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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 조선시대 정의현.,'성읍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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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귀포칠십리"
출발점.,성읍마을.
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정의현 관아'
조선시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정의현성
그곳에서 서귀포 서귀진(서귀포 방호소)까지
거리를 나타낸.,"서귀포칠십리(西歸浦七十里)"
오늘날은 서귀포를 상징하는 말로 개념 확대.
조선 초, 제주도 3고을(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정의현청 관문에서 서귀포 서귀진 관문까지 70리.
1679년(숙종 5) 정의현감 김성구.,남천록(南遷錄)
“정의현청 관아~옷귀 30리, 옷귀~서귀포까지 40리.
그 길은 다 바다와 어우러져 있지만 험한 곳은 없었다.
70리 지나는 동안 옷귀와 쉐둔(효돈) 두 마을을 제외하고
사람 사는 곳이 없었으며 거칠게 멋대로 자란 풀들이 들판에
두루 널려 있고, 보이는 것은 끝이 없었다.” - 남천록(南遷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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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에 쓰인 『제주읍지』의 「정의현지」를 보면,
“서귀리는 정의현청 관문에서 서쪽으로 70리의 거리에 있다.
천지연도 서쪽으로 70리 거리, 서귀포도 서쪽으로 70리 거리"
돌하르방은
불길에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조선시대 500년간
역대 정의현 현감
공덕비(功德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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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의현 관아가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목호들이 살던.,중산간마을.
고려 말,
'목호의 난'
몽골인들의
근거지였던
중산간마을.
목호(牧胡)는,
13세기 원(元)이
제주도에 설치한
목장(아막阿莫)의
관리를 위해 파견된
몽골인(胡)을 말한다.
《고려사》에는
하치(哈赤), 달달목자(達達牧子),
달단목자(韃靼牧子), 탐라목자(耽羅牧子).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평정된 후에
원은 제주도의 동서에 목마장을 세웠고,
이 목마장은 원 조정이 관리를 맡아 주재.
목호는 1,400~1,700명에 이르렀으며,
약 1백년 동안 제주도에 주둔하였다.
.................원나라.................
1206년 몽골제국을 세운 징기즈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뒤 유럽까지 진출.
그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다.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골제국의 제5대 황제
'쿠빌라이'가 이끈 원나라.
1279년에는 남송을 정복하고 중국 통일.
칭기즈칸 사후 송나라까지 멸망시킨 후에
중국 전체를 지배했고 고려를 차지하기 위해
1231~1270년 7차례 침입했고 정치적으로 간섭.
원나라는 1368년 명나라에게 멸망.
몽골족은 원나라가 세워지기 전부터
고려를 여러 차례 침입하며 내정 간섭.
일본정복을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 설치.
두차례 전쟁 준비를 했는데 태풍으로 실패하자
정동행성은 고려를 간섭하는 기구가 되었던 것.
고려왕은 어린 시절 원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왕이 죽으면 원의 승인을 받아 귀국해 왕위를 계승.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야 했고 왕에게 붙여지는 이름도
원나라에 충성을 다하다는 의미를 담아 충렬왕, 충선왕,
충혜왕 등과 같이 앞 글자에 ‘충(忠)’자를 붙여야 했다.
그무렵, 고려인들의 생활습관 역시
원나라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변발을 하고 호복을 입는 등
원나라 의복 양식을 따랐고,
만두와 같은 음식이 전해졌다.
.......................................
......쿠빌라이 야심 & 일본원정........
고려를 예속시킨 쿠빌라이는 바다 멀리
일본 역시 손에 넣을 야심을 품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여러 차례 사신과 서신을 보내어
일본을 회유, 일본은 정식사신을 보내지 않자
쿠빌라이는 무력으로 굴복시킬 계획을 세웠다.
고려에 병선 9백척 건조
군사 동원을 명하였던 것.
이때가 고려 원종 15년(1274)의 일로
이해 6월에 원종이 죽고 원나라 공주와
결혼한 충렬왕이 즉위했는데 당시 고려사정은
오랫동안의 몽골과의 항쟁으로 국토가 황폐한데다
원나라에 바치는 각종 세공으로 경제가 더욱 피폐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무신 정권인 최씨의 몰락,
임연(林衍), 최탄(崔坦),
'삼별초의 난'이 이어져서
백성들이 쉴 겨를이 없었다.
이런 때 쿠빌라이의 전쟁 준비 명령은
고려로서는 청천 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병선 건조에 인부를 동원한다 해도
그들을 먹일 식량조차 조달하지 못해
원나라에서 공급받아야 할 형편이었다.
병선 건조 명령은 정월에 내려졌고
일본 원정군은 10월에 출전하였으니
그 공정이 너무 촉박하여 불철주야의
무리한 공사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공사의 감독관은 홍다구(洪茶丘)라는
원나라 장군으로 고려 군민총관(軍民摠管)
직함도 있었으나 원래 그는 고려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홍복원(洪福源)으로
고려의 국경 수비대장으로 있으면서
몽골에 항복하여 몽골군의 향도 역할.
그는 이러한 이적 행위로 인하여
몽골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다.
마침 그 무렵 고려의 왕족인
영녕공(永寧公) 순이 몽골에
인질로 있었는데 영녕공이
홍복원의 이적 행위를 몹시
미워하였음은 당연한 일.
따라서 영녕공은 원나라 조정에 참소하여
홍복원을 처형토록 하였는데 홍다구가
바로 홍복원의 아들이었다.
홍다구가 고려 사람이면서
같은 민족을 못살게 군 것은
감독관이라는 직함보다는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었다.
조금 뒤의 이야기지만 제2차 일본 원정 때
다시 병선 건조 명령을 받은 고려는 그 공사
감독관으로 홍다구만은 제발 보내지 말라고
쿠빌라이에게 탄원하여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이런 일로 미루어
제1차 일본 원정의
병선 건조 감독관
홍다구의 횡포가
어떠하였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마침내 제1차 일본 원정이 시작되었다.
원나라의 도원수 홀돈(忽敦)이 거느리는
원나라 군사 2만 5천 명과 고려의 총지휘자
김방경(金方慶)이 거느리는 8천 명의 고려병이
합포에서 합류하여 대마도와 이키 섬을 소탕하고
일본 규슈의 하카다(博多)를 향해 총진군하였다.
원나라 군사는 하카다,
하코사키(箱崎)를 공략하고
다시 태재부(太宰府)를
유린할 작정이었다.
원군의 파도처럼 밀어붙이는 인해전술은
일 대 일의 개별 전투를 주로 하던 일본의
무사들을 놀라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일본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석화시(石火矢)의
위력과 요란한 북소리·납함 소리 때문에
말이 놀라 마구 날뛰는 바람에
일본 무사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여지없이 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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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군사는
하카다와 하코사키를
점령하고 불태웠으나
일본군의 야습이 걱정되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들은 작전회의를 열고 대비책을 의논하였다.
원나라의 장군들은 일단 철수하여 전선으로 돌아가
야습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고려의 장군들은
계속 진격하여 속전속결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원나라의 도원수
흔도(炘都)의 의견에 따라
전선으로 돌아가 야습을 피하기로 했다.
해상에서라면 야습을 당할 위험성이 없기 때문.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일본군의 야습은 받지 않았으나
갑자기 불어온 태풍의 습격을 받았다.
원나라 군사의 전선은
바위 언덕에 부딪혀 파선하거나
표류하는 등 대부분이 대오를 잃고 침몰.
이 싸움에서
원나라와 고려군의 전사자가
무려 1만 3천여 명에 달함으로써
제1차 일본 원정은 완전 실패로 끝났다.
