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경환의 명시감상 제1권에서
전전긍긍
안도현
소쩍새는 저녁이 되면
제 울음소리를 산 아래 마을까지 내려보내준다
방문을 닫아두어도 문틈으로 울음을 얇게, 얇게 저미어서 들이밀어준다
머리맡에 쌓아두니 간곡한 울음의 시집이 백 권이다
고맙기는 한데 나는 그에게 보내줄 게 변변찮다
내 근심 천 근은 너무 무거워 산속으로 옮길 수 없고
내 가진 시간의 밧줄은 턱없이 짧아서 그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생각건대 그의 몸속에는
고독을 펌프질하는 또다른 소쩍새 한 마리가 울고 있을 것 같고
그리고 그 소쩍새의 몸속에 역시 또 한마리의 다른 소쩍새가 살고 있을 것도 같아서
나는 가난한 시 한편을 붙들고 밤새 엎드려
한 줄 썼다가 두 줄 지우고 두 줄 지웠다가 다시 한 줄 쓰고 지우고 전전긍긍할 도리밖에 없다
----안도현, [전전긍긍]({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 2004년) 전문
요즈음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소쩍새라는 이름조차도 생소하고, 더군다나 그 울음 소리는 대부분이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산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지고, 어느 덧 녹음이 우거진 5~6월의 저녁이 되면, ‘솟쩍/ 솟쩍“하고 울거나 ’솟적다/ 솟적다‘라고 우는 새가 있는데, 바로 그 새가 작은 소쩍새이다. 이에 반하여, 매우 급격한 단음으로 ’홋~‘하거나 ’횟‘~하고 긴 간격으로 우는 새가 있는데, 이 역시도 ’올빼미목 올빼미과‘의 큰 소쩍새라고 부른다. 작은 소쩍새는 중부 이북에서는 여름 철새이며, 또 어떤 무리들은 그들의 이동지를 향하여 떠나갈 때 잠시 쉬었다가 가는 나그새이다. 이 작은 소쩍새는 몸길이가 18.5cm--21.5cm이고, 몸의 빛깔은 잿빛이 도는 갈색이거나 또는 붉은 갈색을 띠게 된다. 5월 초순에서 6월 중순까지 한 배에 4~5개의 알을 낳고, 알을 품는 기간은 24--25일이며, 새끼를 먹여 키우는 기간은 21일이라고 한다. 낮에는 숲속 나뭇가지에서 잠을 자고, 이윽고 저녁이 되면 작은 곤충들과 거미류 등을 잡아먹고 살아간다. 한국, 사할린, 우수리, 중국(북동부) 등에 분포하며, 중국 남동부와 인도차이나 북동부까지 내려가 겨울을 난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큰 소쩍새는 대한민국의 흔한 텃새 중의 하나이며, 깊은 숲속의 침엽수림지대에서 터를 잡고 살아간다. 몸 길이는 약 20cm~25cm이고, 야행성이며, 작은 새,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 곤충류 등을 잡아먹고 살아간다. 한국, 중국, 우수리, 사할린 등에 분포하고, 대한민국에서는 1982년 올빼미, 수리부엉이, 솔부엉이, 칡부엉이, 쇠부엉이와 함께 천연기념물 제324호로 지정되었다고도 한다.
