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잠언 1장 1절 – 33절) 1: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10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15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16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19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21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22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26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29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30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31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33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개역개정) 오늘부터 잠언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본서는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1:1)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잠언”서의 저자가 “다윗의 아들”로서 당시 통일 왕국시대의 “이스라엘 왕”이었던 “솔로몬”의 저작인 것으로 선언됩니다. 그러나 22장에서는, “지혜 있는 자의 말씀”(22:17)이라고 하여 익명의 저자가 소개됩니다. 또한 25장을 시작하면서는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25:1)고 선언함으로써, 세월이 흘러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리되었던 “유다”왕국의 “히스기야” 시대에 “잠언”서의 내용이 보완 첨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30장을 시작하면서는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30:1)라고 선언하고 있고, 31장에는 “르무엘 왕이 말씀한 바, 곧 그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31:1)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틀로 구성된 “잠언” 전체의 내용을 분류해보면, 1:1-9:18은 젊은이가 지녀야 할 지혜를 권면한 “솔로몬”의 제1 잠언 모음집으로, 10:1-22:16은 의인과 악인을 비교하는 여러 주제로 구성된 “솔로몬”의 제2 잠언 모음집으로, 22:17-24:34은 지혜자의 생활에 대한 솔로몬 시대 현자들의 잠언으로, 25:1-29:27은 인간관계와 생활 자세에 대해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솔로몬의 잠언으로, 30장은 어리석음과 지혜에 관한 “아굴의 잠언”으로, 31장은 현숙한 여인에 관해 “르무엘…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결국 “잠언”서 전체의 주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지혜를 추구하는 자가, 생활 가운데 실천해야 할 의로운 삶에 관한 권면의 내용입니다. “솔로몬”(주전 970-931년)은 국가의 기틀을 잡으면서 신정(神政) 국가로서 백성들의 올바른 삶에 대한 정체성을 위해 저작한 것으로 보이며, 종교 개혁가였던 “히스기야”(주전 715-686년)는 신정국가로서의 신앙적 회복을 위해 “솔로몬의 잠언”을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잠언서의 저작 연대를 이들이 왕성하게 통치했던 주전 950년대에서 주전 700년대 사이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1. 잠언의 목적과 유익을 어떻게 말씀합니까? “잠언”(箴言,Proverbs)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가르쳐서 훈계하는 말’이라는 뜻으로서, 성경적으로는 “솔로몬” 왕의 경계와 교훈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진 사실이나 명백한 진리를 함축성 있는 문장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속담보다 광범위한 것을 의미하며, 격언, 금언, 지혜로운 조언, 현자들의 발언 등을 가리킵니다. “잠언”서의 전체적인 내용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법(뜻)을 준수하는 지혜자의 길을 걸을 것을 권면합니다. 당시 다윗 솔로몬 왕조를 통해 통일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면서 경제적으로도 풍요해지자,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풍요와 안전의 시대에 현실에 안주함으로써, 말초적 쾌락에 빠져서 영적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의 지혜를 잃어버리지 말 것을 교훈합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러한 경고를 했던 솔로몬 왕 자신이 그러한 죄악에 빠졌고, 또한 이러한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는 글이 전도서라는 점에서, 우리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깨어있게 합니다. “잠언”을 기록한 신앙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참 지혜를 추구하는 자가 되어 실현해야 할 신정왕국(神政王國) 곧 하나님 나라의 신앙적 의로운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훈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은, 먼저 잠언의 서론으로서 잠언의 저자와 기록 목적과 유익을 밝히며, 본론으로서 참된 지혜는 먼저 악인의 유혹을 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권고와 지혜의 초청에 응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솔로몬의 잠언”이 기록된 목적을 어떻게 말씀합니까? 첫째는,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1:2)라며, 하나님께 이르는 바른 길과 그릇된 길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지혜”는 원어적으로 ‘호크마’라는 단어로, 신앙적 의미로는 ‘위로부터 난 지혜’로서 하나님께 대한 경건에서 출발하는 신앙적 실천적 특성이 함의된 ‘거룩한 통찰력’을 가리킵니다. “훈계”는 ‘도덕적 훈련, 지속적인 훈련’이라는 의미로, “지혜”의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알게 하며”는, 단지 이론적이고 지식적인 면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1:2)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깨달아 악을 버리고 의롭게 살도록 하는 올바른 성품과 인격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명철”은, 참과 거짓 곧 선과 악을 분별하고 경계할 수 있는 ‘도덕적인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1:3) 곧 “정의와 공평과 정직을 지혜롭게 실행하도록 훈계를 받게 하며”(새번역)라며, 실제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우쳐 무엇이 옳고 바르며 떳떳한지 헤아리게 하려는 것”(공동번역)이라고 밝힙니다. 여기의 “지혜”는 원어적으로 다른 ‘사칼’로, 사물을 옳게 분별하는 ‘신중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여기의 “받게”는, 받아들이는 순종적 수용 자세를 가리킵니다. 