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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초등학교, 마리아 초등학교, 마호멧 초등학교... 이런 교명의 초등학교는 우리나라에 없다. 그러나 미륵 초등학교는 있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용순길 243번지가 그 학교의 소재지다.
불교 종단에서 세운 사립 초등학교는 아니다. 금마면의 미륵산 아래에 있다고 해서 학교 이름이 그렇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를 남긴 미륵사가 있는 지역이라고 해서 산 이름도 미륵산이 되었고, 초등학교의 이름도 미륵 초등학교가 된 것이다.
미륵보살이 성불 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여는 법회를 용화삼회라 한다. 용화삼회란 보통 보리수라 부르는 용화수 아래에서 미륵보살이 세 번 법회를 연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미륵산의 다른 이름이 용화산이라는 것을 보면 금마 사람들이 아득한 옛날부터 이 산을 자신들의 진산으로 믿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라인들이 화랑 김유신의 낭도들을 용화향도(香徒)라 불렀다는 기록을 통해 김유신이 당대에 얼마나 높게 평가받았던가를 헤아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동서 172m, 남북 148m에 이르는 광활한 절터의 주인공은 석탑이다. 흔히 서석탑이라 부르는국보 11호 바로 그 탑이다. '서'라는 방향 표시어가 붙은 것은 본래 동탑도 있었기 때문.
그런데 미륵사에는 두 석탑 가운데에 목탑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터를 발굴 조사한 끝에 얻은 결론이다. 미륵사는 탑 셋과, 각 탑마다 북쪽에 세운 금당 셋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미륵사가 세 절을 합한 듯한 구조로 창건된 것 또한 용화삼회와 관련이 있다. 중생들을 위해 세 차례 설법을 행한 미륵보살을 모신다는 뜻에서 그렇게 절 셋과 탑 셋을 하나의 가람 안에 한꺼번에 배치했다는 뜻이다.
산을 허물어 하룻밤 사이에 큰 못을 메웠다
무왕과 선화공주가 용화산 아래를 지나던 중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곧장 발길을 멈추고 미륵삼존께 예를 올린 왕과 왕후는 그 자리에 절을 짓기로 했다. 왕의 부탁을 받은 지명스님은 신통력을 발휘하여 하룻밤 사이에 그 큰 못을 메운 다음 절을 지었다. 물론 미륵삼존을 본받아 금당 셋과 탑 셋을 올렸다. 절에는 미륵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삼국유사에는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신라 진평왕이 기술자를 보내어 미륵사 짓는 일을 도왔다는 대목도 등장한다. 하룻밤 사이에 큰 연못을 메웠다면 절을 짓는 데에도 별로 시간과 공력이 필요 없었을 터, 진평왕이 무엇을 얼마나 도왔다는 것일까. 조금 미심쩍다. 하지만 어차피 신통력을 바탕으로 하는 설화이니 그런 식의 의심은 아무런 쓸모도 없겠다.
스님 한 사람이 산을 허물어 하룻밤 사이에 큰 연못을 메워버렸다는 무왕 때의 기이는 2012년 6월에도 계속된다. 지금 무심코 미륵사터를 찾은 답사자는 600년에서 641년 사이의 그 어느 날에 못지 않은 광경 앞에서 대경실색하게 된다. 나라 안에 남아 있는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미륵사터 탑이 깜쪽같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본래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사터 석탑, 그래도 지금까지는 한 쪽이 떨어져 나간 상태로나마 6층까지는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미륵사터를 찾아가면 그 웅대하던 석탑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어렵사리 미륵사터를 방문한 답사자들은 '관광해설사의 집'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뾰족한 해결책이 나올 리 없다. '2016년이나 되어야 볼 수 있어요. 그 동안 해체, 보수를 합니다.' 정도의 답변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올해가 중앙 정부 지정 '전북 방문의 해'라는데 이 무슨 '황당'인가.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컴퓨터를 활용해 1993년에 복원해놓은 동탑이나마 살펴보지만 이건 영 아니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서탑과 희멀건 동탑을 비교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인 까닭이다. 온 나라 방방골골의 허다한 석물공장들에서 날마다 빚어내는 현대판 석탑들 중 가장 큰 것을 가져다 놓은 듯한 느낌뿐이다.
꿩이 아니면 닭이라고 했다. 미륵사터에서 금마 네거리로 나온다. 오른쪽으로 돌아 720번 도로를 타고 익산시 방향으로 2km가량 가면 다시 작은 네거리가 나온다. 오른쪽에 '익산 쌍분'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이다. '서동요'로 알려진 두 사람의 이야기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만큼이나 온 국민에게 알려진 연애담이니, 익산쌍분을 찾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미륵사터 인근에 있는 무왕과 선화공주 무덤
이름은 쌍분이지만, 두 무덤은 약 200m가량 떨어져 있다. 더 남쪽에 있는 선화공주의 무덤을 떠나 솔숲길을 타고 북쪽으로 걸으면 무왕의 묘에 닿는다. 안내판은 각각 '대왕릉'과 '소왕릉'이라고 표시하고 있지만, 실제를 보면 둘 다 예상보다 봉분이 작다. 선화공주의 무덤은 왕릉이 아니니 왈가왈부의 대상도 아니지만, 무왕의 묘 역시 초라하다. 망국의 왕이니 어쩔 것인가. 원천석이 읊은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하노라'가 마치 무왕을 위해 지은 노래가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하지만 큰 무덤을 보려고 익산쌍분까지 온 게 아니다. 지금도 서동은 하늘나라에서 밤마다 선화를 남몰래 안고 다닐까. 무왕과 선화공주의 영혼이 있어 언젠가 이곳을 찾는다면, 그들도 아마 2016년은 되어야 미륵사터를 방문하리라. 나무 그늘 아래에서 땡볕을 피하며 나는 문득 그런 상상에 젖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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