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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물갈퀴가 돋아난☆]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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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갈퀴가 돋아난]
김시림 시집 / 천년의시 085 / 주) 천년의시작(2018.10.15)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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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갈퀴가 돋아난
김시림
강가 모래톱
촘촘히 찍힌 새 발자국들
그 위에
내 발을 얹는다
물갈퀴가 돋아난
내가
성큼성큼
강으로 들어가 버린다
바람의 발자국
김시림
그물 무늬 신발을 신고
비릿한 갯내음 풍기며
물 위를 떠돌다가
모래톱 둔덕에
물결 모양으로 가지런히 잠든
바람의 발자국들
그 발에 가만가만 입 맞추는
노랑나비
피어나는 갈대꽃에
좀 전에 앉았던
철길
김시림
고등학교에 진학해 자취하던
산수동 굴다리 지나 철길 근처
주인아주머니와 걸터앉아 얘기 나누던 안채 툇마루
학교가 다른 학생들이 두 명씩 깃들어 살던 자취방
마당에 공동 수도가 있던 집
나는 철로 따라 선반처럼 걸린 둔덕길을 걸어
학교에 가곤 했다
목포 순천 오가던 경전선 기차
건널목 깃발 흔들던 제복 입은 아저씨
철로 사이 가녀린 몸 뒤척이던 제비꽃
언제부턴가 늘 그 자리에서 마주치던
조대부고 교복을 입은 키 큰 남학생
선잠결 내 귓바퀴를 맴돌아
아득히 멀어지던 기차 소리처럼 한 번의 눈짓도 없이
엇갈리려간 소년이 있던 철길
창가에 앉아
김시림
어릴 적 나는
바닷가 바위에 앉아 있곤 했다
엄마를 기다리다 심심하면 쑥색 바위옷을 벗겨
신발에 낳고 다녔다
발바닥에 잎맥처럼 물들던 노을빛
썰물 진 갯벌
팔을 휘저어 초승달 문양을 그려가며
꼬막 잡던 엄마
깊이 빠진 장화 발자국마다
쪼그려 앉아 졸던 석양
줄지어 날던 도요새 떼 날갯짓에
파닥거리던 금빛 수평선
엄마는 석양 수평선 그리고 나를 한 광주리에 담아
밀물을 끌고 오셨다
물결 같은 기와 처마
흰 구름 몇 조각 뜬 하늘
태극무늬처럼 사이좋게 담긴 찻잔의 창가
그물을 깁다
김시림
젊은 날
설익은 채로
흘러가 버리고 만
사랑이
주름진 점박이 얼굴로
마주 앉아
듬성듬성
추억의 그물을 깁는다
설원 속 화석처럼
아무런 동요도 없이
가라앉아 있던 조각들이
벌 떼처럼 들고일어나 전율하며
서로의 그물코에 걸리는
참새와 목련
김시림
장이 섰나
아침부터 새소리 부산하다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찾아봐도 보이지 않더니
요놈들 봐라,
제 몸 색깔과 닮은
동짓달 하순의 목련 거지에
수십 마리 열매처럼 떼 지어 앉아
껍질에 단단히 쌓인
꽃망울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있다
길
김시림
도깨비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는