제1차 일본 원정이 실패한 다음해인
고려 충렬왕 원년, 세조 쿠빌라이는
제2차 일본 원정에 앞서 먼저 예부시랑(문교차관)
두세충(杜世忠)과 병부낭중(국방부 국장)
하문저(何文著)를 우호 사절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일본 규슈의 태재부에 도착하였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자 교토(京都)나 가마쿠라(鎌倉)의
최고 수뇌들과 만나 교섭을 계속하기로 하고 가마쿠라에 도착.
그러나 당시의
일본 집권자 호죠(北條時宗)는
이 두 사절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때가 고려 충렬왕 원년 12월의 일이었다.
이때 이들 두 사절이 휴대한 국서의 내용이
어느 정도 무례한 언사로 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외국 사절의 목을 벤다는 것은
여간 단호한 처사가 아니었다.
가마쿠라의 집권층도 단단히 각오하고
원나라의 재차 공격에 대비하여 규슈 부근의
해안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동원령을 내렸다.
원나라의 두 사절이
참수당했다는 소식은
그후 4년 지나 알려졌다.
두세충 등을 태우고 일본에 갔던
고려의 선원이 천신만고 끝에 탈출
하여 그 소식을 고려 조정에 알렸다.
고려 조정은 즉시 이 사실을 원나라에 보고하였다.
쿠빌라이는 노발대발하여 제2차 일본 원정을 결심.
고려에 재차 병선 9백척 건조와 군대 동원을 명하였다.
제2차 일본 원정군은 원나라 군사 및 고려에서 동원된
동로군(東路軍) 4만 명과 경원(慶元, 절강성 영파시)에서
출발하는 10만 명의 강남군(江南軍)이 6월 15일에
이키 섬에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강남군은 옛 남송군의 군사들로 편성된 부대였다.
동로군은
제1차 원정 때와 같이
흔도·홍다구가 거느리는
원나라 군사와
김방경이 거느리는
고려군의 혼성 군단으로
5월 3일 합포에서 합류.
동로군은
거제도에
잠시 정박한 후
대마도로 진격하여
대마도를 소탕하고
이키 섬으로 진격하였다.
이곳에서 강남군과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동로군은 강남군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진군하여 6월 6일
하카다 만에 도착하였다.
일본에서는 진작부터
원군의 공격을 예상했으므로
군대를 증강하고 해안선의 진지를
견고히 하는 등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원군은 시가노 섬(志賀島)과
노코노 섬(能古島)에 일단 상륙.
일본 본토를 유린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군은
작은 배로 잽싸게 달려와
원군의 전선을 습격하는 등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때마침 여름철.
원군의 진영에서는
괴질이 창궐하기 시작,
강남군의 합류 예정 날짜가
가까워졌기에 일단 함대를
이키 섬으로 후퇴시켰다.
그러나
6월 15일이 되어도
강남군은 이키 섬에
도착하지 않았다.
강남군 사령관은 아라한(阿剌罕)과
남송의 항장 범문호(范文虎)였는데
출발 직전에 아라한이 중병에 걸려
아타하이(阿塔海)가
신임 사령관이 되었다.
이 때문에 출발이 늦어졌고
또 합류 장소로 이키 섬보다는
히라도 섬(平戶島)이 적합하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합류 장소를 급히 변경했다.
합류 장소의 변경 사실을 동로군에게 알리기 위한
선발대가 항로를 잘못 잡아 대마도로 도착하는 바람에
합류 기일인 6월 15일이 지나서야 겨우 연락이 되었다.
강남군은 6월 18일에 경원을 출발하여
겨우 6월 말에 히라도 섬에 도착하여
이키 섬에서 온 동로군과 합류했다.
원군은 한 달 가까이 휴식을 취한 뒤
7월 27일에 작전을 개시하였다.
원군은 우세했고 본토 상륙도 서둘렀다.
그러나 이때는
태풍이 불어오는 계절로
규슈 일대가 태풍권에 들어
심한 태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심한 풍랑으로 원군의 전선은
차례차례 침몰하고 익사자가 속출.
《세조본기(世祖本紀)》에는
이 싸움에서의 생환자가 ‘10명 가운데
1, 2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원사(元史)》
〈아타하이전(阿塔海傳)〉에도 ‘죽은 자가 10명 가운데
7, 8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로군과 강남군의
병력이 모두 20만 명이었으니
겨우 3~4만 명이 생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고려군의 생환자가
1만 9천397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생환자의 비율은
강남군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차에 걸친 일본 원정 실패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단념하지 않았다.
두 차례의 실패는 싸움에 진 것이 아니라
태풍에 의해 함대가 궤멸되었으므로
불가항력이지 패전은 아니라는 것이
쿠빌라이의 주장이었다.
제2차 일본 원정이 실패한 다음해 쿠빌라이는
다시 고려에 전선 건조 명령을 내리고 일단 폐지했던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충렬왕을
정동행성의 좌승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강남에서 잇따라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 원정은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쿠빌라이는
여러 차례 일본 원정을
계획했으나 그때마다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나 실현할 수 없었다.
원나라 지원 31년(1294)
쿠빌라이가 죽음으로써
원나라의 일본 원정 문제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
...............원나라의 멸망 요인....................
몽골 사막지대에서 일어나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유럽과 아시아를 정복함으로써 역사 상 유례 없는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도, 세조 쿠빌라이가 원왕조의
황제로서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후 불과
90년 만에 중국 통치에 실패했기 때문에 종말을 고했다.
무력이 지나치게 강했다는 점이
중국통치 실패원인으로 지적된다.
민족적인 긍지가 매우 강하여
몽골 지상주의 신념을 가졌기에
정치적으로 책임 있는 장관을 비롯
각급 기관장, 다루하치의 자리는 모두
몽골인이 독점하고 색목인이 이를 보좌.
한인·남인은 최하위 신분으로 괄시 받았다.
중국을 지배하는데도 중국전통을 무시하는
경향이 농후하여 황제란 천하만민 복리증진
이념을 무시한채 권력으로만 군림하려 하였다.
몽골인은 대제국을 건설해 놓고 나서도
정치는 유목 수렵자 사고방식으로 추진해
토지, 백성들을 수렵에서 얻은 물건처럼 취급.
정복당한 백성들은 사유물과 똑 같아
하등의 이의와 발언권도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정치는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인들의 최고 권력자인 칸은
왕공들의 집회인 쿠릴타이에서 추대.
여기에는 한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다.
"위대한 정복자가 나타나면 새로운 칸은
반드시 그의 혈통 가운데서 선출해야 한다."
칭기즈칸은 위대한 정복자였기 때문에
그후 칭기즈칸 혈통 가운데서 칸을 선출.
세조 쿠빌라이가 원제국을 세운 후에도
제위 계승 때마다 후계자 문제로 심한 내분
결국, 황제 후보자는 항상 세조 혈통에서 나왔다.
이것은 쿠빌라이가 대정복에 의해
원제국을 세웠으므로 원제국은 당연히
세조 쿠빌라이 사유물이란 몽골인 사고방식.
.
그래서, 세조 쿠빌라이 후계자들은
사유물을 지키기 위하여 가치 없는
투쟁을 되풀이함으로써 결국 자멸했다.
이러한 정권 밑에서 백성들을 위한
참다운 정치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
.
목호들은 공민왕의 즉위 후 고려가
반원정책을 펴자 고려관리를 살해하고
원나라에 만호부를 설치해 줄 것을
요구하며 반란을 획책하였다.
