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서는 달지만 먹으면 배가 쓰린 두루마리
묵시 10,8-11; 루카 19,45-48 /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2022.11.18.; 이기우 신부
오늘 묵시록 10장에서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고 섬에 갇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묵시 10,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에페소를 비롯한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해야 함은 물론, 복음서와 서간들 그리고 묵시록까지 기록해서 후세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처지를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때에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하는 소리가 나에게 들렸습니다”(묵시 10,11).
그런가 하면 복음에서는 예루살렘 도성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3년 전에도 성전을 한바탕 뒤집어놓은 일이 있어서(요한 2, 13-22 참조) 사두가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을 감시하던 참이었는데, 이제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그분이 다시 한 번 성전을 감독하는 대사제와 사두가이들의 권위와 권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이 성전정화사건으로 말미암아 사두가이들은 결정적으로 그분을 살해하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으로서는 재차 이 사건을 일으키셔야 할 정도로 사두가이들이 성전에서 벌이는 횡포가 심각했습니다.
이렇게 독서에서는 사도 요한이 박해 속에서 사도로 살아온 운명과 선교사로서 짊어진 소명을 비장하게 고백하고 또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유다교의 복마전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계시는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하느님 말씀을 무시했던 유다교의 슬픈 운명과 그리스도교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새롭게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리라고 다짐하는 장엄한 모습을 동시에 떠올리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일곱 겹으로 봉인되었던 두루마리를 풀어 펼치시자 그리스도의 인호를 받고 환난을 이겨낸 수많은 무리들에 의해서 새 예루살렘이 세워지고 이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이 되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역사의 부침도 있었고 명암도 있었지만, 가톨릭교회의 역사는 그 구체적인 전개과정이며, 이 땅의 교회가 박해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래 겪고 있는 역사 또한 그렇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 정신을 담은 ‘공동합의성’ 문서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겪고 있는 모습은 공의회 이전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내부적으로 공동합의적 삶을 이룩해야만 하는 일은 생명과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정의와 연대성과 평화의 표징 안에서 민족들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을 진흥시키는 파스카 과업에 봉사하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권위주의적이고 기술 지배적인 시류의 위험 속에서 민주주의적 참여 절차가 구조적인 위기를 맞고 그 원리들과 영감을 주는 가치들이 불신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대화를 실천함으로써 정의와 평화를 건설하는 공통되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은 절대적으로 우선되어야 할 일들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향해야 할 사회적 관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파스카 과업으로 향하는 이러한 맥락에서는,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과 땅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하느님 백성의 우선적 임무이며 모든 사회적 행위의 기준이며, 이제 사회의 선택과 계획 수립에서, 가난한 이들이 특전적 위치와 역할을 지니고, 부의 보편적 사용과 연대성의 우선성이 강조되며,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볼 의무가 절박하게 요청되어야 합니다. 이 같은 전망은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생태적 차원에서 가톨릭교회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길을 매우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듯 새로운 길을 가려면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이 그 자체로는 찬란해 보이는 매력이 있는 반면, 막상 이를 실천하자면 현재의 모습에 안주하려는 경향으로부터 회심해야 하는 고통을 각오해야 합니다.
‘공동합의성’을 공의회의 결론으로 삼고, 이를 몇 년 동안이나 국제신학위원회 위원들에게 연구를 시키고 나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발표하게 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의지는 오늘 복음에서 철옹성 같았던 예루살렘 성전에 도전한 예수님의 용기를 연상하게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예수님의 계명대로 서로 섬기며 살아가는 일은 외부에서 방해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런 박해는 종식되었습니다. 단지 우리 내부에서 버티고 있는 복고지향적이고 현실안주적인 성향이 가로막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성향이 과거 2천 년 전 예루살렘 성전만큼이나 공고한 장벽처럼 우리의 회심을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우 여러분!
제도를 카리스마에 봉사하도록 개혁함으로써 복음 진리로 무장한 가톨릭교회로 변신하는 일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가 아닙니다. 각성된 개별 신앙인들이 작은 공동체로 모여 연대하는 일 또한 성령께서 이끄시는 것으로서, 실현불가능한 기적이 아니라 얼마든지 실현가능한 기적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복음 환호송, 요한 10,2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