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328.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화요일. - 불평불만을 잠재우는 법. 등 )
----------------------------------------------------
230328. 사순 제5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불평불만을 잠재우는 법
죽었다가 사는 법을 얘기하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이지만
오늘 주제를 약간 빗겨나 불평불만을 잠재우는 법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독서가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께서 잠재우시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이 짧은 얘기에 불평불만의 원인과 처방이 있습니다.
우선 불평불만의 원인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양식이 있는데 그 양식이 그들에게 보잘것없어 보이고,
심지어 양식도 없고 물도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원하는 양식이 없고 충분한 물이 없는 것뿐인데 말입니다.
불만이 보통 그렇습니다.
이것이 있는데 저것을 원하니 이것이 불만이고,
이만큼 있는데 저만큼 있기를 바라니 이만큼이 불만이지요.
있는 것은 만족치 않고 없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것의 문제이고,
이 정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욕심 곧 ‘더’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또는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고 불평까지 할 경우,
이에 직방인 처방이 바로 극약처방이고 최악 처방입니다.
지금까지 백성의 요구와 불평을 들어주신 하느님께서
불평이 이렇게 계속되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으시고
이번에는 죽음이라는 최악을 극약처방 하십니다.
죽음이라는 최악을 생각하면
죽음만 아니어도 다 악이 아니고 선이 되지요.
돈이 한 푼도 없을 때는 만 원도 큰돈인 것과 같습니다.
최악이란 최선의 반대이며 선은 하나도 없고 악뿐인 상탭니다.
죽게 되면 사실 존재 자체가 사라질 판이니,
욕망은 사치이고 그래서 욕망도 사라지겠지요.
그러므로 행복하려면 우리는 스스로 최악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에 의해 최악을 맞이하고
하느님께 간청해 살 수 있는 처방을 겨우 얻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리고 진정 행복하려면
우리는 그렇게 되기 전에 스스로 욕망을 내려놓고 최악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렇게 합시다.
사랑에는 최선을 다하고,
욕망에는 최악을 각오합시다.
이렇게 하여 불평불만은 잠재우고
행복을 요즘 봄날처럼 꽃피웁시다.
----------------------------------------------------
230328.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당신은 누구요?”(요한 8,25)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신원을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8,25)
사실, 예수님께서는 앞 문장에서 이미 당신의 신원을 밝히셨습니다.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3)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을 두 가지로 밝히십니다.
<첫째>는 ‘위에서 온 분’으로, 곧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길은, 그가 어디서 왔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셨고 위에 계신 분께 속하시니, 분명 위에서 오신 하느님이시고, 위에 계신 분의 아들이신 성자이십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리스도를 머리 위에 두고 사는 사람이니 그분께 속한 이요, 올리베따노 수도회에 속해 있으니 분명 올리베따노회 수도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둘째>는 ‘내가 나’라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을 계시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나는 나다.”(탈출 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당신 스스로를 일곱 번에 걸쳐 이렇게 계시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48).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한 15,1).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릴 때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그렇습니다. 진정,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 주님께서 “내가 나”이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입은 이 빛 안에서 사순의 길을 따라 갑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4-15).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주님!
제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소서
제 머리 위에 항상 당신을 모시고, 당신께 속하게 하소서.
당신 품이 제가 살아가야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의 손길로, 저를 바꾸소서.
당신 빛으로, 제 안에 새겨진 당신 형상을 드러내소서.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전부이오니 당신께만 속하게 하소서. 아멘.
