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최고의 문장가 崔致遠(최치원)의 '題伽耶山讀書堂'(제가야산독서당)
狂噴疊石吼重巒
(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
(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
(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
(고교유수진롱산)
"첩첩 바위 사이 광분하듯 쏟아져
겹겹 봉우리 울리고
사람 소리 지척간에도
분간할 수없구나
세상 시비 다투는 소리 들릴까
항상 두려웠는데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싸 버렸구나"
/崔致遠(최치원), 출전/동문선
*題(제) ~에대해 논하다
*疊石(첩석) 첩첩이 쌓인 돌
*重巒(중만) 겹겹 산봉우리
*敎(교) ~하여금 하게하다
*籠(농,롱) 둘러싸다
*盡(진) 완전히~다하다
가야산에 가면 신라 최고의 문장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미상)이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면서 시를 짓고 책을 읽던 독서당터가 있다. 해인사 입구 홍류동계곡에 있는 농산정 부근 바위가 유적지다. 그가 바위에 새겼다는 칠언절구 시는 흐르는 물에 닳아 없어졌고, '고운최선생둔세지'라는 표지석만 남아있다.
'가야산 독서당에 부쳐'라는 그의 둔세시(遁世詩)는 천년전에도 세상의 가장 큰 시빗거리는 정치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6두품집안 출신이었다. 성골 진골이라야 중앙정계로 출세할 수 있는 골품 신분제에 막혀 더이상 관직에서 올라갈 수 없었다. 당나라에 유학중 신라 왕실의 부름을 받고 귀국했지만 지방 한직을 맴돌았다. 결국 그는 '시무십여조'라는 정치개혁안을 진성여왕에게 제출한뒤 은퇴를 선언하고 가야산으로 입산,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때 나이가 불혹, 한창 일할 때였다. 최치원의 정계은퇴는 6두품의 관료 진출 거부로 이어졌다. 6두품은 진골 바로 밑 최고실무계급으로 하위관리들과 진골을 잇는 링크였다.
당나라에서 10여년간 유학하면서 보고 배운 것을 토대로 고국에 돌아와 새로운 정치를 하고싶은 의욕에 차있었지만 골품제에 꽉막힌 신라에서 그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진골 기득권층의 견제, 감시로 기를 펼수가 없었다.
그 무렵 남긴 시다.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롱산).
가야산 계곡옆에 독서당을 만드니 폭포같이 흐르는 물소리가 병풍처럼 산을 둘러싸 산밑 세상의 시비(是非), 옳고 그름을 다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정치가 얼마나 지긋지긋했으면 산속으로 숨어 폭포소리로 귀를 막았을까. 이 구절은 천년이 더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실감난다.
통일신라는 결국 신분제 때문에 국론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지방호족의 반란과 농민들의 봉기 등으로 체제가 무너지면서 고려에 흡수된다.
가야산 해인사 입구 홍류동계곡에 있는 농산정(사진 위)과 최치원이 칠언절구 시를 새겼다는 '고운최선생둔세지' 표지석(사진 아래)
'고운최선생둔세지' 표지석. 둔세(遁世/遯世)는 세상을 피하여 은둔한다는 뜻.
[출처] 신라 최고의 문장가 崔致遠(최치원)의 '題伽耶山讀書堂'(제가야산독서당)|작성자 오월붓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