넷째는,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1:4) 곧 “어수룩한 사람을 슬기롭게 하여 주며, 젊은이들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갖게 하여 주는 것이니”(새번역)라며, 잠언을 기록한 목적이자 그 유익으로서 실제적인 지혜의 능력을 갖게 해주기 위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1:-6)며, 한계와 허물을 가진 인간들로 보다 성숙하고 올바른 삶을 살게 하는 능력과 은혜를 덧입게 될 것이라고 밝힙니다. “슬기롭게”는 타인의 간계를 피하는 능력이라면, “근신함”은 악한 계획과 행동을 주의하여 삼가 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지략”은 사람들을 지도하고 이끌 수 있는 힘을 의미하며, “오묘한 말”은 숨겨져 있는 “심오한 뜻”(새번역)을 의미합니다. 2. 첫 지혜가 왜 악한 자를 피하는 것입니까? “솔로몬”은 잠언서의 전체적 주제이자 신앙적 지혜의 기초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1:7)고 밝힙니다.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은, 참된 지혜를 추구하는 자가 시작해야 할 출발점, 또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고상하고 훌륭한 지혜, 또는 지식의 기원 또는 기초를 의미하며, 참된 지혜의 본질과 추구가 무엇이어야 하느냐를 의미합니다. “경외”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거룩한 두려움으로서, 종이 주인에게 가지는 그러한 복종적인 노예의 두려움이 아니라, 자녀가 부모를 향해 가지는 공경하는 자세로서의 인격적인 사랑의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자로 인정하며 그분만을 절대적으로 섬기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이 경험과 인식을 통해 얻는 모든 삶의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만 참된 것이며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에 반복되어 나오는 경계해야 할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어리석은 자”와 “미련한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외부 영향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미혹되기 쉬운 사람들로서, 도덕적 방향 감각이 없어서 악으로 기울어질 수 있는 단순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미련한 자”는, 이해력이 부족하고 고집이 세어 다른 사람의 충고를 멸시하며, 자신의 나쁜 생각과 마음 때문에 잘못된 길에서 돌이킬 줄 모르는 사람으로서, 도덕적 결함이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는, 이 “어리석은 자”와 “미련한 자”를, 단순히 둔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악한 자들로 규정합니다. 따라서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1:7)고 밝히는 이유입니다. 이 “어리석은 자”와 “미련한 자”가 안 믿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종교 지도자들과 신앙인들로서 하나님의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쉽게 말하면,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예배와 헌금도 열심히 드리지만, 윤리적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이고 “미련한 자”들인 것입니다. “솔로몬의 잠언”의 첫 번째 “지혜”의 권면은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1:10)며, 왜냐하면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1:19)며, “악한 자”의 유혹에 대한 분별력과 피하는 결단력을 가지는 것이 “지혜”라고 말씀합니다. “내 아들아”는 “아이들아”(새번역)라는 뜻으로, 솔로몬이 자기 자식인 르호보암을 호칭하는 표현이 아니라, 스승이 자식 같이 여기는 제자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부르는 호칭으로서, 남녀를 떠나서 훈계와 교훈을 받아야 할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대표 명사적 표현입니다. 이를 위해서,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1:8)고 당부합니다. 일반적으로 유대 가정에서 아버지는 훈육적인 교육인 “훈계”를 맡았고, 어머니는 율법의 교육인 “법”을 맡았던 것을 의미합니다. “아비”와 “어미”는 삶의 경험이 많은 자라는 의미로서, 일차적으로는 부모를 가리키는 표현이면서도, 애정으로 대하는 인생과 신앙의 스승을 가리키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들으며…떠나지 말라”는 것은, 단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떠나지 않는 실천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를 추구하는 자가 지녀야 할 바른 행동의 첫 걸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1:9)며, 참된 권위에 대한 순종의 결과로서 사회적 인격적 신앙적인 명예와 영광과 권위를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고 밝힙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가장 우선해야 할 “지혜”를,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1:10)고 한 말씀처럼 “악한 자”와 그 유혹을 분별할 줄 아는 것입니다. 특히 믿는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와 “미련한 자”를 경계해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10:16)고 말씀하셨는지를 깨닫는 이들이 복됩니다. “이리 가운데”가, 당시 자기들만 잘 믿는다며 사람들을 혐오하던 잘못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유대교인들을 가리키는 표현 아닙니까? 우리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자 해서 순진하게 사람들을 신뢰해서는 안 되고, 사람들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혜”를 세상적인 처세술로 이해해서, “뱀 같이” 자기 이권만을 추구하는 교활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지혜”와 “순결”이라는 양면성의 조화를 이룰 줄 아는 신앙인이 되라는 비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솔로몬”은 “악한 자”의 실체와 속성과 미혹을 어떻게 증언합니까? 첫째로,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1:11)라며,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괴롭히고 상해를 입히고 살상하는 것에 대한 아무런 죄의식이 없는 곧 선악 여부에 대한 판단력이 상실되어 영적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자들이라고 밝힙니다. “함께 가자”는 것은, 죄악으로의 미혹과 동참을 선동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엎드렸다가”와 “숨어 기다리다가”는, “악한 자”가 치밀하면서도 은밀하고 교활하게 음모를 꾸미는 모습입니다. 당혹스러운 것은, 이들은 자신들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살상과 고통을 안겨주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근본 자체가 “악한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스올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1:12)라며, 죽음이 생명을 삼키듯이 오직 자기 이권의 성취를 위해서라면 폭력을 위한 폭력까지 선동하는 극악하고 잔인한 자들이라고 밝힙니다. 셋째로, “악한 자”들이 그러한 음모와 선동을 의도한 목적을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1:13)라며, 세상의 부귀와 재물과 권세를 빼앗기 위해서라고 밝힙니다. 넷째로,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1:14)라며, 탈취한 노략물의 공유를 제안하며 한 통속이 되어 같이 먹고 같이 살자는 끈끈한 동지 의식의 달콤한 유혹으로 접근할 것을 밝힙니다. 