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졸업후 미국 L.A에서 잠시 신문기자와 30여년 CPA로 일하고 은퇴후
老年을 고향 인근 계룡시에서 지내고 있는 전경배 (대전고 卒) 동기가
충청지역 언론인 모임에서 발행하는 '목요언론'에 기고한 "짧았던 나의 기자 생활"
글입니다.
-짧았던 나의 기자 생활-
저는 한국에서 2년 , 미국에서 5년, 도합 7년의 기자 생활을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인 1976년에, 별다른 사명감 없이 시작했던 기자 생활이었습니다.
짧았지만 한국과 미국, 두 나라에서 경험했던 나의 기자 생활을 회고하며 기억에 남는 일과 기자로서 느낀 소회를 체험기처럼 써보겠습니다.
76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사회부에서 동대문, 청량리, 태능 세 곳 경찰서를 담당하는 경찰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였습니다. 입사 후 처음 6개월 동안은 수습 기간이라며 거마비 조로 한달에 6만원을 주더니, 수습 기간이 끝나고 첫월급이라고 받은 게 고작 12 만원 이었습니다. 당시 신생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한 친구는 월급을 18만원 받았는데, 당시 기자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보수였습니다.
기자쟁이들 끼리는 경찰 출입 기자를 “사스마리”라고 불렀는데 나는 어린 사슴 새끼에 빗대어 신출내기 기자를 그렇게 귀엽게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사츠마와리(찰회 察廻)’라는 일본어를 기자들 사회에서 은어로 사용하는 줄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에야 알게 됐습니다.
경찰서는 “기자실”이라는 조그만 방을 마련하여 신문, 방송, 통신사 등 경찰 출입 기자들에게 성의껏 편의를 제공했지만 그걸 고마워하는 기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고참 선배들이 갓 들어온 수습 기자에게 가장 먼저 교육시키는 것이 “절대로 경찰에게 만만하게 보이면 안된다”며
"경찰서 문은 발로 차서 열어라. 아무리 나이가 많고 계급이 높아도 절대로 ‘님’자 붙이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실제로 늙은 경찰에게 반말 하며 싸가지(?) 없게 횡포부리는 기자들도 많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아르바이트 하면서도 대학 다닐 수 있다는 황당한(?) 꾐에 빠져서 아무런 준비 없이 1979년 여름에 미국 유학 길에 올랐습니다. 좋게 말하자면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떠났지만, 사실은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나의 허영심이 크게 작용하여 앞뒤 사정 가리지 않고 무작정 떠난 유학길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황당하고 무모한 결정이었습니다.
입학 허가를 받은 학교가 교포들이 많이 사는 Los Angeles인근으로 결정된 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가진 돈이 없어서 미국에 가자마자 일당 30불 받는 막노동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몸은 고달프고 하루 세끼 먹고나면 20불 모으기도 버거웠습니다. 이렇게 생활해서는 대학원 과정 마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금세 깨달았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이 Los Angeles에서 교포 신문을 발행하고 있던 한국일보 지사였습니다. 한국일보 창업자인 고 “장기영” 사장의 둘째 아들이 70년대 초에 국내 신문사로서는 최초로 미국에 진출하여 현지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습니다. 다짜고짜 찾아가서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 경력을 말하고 일자리를 부탁했습니다. 그때 L. A. 교포 사회에서 기자 경력을 가진 사람을 찾기 어려웠던 때라 그들도 나를 쌍수 들어 환영했습니다. 간단한 조회를 마치고 바로 기자로 채용됐습니다.
처음엔 학교 공부를 위해서 하루 8시간, 일주일에 3일, 일하는 조건으로 시작 했으나 돈이 턱없이 부족하고 궁해서 어쩔 수 없이 일주일에 40시간, 풀타임 기자로 일해야 했습니다. 풀타임으로 일해서 월급 9백불을 받았는데 살인적으로 아껴써야 겨우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 본사에서 전송받은 한국일보에다가 미국과 교포 사회 등 현지 소식을 추가하여 신문을 발행했는데 대략 3만 부 정도를 찍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2명 정도의 기자가 편집국에서 함께 일했습니다.
AP, UPI, AFP, 그리고 일본의 지지통신(時事通信) 등의 뉴스 서비스를 받았는데 네 대의 텔렉스에서 쉴새 없이 쏟아내는 기사 찍는 소리가 양철 지붕에 소나기 퍼붓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Los Angeles Times는 물론 New York Times, Washington Post, Wall Street Journal 같은 미국의 내노라 하는 신문들은 물론 각종 시사 및 경제 잡지 등을 읽고 주요 내용을 간추리고 요약하여 미국 소식란에 기사를 올리는 게 나의 주요 업무였습니다.
교포 소식란에는 한인회를 비롯한 교회 등 종교 단체들의 동정, L A 일원에 사무실을 둔 한국의 상사 지사 소식 , 체육회 행사, 고등학교 동창회, 영사관과 무역협회, 한국 문화원 등 각종 기관과 단체의 소식도 빼놓을 수 없는 단골 기삿거리였습니다. 커뮤니티 인사들의 회갑연이나 아들 딸 결혼, 장례 소식이나 비지니스 개업 소식 등도 전하면서 신문은 동네 사랑방 역할을 다했습니다.
