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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시로 썼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고
그 섬에 가고 싶다고
나는 다도해 위에 표표히 떠 있는 섬들을 보니 저절로 이해가 됩니다.
망망대해라는 세상에는 나라는 섬이 있고 너라는 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섬들이 표류합니다.
섬들은 하나 같이 멈춰있는 듯하지만
저마다의 자리에서 어제와는 다른 수위를 견디며
내일과도 다른 파도와 맞서며 묵묵히 자신만의 바닷길을 걷습니다.
지금은 고흥반도에서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와
건너편의 거금도까지 다 이어졌습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등장하는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나오는
녹도만호 정운장군의 녹도가 있었던 곳도 고흥입니다.
팔영산은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한편 이 팔영산은 한말에는 의병활동의 근거지가 되었었고
해방 이후에는 빨치산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하였으며
일제 침략 당시에는 이 산도 역시 일본인들이
이 나라의 민족정기를 끊기 위하여 정상에 말뚝을 박았으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고 합니다.
그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말똥, 소똥을 태우던
그 봉수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그때 죽창을 들고 왜군들의 조총에 맞섰던
그 무모하기조차 했던 지사들은 다 어디에 묻혔을까요?
위에 있는 놈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만든 진영 이쪽 혹은 저쪽에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줄을 설 수밖에 없던 것이 죄라면 죄였을....
미군 폭격기에 공습을 당해 몰살당한 빨치산이나
빨치산들의 야습으로 몰살당한 군경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 자본주의라는 이념과 전혀 상관없는
단지 거죽만 빨치산이고, 군인과 경찰일 뿐이고
똑같이 순박한 남도의 청년들인데 말입니다.
그때 그 꽃다운 청춘들은 다 어디로 이슬처럼 사라졌을까요?
한국전쟁,
참혹한 역사의 상처를 가슴에 새기고 이를 치유해야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 멀리로 고흥의 끝자락 녹동항과 소록도 거금도가 보입니다.
녹동항은 인근 섬들과 연결되는 기점 역할을 하며
여러 섬에서 생산되는 모든 해산물이 모이는 전형적인 항구도시입니다.
고흥 끝자락에 위치해 있지만 도로가 잘 연결되어 교통이 좋고
소록도와 거금도를 연결하는 다리가 생겨 관광객이 많습니다.
섬과 바다.
소록대교가 만든 풍경이 일품일뿐더러
근해에서 갓 잡은 해산물을 맛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소록도와 금당도를 일주하는 유람선과
제주도와 거문도행 여객선을 탈 수 있어 오감을 만족시키는 곳입니다.
섬이 많은 바다는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그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거금도.
우리나라에서 열 번째로 큰 섬.
우리나라 면 중에서 두 번째로 큰 면.
섬에 커다란 금맥이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거금도.
거금도는 1970년대 우리들을 T.V 앞으로 끌어 모은
옛 추억의 프로레슬러 故 김일 선수의 고향입니다.
그는 일본의 역도산 문하로 들어가 레슬링을 익혀 고국으로 돌아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경제적으로 피폐한 우리 국민들에게
박치기 한 방으로 시원하게 숨통을 틔워주었습니다.
당시에 장충체육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요....
이 거금도가 고향인 지인 동생이 있습니다.
옛날에 그의 아버님이 전남도의원을 지내신 분이라
그의 어머님이 자그만치 세 분이나 계십니다.
그 덕에 위로 누나들이 주르륵 10명, 그 아래로 형이 2명
제일 꼬랑지가 이 동생입니다.
지금도 세 분 어머님이 모두 살아계시고
그를 낳아주신 어머님 팔순 잔치에 갔는데
13남매와 배우자가 전부 살아계셔서 26명이 무대에 올랐는데
사회자가 30년이나 이런 자리에 섰으나 이런 자리는 처음이랍니다.
얼마나 부럽던지요.
지금은 서울남부법원 앞에서 법무사를 하는 데 가끔씩 연락하고
오늘도 이곳 팔영산에서 통화를 했습니다.
이 동생 덕분에 고흥은 몇 번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제 6봉 두류봉(頭流峰)
건곤이 맞닿는 곳 하늘 문이 열렸으니
하늘길 어디메뇨 통천문이 여기로다
두류봉 오르면 천국으로 통하노라
두류봉에서 바라본 나로도 쪽의 다도해....