이에 최영 장군이
공민왕의 명에 따라
2만 5천명 군사를 이끌고 정벌.
이를, '목호의 난'이라 한다
.........목호의 난.........
1273년(원종 14)원나라는
탐라의 삼별초 난을 진압했다.
이곳에 군민총관부(軍民摠管府)
설치,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두어 통치.
1277년(충렬왕 3) 목마장(牧馬場) 설치,
원은 목호를 보내어 말을 기르게 하였는데,
이 일은 고려 말까지 10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뒤 1295년 왕의 교섭으로 탐라가 고려에 귀속되어
제주(濟州)라 고치고 목사(牧使)와 판관(判官)을 파견.
그러나, 목마장은 가끔 원나라가 직접 경영하기도 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명나라와 국교가 굳어지고
제주의 말을 명나라에 보내게 되었을 때, 목호들은
“우리 세조황제(世祖皇帝)가 방축(放畜)한 말을 적인
명나라에 보낼 수 없다.”라 하여 소란을 일으켰다.
1372년 예부상서(禮部尙書) 오계남을
명나라에 보내어 말을 바치기로 하였고,
명나라 유지별감 겸 간선어마사 유경원과
(劉景元)과 함께 제주에 갔다.
이때 목호 석질리(石迭里)·
필사초고(必思肖古)·독불화(禿不花)·
관음보(觀音保)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유경원과 목사 겸 만호 이용장을 죽였다.
이에 제주를 치려했으나,
제주인(濟州人)이 판관 문서봉을
권지목사(權知牧使)로 추대하고,
말을 바치겠다고 해 더 이상
사태의 악화는 없었다.
그러나
목호의 세력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1374년 명나라가
북원(北元)을 치려고
제주의 말 2천 필을 요구하였다.
이에 문하평리(門下評理) 한방언(韓邦彦)을
제주에 보냈을 때에도 목호 석질리·필사초고·
독불화·관음보 등은 공출을 거부하고
다만 3백 필만 내놓았다.
명나라 사신 임밀(林密)과 채빈(蔡斌) 등은
2천 필에 차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고 하자,
목호를 토벌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문하찬성사 최영을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 밀직제학
염흥방(廉興邦)을 도병마사(都兵馬使),
삼사좌사 이희필을 양광도상원수,
밀직(密直) 임견미를 부원수(副元帥),
판숭경부사 지윤(池奫)을 경상도상원수
동밀직사사 나세(羅世)를 부원수,
지문하성사 김유를 삼도조원수 겸
서해·교주도도순문사로 삼아 각각
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이때 전함이 314척에
예졸이 2만 5,600여 명.
그리고 문하평리 유연(柳淵)을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사우(洪師禹)를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로 삼아 각각
진(鎭)에 유수(留守)하게 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비.
토벌규모를 보면 당시 목호를 중심으로 한
제주의 세력이 상당히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영은 적(賊)의 괴수 3인을
처단함으로써 목호의 난을 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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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명나라 사신은 말 3백 필만 가지고 돌아갔는데,
그 중 채빈은 개주참에서 호송을 맡았던 김의에게 피살
이것으로 고려와 명의 외교관계가 복잡한 양상으로 변했다.
.................................................................................
고려 말,
최영 장군이
'목호의 난'을
진압했던 격전지.
1374년 범섬 전투는
서귀포시 법환동 소재
법환포구 앞바다 범섬 일대에서
최영(崔瑩) 장군과 제주 목골족이
'제주 관할 주도권' 최후 결전이었다.
당시 1374년(공민왕 23) 고려와
제주 몽골족 목호 세력이 총력전.
1273년(원종 14) 제주 삼별초 몰락.
그후 몽골의 직할령으로 편입된 제주
이로부터 제주와 몽골의 교류가 이뤄졌고
제주 말 사육 규모가 확대되어 목호들이 주둔.
몽골 탐라국립목장을 관할하던 몽골족 목호.
제주로 온 고려 출정군 총사령관은 최영이고,
정예군 2만 5605명과 전함 314척으로 구성되었다.
요동정벌군 3만 8830명과 견줄 전력이며,
당시 제주 인구와도 맞먹었을 병력이었다.
출정군 외에도 예비 부대가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따로 주둔했음에도 불구하고 출정군은
제주 서쪽 명월포 목호군과의 첫 전투에서 졌다.
목호 세력의 수뇌부는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관음보(觀音普) 등이었다.
이들은 동·서아막(東·西阿幕)의
탐라목장 중 서아막을 관할한 목호.
이들 목호 수뇌부는 기병 3천여 명과
수많은 보병을 거느리고 명월포에 포진.
목호군에는 몽골족과 제주 여성 사이에
태어난 반(半) 몽골족화 된 제주민, 그리고
고려관리 수탈에 반감을 품은 제주민들도 가세.
목호군은 명월포 상륙 고려 출정군을
모두 죽여 기세를 올렸으나, 재차 벌어진
명월포 전투에서는 고려군에 패하였던 것.
이후 양자의 전투는 제주 서쪽
명월촌으로부터 계속 목호군이
서남부 쪽으로 밀리면서 한 달간
주야로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전투에서 밀린 목호군 수뇌부는
법환 포구 앞바다 범섬으로 피했다.
최영도 목호 세력을 쫓아와 법환 포구
속칭 ‘막숙’에 주둔하고, 배 40척을 동원해
‘배연[배염]줄이’라는 곳을 통해 범섬을 압박.
이에 석질리필사는 처자식 등과 함께 항복하고,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벼랑에서 몸을 던져 자살.
이후에도 동아막 목호 수백 명은 성에서 계속 저항.
이에 최영이 장수들을 거느려 성을 쳐부수고,
도망가는 무리를 샅샅이 찾아내 전부 죽였다.
제주에서 한달간 목호정벌 전투를 치렀던 최영.
"목호 정벌은 우리 동족들이 아닌 것이 섞여
그들의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목이 메인다”
원 직할령이 된 이후 고려에 환속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양국에 이중 귀속된 상태였던
제주민들은 큰 희생을 안은채 고려에 재귀속
최영 장군이 탐라 목호 정벌로 개경에 없을 때,
개혁정치를 행하던 공민왕이 시해(弑害)되었다.
이로써 이성계가 조선 왕조 건국의 길로 나아가는
위화도회군 기회를 잡는 일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범섬 전투는 고려 자주성을
회복하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몽골족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았으나,
제주민들은 커다란 희생을 치르게 되었고,
백년간 몽골족화 된 제주민 정체성을 부정.
결과적으로는 이성계가 조선 건국으로
나가는 기회를 잡을 상황도 만들어 준 셈.
현재, 범섬 일대에 최영장군 전적 터가 있다.
.................
.................
조선시대 중앙정부에서
한라산 중산간마을까지
통치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정의현에 관아를 설치한 것.
정의현 관아에서
서귀포 범섬일대까지
중앙 정부의 통치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건설된
'성읍마을 & 가시리 말목장'
제주도는 고려 말, 몽골대제국 백년 지배 때
전세계 정복용 군마 생산에 심혈을 기울인 곳.
특히, 일본 정벌에 사용할 군마를 사육했던 산지.
가시리 갑마장.
새별오름.,제주마
....표선 ~가시리갑마장 가는 길....
조선시대 제주도에서는 일반적으로
4,000~1만 필 내외 말이 사육되었으나,
대부분 중앙 정부에 공물로 진상되었다.
제주 목사-감목관(제주 판관· 정의 현감· 대정 현감)
- 마감 - 군두 - 군부 - 목자로 이어지는.,마정 조직.