이런저런 국내외 뉴스와 커뮤니티 소식에 더해, 본국판이라고 부르던 한국 신문을 통째로 추가하고, 거기다 각종 신문 광고까지 더 해지면 통상 신문은 40-50페이지가 넘었습니다.
L. A.는 땅이 매우 넓고 인구가 많은 큰 도시인데 인건비도 비싸서 신문 배달은 우체국의 배달 서비스를 이용했습니다. 주변 인근에 사는 독자들은 대부분 신문을 다음 날 받게 되지만, 타주나 알라스카 같이 아주 멀리 떨어져 사는 독자들은 사나흘, 때로는 일주일 후에나 받아볼 수 있어서 신문이 아닌 구문을 본다고 푸념하는 독자들도 많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일년에 한 번 씩 “한국의 날” 행사를 주관했는데 이 때는 코리아타운 일대의 도로를 모두 차단해서 차량 통행을 금지하고 꽃차 퍼레이드와 밴드 행진를 하며 위상을 한껏 과시했습니다. 한국에서 유명 연예인들을 수십 명 씩 초청하여 대규모로 미국 순회 교포 위문 공연을 1년에 한번 씩 열었는데, 현지 교포 사회는 물론 미국 한번 가기가 쉽지 않았던 7080 시절에는 인기 가수와 탤런트, 영화 배우, 코메디언들이 앞다퉈 이 공연 팀에 끼워달라고 로비를 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LAPD (Los Angeles Police Department)는 기자들의 취재 편의를 위해서 기자들에게 빨간색의 프레스 카드를 발급했는데 이 카드에 구멍을 내어 끈으로 길게 묶고 목에 걸고 들어가야 경찰서 출입이 허용됐습니다. 프레스 카드가 있다고 해서 아무 때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는 없고, 또 가봐야 기자를 상대해주는 경찰도 없습니다. 프레스 컨퍼런스(Press Conference)라는 공식적인 기자 회견 할 때 정도 만 경찰서 출입하는 게 관례입니다.
사스마리 하면서 배웠던대로 경찰서 문을 발로 뻥차고 들이닥쳤다가는 아마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게 될 것입니다. 미국 경찰들은 정말 무섭습니다. 큰 소리 쳐봐야 겁먹을 사람들도 아닙니다.
수업 시간에 늦어 액셀 밟아대며 과속하다가 속도 위반으로 교통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60 마일 속도 제한 고속도로에서 90마일도 달렸습니다. 한달 식생활비에 해당하는 2백불 짜리 딱지를 뗄 판이라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미국 경찰이 나를 봐줄 리가 없습니다. 꼼짝 없이 당할 판인데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프레스 카드가 생각났습니다. 혹시나 해서 그걸 꺼내보이며 취재 차 급해서 과속했다고 변명했는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교통경찰이 빙그레 웃으며 “과속은 위험하니 조심하라”며 나의 운전 면허증을 돌려줬습니다. 딱 한 번 기자증 덕을 봤습니다.
돌이켜보면 7080 시절이 종이 신문의 최전성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신문에는 광고가 넘쳤고, 정기 구독하는 독자들도 많았습니다. 그 만큼 언론에서 차지하는 신문의 위상은 미국에서도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주법은 신문에 광고가 기사보다 더 많이 실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신문의 주수입원인 광고를 놓치지 않으려면 기사를 많이 써서 지면을 늘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광고가 몰리는 주말 신문은 보통 300-400 페이지나 돼서 신문을 노끈으로 묶어 배달했는데 문앞에 신문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 같아서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평일에도 지면이 보통 80-90 페이지 정도는 됐습니다.
지면이 많다보니 기사도 길어지고 다루는 내용도 아주 깊고 넓으며 또 집요했습니다. 그런 미국 신문 기사에 익숙해지니 왜 한국 기자들은 미국 기자들처럼 사건에 대해 분석적이고 입체적이며 종합적인 안목을 가진 기사를 쓰지 못할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미국 기자들처럼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는 심도 있고 분석적인 기사를 한번 써보고싶었습니다.
신문사에서 특종상을 받고 부상으로 회사가 비용을 부담해주는 3박 4일의 휴가 여행을 떠나게 됐습니다. 나는 단 며칠 간이라도 미국식 기자 연수를 받고싶다고 신문사에 요청하여 주말을 앞뒤로 껴서 일주일 간 시카고의 타임 센터에서 기자들 상대로 하는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권위있는 시사 주간지 “타임(Time)”과 “라이프(Life)”의 발행사가 둥지를 튼 시카고는 저널리스트들이 가져야할 직업 정신과 윤리 강령에 관한 최초의 보고서인 “허친스 리포트(Herchins Report)” 를 발표하여 일약 언론인들의 성지로 떠올랐던 곳입니다.
그 때 연사로 나온 Chicago Tribune지의 편집장(Editor in Chief)이 했던 말이 아직도 내 가슴을 울립니다.
그는 10번의 특종 보도보다 한번의 오보가 신문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해악을 끼친다면서 중요한 정보를 얻었으면 반드시 두세 곳 이상의 신뢰할 만한 소스로부터 크로스 체크(Cross Check) 해서 사실 관계를 복합적으로 확인한 후에 기사를 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했던 말이 인상 깊어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When your mother says she loves you, check it out !” (네 엄마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사실인지 확인해봐라)
사실에는 한 치의 타협이나 왜곡이 없는 진실 보도 만이 기자의 사명임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