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몰랐을때는 그냥 넘어가다가 어느정도 알고서 다시 보았을때 세세한 부분을 재발견하는 것도 나름 소소하게 재미를 느끼는 부분이어서, 저는 전에 본 사극을 다시 보는 것도 즐기는 편입니다.
드라마 정도전의 경우 드라마적 허구가 당연히 포함되어있지만, 사료에 나타난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잘 나타내기 노력을 많이 한 작품이고, 그 때문에 일반대중 뿐만이 아니라 역덕들에게도 상당히 호평을 받았습니다.
초반에 잘 만들다가도 드라마가 후반부로 가면서 안드로메다로 가는 경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도전은 그렇지 않고, 사소한 대사 하나에서도 사료에 있는 걸 활용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예를들어 조준이 요동정벌에 반대하니까, 남은이 정도전과 대화하면서 "애초에 두승이나 재면 딱 알맞을 사람이었수 대업을 같이 할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라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게 진짜 사료에 나와있는 부분이었죠. (그것도 '실록' 에 ㅎㅎ)
남은이 말하기를
"정승(政丞)은 다만 두승(斗升)의 출납(出納)만을 알 뿐이라, 어찌 기모(奇謀)와 양책(良策)을 낼 수 있겠소?"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6월 27일 신묘 1번째기사 조준의 졸기
이건 이환경작가의 용의눈물에서도 나타나는데,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방간의 2차왕자의 난이 벌어졌을때 소식을 들었던 이성계가 "방간이가! 이런 소같은 놈이 있나!"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도 실제 있는 말 ^^;;
태상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정안(靖安)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하였다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1월 28일 갑오 3번째기사
이런 거를 드라마에서 잘 살릴 수 있다는게 바로 드라마 연출진들의 능력일 겁니다.
그리고 정도전의 마지막의 요동정벌에 관해서는 드라마적 상상력을 가미한 연출이겠지만 그 연출 또한 어느정도 역사적 지식배경이 없으면 나오기 힘든 것이었다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지막 화에서 정도전이 이방원의 습격을 받기전 남은과의 대화에서 남은이 명나라하고 무슨 방도가 있는 겁니까? 하니까 정도전이 "명나라에서 끝까지 체면을 살려달라고 요구하면 이 늙은 몸뚱이가 가서 죽어줄 밖에" 하는 장면이 나오죠.
처음 봤을때는 그저 주인공으로서 정도전의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만 봤는데, 구도를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는 거죠.
드라마내의 구도를 보면 정도전은 홍무제의 죽음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혼란을 틈타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있고, 자기가 가서 죽는 건 요양 도지휘사 점거하고 난 뒤를 상정하고 있는 겁니다.
즉 드라마상에서 정도전의 계획은 명나라의 내전을 틈타 요양 도지휘사를 무혈로 점거 - 내전이 끝난 뒤 명나라에서 항의하거나 명나라가 재침공을 할 기미가 보이면 자기가서 죽음 - 대신 요양은 넘겨주지 않고 명나라의 보복도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조선의 요양 점거를 기정사실화 시킴 인데.
근데 이런 구도는 고려말에 있었습니다. 다만 저런 멋있는(?) 모습이 아니었을 뿐.
바로 공민왕 제위기간의 '인당'
공민왕의 정동행성 폐지, 기철일파 제거, 쌍성총관부 공격과 더불어 반원개혁의 하나로서 거론되는 압록강을 넘어 파주참을 공격한 일이 있는데, 이 일을 주도 한 사람이 바로 인당이었죠. 당연하겠지만 원나라에서는 저 일들에 대해서 대단히 항의하였고 80만으로 고려를 공격하겠다는 협박을 해 옵니다. 공민왕은 원나라가 그럴 형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겁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나라와의 전면전은 피하기 위해서 마치 조조가 왕구를 죽인 것 같은 비정한 모습을 보이며 '인당'을 희생제물 삼아서 원나라의 체면을 살려주게 됩니다.
즉 '인당' 사례 처럼 '영토 공격이후 사건무마를 위해 희생제물이 된다' 는 걸 드라마 상의 제물이 될 정도전 본인이 계획하고 구상했다고 연출을 한 거지요.
그리고 이건 드라마 연출진들이 알았기 때문에 정도전의 마지막 요동정벌 구상에 활용을 한 거라고 봅니다. 드라마상에서 공민왕 암살사건 직전에 공민왕이 정도전과의 대화에서 "나를 믿지마라 나는 영토를 수복한 인당을 죽였고, 개혁하던 신돈을 죽였다"는 대화가 있기때문이죠. 즉 인당의 사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데, 좀 소름끼치는 건 그럼 처음부터 이 소재를 마지막에 활용할 계획을 하고서 이런 대사를 집어 넣은 건가 싶다는 거.
어디까지나 사극 상의 허구적 연출이기는 합니다만, 저 허구적 연출들이 그냥 작가의 상상력으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라 나름의 역사적 배경을 활용하였다는 점, 그리고 그 연출이 대중들에게 잘 먹혀들어갔다는 점, 이런 부분이 정도전이라는 드라마의 가치를 높이 평가 할 수 있는 요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 이런 드라마 언제쯤 다시 나올런지..... ㅜㅜ
첫댓글 벌써 나온지 십년이 다 되어가죠
지난 2014년에 유럽 가서도 진짜 열심히 봤던 게 조금은 아득해진 기억이 되었네요
더 이상 그런 사극은 없을듯...
이거 다음으로 2017년에 중국에서 드라마 '사마의'가 나와서 한동안 그거에 빠져들었었죠. 그래서 "앞으로 중국에서 양질의 사극이 나오는 걸 기대해도 되는거야?" 라고도 생각했지만...... ㅠㅠ
잘 읽었습니다. 생각보다 더 많은 공력이 들어간 작품이었네요.
이런 공력이 들어간 작품들이 앞으로도 좀 나와주면 좋으련만ㅠㅠ 거란전쟁은 어찌 되려는지 하아....
거란전쟁이 재미있는 사극될것 같습니다
저도 그리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ㅋㅋ
작가 내공이 좋아서 그랬던 거라선지 이후에 더 나은 사극이 나오기 힘들었던 듯요 ㅎㄷㄷ
지금 하는 이방원도 배우들의 대사가 현대극 말투로 양념쳐져 있죠.
명작뒤에 좋은 평가 받기 힘든 부분도 있기는 하죠 ….ㅜㅜ 저도 징비록 전투씬 만은 나름 좋게 평가합니다
@배달의 민족 징비록 전투씬은 뭔가 이중인격 인간 같이 제작진이 양세력나눠 충돌한건지
어떤 덴 고퀄이고 어떤 덴 과거 엉망인거 그대로고 섞여서 더 아쉬웠던 기억이 ㅋㅋㅋ
재미있게 본 사극이었죠 고증이 잘된 수작입니다.
이런 사극을 다시 볼 날을 기원합니다 ㅎ
정말 재미있게 본 사극이라 소장 중인데, 문제는 주연배우를 다시 보기 힘들다는 것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