안도현 시인은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등이 있고, 어른을 위한 동화집으로는 {연어}, {관계}, {사진첩} 등이 있다. 이밖에도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 등의 산문집이 있고, ‘제1회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제13회 소월시문학상’, ‘제1회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가 있으며, 그리고, 이제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도현 시인의 [전전긍긍]은 그 소쩍새와 시인의 대립이 가장 힘 있고 깊이 있게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어느덧 [전전긍긍]이라는 시를 제일급의 명시로 이끌어 올리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소쩍새는 저녁이 되면/ 제 울음소리를 산 아래 마을까지 내려보내준다/ 방문을 닫아두어도 문틈으로 울음을 얇게, 얇게 저미어서 들이밀어준다/ 머리맡에 쌓아두니 간곡한 울음의 시집이 백 권이다”라는 시구를 생각해보면 안도현 시인의 소쩍새는 작은 소쩍새이지, 큰 소쩍새가 아니다. 큰 소쩍새의 ‘홋~’과 ‘횟~’이라는 울음 소리는 매우 급격하면서도 긴 간격의 단음으로 전혀 시적이지가 않지만, 작은 소쩍새의 ‘솟쩍/ 솟쩍’이라는 울음 소리와 ‘솟적다/ 솟적다’라는 울음 소리는 매우 시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작은 소쩍새가 예로부터 “솟쩍/ 솟쩍”하고울면 흉년이 들고, ‘솟적다/ 솟적다’라고 울면 ‘솥이 적으니 큰 솥을 준비하라’는 뜻에서 풍년이 든다고 한다. 소쩍새의 울음 소리는 그러나 젖먹이 어린 아기를 잃어버린 어미의 울음 소리처럼 매우 구슬프고 간절한 데가 있었고, 따라서 나는 이 소쩍새가 육식동물이라는 것이 잘 믿어지지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초근목피로 겨우 보리고개를 넘어가며, 어수선하고 살풍경했던 시절의 가슴 속으로 파고 들던 소쩍새의 울음 소리가 어찌나 구슬프고 간절했던지, 긴, 긴 밤, 잠을 이루지 못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안도현 시인은 그 소쩍새의 울음 소리를 가히 제일급의 시인답게 표현해보인다. “소쩍새는 저녁이 되면/ 제 울음소리를 산 아래 마을까지 내려보내준다/ 방문을 닫아두어도 문틈으로 울음을 얇게, 얇게 저미어서 들이밀어준다/ 머리맡에 쌓아두니 간곡한 울음의 시집이 백 권이다”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이다. “소쩍새는 저녁이 되면/ 제 울음소리를 산 아래 마을까지 내려보내준다”라는 평범한 시구가 어느덧 “방문을 닫아두어도 문틈으로 울음을 얇게, 얇게 저미어서 들이밀어준다”라고 그 시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고조된 시적 긴장감을 마치 삶의 절정에서처럼, “머리맡에 쌓아두니 간곡한 울음의 시집이 백 권이다”라고, 최종적인 판결을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 어스름 저녁이 되면 제 울음 소리를 산 아래 마을까지 내려보내주는 소쩍새, 그 소쩍새의 울음 소리가 너무나도 구슬프고 간절해서 방문을 닫아두면----왜냐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으니까----어느새 문틈으로 생선회를 뜨듯이 그 울음 소리를 얇게 얇게 저미어서 들이밀어주는 소쩍새, 어느덧 머리맡에 쌓아두니 그 아름다운 울음의 시집이 백 권이나 되는 소쩍새----. 안도현 시인은 그 소쩍새의 구슬프고 간절한 울음 소리를 들으면서, 소쩍새의 울음은 저처럼 만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돌부처의 내장 속까지도 파고들어가 감동시키고 있는데, 나는 과연 진정한 시인이라고 할 수나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생각은 결코 질투가 아니며,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성찰을 뜻한다. 그리고 그 반성과 성찰이 소쩍새의 마음을 사로잡고 시신詩神의 마음을 감동시켜, “방문을 닫아두어도 문틈으로 울음을 얇게, 얇게 저미어서 들이밀어준다”라는 시구와 “머리맡에 쌓아두니 간곡한 울음의 시집이 백 권이다”라는 안도현 시인만이 쓸 수 있는 제일급의 시구들을 낳게 된다.