'1392~ 1910년까지' 조선왕조 내내 지속된.,군마공출 .
제주는 독립성을 상실한채 중앙정부 지배를 받았다.
말의 특산지로 부각되면서 과중한 수탈이 이뤄졌다.
제주도 중산간 지역을 목장으로 만들어 개간을 금지.
해변 지역의 일부 땅만을 이용해 농사를 지어야 했다.
따라서 도민들은 좁은 경작지에다
척박한 농업 환경과 흉년이 겹쳐
굶어죽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왕조 500년간 제주인구 5만 내외.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나아가
감귤 진상, 전복 등 해산물 진상, 약재 진상
등 온갖 진상과 잡역· 잡세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출륙하거나 민란을 일으켜, 중앙정부에 저항.
임진왜란기에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전마(戰馬)를 국가에 헌납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에 일조, 대표인물이 산마장 개척자 김만일.
................................................................
.
일제강점기
성읍마을을
성읍민속마을로
관광자원화 하면서
넓은 도로가 들어섰다.
.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 있는 민속 마을.
제주 성읍마을은 제주시에서 남동쪽으로 34㎞,
표선에서 북쪽으로 9㎞ 해발 125m 중산간 마을.
성읍마을은 1416년(태종 16) 성산읍 고성리에
설치되었던 정의현청이 1423년(세종 5) 지금의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로 옮겨진 이래 1914년
군현제 폐지때까지 500년간 정의현에 의해 관리.
유형·무형 문화유산들이 보존된.,성읍마을.
옛마을 민속 경관은.,중요 민속자료 제188호.
1935년 동중면은 표선면으로 개칭 하여
1946년 군제 실시에 따라 남제주군에 속.
5세기 간 장구한 세월을 현청 소재지로서
성읍은 군현 폐지후 면사무소 소재지로서
명맥은 유지해 왔으나, 1934년 면사무소마저
표선으로 이전해 성읍 마을은 잊혀지게 되었다.
.............................
.............................
성읍마을을 감싼 높이 4m성(城)은.,길이 900m.
조선 세종 때 성을 쌓고 동헌을 이곳으로 옮긴 후
정의현 중심지였지만, 20세기에는 작은 시골 마을.
성안에는 현재 90여 채 한옥이 있지만,
생활 제약 탓에 빈채로 사람을 맞는다.
벽랑국 세 공주를 여기까지 모셔와
탐라국을 세운 것도 아마도 바람일 것.
민속문화 연구가에게는 성지 같은 제주도.
.
'무더운 중산간 지대에 왜 이리
앞뒤로 꽉 막힌 집을 지었을까?'
제주도 겨울이 바람타고 온다는 것을
곰곰 생각해 보면 궁금증은 쉽게 풀린다.
제주도 바람은 매섭기가 여간 아니기 때문.
이엉으로 지붕을 덮은 제주 한옥은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부터 특별하다.
대문에 해당되는., 이문(간)과 정살문.
'정살문의 정주석에 거는 통나무'
'정낭'의 개수를 조정하여 집주인은
자신이 집에 있는지, 나갔는지 알린다.
통나무 3개가 정주석에 꽂혀 있으면
먼 곳에 갔으니 기다리지 말라는 의미,
1 꽂혀 있으면 가까운 곳에 나갔으니 곧
돌아온다는 뜻이고 가축도 그 신호를 감지.
올레로 이어지는 정낭은 신민이 바람이며
가축들과 어떻게 소통하며 살았는지 대변.
성읍마을 한옥들은 대체로 19~20c 초에 지어졌다.
그러나 그 때문에 집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 시계바늘이 멈춰있는 듯한.,시간 여행지.
제주도.,성읍마을.,나막신
조선후기 하멜이 귀양지
제주에 남긴 문화유산.
네덜란드-자카르타-제주도-한양-강진
-여수-일본- 네덜란드(하멜 표류 행적)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성읍 민속 마을.
조선시대 행정체계 상으로
전라감영 관찰사의 관할 지역은
전라도와 제주도에 있는 산하 관청들.
조선시대 제주도 내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3곳 관청은.,전라감영 소속 .
1416년(태종 16)성산읍 고성리에 설치되었던 정의현청이
1423년(세종 5) 지금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로 옮겨진 이래
1914년 군현제가 폐지 될 때까지 500여 년간 정의현에 의해 관리.
성읍 민속 마을은 유형, 무형의 문화유산들이 보존되어 있고,
옛마을의 민속 경관이 유지되고 있어 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
성읍 민속 마을은 제주시에서 남동쪽으로 34㎞,
표선리에서 북쪽 9㎞, 해발 125m의 중산간 마을.
제주도는 대부분의 용천수가 해안에 분포되어 있어,
유서 깊은 자연 취락은 대개 해안변 따라 발달해 있다.
해안에서 8㎞ 떨어진 중산간 마을은 제주에서는 드문 편.
고려 후기 원, 명 교체기에도 탐라에 큰 전란이 있었다.
목호의 난이었다. 이때 제주도 목호를 토벌하기 위하여
최영 장군 2만 군사들이 명월포를 통해 목호의 난을 평정.
...................목호의 난(牧胡의 亂)........................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 원나라 목장이 있던 제주도
말을 기르던 몽골인 목자들이 일으켰던 반란.,'목호의 난.'
삼별초 항쟁이 여몽 연합군에 의해 평정된 1273년.
원나라는 탐라국에 군민총관부를 설치하여 다스렸다.
충렬왕(忠烈王) 3년(1277년) 탐라에 원 황실 방목장 설치.
탐라가 충렬왕 21년(1295년)에 고려에 반환된 뒤에도
원나라 황실 방목장이었는데 이곳 몽골인이.,목호(牧胡).
목호의 숫자는 많을 때는 1,400명에서 1,700명에 이르렀다.
약 1백년 간 제주도 현지 주민들과 섞여 살면서
말 기르는 기술을 전수하고 탐라 여인과 혼인하여
자식을 두었고, 고려에 대항하여 반란을 획책하였다.
공민왕의 즉위와 더불어 반원정책이 시행되면서
제주에서 목호와 고려 관리의 대립은 더욱 심해져
목호들이 고려 관리를 살해하거나, 원 본국에 요청해
만호부를 다시 설치하여 줄 것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원(元)이 북쪽으로 밀려난뒤 고려와 새롭게 수교한 명(明).
고려에게 북원(北元)을 치는데 필요한 제주마 2천 필을 요구.
제주 목호 지도자.,하치(哈赤)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등은 이에 반발하여 "우리가 왜, 세조(世祖) 황제(쿠빌라이 칸)께서
방목하신 말을 적국 명에 보내야 한단 말인가?"라며 350필만 내주었다.
명(明) 사신의 항의에 고려 조정에서
탐라국을 정벌하며 일어난.,'목호의 난'.
........................................................
탐라는 목호의 난 이후 완벽하게 고려에 귀속되었고,
제주는 예전보다 더 많은 마필 공납 요구에 시달렸다.
우왕(禑王) 5년(1379년)부터 공양왕 4년(1392년) 고려 멸망까지
명에 바친 약 3만 필의 말 가운데 2만 필 이상이 탐라국 말이었다.
목호의 난에는 탐라에 와있던 몽골인뿐 아니라
반(半)몽골화된 탐라인들도 상당수 가담하였으나,
반명 반란에서는 탐라 주민이 거의 동참하지 않았다.
제주 토착세력이 반명 반란을 진압하고
탐라인들은 점차 '목호.' 잔당을 배척하고,
과거, 몽골과 어울려 살았던 사실조차도 부정.
