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 사람의 삶은?
- 출생과 사망
1501년 11월 25일(연산군 7)~ 1570년 12월 8일(선조 3)
-그의 호
지산(芝山)·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이고,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특히 퇴계는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인격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담겨 있다.
- 성장배경
경북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2살부터 <논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20살쯤에는 <주역>에 심취한 나머지 건강을 잃어 그 후 여러 질병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 추구했던 이상향
'퇴계' 라는 호조차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횡포에 대한 반발이었듯이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여 어지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아가 한 시대를 바로잡는 일을 접고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히는 일'을 자신의 천명으로 삼았다.
- 직업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서, 조선 성리학의 기초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며 기에 대한 이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이후 주기론을 강조하는 영남학파의 시초가 된다.
-그의 주요 사상
이기호발설: 사단을 이의 발현으로, 칠정을 기의 발현으로 보는 주리론적 학설.
경: 주자가 도덕적 수양방법으로 거경궁리를 강조, 이황은 경을 마음과 행동을 바르게 할 뿐만 아니라 궁리를 심화시키기 위한 핵심적 원리로 보았다.
이기이원론: 만물의 존재가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고 그 연원은 같지 않으며 이를 중시한다. 이는 이이의 이기일원론과 대립되는 사상이다.
- 인간관계
퇴계의 인간관계는 고봉 기대승과의 연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퇴계는 무려 13년간 안동과 광주에서 편지로 기대승과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을 펼쳤다. 퇴계는 고봉을 존경했고 그에 따라 예를 다해 존대하였다. 그는 성학십도를 집필할 때 고봉에게 수정을 부탁했으며 그의 생각을 수용하고 자신의 생각을 고치기도 하였다. 고봉 역시 스승을 존경했고 스승과 제자의 우의를 다했다. 고봉뿐만 아니라 율곡 이이등 당대 유명한 유학자들과 논쟁을 펼치기도 하였다.
- 명언
'심신을 함부로 굴리지 말고, 잘난 체 하지 말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심신을 수련해야 한다'
'부귀는 뜬 연기와 같고 명예는 나는 파리와 같다', '제 힘으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자포자기와 같다' 등이 있다.
- 이사람의 특징
청백리: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 근검, 도덕, 경효, 인 등의 덕목을 겸비한 이상적인 관료상으로써, 조선시대에 총 217명이 배출되었다.
사단칠정논쟁: 고봉 기대승과의 논쟁으로 퇴계는 이가 움직이면 기가 이를 따르고 기가 움직이면 이가 기를 탄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고봉은 인의예지의 사단이 이라면 희로애구애오욕의 칠정 역시 이가 되어야 하고 칠정이 기라면 사단 또한 기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의 우월성 자체를 부정했다.
3. 그밖에 이사람과 관련된 책들에는
<성학십도>
갓 왕위에 오른 17살의 어린 왕이 성군이 되기 바라며 성학의 개요를 그림으로 나타낸 책으로, 성학은 크게 유학을 지칭, 모든 사람들이 성인이 되도록 하는 학문이라는 의미 내포하고 십도란 태극도, 서명도, 소학도, 대학도, 백록동규도, 심통성정도, 인설도, 심학도, 경재잠도, 숙흥야매잠도를 칭한다.
만물의 생성과 우주의 구조, 그 안에서의 인간의 위상, 학문의 체계, 인간의 본성과 감성의 구조와 작용 과정, 이러한 학문을 일상 생활에서 수양하고 실천하는 방법까지 아우르는 체계적인 교과서이다.
이 이외에도 <무진육조소>, 기대승과의 문답을 엮은 <사단칠정분리기서>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