안도현 시인은 어느 초여름날 저녁, 소쩍새의 시집 백 권을 읽어보고 안절부절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시인도 아니며,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소쩍새의 반에서 반도 따라가지 못한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제일급의 시인이고 어느 누구도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라는 생각이 들면, 그의 생각은 더욱 더 풍요로워지고 더욱 더 자비롭고 관용적이 되어가지만, 어느 덧 문득, 타인들과 비교하여 그만 못하고 자기 자신이 못났다라는 생각에 미치게 되면, 그의 생각은 더욱 더 옹졸해지고 사나운 시기심과 질투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나는 안도현 시인의 그 생각을 질투가 결코 아니라고 했는데, 그의 반성과 성찰 속에는 이미 사나운 시기심과 질투가 내재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처럼 안절부절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맙기는 한데 나는 그에게 보내줄 게 변변찮다/ 내 근심 천 근은 너무 무거워 산속으로 옮길 수 없고/ 내 가진 시간의 밧줄은 턱없이 짧아서 그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라는 시구는 이제 그 시기심과 질투심을 떠나서, 자기 자신은 도저히 소쩍새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시인이라는 것을 시인한 자의 처절한 절망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소쩍새의 아름다운 시집 백 권을 받고도 나는 그에게 보내줄 시집이 없다는 자괴감, 또, 내 근심 천 근은 너무 무거워서 산 속으로 옮길 수도 없다는 자괴감, 또, 그리고 내가 가진 시간의 밧줄은 턱없이 짧아서 그에게 닿지 못할 것이라는 자괴감이, 제2연의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쩍새의 울음은 너무 무겁지도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절제된 울음이지만, 나의 울음은 너무 무겁기만 하고 절제되지 않은 울음에 지나지 않는다. 소쩍새의 시간은 매우 지속적이면서도 일관성을 자랑하지만, 나의 시간의 밧줄은 턱없이 짧아서 그에게 닿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가진 시간의 밧줄’이 턱없이 짧다는 것은 도저히 이승의 생애에서, 대시인인 소쩍새의 울음을 따라 잡을 수가 없다는 절망감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생각건대 그의 몸속에는/ 고독을 펌프질하는 또다른 소쩍새 한 마리가 울고 있을 것 같고”의 ‘그’는 어느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이 ‘그’는 시적 화자인 ‘나’일까, ‘소쩍새’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제3의 인물일까? 이 ‘그’가 소쩍새라면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시구, 즉, “ 그리고 그 소쩍새의 몸속에 역시 또 한 마리의 다른 소쩍새가 살고 있을 것도 같아서”라는 시구와 그 문맥이 맞지 않고, 이 ‘그’가 제3의 인물이라면 ‘나’와 ‘소쩍새’의 대립의 긴장이 무너져 전혀 뜬금이 없는 것 같다. 따라서 나는 이 ‘그’를 ‘나’를 객관화시킨 ‘그’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몸 속에도 고독을 펌프질하는 소쩍새가 살고 있지만, 그러나 나는 그 소쩍새의울음 소리를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킬 수가 없다는 것, 바로 이것이 ‘내 근심 천 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소쩍새도 고독을 펌프질하고, 나도 고독을 펌프질 한다. 하지만 소쩍새의 고독은 아름다운 시가 되고 나의 고독은 전혀 시가 되지 못한다. 이것이 안도현 시인의 [전전긍긍]의 진면목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소쩍새 역시도 자기 자신의 울음(노래) 소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소쩍새 역시도 자기 자신의 몸속에서 또다른 소쩍새가 그를 꾸짖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 제일의 대시인(명창)인 소쩍새 역시도 자기 자신의 노래 소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나를 더욱 더 절망에 빠뜨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시인은 비사교적이며, 고독을 펌프질하는 사람이다. 고독은 자기 자신을 더욱 더 성숙하게 만들고, 눈 앞의 사소한 이익보다는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그 고독 속에서는 지극히 사소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이 더욱 더 소중하게 보일 수도 있고, 이에 반하여, 그토록 소중하고 애지중지했던 인간들이 전체적인 수준에서 바라보면 지극히 하찮은 인간들일 수도 있다. 