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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시대는 그리스도인지 적그리스도인지 분별하지 못한다.
여호와께서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양육하셨지만 우리가 아버지를 거역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주인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고 한탄하신다. 여기서 '깨닫다'라는 뜻은 분리할 수 있는, 다름을 분별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하고 양인지 늑대인지, 그리스도인지 적 그리스도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름으로 범죄자들의 나라가 되었고 거룩하신 분을 신성모독하고 혐오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다. '멀리하다'는 뜻은 '세상을 따라가는 이방인이 되었다. 간음하는 매춘부처럼 되었다'라는 뜻이다.
음란한 세대가 되고 죄악으로 무너진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1:2~4)
공중의 학은 정한 시기를 알고 두루미도 올 때를 지키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주인의 규례를 알지 못한다고 예레미야가 탄식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주인의 규례를 알고 있는가? 어쩌면 우린 두루미만도 못한 자들일지도 모른다. (렘8:7)
2. 하나님께 매를 맞는 이유는 죄를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머리는 쇠약해지고 병들고 괴로우며 비통함에 잠겨있다. 마음도 병들고 근심으로 곤비하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하고 채찍질 당함같이 터지고 새로 맞은 흔적밖에 없다. 이런 우리에게 이사야는 얼마나 매를 더 맞으려고 죄를 계속 짓느냐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더 나아가 범죄가 거듭되면 땅은 황폐해지고 도시들은 불타며 토지가 외국인들에 의해 삼켜진다. 하나님께서 그루터기를 남기시겠지만 간신히 생존자를 남기는 정도이며 나머지는 소돔과 고모라 같이 망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 삶이 피폐해지고 곤비하며 벌을 받는 이유는 계속해서 죄를 쌓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1:5~9) 그러면 죄는 무엇인가? 죄를 극복하기 위해 주신 것이 율법이다.
3. 율법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
이런 멸망하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여호와의 말씀과 법도에 순종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법도는 히브리어로 '토라'다. 토라는 법으로 정해진 명령, 계명, 모세오경, 율법을 의미한다. 또한 토라의 원어는 '야라'로 물처럼 흘러가는, 자연 법칙이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토라를 거스르는 것은 모든 자연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리고 타겟을 겨누어 화살을 쏘거나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토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이고 자연 법칙이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정확히 타겟을 맞추는 것이다.
바로 지도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법도를 백성에게 가르치고 순종하고 순종하게 하라는 것이다. (사1:10)
3 예슈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정말 열심을 다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열심히 한만큼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건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오히려 겸손한 거라 믿는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우리도 죄를 지적하는 의인보다 자신의 죄를 이기지 못하는 죄인을 겸손하다고 여길 수 있다. 이것이 인본주의에서 나온 겸손이다.
예슈아께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이것을 사람들은 예슈아께서 율법을 끝내셨다고 해석함으로 신성 모독한다. 그러나 원어는 '도달점, 목적이 되다'의 뜻이다. 즉, 우리가 예슈아까지 자라나야하는 도달점, 본보기가 되셨다는 뜻이고 예슈아처럼 죽기까지 순종하라는 뜻을 담고있다. 만약 거룩함을 위해 주신 율법을 예슈아께서 자신이 혼자 완성했으니 안지켜도 된다고 하셨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교리인 것이다. 깨달을 자는 깨닫기를 바란다.(롬10:2~4)
4. 여호와의 법정을 짓밟기 위해 오는가?
영어 번역을 보면 여호와께서 "제물을 가져오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다. 즉,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번제와 속죄의 피도 기뻐하지 않으시며 심지어 누가 이것을 가져오라고 요구했느냐고 반문하신다. 그러면서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영어로 마당 court는 '법원, 법정, 판사, 배심원'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밟는다는 뜻은 '뭉개다, 모욕적으로 짓밟다'라는 뜻이 있다.
즉, to tread my courts는 '여호와의 법정을 모욕적으로 짓밟기 위해' 요구하지도 않은 제물을 가지고 왔느냐는 책망인 것이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거룩한 예물과 거룩한 모임을 원한 것이지 불의한 예물과 불의한 모임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범죄자라면 예배자가 아니라 공의를 짓밟는 자로 드러날 수 있다는 무서운 말씀이다. (사1:11,12)
5. 왜 여호와께서 제물과 예배를 혐오하시는가?