'목호의 난.' 당시 개경에서는 공민왕이 시해되었고,
명의 사신은 호송을 맡았던 고려관리 김의에 의해 피살,
명이 고려에 일방적으로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보하였다.
그리하여, 최영 등에 의해 요동 정벌 시도가 촉발되었다.
이때 팔도도통사로써 직접 군사를 지휘하려는 최영을 우왕은
"선왕(공민왕)이 시해된 것은 경(최영)이 제주로 정벌하러 나가
개경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려 하였다.
결국 최영 대신 요동정벌군을 지휘한 이성계.
위화도 회군으로 개경으로 쳐들어와 최영을 처형.
우왕을 폐위시킴으로써, 조선 건국의 단초를 마련한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부터 세종 2년(1420년)까지
'대정현 판관'이었던 하담(河澹)은 목호의 난을 가리켜
"우리 동족도 아닌 것들이 섞여들어 목호의 난을 불러왔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었고 간과 뇌수로 땅을 발랐으니,
말하자면 목이 멘다."고 하며 치열하였던 전란을 술회하였다.
이후, 원의 세력은
제주도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성씨, 언어, 문화 등에서
몽고 100년 지배 잔재는 남아 있었다.
탐라국은 조선에 합병되며 해체.
탐라국의 귀족들은 평민화 되었고
제주도는 '전라감영'의 제주목에 편입.
그래서, 조선시대 제주목 대정현 주민과
서귀포 정의현 주민과는 혼인하지 않았다.
정의현에서는 '대정현의 며느리를 맞이하면
치마에 뱀신을 품고와 가문을 망친다.'며 구박하고.
대정현에서는 탐라를 망친 근거지가 정의현이라며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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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의 100년 잔재가 유독 많은.,'중산간지역.' 정의현.
조선시대 제주도에 대정현과 정의현을 따로 둔 이유는
제주목의 행정력을 섬 전역에 미칠 수 있도록 의도한 것.
행정 상, 전라감영에 속한 제주목
'전라감영'에 소속된 제주목사 아래
'대정현'의 군수 및 '정의현'의 군수.
정의현성이 있었던 고성리 지역이
제주도 동남부 지역을 관리 하기에는
지리적 위치가 적절치 않은 것으로 판단.
정의현
지금의 성읍으로 행정 중심을 옮기게 된 것.
이렇게 고성 지역에 정의현성이 있었던 기간이
1416년(태종 16)에서 1423년(세종 1)까지 겨우 7년.
14세기 초 고려시대에., 동도현을 두었던 지역.
조선 초까지, 본래 탐라국의 영역이었던.,정의현.
서귀포 성읍마을은 조선이 개창하며 만든 행정구역.
역사서에는 제주도민의 필요에 의해 관청이 세워졌다지만
당시 제주도민에게 관청이 필요한 이유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조선의 관청이 없이도 잘 지내왔던.,'남제주 중산간지역' 정의현.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한 삼별초 토벌후
제주도는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원명교체기 제주도의 목호의 난이 진압될 때까지
약 100년 동안 원은 이곳 제주도를 목마장으로 삼고
대제국 경영의 전초기지화를 시도하다 다시 고려에 환속.
100년간 몽고의 제주 지배는 언어, 풍속,
목마 등 고유한 자취를 남긴.,정의현 일대.
조선 초, 기록에는 관청이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관청을 세워달라는 민원이 자자했기 때문이라지만
고려때 원나라 직할령이었기에 조선 조정에 대한 반발.
하여, 조선이 정의현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성읍 민속마을.
제주 성읍 지역에서는 1914년 조선의 군현제가 폐지될 때까지
약 500년간 정의현청의 관리를 받아온 유서깊은 마을이기도 하다.
1864년(고종 원년) 8월 정의현과 대정현으로 승격하였을때.
성읍마을은 제주목 관할에서 벗어나서, 전라도 관찰사의 관할.
정의현과 ·대정현에 각각 변지군수를 두니
제주도의 특수한 지정학적 사정으로 말미암아
제주목과 양군간의 체통이 문란하여 행정상 불편.
그리하여 1880년(고종 17년) 2월에는 양읍을 다시
현으로 환원하고 과거 방식대로 현감을 두게 했다.
1895년 (고종 32)에는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제주를 부(府)로 고쳤으며 목사를 관찰사로 바꾸고
판관 제도를 참사 제도로 고쳐 군수를 겸하게 하였다.
아울러, 제주부 경무청도 신설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관제가 개편됨에 따라
종래의 좌·우 포도청을 합쳐 설립한 관청의 하나.
대한 제국기,
경찰과 감옥에 관한
일을 맡아본.,제주부 경무청.
1906년(광무 10년)에는 1896년(고종 33) 부활했던 목사제도 폐지,
군수를 두었으며 1914년 정의, 대정 2군을 폐지하여 제주군에 합병.
1423년(세종 5) 이후 '정의현 도읍지' 성읍은 현청 소재지 역할을 마감.
1915년 5월 1일을 기하여 제주군 제도가 폐지되고
도제(島制) 실시로, 현재 표선면이.,동중면(東中面).
성읍리는 동중면 면소재지가 있는 하나의 리(里)로 전락.
1935년 동중면은 표선면으로 개칭하게 되었으며
1946년 군제 실시에 따라 남제주군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5세기 동안 장구한 세월을 현청 소재지로서
번화롭던 성읍은 군현 폐지 이후에도 면사무소 소재지.
1934년 면사무소마저 표선으로 옮겨짐에 따라
성읍 마을은 행정 중심 마을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성읍 민속 마을은 제주도 동남쪽 중산간 지대
해안에서는 9㎞, 해발 125m의 높이에 위치한다.
성읍 마을의 성곽의 크기는
동서로 160m, 남북으로는 140m
규모로 귀 죽인 네모꼴을 하고 있다.
성은 객사의 대문을 중심으로 정남축 축상에
남대문, 내대문, 기두정(장군대)를 일치시키고,
동서 대문도 객사 대문과 동서 버금축을 함께 한다.
성읍 민속 마을이 정의현의 도읍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성읍 주변이 여느 마을들과 다른 풍수적 여건을 갖춘 때문.
마을의 북쪽으로 한라산 영주산이 병풍처럼 애워싸고 있다.
성읍 마을에서는 천미천 건너로 남산봉이 다가서며,
한라산을 조산으로 하고 영주산은 진산, 남산봉은 안산.
모지오름· 따리비오름· 설오름 ·갑선이오름.,우백호
남산봉 밖으로는 풍수지리상 좌청룡으로 연결된다.
동헌 앞 나무그늘이 가장 크고
사람들도 많이 모이는 장소이며,
그 다음은 길이 만나는 벌원 방죽.
성읍 민속 마을의 가옥들은 길에 면한 경우에는
짧은 올레를 두었고, 살림집은 길과 비켜서 앉혔다.
길 안쪽 집은 긴올레를 두고 문을 두지 않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긴올레는 농촌에서 많이 이용되는 방식인데,
짧은 올레가 많은 성읍은 도시형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읍 민속 마을의 정의현성 안에는 약 110호 가옥이 있다.
성 밖에도 많은 가옥들이 있는데
성읍 마을은 오백년 동안.,도읍지.
유형 무형의 문화재가 꽤 많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161호.,느티나무 & 팽나무
중요 민속 문화재로 조일훈 가옥, 한봉일 가옥,
고평오 가옥, 이영숙 가옥, 고상은 가옥이 있다.