안산 앞 중샘 길을 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깨져도
뒤 한 번 돌아보시지 않고
쌩 앞서가셨던 아버지
혹여 일으켜 안아줄까 하고
산이 떠나가도록
하늘이 깨지도록
고래고래
소리쳐 울어도 소용없었다
갈수록 막막하기만 한 인생길에서
넘어지더라고 혼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려주시고는
길 따라 쭉 가버리시는 아버지
그래서일까
아버지의 나이가 지났는데도
나는 길을 가다가
자주 나를 잃어버린다
자두나무집
김시림
오지게 열매를 품고
폐가를 지키던
자두나무
기울어진 슬레이트 지붕을
바꾸고 집 단장을 하였다
자두 딸 때
성묘할 때
김장할 때
다시 일가식솔을 품을 수 있게 된 집
꽃 같은 막내딸이
나리꽃 한 다발을 뿌리째 들고
사립문 들어서자
엉덩이를 들썩이며 환하게 웃는 집
자두 자루들이 옹기종기 모인 마루에 앉아
뽕나무 잎 넣고 삶은 다슬기 솔살 빼먹는데
소낙비 내린다
첩첩 산들을 밀었다 당겼다
그네 태우며
흙 마당을 난타하는 빗방울들
낙엽을 닦으며
김시림
내 발등으로 뚝 떨어진
선홍색 고운
돛단배 같은 벚나무 이파리 하나
지금 막 지고 만
우주의 생명 한 잎
수없이 물을 길어 나르던
잎맥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닦다가
이미 이파리 의 일부가 된 먼지를 닦다가
오래전애 가신
시아버님을 생각한가
요관암 말기 증상으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던 다리
숨구멍마다 이슬방울처럼 솟아나던
그 진물 다시 닦아드리고 싶다
만월
김시림
형광 꽃구름 머리에 인
윤칠월 열나흘 달
원효대교 동편 하늘 언덕 오르다가
나를 보고 활짝 웃는다
내 마음 밭에선
내일의 문을 열 씨앗들이
싹을 틔우느라 톡톡톡
가슴 안벽을 발길질하고
해와 달
별과 바람이
쉼 없이 넘나들며 가꿔놓은
내 들녘에 무수히 깔린 희망들
무엇이든지 심고
무엇이든지 거둘 수 있는
마흔 두 살의 내가
만월 속에서 웃는다
관계
김시림
구름
바람
천둥
번개는
하늘의 무늬
꽃이 피어나고
지진과 해일이 일기도 하는 것은
땅의 무늬
사람이 행하는 그 모든 것은
사람의 무늬
하늘 땅
사람
너 그리고 나의무늬가 모두 같다면
세상은 어떤 빛깔이 될까
달라서 섞이지 못하는
너와 나의 관계가 서글픈 날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
굴러가는
우주의 톱니바퀴를 생각한다
레인스틱을 연주하다
김시림
세계 민속 악기 박물관 벽에 기대고 있는
침례 북부 원주민들이 비를 기다리며
연주했다던 레인스틱
선인장 속을 파내고
관 안쪽에 나선형으로 가시를 박아
씨앗이나 곡식 낱알을 넣어 만들었다는데
그 심장을 잃은 선인장은 얼마나 아팠을까
다른 씨앗을 자기 속에 품게 될 때까지
몇 계절이나 흘렀을까
옛집 슬레이트 지붕 위를 발로 두드리던
빗방울 소리를 내는 악기
홍역 앓던 내 유년의 이마 위에
물수건을 갈아주던 엄마
레인스틱을 연주하자
빗소리 사이사이 자욱하게 깔리는
엄마의 실루엣
술
김시림
상병인 아들 휴가 첫날 밤
아들이 대학 선배와
아들의 지도 교수와
아들의 시인 엄마가
한데 어울려 술을 마셨다
어느 바다 심연애서 노닐다가
영문도 모른 채 잡혀 오고만
통오징어 안주
술자리가 중앙아시아 마카로니 밀밭처럼
무르익을 때
죽통이 그려진
참이슬 후레쉬 병을 높이 들어 올린 교수
“나는 이것을 암흑의 세계로 흘러가는
썩은 물이라고 생각한다.”