헛된 제물의 뜻은 '교활한 제물, 우상숭배로 드려지는 제물, 거짓 제물'등이다. 만약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면 우린 죄 가운데 우상숭배와 같은 헛된 예물을 드릴 수 있다. 또한 월삭, 샤밧 심지어 여호와의 절기도 가증히 여긴다고 말씀하고 있다. 마치 우상숭배처럼 또, 도덕적으로 구역질나는 것으로 여기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월삭, 절기, 샤밧을 싫어하신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 뜻이 아니다. 바로 성회 중에도 악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을 견디지 못하겠다'라는 것은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성회에 죄악들은 허용할 수 없고 극복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죄악은 허용되는 문제가 아니라 끊어야 하는 문제이다.
심지어 여호와의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절기를 싫어하고, 대적으로 여기고 증오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분명 여호와의 월삭이고 절기이지만 아버지께서는 거룩한 모임을 선포하셨지 범죄자들의 모임을 정하신 것이 아니므로 너희의 월삭이라 칭하는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마음은 여호와의 영혼이다. 즉, 성령이다. 성령은 그런 범죄자들이 모여 있는 예배와 제물을 증오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월삭과 샤밧과 절기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들이 드리는 거짓된 예배와 제물를 말하는 것이다. 성령은 여호와의 영이다. 여호와의 영은 여호와의 법을 지킨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가 여호와의 법도를 사는 것은 당연하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이다.(사1:13,14)
6. 왜 하나님께서 많은 기도를 거절하시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손을 펴도 그리고 많이 기도해도 아버지께서 듣지 않을 거라 말하고 있다.
기도를 싫어하셔서, 손을 펴는게 싫어서 하시는 말인가? 기도 대신에 다른 방법을 찾으라는 말인가? 왜 싫어하시는 건가?
심지어 많이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일지라도 듣지 않으신다는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다.
듣지 않으시는 이유는 우리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우리가 마땅히 죄를 책망해야 할 때 책망하지 않고 죄를 끊도록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들의 피가 모두 우리 손에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손으로 수많은 죄를 지어 피가 가득하다면 우리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것이다.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이 그 기도를 헛되게 한다. (사1:15)
7 얼굴을 가리고 돌아보지 않으시는 이유가 있다.
특히 하나님의 종들, 지도자들의 본분은 정의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했다. 즉 순종을 거절하고 불순종을 기뻐했다. 그러면서 갈급한 하나님의 백성을 뜯어 먹고 뼈를 꺾어 다져서 먹어치웠다. 그들의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데 자신의 유익을 위해 그들을 잡아먹고 괴롭히고 남김 없이 벗겨 먹고 먹을 것이 없어지면 내던져 버렸다. 이렇게 하나님의 종들이, 리더들이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이기적인 삯꾼이였으므로 이제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짓을 때 응답하지 않고 악한 행위만큼 얼굴을 가리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리더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주는 지도자를 찾아가고 공의에 관심이 없는 자신의 문제도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만 탓할 수는 없다. 모두의 책임이다.(믹3:1~4)
8. 신실하던 하나님의 백성이 원수가 되었다.
여호와께 신실했던 성읍(도시)이 음란한 여자가 되고 살인자들이 사는 곳이 되며 도둑과 짝하고 뇌물을 사랑하고 공의로운 재판을 하지 않음으로 여호와께 대적이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원수들에게 보복함으로 위로를 얻고 싶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악한 자들의 행위대로 보응함으로 위로를 얻는 피해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가? 무조건 용서하고 잊으라고 말함으로써 우린 공의로운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린 공의로운 자들의 편에 서있는가? 아니면 범죄자들의 편에 서있는가? 정말 돌아봐야한다. 진정한 회개는 기꺼이 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는 데서부터 시작하고 합당한 배상을 해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공의로운 재판은 범죄에 합당한 죄의 댓가를 지불하게 하고 손해에 합당한 배상을 하게 함으로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고 따라서 용서가 따라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도 대적에게 합당하게 보응하여 마음에 위로를 얻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도 공의로운 재판은 피해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가해자들에게 합당한 처벌이 되야한다.(사1:21~24)
9 죄악과 상관없이 구원을 얻을 수 있나?