제주도 지정 문화재로 정의향교와 일관헌 등 건축물
민요와 돌하르방, 초가집 등 숱한 문화유산들이 있다.
이러한 지정 문화재 이외에도, 정의현성의 성곽과
남산봉의 봉수대, 풍부한 전설, 고유의 민속 자료 등
아직도 보호하고 보존해야 할 가치 있는 유산들이 산재.
성읍 민속 마을은 조선 시대 도시주거의 모습.
성읍의 가로 체계 및 주요 시설물의 배치 방식 등은
당시의 도시 계획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 마을 내 많은 문화재와 유산 등이 있어
그 자체를 잘 보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성읍민속마을 '뒷산'은 영주산(瀛洲山: 326.4m).
말발굽 분화구 형태를 지니고 있는.,오름측화산이다.
대부분 초지이고 동쪽 기슭에.,성읍 민속마을 공동묘지.
..................영주산(瀛洲山: 326.4m)................
성읍민속마을 북쪽 약 1.8㎞ 지점에 위치한.,"뒷산."
면적 1,338,920㎡, 둘레 4,688m, 표고 326.4m, 비고 176m
분화구 동쪽 안사면의 능선에는 용암노두가 노출되어 있다.
오름 동쪽 기슭에는 동쪽으로 터진 소형 분화구가 딸려 있다.
영주산 서녘 기슭을 흐르는 천미천에는 '가매소'라는 못이 있다.
오름 전체에 걸쳐 억새가 우점하고 있는 영주산.
가을철에 억새가 풍부하여 찾는 탐방객들이 많다.
성읍 민속마을에서 수산리 방향 700m 지점에 승마장.
그곳에서 북쪽으로 600m 더 올라가면 오름 입구에 도착.
정상까지 30분 걸리며 목장, 성읍민속촌, 성산일출봉.,조망.
원래는 한라산을 영주산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중국의 『사기』에서 비롯되었다.
바다 가운데, '봉래, 방장, 영주' 삼신산(三神山)
'불로불사(不老不死) 약초가 있어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삼신산.
기원전 서불이 불로초를 찾으러 왔던 곳.
제주도 영주산.,시로미.
그때 서불이 찾은 곳이 성읍민속마을의 뒷산.
이곳 영주산 연못도 신선들이 흰 사슴을 타고
노닐다가 물을 마시게 하던 곳이라 하여.,백록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영주산'의 속명은 '영모루'
정의현 북쪽 4리에 있으며 산 북쪽은 곧 정의 김녕 등.
옛 기록에 '정의 · 김녕 · 함덕에 신선이 많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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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훌륭한 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현재 그곳에서 생활해야하는 주민들의 삶과
어떻게 조화롭게 할 것인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
현재, 차량이 마을 중심을 관통하는 점.
슬레이트 가옥이 여전히 혼재하고 있는 점,
시멘트 도로가 민속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점.
성읍 민속 마을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또한 본래 성읍 마을이 가지고 있던
주요 도로 및 쉼팡과 같은 휴게 시설,
연자방아 등은 현재에도 높은 인지도.
성읍민속마을에서는 매년 초가을
초가에 엉을 얹는 날에는 굿을 한다.
뱀을 무서워하면서도 신성시 여긴 고려시대 이곳 주민들.
뱀신(칠성신)을 모신 밧칠성을 집안에 두었다고 전해온다.
조선 초, 이곳 하례리 481번지는 '알당들왓' 밧칠성 당굿 터.
하례리 밧칠성, 위미리 마메기동산, 보목리 '조노기'.
각각 예촌본당, 위미마매기본당, 보목리 조노기 본당.
해마다 15살 마을처녀를 뱀신에게 바쳤다던.,알당들왓.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정책 음사철발령에 따른 1702년
제주목사가 절500, 당500을 없앴다는 말과 연관이 깊다.
1515년(중종 10) 3월 제주판관 서린(徐燐)이
뱀신을 퇴치한 김녕굴 전설을 형상화 한.,조각.
김녕굴 & 만장굴은 세계에서 가장 긴.,용암동굴.
김녕사굴 .
만장굴
...............인근 볼거리................
김녕굴 & 만장굴, 성산일출봉, 한라산.
천지연폭포, 비자림, 표선 해수욕장 등.
성읍민속마을에서 1시간 내 차량 이동거리.
..........................................................
김녕굴
만장굴
성산 일출봉
비자림
천지연폭포
천지연폭포.,추억의 신혼부부
한라산 탐방로
현재, 서귀포시 표선
'정의현 성읍 민속마을'
일제강점기에 관광자원화.
본디, 조선시대 원형에서
상당 부분이 변형되어 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제주도 전통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좋을듯.
제주도는 한라산이 가운데 있어
'동서남북'의 자연환경이 각각 다르고
중산간미을과 해안마을 환경도 각양각색.
현재, 제주도 내 전통가옥은
'성읍 민속 마을'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옛 모습을 잃었다.
그러므로, 성읍마을이
곧 제주의 민속마을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이다.
......서귀포시 정의현 성읍마을.........
한라산 중산간지대에 있는 성읍마을은
조선싣 제주가 3개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을때 '정의현'이라고 불렸던 곳의 도읍지.
1400년대부터 구한말까지 약 500년 동안
제주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제주를 대표할 민속 유물 유적이 모인 곳.
실제 주민들이 거주해 더욱 생동감이 있다.
당초 정의현 도읍지는
성산읍 고성에 있었는데
동쪽으로 너무 치우친데다
일본과 가깝기 때문에 성읍리가
정의현의 도읍지가 된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있는
정의현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본래 제주의 동도(東道)였다.
조선 태종 16년에 현감을 두었다.
사방 경계는 동북쪽 제주에 이른다.
동쪽이 26리, 북쪽이 7리.
서쪽으로 대정현까지 37리,
남쪽으로 바다 해안까지 7리.
가구 685호,
인구 2,073명
군정(軍政)은
마군(馬軍) 376명
보군(步軍) 254명."
또 '여지도서'에
'풍속'은 이렇다.
"여자가 많고 남자는 적다.
민간에서 일컫기를 '산악에
암봉우리가 많기 때문이다'
솜을 생산하지 않는다.
한자의 적은 옷감도 금처럼
여기기 때문에 백성들이 남자
낳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여자를 낳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성읍마을에서는 한라산이 종주산이자
전체 고을을 진호하는 진산(鎭山)이다.
마을 주인이 되는
주산은 정의현성 북쪽에
위치한 영주산(326.4m)이다.
영주산도 오름이지만 제주도 오름 중
유일하게 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만큼
제주도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름은 큰 화산의 옆쪽에 붙어서 생긴 작은 화산을 말하며
마그마를 지표로 끌어내는 길이 가지를 쳐서 옆쪽으로 다른
분화구를 이루거나 주 화도의 위치가 이동하면서 이루어진다.
성읍마을은 동쪽의 본지오름 방면으로 이어지는 맥이 좌청룡에,
서쪽 모지오름, 따리비오름, 설오름, 갑선이오름으로 이어지는 맥이
우백호에, 남산봉(120m)이 안산에 해당, 천미천이 명당수 역할을 한다.
이들 오름에 의해 성읍은
전란이 일지 않는 명당 중 명당
병화불입지(兵禍不入地)'로 인식.
그러나 이후
몇 차례에 걸친
행정적 변화에 의해
성읍은 도읍지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평범한 농촌으로 탈바꿈.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민속 마을로서의
위치를 확보했다.
