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광복 69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친일 매국노들과 그 후손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부와 권력을 누리며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데 비해, 목숨을 걸고 항일독립운동을 한 독립투사들과 그 후손들은 푸대접을 받아 대부분 궁핍하게 살고 있어, 민족정기가 바로 서지 못하고 있다.
이유립 선생은 일평생 늘 고독과 세상의 질시와 가난을 적으로 하여 힘겨운 삶을 살았지만 올곧은 선비정신을 잃지 않고 항일독립운동가로, 재야 민족사학가로, 정통국사 광복운동가로, 교육자로 활동하며 조국의 발전에 많이 기여했다. 그리고 그는 동향의 오봉록 지사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국립묘지에 안장되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유립 선생 자기 자신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가족들이 지금 강화도와 대전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다. 그리고 그가 13년간 거주하며 민족사학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며 정통국사 광복운동을 전개하던 대전시 중구 은행동 107번지 목척시장 뒷골목에 위치한 한암당(寒闇堂)은 방치되어 흉물로 전락한지 오래되었다.
한암당 이유립 선생은 1907년 평북 삭주에서 독립운동가였던 이관집의 5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7일 삭주 신안동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했다. 그리고 1920년에 스승인 계연수 선생이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무참하게 살해되자 남만주로 건너가, 3년여를 머무르면서 조선독립소년단의 단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의민사·천마산대(서로군정서 별영) 등 항일단체의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국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1924년에는 천마산대 소년별동대격인 삼육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역사와 상식을 강의했다.
1939년에는 이상유의 희사금으로 신풍학원을 설립, 학감 겸 교사로 근무했으나 학생들의 신사참배 불응과 창씨개명 불응 등이 배일행위로 지적되어 강제로 폐교되었다. 1976년에는 대전에서 의정부로 거주지를 옮겨 단촌 이석영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광개토성릉비문역주’·‘세계문명동원론’·‘커발한문화사상사’ I·II를 차례로 발간하고, 월간 잡지 ‘자유’에 국사 관련 논문을 기고했다. 그리고 그 해 10월 박창암·안호상·문정창·임승국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조직했다. 1979년에는 ‘환단고기’를 처음으로 공개해 역사학계를 놀라게 했고, 1983년에는 단촌 이석영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한암당이유립사학총서’를 간행했다.
이유립 선생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가 1986년 4월 19일 새벽 1시에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여 고양의 문경공원묘지에 안치됐다. 그의 사후 1년만인 1987년에 제자들에 의해 이유립 선생의 한민족사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대배달민족사’ 5권이 간행되어 이암-이맥-이기-계연수-신채호-정인보-최태영으로 이어지는 민족사학의 맥을 잇는 데에 많이 기여했다. 그런데 이유립 선생은 아직까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국립묘지에 그의 유골이 안장되지 못하고 있고, 유가족들은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고 있다.
그러니 국가보훈처가 하루라도 빨리 이유립 선생 유족들을 찾아뵙고 이유립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조사하여 이유립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해야 한다. 그리고 대전시에서는 한암당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이유립 기념비와 기념관을 세우고 관광자원으로 개발하여 구도심을 활성화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