----------------------------------------------------
230328.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혼자 버려두지 않는다
국어 공부를 잘 한 사람은 ‘주제파악’을 할 줄 알고, 산수 공부를 잘한 사람은 ‘분수’를 알며, 지리 공부를 잘 한 사람은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고 말합니다. 주제를 파악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것이,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당신이 하셔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계셨고,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행함에 있어서 당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확고히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 버림받은 이들을 우선 선택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시며 명의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가 명확해졌습니다.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고 기댈 곳이 있다면, 다행입니다. 신뢰를 갖고 만날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다면 복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공감해 주고 배려하는 친구가 있다면 행운을 잡은 것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이웃을 만난 것이 기쁨입니다. 더군다나 침묵 중에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만난다면 더없이 행복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기왕이면 주님과 더불어 복을 만들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8,23).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마음과 열성을 다하여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8,29) 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되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아버지 마음에 드는 일을 함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된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그분 마음에 들어야겠습니다. 사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 21,2). 따라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지금 고달프고 힘들어도 주님께 희망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원하는 일을 함으로써 마침내 그분과 하나 된 바오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미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 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6,5). 그러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의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나를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이사41,10).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어떤 젊은이가 길에서 요술 램프를 주웠습니다. 램프를 쓱쓱 문지르니 요정이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단, 한 가지만입니다.” 그 젊은이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돈도 갖고 싶고, 예쁜 여자도 만나 결혼도 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까 한참을 망설이며 생각했습니다. 머리가 좋아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 좋은 머리를 달라고 할까? 아니야 돈을 달라고 하자. 돈이 많으면 예쁜 여자와 결혼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한 가지를 청해야 하니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러다 생각했던 것을 한꺼번에 램프의 요정에게 말했습니다. “머리, 돈, 여자!” 요정은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결국 젊은이는 ‘머리 돈 여자와 결혼’을 하였답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
230328.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토론토에서 신문홍보를 하면서 사제관에 머물렀습니다. 사제관에는 ‘삼국지’가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 읽어보았는데 그때는 요약본이었습니다. 이번에는 10권짜리 삼국지를 읽었습니다. 유비가 얼마나 후덕한 사람인지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유비는 늦가을에 추운 개울을 건너야 했습니다. 개울을 다 건넜는데 개울 반대편에서 한 노인이 유비를 불렀습니다. 노인의 이야기는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힘이 없으니 유비에게 와서 업고 건너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비는 노인의 말을 듣고 이왕 몸이 젖었으니 다시 건너가서 노인을 업고 오기로 했습니다. 두 번째 건너니 물이 더 차가웠습니다. 겨우 노인을 모시고 왔는데 노인이 급하게 건너오느라고 짐 보따리를 놓고 왔다고 합니다. 유비에게 개울을 건너 짐 보따리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유비는 마음이 좀 상했는데 이번에는 노인이 다시 자신을 업고 가라고 합니다. 유비는 노인이 장난치는 것 같아서 화가 났지만 이왕 좋은 일을 했으니 다시 노인을 업고 개울을 건넜습니다. 노인은 유비의 후덕함을 칭찬하면서 앞으로 그런 후덕함을 보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 유비에게 그런 후덕함이 있었기에 관우, 장비, 조자룡, 제갈공명과 같은 유능한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조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내용도 있습니다. 조조는 도망가는 길에 어느 노인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걱정이 되어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문틈에서 조조는 노인이 칼을 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노인은 아내에게 ‘어떻게 죽일까를 묻습니다.’ 조조는 노인이 잠이든 자기를 몰래 죽이려한다는 오해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조는 먼저 노인 부부를 죽였습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노인이 죽이려고 했던 것은 조조에게 대접할 닭이었습니다. 조조는 다음 날에 노인의 가족까지 모두 죽이고 도망갔습니다. 자신이 노부부를 죽인 것을 알고 가족들이 복수 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조조의 성격은 ‘적벽대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조조는 제갈공명의 계략에 속아 유능한 장군들을 즉결처분하였습니다. 그 장군들은 강의 흐름을 잘 알고, 함선을 잘 다루는 장군들이었습니다. 나중에 조조는 자신이 제갈공명의 계략에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유능한 장군을 없앤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크게 지고 말았습니다. 과감한 판단력과 전략으로 조조는 나라를 세웠지만 후덕함에는 유비를 결코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유비와 조조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햇님과 바람’의 동화가 생각났습니다. 햇님과 바람은 길을 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를 합니다. 바람은 힘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옷을 더 단단하게 여미면서 길을 갔습니다. 햇님은 따뜻함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 했습니다. 나그네는 옷을 벗어들고 길을 갔습니다. 조조의 군대가 침략했을 때입니다. 장군들은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일단 후일을 도모하자고 하였지만, 유비는 백성들을 모두 안전하게 대피하게 하였습니다. 백성이 없는 나라는 의미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조조는 특유의 냉철함과 판단력으로 위기를 모면합니다. 백성들은 얼마든지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율법과 계명을 통해서 사람을 판단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이라는 바람으로 사람들의 옷을 벗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죄인으로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햇빛으로 사람들을 품어주셨습니다. 죄인이라고 여겼던 세리, 창녀, 이방인, 중풍병자는 모두 예수님의 따뜻한 햇볕을 받아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오늘 독서는 광야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이집트에서 지내던 때를 그리워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뱀’이라는 바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였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느님께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청을 받아들여 ‘구리뱀’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구리뱀이라는 햇빛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과 용기를 얻어서 거친 광야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라는 광야를 지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바람으로는 결코 사순시기라는 광야를 건널 수 없습니다. 불평과 불만이라는 바람으로는 결코 사순시기라는 광야를 건널 수 없습니다. 이해와 용서라는 햇빛을 바라보면 사순시기라는 광야를 무사히 건널 수 있습니다. 나눔과 희생이라는 햇빛을 바라보면 사순시기라는 광야를 무사히 건널 수 있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
230328.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잠시 뒤, 저를 보며 직원이 “커피 나오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잘못된 표현입니다. “커피 나왔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물건을 과도하게 높이는 말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커피 나왔습니다.”라고 말하면 왜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며 화내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표현임을 알면서도 이상한 존댓말을 쓴다고 하더군요. ‘손님은 왕’이니까 손님이 원하는 표현을 쓴다는 것입니다.