술이 깬 아침이면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실수를 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무섭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다
비 오는 날
김시림
출근 길 버스 차창에
말줄임표를 찍는 빗방울들
쌀알만 한 것들이 골을 타고
내려오며 동무를 만나
얼싸안으면 두 배씩 커지다가
또그르르 굴러 내린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의
내 얼굴이 차창에 어른거리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턱을 괸 채 새치름하던 줄임표 하나
얼떨결에 떠밀려 간다
와온에서
김시림
순천만 와온해변과
솔섬을
잇는
구불구불 날리는 엄마 옷고름 같은 수로
솔섬을 바다로부터 불쑥 들어 올리고 있는 소나무
그물에 걸려 파닥거리는 숭어 몇 마리
햇살 부스러기를 들에 업은
갯지렁이와 도요새와 말미잘
금줄처럼 걸린 해안 모래밭에 앉아
갯지렁이를 잡아먹고 있는
도요새를 노트에 그려 담다가
이제 막 도요새가 목구멍으로 넘긴 저 갯지렁이는
갯지렁이인가 도요새인가 생각하다가
또한 엄마 갯마중 나가던 어린 나를 생각하다가
국화 꽃잎처럼 내민 말미잘 촉수를 건드려본다
꽃숭어리를 닫아걸고 갯벌 속으로
쑥 들어가 버리는 말미잘
병실에서
김시림
새벽 세 시 반
홀로 깨어 창밖을 본다
불이 가고 없는 빌딩 숲
공동묘지처럼 수척하게 늘어선 가로등
소리를 내려놓은
신촌 문산 간 고즈넉한 철로
문득 고향에 가고 싶다
나와 함께 아버지를 기다리던 원추리꽃
큰 바다가 있다는 걸
아직 몰랐던
어린 내 바다에 가고 싶다
풀꽃 길을 걷다
김시림
온천 마을 유후인由布院을 품에 푹 안은 물안개
머플러처럼 좁다란 길을 걷다 보면
아담한 집 마당 나무들마다 피어난 푸른 이끼
긴린코(錦鱗湖)
바닥이 훤히 보이는 호구에
나무들을 데리고 온 휴유다케 산등성이
구름덩이를 데리고 온 하늘이 다칠까 봐
살~살~살~
움직이는 물고기들
이끼에서 자라는 풍란을 닮은 풀꽃 길을 걷다
하관下棺하던 엄마를 지나
산등성이 쪽으로 날아가던 노랑나비를
오래 눈으로 따라갔던 기억
이끼 속 풀꽃들처럼
내 생각 속에
세 들어 살고 계시는 엄마
징검다리
김시림
흐르는 물결 위에 석양 덩어리가 풀어지고 있다
석륫빛 스웨터를 입은 나의 엄마가 징검다리를 건넌다
풀벌레소리가 건너고
잠자리 떼가 따라 건너고
한 번 건너가면 왜 못 오나
징검다리는 나의 엄마와 풀벌레 소리와 잠자리 떼를 건너
아득히 사라진다
오리나무 숲에서
김시림
길을 잃고 헤매다가
솟대 같은
천년 바위 같은
그대를 만났지
수문에 갇혔던 몸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포말꽃을 피웠지
공원
김시림
쌈지공원 앞
삼각주 모양의 한평공원
비람의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는
사루비아 백일홍 맥문동 박하
주목나무 가지를 흔들어 대는
돌고래 모빌
자투리 공간에 꽃과 나무를 심어 만들었다는
공동체 정원 팻말 앞에 멈춰 서서
불러보는 꽃 이름들
아버지랑 만들었던 꽃밭에서
피어나던 백일홍
먼 나라
돌핀 크루즈에서 보았던 돌고래
텅 빈 운동장 웅덩이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피어나는 이야기 방울들
한 사람을
김시림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속사람
백을
견디는 일이다
한 사람을 잊는다는 것은
내 속사람
천을
지우는 일이다
강물에 빗방울을 떨어지고
천둥 번개는 하늘을
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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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연달아 먼바다의 푸른 집을 지고 와선
백사장에 부려놓은 파도를
갯것 해 나르던 엄마처럼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고
가슴에 구멍 숭숭 뚫린 채
몸을 뒤척이는 조가비들
잠 못 이루던 아버지처럼
엄마 아버지께 이 시집을 바친다.
2018년 가을
김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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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림 詩集 [※물갈퀴가 돋아난※]
[ 해설 ] -
바다 체험과 가족 서시, 그리고 자연 서정
공광규. 시인
1.
김시림은 1965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여 성장,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1991년에 등단하여, 그간 여러 권의 시집을 내었다. 이번 시집에 등재된 시들을 개관하면 가족 서사의 수용과 바다 심상의 전면화, 그리고 자연 서정의 심화일 것이다. 유년기에서 현재까지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회감 형식의 시가 대부분이다.
시인은 많은 시편에서 가족 서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주제를 진술해 나가고 있으며, 그가 태어나고 자란 바다를 중심으로 한 심상을 시의 공간적 물리적 배경으로 배치하고 있다. 또 자신이 경험한 화초와 수목 등 식물을 전면에 동원하여 자연 서정을 심화시키고 있다.
