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길다. 작년 12월 22일에 방학식 한 이후로 2월 말까지 학교 갈 일이 없다. 서은이 학교가 석면공사에 들어갔기에 모든 방과후 프로그램도 방학이다. 아이들의 방학이 엄마의 개학이요, 개학을 하고 학교 가면 왠지 모를 해방감을 만끽하게 되는 것은 유치원을 이어 초등학생이 되어도 여전한 것 같다. 개인 시간이 없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평소에 아이들과 못 하던 것을 맘껏 하는 즐거움도 크다.
방학생활 45일차. 서은이에게 뭐가 제일 기억에 남느냐 물었더니 워터파크와 친구들과 풀빌라 다녀온 것을 꼽는다. 대답하는데 3초도 걸리지 않는다. 역시 노는 게 제일이지. 엄마는 마음 속에 원하는 답이 있기에 질문을 바꿔 다시 물어본다. 그럼, 뭔가 알차고 보람있어서 잘 했다 싶은 건 뭐야? 영어 캠프와 어~ 한밤의 역사기행! 옳지! 나왔다.
한밤의 역사기행은 초등학생 가족을 대상으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하는 기특한 방학 특별 프로그램이다. 1월 한 달 간 주별로 다른 주제로 진행이 되며 4주차까지 모든 내용을 이수하면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 600년 서울의 모습을 시대별로 훑을 수가 있다. 지난 여름방학 때 3주차 '경성이야기'를 처음 접했는데 이게 재미가 있었는지 이번에도 하고 싶다 한 것이다. 여행자 수첩에다 수업 후에 찍어주는 도장을 다 모으면 선물을 준다는 마케팅도 공이 크다. 이를 위해 엄마가 얼마나 예약신공을 발휘했던가. 접수창이 열리는 날을 알아봐 알람을 맞추고 미리 로그인 하여 기다리다 다다다 손가락을 놀려서 얻어낸 결과물이다. 1월 3일 1주차 중촌 나들이, 1월 31일 4주차 달라지는 서울.
수업의 큰 흐름은 비슷하다. 처음에는 박물관을 잠시 소개하고 주제와 관련된 주요한 내용을 PPT와 함께 듣게 된다. 이는 어린이들뿐 아니라 (사실 초저 아이들보다는) 어른인 나도 흥미롭다. 맥을 짚은 다음은 설명에 해당되는 전시관으로 옮겨가서 해설과 함께 관람을 한다. 박물관이 참 넓고 볼 게 많은데 정해진 부분을 집중해서 보게 되니 그 시대에 대해서는 쏙쏙 잘 들어온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게 관람이 끝나면 다시 교실로 돌아와 만들기를 하던지 게임을 하며 수업내용을 확인하는 활동을 하고 마친다.
처음 수업을 들으러 왔을 때 고요한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는 기분이 참 묘했었다. 어둠이 내리고 일반관람객은 모두 집으로 돌아간 시간이다. 우리를 위해 야근하시는 선생님들이 반갑게 맞아주시고 정성껏 준비된 수업을 하신다. 전시물도 쉬는 깜깜한 시간에 마치 무대 위 라이트가 주인공을 따라 다니듯 우리 발걸음이 닫는 곳에 불이 켜져 있다. 집중이 안 될 수 없다. 우리만을 위한 공간과 해설. 한밤에 누리는 호사이다.
1주차 중촌이야기 수업. 조선시대 한양도성 안에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윗쪽이 북촌, 아랫쪽이 남촌, 그러면 가운데는? 중촌이다. 천문학, 화가, 역관과 상인들 등 지금으로 치면 전문가 그룹들이 중촌에서 주로 살았다는 설명을 들으며 아이들은 한양 도성 안에서 광화문 앞 육조거리가 어디인지 청계천이 어디로 흐르고 지역 구분은 어찌 되는지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리고 당시 신분증이었다는 호패를 나무판과 끈을 이용해 직접 만들었는데, 허리춤에 차고 달랑달랑 다니는 것이 그리 귀여웠다.