예레미야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거짓말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심지어 이것은 구원의 교리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생명과도 관계가 있다.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하며 (바알의 뜻은 남편, 주인이다.) 다른 주님을 섬기며 우상 숭배하며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믿고 말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성경에는 자신이 언제 바알을 섬겼냐고 항변하는 말씀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음란한 바알처럼 섬기고 있을 수도 있다. 즉, 온갖 죄인들이 모여 성전을 도둑들이 모이는 장소로 만들고 여호와께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모습은 예레미야 눈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 유익이 없는 거짓말, 누구에게도 유익하게 하지 않는, 죄를 끊는 것을 도와주지도, 죄를 깨닫게 하지도 않는 헛된 거짓말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죄를 끊지 않아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왜 이러한 구원에 대한 가르침이 무익하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렘7:8~11)
10 죄인의 최후는 불에 타고 끌 사람이 없다.
패역한 자와 죄인은 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망한다. 그들은 물 없는 동산같고 그 행위는 불꽃같이서 함께 탈 것이고 그 불을 끌 사람도 없다.(사1:28~31)
또한 마른 풀이 불속에 떨어진 것 같이 탈 것이고 뿌리가 썪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을 위한 구원 교리는 그들을 그대로 망하게 할 뿐 어떤 유익도 없이 곧장 지옥의 불로 인도할 뿐이다. 불나방 교리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이렇게 망하는 이유는 자기 하나님의 법도을 버리고 거룩한 분의 말씀을 멸시했기 때문이다. 불순종하고 거룩함을 멸시한 댓가이다. (사5:24)
죄인의 뜻은 '과녁에서 빗나가다, 죄짓다'등이다. 율법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목적을 깨닫고 이루는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1 죄인의 길은 인정하지 않으신다
앞으로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를 것이다.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지푸라기 처럼 불에 탈 것이다.(말4:1) 또한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들의 길은 망한다.(시1:6) 불의한 자에게 환란과 불행은 당연한 것이다.(욥31:3) 우린 말씀처럼 의인의 삶을 인정하는가? 이 세상에 정말 의인이 있을까? 만약 의인이 하나도 없다면 우리는 모두 멸망할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이 틀린 것이다. 남은 자가 없다. 그러나 의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런 말씀을 적어 놓으셨겠는가? 거룩함에 대한 진부한 설명조차 필요없을 것이다.
예슈아께서는 본인을 '선한 선생'이라 부르는 것조차 말리셨다. 이유는 선한 분은 오직 아버지 한분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의인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린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함으로 의로움의 옷을 입을 수 있다. 그 의는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에서 비롯된 의로움이다. 예슈아께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고 아버지의 의로운 종이 되셨다. 그런 자들이 의로운 자들이다. 자신의 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에 순종함으로 의로와지는 것이다.
12 율법의 작은 점도 폐하러 오지 않으셨다.
예슈아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오해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완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과연 완전한 것은 무엇인가? 예슈아께서 성취하셨으므로 이제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하다. 그 말은 곧 죄를 지적하는 율법에서 자유하다는 말이고 죄에 대해 자유 이용권 free pass ticket을 받은 것이 아닌가? 교인들의 수많은 범죄와 더 가까이는 가정이 깨어지고 자녀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문제는 왜 일어나는 것인가? 율법을 버리는 것은 이미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는 것이므로 사실 자녀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회개하기 이전에 원인 제공을 한 부모가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가야한다.
또한, 여기서 '완전하다'는 뜻은 바로 아래 구절에 나와있다.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가르치면 천국에서 지극히 작게 되고 모두 가르치고 지키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어진다. 예슈아께서는 점 하나도 가르치고 지키는 것이 완전한 것이고 이를 위해 오신 거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을 폐하러 오셨다고 가르치는 것은 말씀으로 보면 천국을 버리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생명과 관련된 무서운 거짓말이다. (마5:17~19)
13 죄를 용서해주신다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함께 변론하자고 말씀하신다. 즉, 자신의 삶을 정당화해보라는, 논리적으로 왜 자신이 의로운 자인지 증명해 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인은 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 아니냐고 ... 여호와께서는 우리 죄가 주홍같아도 눈처럼 희게 하시며 붉더라도 양털처럼 희게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는 회개의 중요성을 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행함으로 하는 것이다. 즉, 즐겁게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회개하고 다시 불순종한다면 결국 칼에 삼켜지게된다. 이와 같이 양털처럼 우리 죄를 용서받는 것은 회개한 자가 누리는 축복이다.