김시림의 시에서 출현하는 가족은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 남편과 아이들, 시가의 어른들로 다양하다. 주제든 소재든 가족이 언급되는 시편들이 시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 가운데 엄마나 어머니가 언급되는 시는 「솔방울 떨어지고」「남리 장날」「어머니」「목걸이」「와온에서」「창가에 앉아」등이다.
어릴 적 나는
바닷가 바위에 앉아있곤 했다
엄마를 기다리다 심심하면 쑥색 바위옷을 벗겨
신발에 넣고 다녔다
발바닥에 잎맥처럼 물들던 노을빛
썰물 진 갯벌
팔을 휘저어 초승달 문양을 그려가며
꼬막 잡던 엄마
깊이 빠진 장화 발자국마다
쪼그려 앉아 졸던 석양
줄지어 날던 도요새 떼 날갯짓에
파닥거리던 금빛 수평선
엄마는 석양 수평선 그리고 나를 한 광주리에 담아
밀물을 끌고 오셨다
물결 같은 기와 처마
흰 구름 몇 조각 뜬 하늘
태극무늬처럼 사이좋게 담긴 찻잔의 창가
-「창가에 앉아」전문
팔을 갯벌에 휘저어 초승달 문양을 그리고, 장화 발자국마다 석양이 담겨 졸거나, 파닥거리는 금빛 수평선 등 감각적 심상이 두드러진 시다. 가족 가운데 어머니는 자녀들과 가장 친밀한 관계일 것이다. 화자의 어머니는 갯벌에 나가 일을 하고, 과거의 어린 화자는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시는 성인이 된 화자가 창가에 앉아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술된ㄷ. 어린 화자는 갯벌로 일을 하러 나간 엄마를 기다리다가 심심하면 바위옷을 벗겨 신발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엄마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에는 노을이 있고, 노을은 어린 화자의 벗은 발바닥을 잎맥처럼 물들인다.
시에서 엄마의 갯벌 노동은 아름답게 묘사된다. 당시 엄마는 노동 자체가 고역스러운 것이겠지만 노동과 먼 아이의 입장에서는 노동이 보이지 않고 따뜻한 엄마만 보이며,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뿐이다.
갯벌에 도요새가 날고 수평선은 금빛으로 아름답게 파닥거린다. 아름다운 석양과 수평선, 그리고 어린 화자를 광주리에 담아서 이고 가는 엄마, 그 뒤를 밀물이 따라오고 있다. 아름답게 심상화된 바닷가 풍경이다. 화자가 앉아서 회사하고 있는 찻집의 기와 처마도 물결을 닮았다고 하는데, 아마 이 시는 여기서 착상과 상상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시「목걸이」에서 화자는 “부부 동반 여행 갔다가/장곡해변에서 주워 온/구멍 난 굴 껍데기를 실에 꿰어/목걸이를 만들다가 엄마 생각을 한다”. 화자는 “바다 한복판/징검돌밭 같은 굴 양식장에서 채취한/굴 덩이들을 모아두었다가/남리장 전날” 밤새워 굴을 까던 엄마를 회상한다.
시「와온에서」는 와온해변과 솔섬을 잇는 수로를 “구불구불 불 날리는 엄마 옷고름”으로 비유하거나, 해안 모래밭에서 갯지렁이를 잡아먹고 있는 도요새를 보고 엄마 갯마중 나가던 어린 자신을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엄마는 생전에 꽃을 좋아했는데, 시「어머니」에서 “나팔꽃보다 일찍 일어난” 칠순의 엄마는 “꽃들과 눈 맞추고”는 “크면 큰 대로/작으면 작은 대로/꽃들은 어찌 이리도 이쁘다냐?”하면서 감탄을 한다. 시를 통해 엄마가 “마흔일곱 혼자 되”었고, “사 남매 자식”을 키웠음을 알 수 있다.