그러나
제주의 지형적 특성상
육지처럼 전형적인 명당 구조를
갖추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성읍마을을
형국론을 빌려 두 가지로 해석하기도 했다.
첫째는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배의 형국으로 보는 것이고
둘째는 한라산의 맥을 중심으로
장군이 앉아 있는 형국인
'장군대좌형(將軍大座形)'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배의 형국으로 보는 것은
마을의 동쪽으로 천미천이
휘돌아 나가는 지형적 형상에서
비롯되었으며 마을 동남쪽의
남산봉을 키로 간주한다.
마을의 뱃머리는
서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끝은 남산봉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배 모양의 형국으로 인해 어려서
그곳을 떠나면 입신출세한다는 속설도 있다.
장군대좌형의 경우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상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주장이다.
성읍이
정의현의
도읍지였으므로
주민들의 긍지도 대단.
예를 들면
성읍에서 표선면사무소가 있는
표선으로 갈 때 '촌에 간다'고 하는데
면사무소가 성읍에서 표선으로 옮겨갈 때
표선이 시골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제주도 도읍은
제주시에만 있었는데
조선 왕조가 세워지자
안무사 오식(1370~1426)이
태종에게 제주도를 삼주현으로
나누어 통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에
태종 16년(1416)
현 제주시와
북제주군을 합해
제주목으로,
한라산 남쪽은
서귀포시를 중심으로
동서로 나누어 서쪽은 대정현,
동쪽은 정의현으로 구분해 통치했으며
이런 구분은 1914년까지 약 500년간 지속되었다.
.
성읍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보존된 읍성 중 하나.
이처럼
과거의 모습을
잘 간직한 데는
매우 슬픈 사연이
배어 있다.
다른 마을들도
성읍마을처럼 초가집이 기본이었지만
4·3항쟁 때 대부분 불태워져 사라졌기 때문이다.
군경 토벌대는 제주도의 중산간 마을을 모두 태웠다.
유격대의 지원 기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명목이었으며
집도 사람도 모두 없애는 초토화 작전으로 일관했다.
그런데도
성읍마을이
불타지 않은 이유는
경찰지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토벌대가 없었다면
성읍마을 못지않은
소중한 민속 자원들이
상당수 남았겠지만
성읍마을만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성읍마을을 답사하기 전에
제주도의 민가에 대해 설명한다.
해양성 기후가 뚜렷한
제주도는 바람이 세기 때문에
겨울에는 몹시 춥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주거는 바람을 기본으로 한다.
즉 대지가 주위의 지형보다 다소 낮으며,
곡선 형태의 올레와 마당을 중심으로 삼고
가옥을 별동으로 배치했다.
상대적으로
외부 노출 표면적이
작은 평면이 정착되었고,
울타리는 높아진 반면
기단과 마루높이는
낮아지게 되었다.
제주도 집의 특색은
뭐니 뭐니 해도 지붕에 있다.
제주도에는 기와집이 드물다.
화산토로 기와를 구워내기도 쉽지 않고
바람에 기왓장 정도는 순식간에
날아가기 때문이다.
김석인의 『탐라기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제주도 땅은 점액이 없어 도기와 기와를 만들기 어렵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기와집이 매우 적고 모두 띠로 덮었다."
.
제주도에는
삼다 중 하나
바람이 많다.
거기에다
계절과 해륙에 따라
풍향이 다르므로
평소에도 바람에
대비해야 한다.
주민들이 생각해낸 것은
완만한 지붕 경사각을 통해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것.
다시 말해 반란(半卵) 형태의
길고 둥근 돔 구조를 이루어
내풍에 역점을 둔 우진각 지붕.
송성대 박사는
이를 조개를 엎어놓은
모양으로 보아
제주도의 원초적인 지붕을
'조개 집 형태'로 묘사.
지붕은 새로 만들고
새 줄로 단단하게 결박해
날아가지 않도록 대비했다.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골각이 형태가 기본이다.
『제주읍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긴 막대를 가로 방향으로 결박
짓누르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원목의 중압을 활용하기 위한 것.
강풍에 대응하기 위해
무거운 나무를 사용했고
단단한 결박 구조까지 갖추어
제주도 고유의 가옥 구조가 되었다.
모음 지붕이 기본으로
지붕 최상부에 용마름이
없다는 것도 특징이다.
지붕면 물매는
10분의 2.5~3,
각도는 15도 안쪽.
육지에 있는 한옥의 물매는 4~5,
각도는 25도 정도이므로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건물 규모는
육지보다 큰 편이나 높이는 오히려 낮다.
외부 창에는
널빤지로 만든
문을 설치해
비바람에 대비.
기단은
대개 10~20cm
높이 막돌을
한단으로 쌓았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오고 비바람이 치는 일이 많아
나무기둥을 보호하기 위해 주추를 높게 만들었다.
『삼국유사』에 "북령의 사자암에는 판옥을 만들었다"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제주도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러한 가옥을 건설한 것으로 보이며
이런 형태는 울릉도에서도 보인다.
울릉도에서는
방설 벽과 지붕을 만드는데
억새와 횡목을 기본으로 한다.
바람의 영향은
처마 밑에 설치한
풍차로도 알 수 있다.
풍차는
겨울에는 눈바람,
여름에는 비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준다.
제주에서는 눈과 비가
수직으로 내리는 경우가 드물고
수평으로 들이치기 때문에
풍차가 없으면 불편한 일이 많다.
새로 엮던 풍차가
사라지고 양철로 변해도
바람막이 건축술은 이어졌다.
제주도 가옥에서 또 다른 특징은 창문.
원래 재료는
목조이며 온돌을 제외한
전체 통용문에 적용하고 있다.
5cm 정도 평판으로
견고하면서도 폐쇄적인
특색을 갖고 있다.
세찬 바람에 대비한 방풍 기능에 그치지 않고
외부를 차단하는 역할도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대청마루의 통용문을 대문이라 부르며
별도의 대문을 두지 않은 것도 특색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빈번한 침략 등에 대한 자위 수단이자
경계 심리까지 가옥 구조에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기능이 무엇이든 두꺼운 판문 구조는
목재 취득이 용이한 환경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원목이 무성하게 자라는 한라산의
환경과도 크게 연계된다고 볼 수 있다.
통시(뒷간)도 빼놓을 수 없다.
전통적인 변소는 좁고 깊은 구덩이를 파고
양 둔덕에 발을 올려놓는 잿간 변소,
해우소라 부르는 절간 변소,
구덩이 대신 발아래 돼지를
키우는 통시 등으로 구분된다.
전통 변소는 열린 구조로 되어 있어 공기가 잘 통하며,
인간이 배출한 유기물을 미생물과 벌레들이 분해해
농사에 필요한 거름으로 재생산하는 기능을 한다.
제주도에서 배변하는 곳에
돼지우리가 함께 딸려 있다.
이러한 문화는 제주도의 기후, 토양과 관계있다.
돼지는 인분을 처리, 돼지가 배출하는 유기 폐기물은
퇴비로 재활용되어 폐기물을 자원화 하는 역활을 담당.
그러므로 제주도에서는
개를 키우지 않는 집은 있어도
돼지를 키우지 않는 집은 없었다.
돼지를 키우는 이유는
고기를 얻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거름을 얻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제주도 똥돼지'라는 말도 나왔다.
통시는
건물의 한쪽 면을
돌아가서 설치되므로
마당에서 직접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서 2~3계단 위에
두 개의 넓고 긴 돌을 배치하고
시선 차단을 위해 담을 얕게 쌓았으며
지붕 구조물은 없다. 이때 주인들은
돼지우리에 짚을 넣어둔다.
