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의 미소
오종락
지난 3월 14일은 문우 삼총사와 함께 봄을 찾아 길을 나섰다.
산악회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장장 3시간 30분이나 걸리는 먼 길을 떠났다. 찾아간 곳은 전북 고창 선운산이다. 선운산 일대의 문화탐방과 선운사 동백꽃을 보며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선운산 들머리에는 천년고찰 선운사가 있다. 선운사는 좌 견치산(犬齒山), 우 청룡산(靑龍山)이 뻗어 내린 가장 아늑한 곳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절 뒤뜰에는 수령 500여 년이 된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동백은 동백 중에서도 봄철에 피어나는 춘백(春栢)으로 유명하다. 고상하고 예쁜 춘백의 자태와 꽃말(당신을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이 나에게 행복한 봄기운을 선물해 주는 것만 같았다. 춘백은 다른 봄꽃에서 느끼는 맛과는 달리 색다른 봄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곳 춘백은 조석으로 산사의 독경소리를 들으며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찬란한 봄날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서로 앞 다투지 않고 조용히 피어나고 있었다. 꽃잎도 외로움을 이겨낸 수도승을 닮아서인지 홀잎으로 피어나고 있어 예사롭지가 않았다. 이른 봄 소리 없이 피어나는 춘백은 아름답다기보다 우아하고 고결하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성싶다.
동백은 원래 겨울철에 피어나는 꽃이라 동백(冬栢)이라 불렀다. 그런데 봄철에 피어나는 춘백(春栢)은 동백꽃의 ‘꽃말(당신만을 사랑해, 겸손한 마음)’이 말해 주듯이 인과 법칙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에 아름답게 피어나 겸손한 마음으로 만인을 사랑한 선업(善業)의 결과로 따사로운 봄날에 환생한 생불화가 아닐는지! 봄날 우아하게 피어나 또 다른 시은(施恩)의 임무를 부여받은 꽃이 아닐까 싶다.
“춘백아! 반갑구나. 너는 추운 겨울 동안 대체 어디에 숨었다가 이렇게 봄이 오면 피어나니. 봄이 그렇게도 좋다더냐?” 하며 묻고 또 물어도 아무런 대답 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산사의 춘백은 묵언(黙言) 기도를 하면서 피어나는가 보다 하면서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한참 전 참배한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천년 세월을 뛰어넘어 마애불은 자애로운 미소로 아무 말없이 민초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었으리라. 또 해마다 새봄에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격려해 주신 말씀을 오늘 내가 몸으로 느끼지 않았던가! 순간 돌계단을 오를 때 난간에 걸려 있던 법구경 한 구절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면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는 말씀과 “좋은 일은 서둘러 행하고, 나쁜 일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또 연달아 오전에 관람한 참당암(懺堂庵) 입구 돌기둥에 새겨진 “유죄 참회(有罪懺悔)”라는 글귀도 떠오른다. 세상사 인과성(因果性)이 없는 것이 어디 있으랴! 동백이 춘백으로 피어나듯이 잘못은 참회하고 선업을 지으며 고난을 극복하다 보면 좋은 결과로 태어난다는 가르침이 아닐까 한다.
짧은 시간에 춘백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 느낌을 모두 다 가슴에 담을 수는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카메라에다 동백의 특징적인 고운 자태와 순간의 느낌을 몇 장의 사진으로 담았다. 아직 때가 조금은 이른 탓인지 꽃망울 형태가 주로 많았고 드문드문 붉은 얼굴을 살짝 내밀며 피어나고 있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가씨가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 내미는 모습과도 흡사했다.
미당 서정주 시 “선운사 동구”에서는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라고 읊었다. 그때의 시점보다는 봄이 조금은 무르익은 시점이 아닐까 싶다. 또한 당시의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은 들을 수는 없었지만, 도솔천 내원궁의 비구니 스님이 중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지장보살, 지장보살….”을 염송하는 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계곡으로 흘러 내려와 내 귓전에 맴돌았다. 살랑살랑 봄바람은 쉴 새 없이 불어오며 고요히 잠든 춘백을 흔들어 깨웠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어서 피어나 봄 손님을 맞이하라는 듯이….
오늘 나는 피어나려고 애쓰는 춘백의 모습에서 앳된 소녀의 얼굴을 닮은 새봄의 미소를 보았고, 암벽에 새겨진 거룩한 마애불에서 천년 세월 동안 변치 않고 봄을 지켜온 부처님의 미소를 가슴에 담아왔다.
돌아오는 길,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휴대용 야외 식탁이 차려지고 향긋한 멍게회와 하산주가 올라왔다. 식탁에 빙 둘러앉아 오늘 하루 문화해설을 해주시느라 수고하신 문선생님과 문우님들께 고마움을 전하며 회원님들 모두의 봄철 건강을 기원했다. 산마루턱에 걸린 석양을 바라보며 석양주를 하산주 겸 한 잔씩 들이켰다. 봄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싸느랗게 지나갈 때 뱃속에서 상큼한 멍게회와 막걸리가 혼합되어 짜릿한 봄맛을 전해왔다.
오늘은 아무 말없이 봄의 미소를 머금은 춘백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뜻깊고 아름다운 봄날은 이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2017.3.17.)
첫댓글 천년 고찰 선운사하면 동백이죠, 몇번 갔지만 갈 때마다 동백의 고운자태와 그 아름다움을 어디서 또 찾아 볼 수 있을까 라는 탄성을 짓습니다. 우리나라 절경 속 사찰은 다 명당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선운사역시 터 이론에 무지한 내가 봐도 참 좋다 이 동백나무는 언제부터 이렇게 군락을 지어 자랐을까 잠시라도 한없이 낮추고 싶은 겸손함을 잠시라도 가져보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창 선운사, 몇 번 가 보았습니다만 갈 때마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사람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산도 꽃도 천년 고찰도 그리고 고창읍성과 고인돌 유적지 등 가슴에 오래오래 남는 곳이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그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한날 한시 같은 길을 걷고, 보고 듣고 느꼈는데도 무딘 감각과 우둔한 탓인지 글 한줄 쓸 생각조차 못해봤는데 선생님이 보신 동백의 미소와 춘백에 대한 해박하신 지식, 곁들인 예찬 멋진 문장에 경의를 표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3.18 03:43
동백보다 더붉은 문우님들과 정유년 봄산행을 함께하였고, 인생길 좋은벗을 얻어 한없이 기쁘고 고맙습니다. 언제나 정감넘치는 좋은글 부탁드리며 잘 읽었습니다.
전에 동문산악회 산행 중 선운사를 방문학 적이 있습니다. 동백꽃도 유명하고 아치형의 다리도 아름답더군요! 동백꽃에 대해서 유익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수려한 글 잘 감상했습니다. 수필창작반에 처음 들어와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동백꽃에서 부처님의 미소를 보는 해안이 대단합니다. 사물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동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넘쳐납니다. 같이 동행했었는데 나는 겉만 보았고 오교수가 내면을 다 보고왔네요. 글을 통하여 깨우치지 못한 것을 배우게되어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절 주변에 자라는 나무도 부처님을 닮아가나 봅니다. 선생님 같이 훌륭한 분과 함께 글 공부를 하게되어 다행이라 생각되며, 저도 선생님을 닮아가서 훗날 이런 글을 쓸수 있을런지, 자신이 없습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