저기에 흰 탑의 우주위성 발사체가 있었는데
잘 보이지 않으니 머라 씨부릴 수도 읍꼬....
혹 누가 머라 물어본 데도 말도 못하고....
일제강점기 때 한센병 환자들이 강제 수용되어
인권을 유린당했던 흔적을 돌아볼 수 있는 한 많은 소록도.
그곳에서 고흥 반도의 끝 녹동항을 바라보면
가슴 아팠던 소록도 역사와는 달리 그리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배로 오 분이면 건너갈 수 있는 녹동항을
당시 소록도 환자들이 바라봤을 때는 얼마나 기가 막혔던 바다였을까요?
지금은 소록대교가 개통되어 편리하게 섬을 오가고 있습니다.
역사의 우울함과 대비되는 소록도의 아름다움에 혼란스러워 하며
그 때 녹동항에서 먹었던 장어탕 한 그릇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소박한 김치류와 꼬막 등 바닷가 밑반찬에
흔해 보이는 매운탕처럼 생긴 장어탕이 끓여 나왔었습니다.
한 숟가락 떠서 국물과 장어 한 점을 먹었더니 순간 생각이 멈춰버렸습니다.
누군가 옆에서‘바로 이 텍스쳐야’라고 말했었습니다.
장어의 부드러움과 잘 끓인 국물의 하모니.
소록도에 들어갔다 온 숙연함을
장어탕 한 그릇 앞에서 모두 잊고
밥상 앞에서 웃고 있는 단순한 나을 발견했습니다.
제 7봉 칠성봉(七星峰)
북극성 축을 삼아 하루도 열두 때를
북두칠성 자루 돌아 천만년을 한결같이
일곱 개 별자리 돌고 도는 칠성바위
7봉에 서니 지나온 바위 봉우리와 가야할 8봉이 한 눈에 확 잡힙니다.
힘든 산행 중에 즐기는 눈요기용의 달콤한 디저트입니다.
탁 트인 정상에서 바라보는 섬마을,
정지된 듯 잔잔한 푸른 바다는
한 편의 '시', '그림'이기도 함과 동시에 '노래'이기도 합니다.
저 푸른 물결 헤치고 거센 바다로 떠나가는 님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고흥은 임방울 선생과 쌍벽을 이룬 국악인 김연수의 고향이고
국악인 오정숙은 김연수의 제자입니다.
또 라일락으로 대표되는 서양화가 천경자 화백의 고향이며
따르릉 따르릉으로 시작하는 동요 <자전거>를 작사한
동요작가 목일신의 고향입니다. (너무 길어져서 요약합니다.)
내가 올라온 산의 높이를 가늠하듯
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잠시 숨을 고릅니다.
세월이 구름을 따라 흐르니 마음은 미소를 따라 흐릅니다,
이 웃음을 포용하지 못하고 어찌 바위 앞에서 용감해지겠습니까?
바위자락의 이끼처럼 몸은 늙고 쇠퇴해 가겠지만
이런 웃음이 있어 마음은 언제나 태양이 아니겠습니까?
제 8봉 적취봉(積翠峰)
물총새 파란색 병풍처럼 첩첩하여
초록의 그림자 푸르름이 겹쳐 쌓여
꽃나무 가지 엮어 산봉우리 푸르구나
정상에 오르면 저 멀리 대마도까지 조망된다는데 대마도는 안 보입니다.
뭘 잘못한 것일까요?
다음에는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오겠습니다.
허나 눈앞에 펼쳐지는 다도해의 절경은 일품입니다.
산자락 아래 징검다리처럼 솟은 섬들이 펼쳐놓은
다도해의 풍경을 감상하기에는 둘도 없이 좋습니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어느 다리 긴 거인이 있다면
곳곳에 솟은 섬만 밟고도 물 안 묻히고
다도해를 한 바퀴 돌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 "고흥" 피굴을 아십니까?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다양한 어종이 있다고 알았는데
고흥이야 말로 거의 사면이 바다라 해도, 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같은 해초도 섬의 왼쪽이냐 오른쪽이냐에 따라
맛과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고흥사람들은 가르쳐줬습니다.
