살려놓고 봐야 할 것 아닌가.
판사는 나보고 왜 돈을 받았냐고 물어.
그냥 맹물은
돈이 안 들어가니 얼마든지 퍼줄 수 있지.
그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심이고 인정이야.
그런데 내 물약은 돈이 있어야
구하는 귀한 재료들이 많이 들어가거든
또 만드는 과정에도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이 있어요.
그러니 내가 그 물약을
달라는 사람에게 돈을 안 받을 수가 없지.
만약 나라에서 지원해줄 테니
환자들에게 돈 받지 말라고 하면,
나야 얼씨구 나 좋다 하고 거저 고쳐줄 거야.
사람이 아프다면 나라에는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원을 찾아주어야 할 것 아닌가?
백성이 아프다면 그걸 고쳐 주어야지
그게 백성을 위하는 나라지,
고친 사람을 옥에 잡아
가두는 나라가 백성을 위하는 나라일까?"
할아버지의 말을 듣다 보면
옛날 이야기 한 토막이 떠오른다.
어떤 나라의 공주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
임금은 공주의 병을 고치려고 어의들을 불러 모았지만
어떤 어의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임금은 전국 방방곡곡에
공주의 병을 고치는 사람에게 나라의 반을 주고
공주와 결혼을 시키겠다는 방을 내렸다.
이때 산에서 약초를 공부하던
착한 청년이 공주의 병을 고치겠다며 궁궐로 찾아왔다.
이 청년이 지은 약을 공주에게 먹이자
정말로 공주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임금은 공주를 고쳐 준 이 청년을
자격이 없다고 벌하지 않고
약속대로 공주와 결혼을 시켜주었다.
오늘날 이 땅의 민중의술인들에게
이 이야기는 한낱 꿈에 불과하다.
아니, 실지로 대통령이든 국무총리이든,
못 고치는 병이 있으니 누가 한 번 나서보라는
방을 한 번 불여주기라도 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결국 의술은 있으나 나라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법에 의해 사각지대로 내몰린 실력파 민중의술인들은
해외로 이민을 가서
오히려 그 나라의 대체의학을 살찌우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외국에서
이렇게까지 좋은 대접을 받을 줄 몰랐다고 한다.
심지어 아랍권에서 왕실의 주치의가 된 사례도 있다.
한편, 광복 후에
우리는 미군정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그리고 미 군정은 기독교적 사고를
중심으로 한 서구문화가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미군정의 지지를 받으며 등장한 이승만 정권은
정치,경제,문 화의 모든 면에서
서양의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니 우리의 전통예술과 문화와 의술은
절로 열등하고 미개한 것으로 취급당하게 되 었다.
침을 찌르고, 살을 태우고, 풀뿌리나 광물을 달여 마시는
민중의술이 청산되어야 할 미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본도 우리와 마찬가지 상황을 겪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국이 된 일본에 들어간 맥아더의 군정은
침으로 찌르고 뜸으로 태우는 치료법을 보고
상식에 어긋난다며 금지시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내려온 고유한 의술을 금지할 수는 없는
법이라며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권리를 되찾았다.
그 결과로 오늘날 일본에서는 여전히
침과 뜸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또한 21세기 고 령화 사회를 대비하는
의학의 커다란 부분으로 인정받고 있다.
침쟁이, 뜸쟁이로 민중의술이 매도당해온 시절을 견디온
할아버지는 우리나라의 해묵은 병폐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우리나라는 삼독에 빠져 있어.
첫 번째는 중국의 독에 빠져 있고,
두 번째는 일본의 독에 빠져 있고.
세 번째는 미국의 독에 빠져 있지.
찬란 한 역사의 꽃을 피워왔으면서도
자기의 문화와 예술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모르고 남의 것만 숭배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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