사실 서울역사박물관은 한 군데가 아니다. 여기는 본관일 뿐. 서울의 역사를 산책할 수 있는 여러개의 분관이 있다. 근처의 경교장과 돈의문 역사관, 딜쿠샤도 해당되고 경희궁, 공평도시유적전시관, 군기시유적전시실, 동대문역사관 운동장기념관, 백인제 가옥, 한양도성박물관 등 종로구와 중구에 있는 곳 뿐 아니라 청계천박물관과 서울생활사박물관도 서울역사박물관에 속한다.
마침 호패를 만든 다음 날은 흥인지문 옆의 한양도성박물관에 갔는데 동행하는 친구가 서은가은이 허리춤의 호패를 보고 뭐냐고 물었다. 응, 이게 있어야 한양도성 안에 들어갈 수 있어. 이 말을 듣고 옛날에는 그랬단 말이다라는 후속설명을 듣기까지 '그럼 나는 못 들어가나?' 당황해 하는 친구의 표정을 보고 까르르 웃었더랬다. 그 날도 한양도성의 크고 작은 대문들의 위치와 이름을 살펴보고 한양도성을 쌓을 때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도성의 출입을 어찌 관리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서 전날 수업 내용이 자연스럽게 확인되고 확장되는 것이다.
내친 김에 본관에서 낮에 하는 '우리가족 박물관 기행' 수업도 있어서 다녀왔다. 주제는 별명왕, 육조거리이다. 담당을 하는 선생님들이 항상 같지는 않은데 이번에는 수업의 도입이 신선했다. 두 분이 조선시대 관리의 복장을 갖춰나왔는데 한 분은 육조(이조,형조,병조,호조,예조,공조) 중 이조, 한 분은 호조 소속 관리였다. 호조는 전국의 세금을 적절히 거두는 것에 따르는 노고를 호소하고, 이조는 공정하게 관리들을 평가하는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이조가 인사권까지 지녔기에 자기를 예조나 공조 등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하는 호조 관리의 모습을 보며 육조가 각각 어떤 일을 했는지 하하 웃으며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광화문 앞이 육조거리였고 시대가 바뀌며 호칭이 계속 바뀌었다는 것도. 박물관 전시까지 유쾌하고 재치있게 안내하신 호조관리를 아이들은 졸졸 따라다녔고 마치고는 엄마가 팬이 되어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요즘은 박물관이 전시 뿐만이 아니라 교육프로그램도 너무 잘 되어 있어서 흐뭇하다. 누가 역사를 어렵다 하는가. 연도를 기억하여 기역,니은 시대순으로 나열하는 시험치는 역사는 차치하고, 옛 이야기와 살아가는 모습을 듣고 보며 재미없다 여길 사람은 없다. 군데군데 영상으로도 잘 꾸며져 있어 어린 아이들도 만화는 한참을 들여다본다. 가은이는 혜화문을 지키는 사람이 열쇠를 잊어버리거나 허락받지 못한 승려가 들락거린 일로 인해 곤장을 맞는 애니메이션을 보며 문지기가 저렇게 중요한지를 배웠다. 박물관도 딱딱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아이들은 흥미를 끄는 전시물 앞에 잘 머물러 서서 보고, 간식으로 입을 다실 공간도, 건물 밖에는 뛸 수 있는 공간도 잘 되어 있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자기가 사는 나라와 지역의 역사가 어떠한지를 알기에 이렇게 다양하고 잘 준비된 곳에 살고 있다니 이건 축복이지 말이다. 그래서 내일은 청계천박물관을 가기로 했다. 항상 광화문 앞 쪽 청계천만 걸었는데 이번에는 반대쪽 길도 거닐어 보고 청계천 주변으로 펼쳐졌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여다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