오래전 엄마가 심어놓고 가신
부추꽃이 하얗게 피었다
장날 아침
솔 좀 베어라
주문하시던 엄마
마당 한편 부추밭에 쪼그려 앉아
자릿세 낼 솔을 벨 때
솔솔 나던 향기
사리와 조금
물때를 가리지 않고 잡은
갯것을 머리에 이고
자라목 십 리 길을 걸어 장에 가시던 엄마
나도 엄마 따라 장에 가서
뻥튀기 소리 들리는 어물전
굴 꼬막 숭어 파래 낙지 새우 붕장어 칠게
지척의 바다가 대야마다 들어앉아
흥정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석양이 내려앉은 고무 대야에선
할머니가 좋아하는 홍시
할아버지의 봉초封草
나와 동생의 해당화색 원피스가
한 동무 디어 까불거렸다
-「남리 장날」전문
시에서 화자의 엄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자리에는 “부추꽃이 하얗게 피었다.” 엄마는 장날 아침이 되면 “솔 좀 베어라”하며 주문했다. 화자는 “마당 한편”에 있는 부추밭에 쪼그려 앉아서 솔을 베면서 맡았던 오래전 향기를 떠올린다. 엄마는 물때를 가리지 않고 잡은 갯것을 머리에 이고 십 리 길을 걸어 장에 가서 판다.
어린 화자는 엄마를 따라 시장 어물전에 가서 대야마다 갯것을 놓고 흥정하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갯것을 판 돈으로 할머니가 좋아하던 홍시와 할아버지가 피우던 봉초, 나와 동생의 해당화색 원피스를 사다 놓고 있다. 파장 무렵인 저녁이 되자 석양은 갯것이 담겼던 고무 대야에 내려앉는다.
장을 보려 가려고 아침부터 분주하게 아이들을 깨워 솔을 베게 하고, 틈틈이 잡은 갯것을 머리에 이고 걸어서 장에 가는 엄마, 그리고 엄마를 따라 장에 가서 어물전의 모습을 관찰하고, 저녁이 되자 갯것을 판 돈으로 식구들이 좋아하는 과일이나 담배, 옷가지를 사는 수십 년 전 시골 시장의 풍속사가 시 한 편에 오롯이 담겼다.
2.
김시림의 시에서 아버지가 제재로 언급되는 시는 「병실에서」「아버지1」「아버지2」「아버지3」「공원」「길」「겨울」등이다. 시를 통해 얻은 정보를 정리해 보면, 아버지는 염전을 개간하다 해일로 인해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엄마나 어머니를 제재로 한 시들이 보여 주듯 아버지 역시 바닷가의 삶이었다.
양복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애수 어린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내 지갑 속
돌아가신 아버지의 흑백사진 한 장
바다와 만호염전 사이
긴 둑을 지나 외딴 산기슭에
오두막을 짓고 염전을 개간하셨던 아버지
해일海溢은 완공되기도 전에
염전을 휩쓸어 가고
바다 기슭 의자바위로 냅다 달려온 파도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을 아버지의 꿈
바다에 나가 손 그물질을 하거나
어린 나에게 노래를 불러 주셨는데
방조제를 넘나들던 애수 띤 클레멘타인
지금도 대처를 향해 응시하는 아버지의 시간은
연이어 파도 이랑을 몰고 오는 바다처럼
내 시간에 덧대어져
나를 경작耕作하고 있다
-「아버지1」전문
화자는 자신의 지갑 속에 있는 아버지의 흑백사진을 본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양복을 정갈하게 입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화자의 아버지는 산기슭에 오두막을 짓고 염전을 개간하였으며, 염전이 완공되기도 전에 해일이 휩쓸어 간 것이다. 결국염전을 하려던 아버지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이후 아버지는 바다에 나가 손으로 그물질을 하여 가족의 생계를 이었으며, 어린 화자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노래는 ‘클레멘타인’이었다. 출세를 꿈꾸며 대처를 향하여 꿈꾸던 과거의 아버지와 먼 곳을 응시하는 사진 속의 아버지 눈이 겹친다. 이런 아버지의 시간에 덧대어져 화자는 자신을 경작하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처음에는 해왕염전이 바라보이는 곳에 묻었다가 나중에 자라섬이 보이는 곳으로 이장했음을 시「아버지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는 화자가 열일곱 정월 대보름에 돌아가셨다. 30년 된 무덤 속에 있는 뼈를 풀과 나무뿌리가 감고 있다. 이 뼈는 화자를 “이생으로 건네준 뗏목”이다. 상추 상자 하나에도 차지 않는 뼈들은 그리움의 양보다 적다.