어느 해 찾은 녹동항에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짠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싱싱한 생굴에 레몬즙만 살짝 뿌려
바닷내음의 굴을 먹어야 굴 맛의 진수라고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굴을 먹으면서도 가장 맛있는 굴의 촉촉한 수분을 보존해주는 보호막인
굴의 외관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돌덩이처럼 딱딱한 굴껍데기는
내가 먹을 수 있는 먹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만 여겨왔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고흥의 '피굴' 맛을 보기 전까지의 생각이었습니다.
불투명 회색빛 국물에 굴이 아낌없이 들어가고 깨가 뿌려진 차가운 국물은
식감을 돋우는 빛깔이라고 하기에는 좀 거리가 있었습니다.
썩 내키지 않아 한 모금만 살짝 맛보려던 것이
어느새 난 한 그릇을 들이키고 있었습니다.
그 뒤 나는 '피굴'이라는 음식에 빠져들었습니다.
마치 첫인상이 비호감인 여자에게 생각 없이 말 한번 걸었다가
뜻하지 않게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난 늘 맑은 국이 시원하고 맛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었습니다.
피굴.
굴 껍데기를 끓여 만든 차가운 굴국.
한겨울에 시원하게 먹는 이 맛,
바로 고흥의 맛.
많은 사람들은 단단한 껍데기 안의 굴 알맹이만 빼서 생으로 먹거나
국을 끓여 먹는 것이 고작입니다.
물론 껍질 채 석화를 구워먹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도대체 누가 단단한 굴 껍데기를 곰국 끓이듯 끓일 생각을 했을까요?
피굴은 술 먹은 남자들의 숙취를 말끔히 없애주고
한사발의 동치미를 들이키듯 한 겨울의 시원함을 통쾌하게 던져 주었습니다.
고흥하면 떠오르는 사람인,
유명한 프로레슬러‘김일’의 박치기도
피굴을 먹으며 단련된 실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여류화가이자 문학가인 천경자의 혼(魂)도
어린 시절에 먹던 피굴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1봉에서 8봉까지 봉우리 마다 바위의 절경이 시선을 압도합니다.
각 봉마다 고유이름을 표지석에 새겨 등산객을 반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깃대봉을 찍고 하산을 합니다.
우리네가 아름다운 풍경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산과 바다이지요.
이 다도해의 풍경을 함께 품고 있는 팔영산은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습니다.
파란하늘이 보일 때면 다도해의 올망졸망한 섬들이 멋지게 펼쳐집니다.
왕복 10시간 버스타고 6시간 산행 정말 힘든 하루였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남도 끝자락인 이 산을 자주 갈수 있겠습니까?
산행 중에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팔영산을 오지 않았다면 크게 후회할 뻔 했다고요.
저 역시 오늘 산행을 제 열 손가락 안에 꼽고 싶습니다.
이제 지친 하루의 때를 먼 바다에 씻겨내고
마음속에 담아온 절경을 토해내어야 합니다.
저 바다를 넘어 내일의 태양은 또 다시 솟아오를 것입니다.
산, 바다 ...., 그리고 길
갈매기 나는 바닷가에 그대가 없으니 쓸쓸한가? ~
언젠가 다음에 다시 찾으면 또 다시 나를 반겨줄 텐가? ~~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왜 팔영산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덟 산봉우리가 푸른 다도해에까지 그림자처럼 비치는 산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그 황홀한 8봉이
산을 다녀간 이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그림자처럼 남아서일까요?
그렇다면 나도 다른 이의 마음속에 팔영산의 그림자처럼 남고 싶습니다.
계절은 언제나 새롭게 다가오고....
세월은 바람따라, 구름따라 무심하게 지나갑니다.
지나가는 모든 것은 아름답고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살아가며 깨달았지만,
가는 세월조차 아름다웠노라고 애써 말하며 떠나는 것 같아
가슴 한곳엔 허허로움이 남습니다.
가족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면
친구는 내가 선택한 가족입니다.
우리 오솔길 가족 여러분 담달 명지산에서도 뵙기를 청하며
고흥 팔영산에서의 산행을 마칩니다.
인사를 고하며 고흥의 서정시인 송수권의‘여승’을 올려봅니다.
여 승
-송 수 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을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2018. 9. 8.
ㅇ ㅖ 소 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