우리가 즐겁게 순종하는 것은 아버지의 명령에 호흡을 맞추고 아버지께 동의하고 스스로 결심하여 자진해서 순종하는 것이다. 이렇게 순종하는 자가 회개한 자이고 이들은 복지를 누리며 선한 삶으로 인도될 것이다. (사1:18~20)
14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우리가 만약 여호와를 사랑한다면 그분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킬 것이다. 이것은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그러면 우린 생존하고 번성하고 복을 얻을거라 말씀하고 있다. 만약 예슈아를 믿으면 이러한 조건들이 더이상 필요없을까? 아니, 예슈아를 믿으면 불순종해도 복을 받을까?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것은 예슈아만 믿으면 된다였다.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내용은 복을 얻기 위해 다른 조건은 필요없다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은 실수가 없다. 우리에게 예슈아가 필요한 이유는 그분처럼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종과 예슈아는 반대말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양심까지 씻어진 우리는 더욱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말씀도 서로 대립하거나 부딪힘이 없어야 한다. 말씀은 하나님이고 실수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은 온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사랑하지 않고 사망과 화를 선택한다면 반드시 망할 것이다.(신30:15~18)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미워하는 자 즉, 진리를 미워하는 대적들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신32:41)
15 아픈 줄도 모르고 징계를 받는 줄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치셨지만 이들은 아픈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멸하셨지만 이들은 징계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여호와께 회개하고 돌아가지 않는다. 이처럼 회개도 쉽지 않다. 죄를 깨달아야만 할 수 있는게 회개이다. 이때 예레미야는 이 무리들이 어리석고 비천하여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도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지도자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여호와의 길, 하나님의 법도를 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의 멍에를 꺽어버렸고 결국 사자와 이리와 표범에 의해 찢겨졌다.
이게 우리 모습이 아닌가? 교인들은 여호와의 길 아니, 예슈아의 길을 모르고 예슈아께서 지키신 법도도 모른다. 하나님의 아들이 지키신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한다. 그건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다. 율법을 말하지만 지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레미야 눈에 이들은 모두 비천하고 어리석으며 망할 자들로 보였을 것이다. (렘5:3~6)
16 스스로 씻고 깨끗해지는 방법
우리는 스스로 씻고 깨끗해지고 싶다. 어쩌면 술, 담배를 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죄를 끊는 것이 관건이다. 또한, 죄를 끊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선행이 무엇인지 배우고 정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선행의 뜻은 어떤 것이 건전한 것인지, 아름다운 것인지,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등등 선한 가치관을 말하며 이것을 우린 배워야 한다. 뽁족한 막대기로 찌르듯이 말씀으로 양심을 찔려가며 하나님의 선한 행동, 선한 삶에 대한 가치관을 배워야한다.
또한 정의 즉 '거룩한 율법에 따라 이미 법률적으로 제정된 하나님의 판단의 법도'를 구하고 예배해야한다. 우린 하나님의 이름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 되심을 예배하는 것이다. 바로 거룩함을, 공의를, 정의를, 그분의 거룩한 법도를 예배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니다. 진리가 없는 하나님은 양의 탈을 쓴 늑대와 다름이 없다. 우린 기도할 때 무엇을 구하는가? 분명 예슈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 즉, 정의와 공의를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재정인가? 아니면, 그분의 공의인가? 우리가 만약 재정을 구하고 있다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칫 의식주를 구하는 이방인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지 돌아봐야 한다.(사1:16~17)
17 정의와 공의로 처음과 같이 회복하리라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의 찌꺼기를 잿물로 씻어내듯 녹이시고 혼잡물을 다 제거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판관들 우리의 조언자들, 충고자들을 처음처럼 회복하시고 결국 의로움과 신실함으로 회복된 도시를 만들고 정의와 공의로 죄에서 구출하실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고 있는데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법도를 따를 때 정의와 공의로 속죄를 받는 것이다.(사1:25~27)
18 언약의 사자가 정결케하고 회복시키려고 오신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보내 예슈아의 길을 예비할 것이고 예슈아께서 여호와의 성전에 갑자기 임하실 것이다. 그분은 바로 언약 자체이시며 왕이시다. 예슈아께서는 언약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과 함께 가고 언약을 대표하시는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왕이시다. 그가 오시는 날을 누가 능히 견딜 수 있겠는가? 그는 불과 잿물과 같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여 공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바치게 할 것이다. 예물이 옛날과 같이 고대와 같이 회복될 것이다. 재림하시는 예슈아와 함께 오는 환란은 반드시 우리를 깨끗하게 씻는 연단하는 불이 될 것이다.