「아버지3」에서 시인은 죽음을 “썰물처럼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그리움이 “밀물로 온”다고 한다. 죽음과 그리움을 감각화 사물화하고 있다. 시「공원」에서는 쌈지공원 앞에 피어있는 백일홍을 보고 “아버지랑 만들었던 꽃밭”을 떠올린다.
도깨비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는
안산 앞 중샘 길을 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깨져도
뒤 한 번 돌아보시지 않고
쌩 앞서가셨던 아버지
혹여 일으켜 안아줄까 하고
산이 떠나가도록
하늘이 깨지도록
고래고래
소리쳐 울어도 소용없었다
갈수록 막막하기만 한 인생길에서
넘어지더라도 혼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려주시고는
길 따라 쭉 가버리신 아버지
그래서일까
아버지의 나이가 지났는데도
나는 길을 가다가
자주 나를 잃어버린다
-「길」전문
이처럼 아버지들은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인생의 길을 가르쳐 주지만, 자식들은 대부분 성인이 되어서야 깨닫는다. 화자의 아버지는 무서운 길을 가면서 어린 화자가 넘어져 무릎이 깨져 울었는데도 그냥 앞서서 갔다고 한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보니 “막막하기만 한 인생길에서/넘어지더라도 혼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시「겨울」은 고향인 해남에 눈이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의 염전과 방조제, 흰 갯벌이 차일처럼 펄럭거리겠다고 상상을 하다가 “아버지 머리 하얗게 덮어버린 염전/눈 마당 쓸다가 코끼리만 한/눈사람 하나 만드시던 아버지”라고 회상한다.
가족이나 친지를 소재로 담은 시를 더 보자면, 여름날 큰 오빠와 청평사 계곡에서 메기매운탕을 먹는 얘기를 쓴 「큰오빠」, 장가게 여행에서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문 형식의「장가게에서」가 있고, 남편을 “온몸을 활처럼 구부리고/제 몸보다 작은 배청채 장다리꽃 화분을/모으고 있는 꿀벌”로 형상한「꿀벌」, 아들과 일화를 시로 엮은「삼층탑」과「아들과 은행나무 아래서」「술」이 있다.
남매들이 외국 여행을 가서 술을 마시다가 고향과 아버지를 회상하는「하롱베이」, 아래층으로 이사 온 사람이 들고 온 시루떡을 보고 제삿날 큰엄마 작은엄마 당숙모들의 도란도란 음식을 하던 것을 생각해 내는「시루떡」, “국숫집을 나오다 만난/녹슨 펌프가 있는 옛날 샘터”를 보고서 펌프질을 해서 저녁밥을 짓던 화자를 업어 키워주신 외할머니를 회상한「행주산성에서」, 붉은 벚나무가 지는 것을 보고 오래전에 돌아가신 시아버님을 생각하는 「낙엽을 닦으며」도 가족이나 친지들이 소재로 들어간 시들이다.
3.
바닷가는 “나와 함께 아버지를 기다리던 원추리꽃”이 있는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병실에서」“큰 바다가 있다는 걸/아직 몰랐던/어린 내 바다에 가고 싶다”고 한다.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체득한 어린 바다, 유년의 바다는 모든 시의 기저에서 핵심 심상으로 작용한다.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은
철 따라 마늘 녹두 함깨 보리가 넘실거리던
밭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다와 마주하고 있었다
바다 건너 섬지라는 마을엔
빨강 파랑 회색 지붕을 한
삼태기만 한 집들이 다랑이 논처럼
층층이 산자락을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늘 그곳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내 또래 아이들 이름이 궁금했다
가끔 물살에 떠밀려 온 생활용품 빈 용기를 볼 때면
그들이 한없이 그리웠는데
쉰이 넘은 지금도 내 속에서 청보리밭처럼 일렁이는
알 수 없는 동경과 그리움은
그때 싹 튼 것인지도 모른다
-「섬지」전문
시인의 유년 체험은 아름답고 풍성하며 동화적이다. 시에서 보듯 시인은 어려서 밭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다와 마주한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았으며, 바다 건너에는 마을이 있는 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철 따라 마늘이나 녹두, 참깨와 넘실거리는 보리밭이 있고, 건너다보이는 섬에는 다양한 색상을 한 지붕이 파스텔 톤을 하고 있었다.