악행을 통해 얻은 재물과 권세를 공유한다는 것은 같이 죄를 짊어진다는 것으로, 이러한 탐욕이 진리를 거스르는 가장 위험한 요소임을 경계합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악한 자”의 실체와 속성과 미혹을 분별하여,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1:15)며, 왜냐하면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1:16)고 경고합니다. “악한 자”가 살아가는 방식과 그 길에 걸음을 내딛지 않는 것이 악의 유혹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기에 그들의 수고가 헛것이 될 것과 하나님의 심판으로 자업자득이 될 것을, “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면 헛일이겠거늘, 그들이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1:17-19)는 비유적인 선언으로 경고합니다. 3. 지혜의 초청에 대한 두 반응과 결말은? “솔로몬의 잠언”의 두 번째 “지혜”의 권면은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1:23)며,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1:32-33)며, “지혜”로의 초청에 어떤 선택적 반응을 하느냐가 전혀 다른 상반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나의 책망” 곧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의 책망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전혀 다른 삶의 결과와 결말을 만들어 낼 것을 권면합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1:20,21)라며, 이러한 “지혜”의 훈계가 감춰진 비밀이 아니라는 것을, “길거리, 광장, 시끄러운 길목, 성문 어귀, 성중”에서 곧 우리의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듣고자하면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일부러 찾아나서야 할 필요도 없이, “지혜가” 오히려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봐달라고 외쳐댄다는 비유적 표현을 합니다. 이것은 세상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섭리하시기에 이 세상의 모든 일과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신적 지혜가 깃들어 있으며,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공개적 장소에서 큰 소리로 초청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시대 이전의 노아 아브라함 요셉 욥과 같은 신앙 선진들이, 율법을 뛰어넘는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산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시시콜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고자 했을 때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렇게 살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1:23)며, 하나님께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그들에게 부어주어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보여줄 것을 약속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눅8:8)라고 말씀하셨는지를 깨닫는 이들이 복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와 “미련한 자”의 신앙 행태를 가리켜서,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1:22)라고 안타까워합니다. “거만한 자들”은, 남을 무시하고 자기를 자랑하며 큰소리치는 것을 좋아할 뿐, 하나님을 믿기에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우습게 여기고 조롱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안 믿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행태를 가리켜서,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1:24-25)이라며,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도 이들에게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1:26)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외면하던 이들이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찾을 때가 올 것을,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1:27-28)고 말씀합니다. 예상치 못한 재앙에 당혹스러워하며 그때서야 하나님을 힘쓰고 애써 간절히 찾겠지만,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1:28)라며, 왜냐하면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1:29-30)고 말씀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재앙들을 준비할 수 있도록 “교훈”하고 “책망”했지만,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함으로써, 그 모든 것을 “미워하며… 받지 아니하고… 업신여겼”기에 당한 결말이라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1:31)며, 경건성을 잃고 악한 생각으로 꾸민 모든 일에 상응하는 큰 대가를 스스로 치르리라고 경고하며, “지혜”의 초청을 거부하지 말 것을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1:32-33)고 약속합니다. “퇴보”는 하나님의 지혜에 “등을 돌리고 살다가”(새번역)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솔로몬의 잠언”에서 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1:7)라고 강조한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삶의 모든 것을 통찰하는 근거로서, 오늘 본문에서는 “어리석은 자”와 “미련한 자”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 것과, 이러한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의 초청을 거부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1:10)며, 믿는다고 하는 “악한 자”들이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1:13-14)며, 남을 해치는 악행에 동참할 것을 미혹하고 선동할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1:19)고 경계합니다. 혹시라도 이런 길에 접어들었다 할지라도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1:23)며, 새로운 구원의 기회를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두 길과 결말을 제시하면서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1:32-33)며, 참된 “지혜”로의 선택과 결단을 요청합니다. 시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1-2)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도 “지식의 근본”이 되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5-17)고 밝힙니다. 우리가 “잠언”을 통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깨닫고, 거룩하고 복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참된 생명의 사람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