마트에 가니, 코로나 규제가 완화되면서 다시 시식 코너가 생겼습니다. 이 코너의 직원이 제게 “한 번 드셔 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역시 과도한 높임말입니다. 서술어가 둘 이상 이어질 때는 맨 마지막 서술어만 높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들어보세요. 먹어보세요.’가 맞습니다.
다른 이에게 존중받기를 원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국어에 맞지 않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존중받아야만 해야 할까요? 어린이들은 때로 어른에게 반말로 말합니다. 아직 말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어른은 화내지 않습니다. 어려서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화내며 존중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쩌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 것입니다.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무시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존중받지 못합니다. 앞에서는 존중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진상, 꼰대’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겉으로만 존중받는 삶이 아닌 진정으로 존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더 겸손한 삶이 요구됩니다. 남이 알아주는 삶이 아닌 내가 알아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인간의 몸을 취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겸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굳게 믿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 안에 가지고 있는 교만의 마음으로 인해, 알아듣지 못합니다. 자기 생명까지 내놓으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주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서, 의심과 불신으로 주님의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겸손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또 일상 삶 안에서 충분히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겸손의 덕을 갖추고서 주님을 믿고 따르고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기 죄 속에 죽는 삶이 아닌,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선한 삶은 방대한 지식에 맞먹는 가치를 지닌다(조지 허버트).
------------------------
----------------------------------------------------
230328.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旅程), 믿음의 전사(戰士), 믿음의 훈련(訓鍊)
-무지에 대한 답은 믿음뿐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27,14)
어제 저녁 식사후 세기중 제가 한말에 제가 공감했습니다. “정말 믿음이 좋은 분들은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 같습니다.” 형제에게 말하고 제 주변을 보니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의 본질은 전쟁이죠”, 얼마전 모 유명정치인의 짧은 언급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 믿는 방식으로 말하면 "믿음의 전쟁"입니다. “믿음의 여정, 믿음의 전사, 믿음의 훈련-무지에 대한 답은 믿음이다-”바로 오늘 강론의 제목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에서 믿음을 빼버리면 허무와 무의미 자체일 것입니다.
삶과 믿음입니다. 삶과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여정인 것입니다. 불신불립(不信不立)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습니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안정과 평화가 없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삶이 두렵고 불안합니다. 믿음이 없을 때 원망, 절망, 실망이지만 믿음이 좋으면 감사, 감동, 감탄입니다.
인간 품위의 기초가 믿음입니다. 잘 나갈 때는 모릅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고난이 계속될 때 비로소 믿음은 진가를 발휘합니다. 갑작스런 믿음의 은총, 믿음의 성장은 없습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 은총에 응답하여 영원한 현역의 믿음의 전사로서 믿음의 훈련에 충실할 때 비로소 믿음의 성장에 성숙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믿음의 수준은 여전히 초보자 수준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믿음의 최종 시험이 죽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의연히, 믿음으로, 편안히 선종하는 이들은 몇이나 될까요. 극히 드물 것입니다. 그러니 평생 훈련과 공부가 실천이 믿음의 훈련, 믿음의 공부, 믿음의 실천입니다. 치매에 대한 결정적 처방이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매일 목숨을 걸고 쓰는 강론은 일종의 믿음의 훈련, 믿음의 공부, 믿음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노년 인생 품위의 우선 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밥의 욕망만 있고 인간 품위의 기초인 믿음이 없으면 말그대로 노욕, 노추의 삶일 것이다. 날로 성장 성숙해가야할 믿음이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정말 돈 유산 보다 물려 줘야 할 값진 유산이 믿음의 유산이니다. 세상에 믿음의 유산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믿음도 보고 배운다. 부모로부터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보고 배우는 믿음이다. 믿음의 교사로 부모를 능가는 사람은 없다."
“영적탄력이 좋아야 영적 부요의 삶이다. 바로 믿음의 탄력과 함께 가는 영적탄력이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믿음이, 삶이 영적탄력의 요체이다.”
피정지도시 자주 강조하는 내용들입니다. 어제 써놓은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소망하며 쓴 “내 믿음의 품”이란 자작고백시도 생각납니다.
“한없이 넓고 깊은 그윽하고 아늑한 품이 하느님을 닮았다.
정주 수도원 자연의 품이 바로 그러하다.