섬이 멀리 있어서 집이 삼태기만 하게 작게 보이는 곳에는 어린 화자 또래의 아이들이 살고 있을 것이고, 그 아이들의 이름이 궁금했다고 한다. 거기다 “가끔 물살에 떠밀려 온 생활용품 빈 용기를 볼 때”는 섬에 사는 아이들이 한없이 그리웠다는 것이다. 성인이 된 지금도 알 수 없는 동경과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데, 이때 비롯되었다고 한다.
오지게 열매를 품고
폐가를 지키던
자두나무
기울어진 슬레이트 지붕을
바꾸고 집 단장을 하였다
자두 딸 때
성묘할 때
김장할 때
다시 일가식솔을 품을 수 있게 된 집
꽃 같은 막내딸이
나리꽃 한 다발을 뿌리째 들고
사립문 들어서자
엉덩이를 들썩이며 환하게 웃는 집
자두 자루들이 옹기종기 모인 마루에 앉아
뽕나무잎 넣고 삶은 다슬기 속살 빼먹는데
소낙비 내린다
첩첩 산들을 밀었다 당겼다
그네 태우며
흙 마당을 난타하는 빗방울들
-「자두나무집」전문
자두나무가 있는 자두나무집. 부모들은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자라서 외지로 나가 산다. 시골집은 덩그러니 비어있다. 전형적인 현재 시골 풍경이다. 식구들은 집을 떠났지만 자두나무는 혼자 열매를 오지게 맺으며 폐가를 지키고 있다.
이 시골집은 화자로 추정되는 “꽃 같은 막내딸이/나리꽃 한 다발을 뿌리째 들고/사립문을 들어서”던 집이다. 집을 떠난 자식들이 나이가 들고 여유가 생기면서 기울어가던 폐가는 수리가 되고, 자두를 따거나 성묘를 할 때, 또는 김장을 할 때 모여든다.
형제들이 모여 자두를 따서 마루에 자두 자루를 옹기종기 모아놓고, 자두 자루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다슬기를 먹고 있는데 소나기가 내린다. 아마 이 시가 만들어진 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슬기를 삶을 때 뽕나무 잎은 넣는다는 것을 언제 알았을까? 이 집에 살면서 부모에게, 부모는 또 그의 부모에게 배웠을 것이다.
서사와 서정을 균형 있게 구성하는 장인의 면모를 가진 시인의 시 가운데 가장 빛나는 순간은 표제시「물갈쿠기 돋아난」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아마 이 시는 김시림 시의 주제와 방법을 압축하는 대표적 시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강가 모래톱
촘촘히 찍힌 새 발자국들
그 위에
내 발을 얹는다
물갈퀴가 돋아난
내가
성큼성큼
강으로 들어가 버린다
-「물갈퀴가 돋아난」전문
화자는 강가 모래밭을 걷고 있다. 그러다 발견한 새 발자국, 새 발자국들은 모래톱 위에 촘촘히 찍혀 있다. 그 위에 자신의 발을 얹는 화자. 그러자 화자의 발에서 물갈퀴가 돋아난다는 상상을 한다. 물갈퀴가 돋아난 화자가 성큼성큼 걸어서 강으로 들어간다니.
돋아난다는 시각적 심상과 성큼성큼으로 표현되는 동적 심상. 선명한 동선이 한 폭의 그림이다. 단정한 스케치이고 묵화이자 채색화다. 시에서 새와 사람은 같은 동물이라는, 생명체라는 공통점을 넘어 동일의 가치를 갖는다. 여기에 만물동원, 만물동근의 상상이 자리하고 있다. 표현의 절제와 심상의 활용, 새와 사람을 겹쳐 보는 생태적 상상이 독자의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물 무늬 신발을 신고
비릿한 갯 내음 풍기며
물 위를 떠돌다가
모래톱 둔덕에
물결 모양으로 가지런히 잠든
바람의 발자국들
그 발에 가만가만 입 맞추는
노랑나비
피어나는 갈대꽃에
좀 전에 앉았던
-「바람의 발자국」전문
시「물갈퀴가 돋아난」과 비슷한 상상력의 기반과 절제를 보여 주는 시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비가시성의 현상인 바람을 “그물 무늬 신발”을 신은 사람으로 형상한다. 의인화다. 바람은 비릿한 갯 내음을 풍기며 물 위를 떠돌았으며, 모래톱 둔덕에 물결 모양으로 가지런히 잠들어 있다.
