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43/노부老父 생각]효자는 하늘이 내는 것?
하늘이 이렇게 드높고 청명한 가을날씨에는 절대로 슬프거나 우울한 일이 나의 주변에 생기면 안될 일이다. 더구나 인력人力, 즉 사람의 힘으로 안되는 일이라면 더욱 안될 일이다. 가깝게는 핵가족, 나의 식구들, 나아가 부모를 비롯한 피붙이 동기중 암 등으로 심하게 아프다든지 다쳤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다. 집안이 잘 되려면 어떤 우환憂患도 없어야 되고, 가화만사상家和萬事成이 으뜸이라는 것은 진리이지 않는가. 내가 유난히 센치해서가 아니고, 날씨 때문이라도 ‘살아간다는 일이 원래 서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하는데, 주간보호센터에서 모시러오고 모셔다드리는 96세 ‘아버지의 하루’를 생각하면 한없이 우울하다. 이제 그 나이에 ‘킬링 타임’말고 무슨 할 일이 있으시겠는가. 핸드폰을 수시로 들여다보거나 티비를 잠깐잠깐 보아도 당신 앞에 널려 있는 무한정의 시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짜-안하기가 말로 못한다. 어머니와 같이 백년해로를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힐끗힐끗 당신의 모습을 훔쳐보는 나도 답답하다. 딱히, 마땅히 아버지와 아들간에 할 이야기도 없지 않은가. 고작 ‘잘 다녀오세요’ ‘잘 다녀오셨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정도이고, 당신도 ‘밥 먹어야제’ ‘끼니라도 잘 챙겨먹어야제’ ‘곤헌디 어서 자라’ 등뿐이니, 다 합쳐도 하루 10분이 채 안될 터이다.
어제는 서재에서 아무렇게나 팽개쳐있는 문건들을 정리하다 놀라운 발견을 했다. 1989년 손위동서의 아버님(임실향교 전교출신 이병춘옹)이 써주신 ‘팔반가 병풍서’ 8장이 눈에 띈 것이다. 최근 106세로 돌아가신 그분은 100세때 나와 바둑을 두기도 했다. 고조선의 역사가 멸실된 것을 안타까워하고, 서예를 즐기셨는데, 결혼 5년차 사돈인 나에게 왜 이 글을 써서 선물했을까. 겉봉투에 쓰인 '효 백행지원孝百行之源'을 가르켜 드린 것이었으랴. 명심보감明心寶鑑의 ‘팔반가八反歌’를 들어보신 이들도 있을 터,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차이’를 여덟 가지 예를 들어가며, 효도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좋은 글귀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흔히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은 있다’는 말로 자신의 불효를 '어쩌라고?' 하며 변명한다. 자식으로서 반성해야 할 여덟 가지 항목을 찬찬히 읽으며 그 뜻을 새겨보지만, 어찌할 수 없는 게 태반이다. 아하-, 그래서 예전부터 ‘효자는 하늘이 낸다’고 했구나 싶다. 팔반가를 자세히 알고 싶어 주제 검색을 하다 깜짝 놀랐다. 2005년 성균관 산하 조직(국민생활실천운동본부) 블로그에 내가 쓴 글이 튀어나온 게 아닌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졸문을 발견했다. 와우-, 도대체 이 손바닥만한 휴대폰에는 어째서 없는 것이 없는 것일까. 누가 입력을 해놓았을 것이 아닌가. 언빌리어블unblievable. 도대체 믿을 수 없다.
그래서 붓펜으로 ‘팔반가’ 전문을 써보며, 새삼 나의 불효에 대해 거듭 반성했다. 반성은 언제나 아무 때나 곧잘 하지만, 그 반성 끝에 오는 ‘불손한 언행’은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다. 돌아가시면 엄청 후회하고 울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확신한다. 나는 죽어도 효자가 될 수 없다고! 효자는 하늘이 내는 것이라고! 여기에 팔반가 전문의 한자와 해석을 옮길 필요가 없는 이유는, http://yejeol.or.kr/nanumbang/view.php?code=cm_sarang&page=4&number=32&keyfield=&key= 이 블로그에 실려있는 졸문 끝부분을 읽어주시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요즘 우리 나이에 자라나는 손자손녀들을 보면, 이건 숫제 ‘미친다’. 어째서 이렇게 눈에 넣어도 아플 것같지 않게 이쁜 것인가. 우리 자식들을 키우며 이렇게 예뻐했을까, 전혀 기억에 없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끔찍히 사랑하지 않았던 것같다. 살아가는데 바빠서였을까. 그래서 ‘내리사랑’이라는 말도 있을 터. 그런데 우스갯말로 ‘할아버지의 재력財力’이 문제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좋은 책상 하나 사주고 싶지 않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어디 있을까. 이왕이면 손주 이름의 통장을 만들어 금일봉도 넣어주고 싶다. ‘능력이 없는’ 할애비는 그래서 어제 오후에 정태춘의 <아가야 가자>라는 노래를 음치인데도 불러 손자에게 선물을 했다. 이 노래는 나의 두 아들 갓난애 때에도 불렀으니 근 40년이 다 돼가는 ‘고전가요’이다. 재밌는 것은 그녀석 두 살이나 됐을까, 제 엄마가 할아버지의 애창곡이라며 그 노래를 불러주면 한 소절만 듣고도 엄청 세게 울어댔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제 울지는 않고 재밌게 끝까지 들을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아가야 걸어라/두 발로 서서 아장아장/할매 손도 어매 손도 놓고/가슴 펴고 걸어라/흰 고무신 아닌 꽃신 신고 저 넓은 따이 네 땅이다/삼천리 강산 거칠 데 없이 아가야 걸어라//아가야 걸어라/두 다리에 힘 주고 겅중겅중/옆으로 뒤로 두리번거리지 말고/앞을 보고 걸어라/한 발자국 두 발자국 저 앞길 환하잖니/가슴에 닿는 바람을 이겨야지/아가야 걸어라//아가야 걸어라/어깨를 펴고 성큼성큼/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동무하여 걸어라/봄햇살에 온누리로/북소리처럼 뛰는 맥박/삼천리라더냐/그뿐이라더냐/아가야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