수도공동체의 품이 그러하다.
모두를 받아들여
모두를 품에 안은 환대의 품
한없는 침묵의 품, 인내의 품, 사랑의 품, 생명의 품이구나.
아무도 오는 이들 막지 않고, 가는 이들 잡지 않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초연하고 넉넉한 품,
언제 이에 도달하려나
내 믿음의 품은.”
어제 점심중 식탁을 보니 3분의 상주 손님에 2분의 새 손님의 방문으로 무려 5명의 손님이 함께 하는 수도공동체 믿음의 품이 참 넓고 깊구나 감동했습니다. 정주 수도원에 빛나는 환대 영성은 베네딕도 수도회의 자랑일 것입니다. 정주와 환대 역시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이 답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믿음의 빛, 믿음의 힘입니다. 불신의 어둠, 불신의 약함입니다. 믿음의 빛은 하느님의 빛이고 믿음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만이 인간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본처방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믿음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말씀의 대상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매일미사책 시작 말마디가 이를 입증합니다. 제1독서는 “그 무렵”으로, 복음은 “그때에”로 시작됩니다. 언제나 “그 무렵”, “그때에”입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1독서 민수기 말씀중,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여정중 마음이 조급해져 하느님과 모세에 불평하는 믿음 약한 백성들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불뱀에 물려 죽자 즉시 중재자 믿음의 모세에게 간청하니 모세는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니 주님의 응답입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불뱀에 물렸을 때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으니, 바로 구리뱀이 상징하는 바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하느님과 백성의 중재자 모세가 예수님의 예표라면 구리뱀은 십자가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 믿음의 영도자 예수님의 신원이 은혜롭게 계시됩니다. 두 대목이 우리의 믿음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이래서 예닮의 여정을 통해 위에서 오신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빛과 생명 속에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바로 “나는 나다”라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의 죄속에서 결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참으로 믿음만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위에서 온 존재인 주님과 함께 생명과 빛으로 살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여정중에 평생 성사인 성체성사와 고백성사를 통한 예수님과의 일치가 중요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이 말씀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합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예수님을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라 고백하는 것이며, 이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이를 수 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예수님이야말로 영원한 회개의 표지이자 믿음의 표지요 희망의 표지이자 구원의 표지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영원히 바라볼 대상은 십자가의 예수님, 파스카의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지는 예닮의 여정과 더불어 우리의 믿음도 날로 성장 성숙해 가리라 믿습니다. 육신은 날로 노쇠해가도 영혼은 날로 믿음의 성장과 성숙과 더불어 새로워 졌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믿음의 성장과 성숙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나 천상 선물을 갈망하며,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
230328.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그 시절 바리사이들이 알았었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서 오셨고,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메시아시고, 동시에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우리 주님께 고백하는 우리 마음속 신앙입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조금 다른 고백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가끔 발견하기도 합니다.
바리사리들이 주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이 누구요?
저도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간혹 우리는 우리 주님을 자판기 취급합니다. 내가 그에 맞는 값을 냈으니 원하는 것을 내놓아야 하는 자판기 말입니다. 꼭 천원을 넣으면 천 원짜리 음료가 떨어지는 그런 자판기처럼 주님을 대합니다.
또한 심부름꾼이나 알라딘에 나오는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처럼 취급합니다. 즉 내 기도와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마음을 돌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간혹 만나기 때문입니다.
말은 ‘주님’ 즉 ‘주인님’이라고 하면서 정작 행동은 그 ‘주님’을 우리가 부리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주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요. 잠시 그리고 찬찬히 주님께서 차지하고 계신 나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한번 온전히 주님의 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메시아시며 하늘에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리고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
시간이 지나면 무뎌집니다.
어느 날 주방에서 칼을 쓰는데
시원시원히 썰리지 않는 거예요.
칼날을 보니
여기저기 무뎌지고
중간에 이가 빠진 부분도 보이더라고요.
숫돌을 꺼내
칼 눕혀 이리저리, 아래위로 문질렀습니다.
이내 다시 반짝이고 날카롭게
숭덩숭덩 잘 썰리는
칼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셨지요.
깨어서 기도하세요.
지금 깨어 있으세요.
마음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날카롭게 자신을 바라보세요.
아픈 곳은 없는지, 무뎌져서 죄에 빠져 있는 곳은 없는지….
----------------------------------------------------
230328.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과 함께>
그분께서 나에게 오시니
나 있는 제자리에서도
나는 그분과 함께할 수 있었답니다
그분께서 나에게서 가시니
나 있는 제자리에서는
나는 그분과 함께할 수 없답니다
그분께서 가시는 그만큼
그분 가신 방향으로 감으로써만
나는 그분과 함께할 수 있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