바람에 노랑나비가 가서 입맞춤을 하면서 나비는 곤충에서 사람으로 의인화된다. 바람과 나비는 비생명과 생명이라는 먼 거리를 극복하고 모두 같은 생명체라는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 시인은 비생명을 생명으로, 생명을 사람으로 상상해 낸다. 시「작약꽃」과「봄날」「가지밭에서」도 서정과 절제의 백미를 이루는 시편들이다.
지금까지 김시림의 시편들을 몇 가지로 유형화하고 계열화해서 정리해 보았다. 가족이나 친지가 자주 등장하는 그의 많은 시편들은 주요 공간적 지리적 배경을 바다로 하고 있다. 그의 시 주제를 가족주의라고 해도 되겠다. 고향의 바다 체험 배경 위에 시인은 유년기의 체험을 소환하고 가족과 친지들을 호명하고 언급한다. 그래서 그를 바다 시인이라고 해도 되겠다.
이런 체험적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의 시법은 오래된, 그러면서도 현재도 유효한, 아니 시가 살아있는 한 필요한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짧은 시편들은 서사와 서정을 균형감 있게 구성하고 있으며, 절제된 표현으로 서정시의 백미를 보여준다. 짧은 시편들 속에서 시인의 창작 능력이 더욱 빛을 발한다는 생각이다. 특히 비가시성의 현상을 가시성으로 전환시키거나, 상상력을 발전시키는 방식은 그만의 특기이고 개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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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이번 시집에 등제된 시들을 개관하면 가족 서사의 수용과 바다 심상의 전면화, 그리고 자연 서정의 심화일 것이다.
가족이나 천지가 자주 등장하는 그의 많은 시편들은 주요 공간적 지리적 배경을 바다로 하고 있다. 그의 시 주제를 가족주의라고 해도 되겠다. 고향의 바다 체험 배경 위에 시인은 유년기의 체험을 호환하고 가족과 친지들을 호명하고 언급한다. 그래서 그를 바다 시인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리고 그의 짧은 시편들은 서사와 서정을 균형감 있게 구성하고 있으며, 절제된 표현으로 서정시의 백미를 보여 준다. 짧은 시편들 속에서 시인의 창작 능력이 더욱 빛을 발한다는 생각이다. 특히 비가시성의 현상을 가시성으로 전환시키거나, 상상력을 발전시키는 방식은 그만의 특기이고 개성일 것이다. ― 해설 중에서
❚신간 소개 / 보도 자료 / 출판사 서평❚
1991년 『한국문학예술』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시림 시인의 시집 『물갈퀴가 돋아난』이 천년의시 0085번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다수의 시편에서 가족 서사가 전면에 등장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바다가 다수 시편에서 공간적 배경이 되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시인은 삶 가까이에 존재하는 자연물을 시어로 택하여 자연 서정을 심화시킨다. 유년기에서 현재까지의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회감 형식의 시들은 고향의 바다 체험과 유년기의 체험이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 풍경과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해설을 쓴 공광규 시인은 이번 시집에 대하여 “그의 짧은 시편들은 서사와 서정을 균형감 있게 구성하고 있으며, 절제된 표현으로 서정시의 백미를 보여 준다. 짧은 시편들 속에는 시인의 창작 능력이 더욱 빛을 발한다는 생각이다. 특히 비가시성의 현상을 가시성으로 전환시키거나, 상상력을 발전시키는 방식은 그만의 특기이고 개성일 것이다”라고 평했다.
시인의 유년 체험은 아름답고 풍성하며 동화적이다. 이는 시인이 보이지 않는 개인의 감정이나 감회를 눈에 선연하게 감지되는 자연물과 핍진성 있는 가족 서사로 풀어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해설의 말처럼 “그의 시 주제를 가족주의라고 해도 되겠”고 “바다 시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출처] 천년의시 0085 김시림 시집 물갈퀴가 돋아난|작성자 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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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림 시인∥
∙ 1965년 전남 해남 출생.
∙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에창작과 졸업
∙ 1991년 『한국문학예술』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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