반면 점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거짓말하는 자나 일꾼에게 돈을 주지 않고 억울하게 하는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모든 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19 셀 수 없이 큰 무리가 큰 환란으로 연단을 받는다
각 나라와 백성과 방언에서 셀 수 없이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초막절에 왕의 대관식에 참여할 것이다. 이들은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이다. 그 환란은 굶주려야 했고 목마르고 불이나 뜨거운 것에 상해를 입기도 하는 연단이었다. 이러한 연단을 이겨냄으로 흰 옷으로 씻어지고 정결케 되었으며 예슈아께서 이들의 목자가 되어 생명수로 인도하시고 여호와께서 이들의 모든 눈물, 아픔, 슬픔을 씻어 주신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시간인 큰 환란을 피할 생각보다는 능히 참아내고 인내하는 믿음의 단련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큰 환란에 숨겨짐을 얻는 것도 오직 아버지 손에 있다.(계7:9~17)
20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는 자들
분명 대환란은 하나님의 백성을 연단하여 거룩하게 하시는 기간이다. 그러나 만약 연단이 필요없다면 대환란의 기간도 필요없을 것이다. 그러면 누가 숨김을 얻을 것인가?
말씀은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들로써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들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규례는 판단의 법도, 미쉬파트이며 '특히 거룩한 율법'을 말한다. 숨겨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므로 그 결과는 아버지께 있다. 하지만 순종은 우리 손에 있다. 우리는 순종할 뿐이고 숨김을 얻는 것은 합당한 자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받을 것이다.(습2:1~3)
21 아브월 9일에 있었던 어마어마한 핍박의 역사들
오늘이 바로 아브월 9일이다. 그러나 아브월 9일이 샤밧과 겹치면 다음날을 아브월 9일로 지킨다. 왜냐햐면 샤밧은 안식의 나라를 상징하는 즉, 천국을 의미하는 기쁜 날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바로 오늘 이런 일들이 있었다.
솔로몬의 1차 성전이 파괴되었고
헤롯의 2차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유대인 항쟁때 유대인 58만명이 전멸되었고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으며
많은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되었고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한 법이 선포되었고
인종 청소 계획을 승인받았고
30만명이 몰살을 위해 강제 수용소로 수송되었다.
이와 같이 아버지의 달 아브월에 여호와의 전이 파괴되고 여호와의 백성이 전멸될 위기에 처했었다.
2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 금식이 변하여 희락의 절기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기 위해 오직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화평은 보상이 있고 배상이 있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분명한 배상을 하는 것이 화평임을 원어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가 있는 화평을 사랑할 때, 나라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통치를 세울 것이다.
놀라운 것은 1948년에 우리나라가 해방되어 독립을 선언했을 때, 같은 해에 이스라엘도 독립했는데, 1948년 아브월 9일은 8월 14일이었고 샤밧이었다. 그래서 8월 15일을 아브월 9일로 지냈다. 바로 성전이 무너졌던 슬픈 날에 우리 나라는 독립을 기뻐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의 2000년 만에 이스라엘을 세우시면서 회복을 시작하셨다. 바로 아브월 9일이 우리 나라에 너무 기쁜 날이었던 것 처럼 반드시 이스라엘의 슬픈 아브월 9일도 기쁜 절기로 바꾸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