모든 시인들은 자기 자신의 고독을 사랑하고, 그 고독의 생산성을 통해서 불후의 명시들을 탄생시키게 된다. 그러나 소쩍새의 고독은 그 고독의 생산성을 자랑하고 있는데 반하여, 나의 고독은 전혀 그 생산성을 자랑하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가난한 시 한 편을 붙들고 밤새 엎드려” 고민해보지만, 그러나 그것은 도로아미타불의 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가난한 시 한 편’은 대한민국 최고의 시인인 안도현으로서는 매우 서글프고 초라한 처지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의 가난은 ‘상상력의 빈곤’, ‘언어 사용능력의 한계’, ‘역사 철학적인 지식의 빈곤’, 그리고 제일급의 시인으로서의 ‘삶의 진정성의 부재’ 등에 맞닿아 있으며, 시인이라는 이름만을 지녔을 뿐, 그 시인의 자격이 없는 존재론적 토대를 말해준다. 안도현 시인은 그 진정한 시인의 이름에 값하고자 시 한 편을 붙들고 “밤새 엎드려” 써보지만, “한 줄 썼다가 두 줄 지우고 두 줄 지웠다가 다시 한 줄”을 쓰는 도로아미타불의 수고만 되풀이할 뿐, 그 어떤 댓가도 얻지를 못한다. 어떻게, 얼마나 더 노력하면 마치 소쩍새처럼, 그의 울음을 생선회처럼 ‘얇게, 얇게’ 썰어놓고, 또한, 진정으로 그만큼 구슬프고 간절한 백 권의 시집을 완성해 놓을 수가 있는 것일까? 이 [전전긍긍]은 안도현 시인의 심모원려深謀遠慮와 비책묘계秘策妙計가 떠오르지 않는 진퇴양난의 상태를 말해준다. 그는 깊이 있게 생각하여 먼 미래를 내다 보지도 못하고, 비의적이면서도 슬기로운 지혜를 생각해내지도 못한 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는 무엇일까? 안도현 시인은 왜 시에 이처럼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 시는 종교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과 축제적 기능을 갖고 있고, 또한 시는 진정제 효과와 강장제 효과와 흥분제 효과와 영생불사의 효과도 갖고 있다(이 점에 대하여는 나의 {행복의 깊이} 1, 2, 3권을 참고해주기를 바란다). 태초에 하나님이 언어로서 이 세상을 창조했듯이, 언어가 있고 우리 인간들이 존재한다. 언어라는 인식의 힘과 그 방대한 문화사전이 없었다면 우리 인간들은 만물의 영장은 커녕, 영원한 유인원(원숭이)에 지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구조주의자들이 역설한 바가 있듯이, 언어가 있고 그 다음에, 우리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어 영역의 확대는 자아 영역의 확대이고, 자아 영역의 확대는 세계 영역의 확대이다. 우리는 언어가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과 사물과 동식물들을 구분하고, 또, 그리고, 그 언어가 있기 때문에 상호간의 의사소통은 물론,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꿈꾸며, 머나 먼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요컨대 언어가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 즉, 역사적 인간이 된 것이다. 시인은 언어의 사제로서 인간 중의 인간이며, 그는 그 인신人神의 위치에서 우리 인간들의 꿈(종교)과 지혜(교육)와, 그리고 그 축제를 주재하게 된다. 따라서 시는 예술 중의 예술이며, 모든 인류를 감동시키게 된다. 시는 삶 자체이며, 삶은 시 자체이다. 대부분의 리얼리스트들은 시가 현실을 반영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 반영은 시와 삶을 분리시킨 인위적이 조작에 지나지 않는다. 시가 삶이 되고 삶이 시가 되면, 바로 그때에는 인간 자체가 예술품이 될는지도 모른다.
이 안도현의 소쩍새는 ‘솟쩍/ 솟쩍’ 울거나 ‘솟적다/ 솟적다’라고 울지 않고 ‘시 적다/ 시 적다’라고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안도현의 시가 너무나도 가난하고 볼 품이 없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빈곤’, ‘언어 사용능력의 한계’, ‘역사 철학적인 지식의 부재’, 그리고 ‘삶의 진정성의 부재’가 이 [전전긍긍]의 절망의 강도를 말해주고, 그리고 그는 어떠한 시대정신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나, “나는 가난한 시 한 편을 붙들고 밤새 엎드려/ 한 줄 썼다가 두 줄 지우고 두 줄 지웠다가 다시 한 줄 쓰고 지우고 전전긍긍할 도리밖에 없다”라는 절망의 깊이에서, 바로 이 [전전긍긍]의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 그의 온몸으로의 절망, 바로 그 온몸으로의 절망----그 구슬프고 간절한 울음 소리가----이 마침내, ‘얇게, 얇게’ 저미어지고, 이 [전전긍긍]의 시 한 편이 소쩍새의 시집, 백 권에 값하게 되고 있는 것이다.
‘전전긍긍의 리얼리티! 그 불사조 같은 비상!’
안도현 시인의 이 [전전긍긍]은 그의 심모원려深謀遠慮와 비책묘계秘策妙計의 소산이며, 그의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