돼지들이 돌아다니며 바닥을 밟으면
짚과 배설물이 섞이면서 썩는데,
냄새가 거의 나지 않고
완전 분해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농작물에 좋은 거름이 되며
씨앗과 흙이 바람에 날아가는 것을 막아준다.
제주 특유의 올레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올레는 마을 길에서부터 집 마당 사이에 있는
골목으로 제주도 민가만이 지닌 특유의 공간이다.
올레는 마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관 변화를 유도하며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해 독립적인 내부 공간을 가지려는
영역 표시와 경계 기능도 갖고 있다. 집을 방문하는 사람은
사적인 공간에 접근하는 과정이 길어져 집주인을 마주할 때까지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올레는 육지에서
고살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나
그보다 좀더 사적인 길이다.
한 집에 딸린 올레도 있지만
대개는 몇몇 집이 하나의
올레를 함께 사용한다.
올레는 폭 1.8~3미터,
담 높이는 1.2~2.1미터 정도다.
길이는 보통 6~15미터 정도이며
형태는 I자형, L자형, S자형 등 다양.
올레 입구를 어귀라 부르며 여기서부터
집의 입구가 시작됨을 암시해준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올레 바닥의
양옆에 다리 팡돌이 있는 것이 특징.
다리 팡돌은 비가 올 때
흙이 신발에 묻지 않도록 한 것.
제주에서는 올레 길을 매우 중요시해
음력 정월에서 3월 사이에 고사를 지낸다.
제주도의 또 다른 특징은
온돌이 육지와 다르다는 것.
우선 온돌이 별로 많지 않다.
『제주풍토록』에서는
"품관 벼슬하는 집 이외에는
구들이 없으므로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돌로 메우고
그 위에 흙을 발라서 다 마르면
그 위에서 잔다"라고 적었다.
『탐라견문록』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마을 집에 구들이 없다.
다만 몇 간의 집을 만들어 놓고
사방에 벽을 세워 바람만 막는다.
중앙에 흙 난로를 설치해 불을 땐다.
겨울에는 한 집안의 남녀노소가
화로를 둘러싸고 누워 온기를 취한다."
17세기 후반 숙종조에
제주 목사를 역임했던 이형상은
제주도 살림집에 그때까지도
구들이 없다고 적었다.
제주도의 온돌은
부엌과 결합된
육지의 경우와 달리
아궁이를 별도로 두었다.
취사와 난방을
공용으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분리해 각각 설치한 것이다.
또한 주방공간이
3분의 1에 가깝도록
비중을 높인 것이 특색이다.
이는 겨울철에도 온난하므로
화입(火入)과 취사를 구분해
화재를 예방하려는 구조에서
출발한 것으로 겨울에 부는 북풍과
북서풍의 진입을 최소화한다.
제주에서는 아궁이에 불씨가 남아 있으면
바람이 들어와 삽시간에 화재로 번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엌을 단순한 취사 공간으로만 보지 않고
거름의 적재 장소로 활용한 것도 제주도만의 특성이다.
아예 부엌을
별도의 건물로
만들기도 했다.
솥은 온돌방 쪽이 아닌 외벽을 향하고
굴뚝도 설치하지 않으며 취사 연료로는
말린 소똥이나 말똥을 사용한다.
부엌이 주택의
가장 중요한 기본 요소라는
고정 관념을 여지없이 흔드는 것이다.
대청마루는
자택의 3분의 1을
점유할 만큼 넓은 면적이며
통로, 식사, 작업 등을 아우르는
공용 공간이다.
이것은 가옥 구조가
주민의 생업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알려준다.
대청마루 한가운데
'부섭'으로 통용되는
화로를 설치한 것도
지나칠 수 없다.
겨울철
거실 공간이자
작업장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화로 시설이
중앙에 있다는 것은
수혈식 주거와 맥락을 같이하는
원시적 가옥 구조의 틀을
아직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이 같은 구조는
구좌에서 남원에 이르는
제주도 동북 및 남동해안과
내륙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근세에 내륙에서 유민이 많이 들어온 지역인데도
과거의 전통이 고수된 까닭은 가옥 소유주들이 제주만의
특색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가옥 중에서
육지와 판이하게 다른 것은 정낭이다.
제주도에는 문이 없다. 고온다습한 풍토에서
나무판자로 문을 만들면 금방 썩을 뿐 아니라
강풍에 날아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낭이라는 아이디어가 도출되었다.
정낭은 무척 단순해서
집에 사람이 있고 없음을
표시하는 동시에 마소의 출입을
막기 위해 걸쳐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주목은 나무토막을 끼워두는 구멍 뚫린 나무 기둥이다.
근래에는 대부분 돌로 만들지만 원래는 나무로 만들었다.
정주목과 정낭을
통틀어 '정'이라 한다.
세 개의 정낭 중 하나만 걸쳐 있으면
집주인이 없거나 잠깐 외출 중이라는 뜻이며,
두 개가 걸쳐 있으면 외출에 다소 시간이 걸린다는 뜻.
세 개가 모두 걸쳐 있다면 먼 곳으로 외출했다는 것을 의미,
하나도 걸쳐 있지 않으면 사람이 있다는 표시다.
정낭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베리아,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대만에도
정낭과 비슷한 문이 있다.
바깥대문은 '면문'이라 하며
그다음 문인 중문을 '이문'.
이문 칸, 곧 중문 칸은
집으로 진입하는 골목인
올레의 끝이다.
성읍의 집들에서는 대개
정낭이 대문 역할을 해
이문 칸만 설치한 경우가 많다.
정낭은 제주도 정신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도둑과 거지, 대문이 없다는 삼무 사상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는 문도 없이 밭이나 바다로 나가서
온종일 일을 하다 돌아와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아쉬운 것은 제주도에
관광객과 외지인이 불어나면서
점차 정낭 정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
성읍마을로 시선을 다시 돌린다.
마을은 표선리부터 한라산 쪽으로
8킬로미터 올라간 곳에 있다.
현대로 치면 8킬로미터는
그다지 긴 거리가 아니지만
과거 제주도에서는 매우 먼거리.
제주도민들이
음료수로 쓰던 샘물들이
거의 해안에 분포하고 있어
해안에서 10km나 산간으로
올라갔다면 여러 문제점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성읍마을에서는
두 곳에 빗물을 담아두는
못(물통)을 만들어 이를 해결했다.
사실 식수만 해결된다면
산지에 마을을 만드는 것이
불리하지만은 않다. 해일이나
해적의 위험이 있는 해변보다
여러 면에서 안전한 주거지.
물이 귀한 성읍의 집집에는
빗물을 모으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있다.
'새촘'이라고 하는데
나무줄기에 억새를 꼬아 묶고
끝을 항아리에 넣어 나무줄기를 타고
내려온 빗물이 항아리에 모이도록 한 장치.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그 말이 허언이 아니다.
성읍마을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다.
공간의 배치는 우리나라 읍성에 많은 宇(우)자형을
기본으로 남북 자오축 머리에는 동헌, 가운데에는 객사,
남쪽에는 남대문을 두는 형식을 취했다.
성곽은 직경 약 770m
크기 귀를 죽인 네모꼴이며,
중심은 객사 대문으로 되어 있다.
성곽 높이는 4m 정도 되는 장방형으로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현무암으로 쌓았다.
1980년대에
남문 서문이 복원
모두 옹성을 갖고 있다.
옹성은 성문 앞에 팔로 감싸는 것 같은
모양으로 설치된 작은 성벽을 말하며,
성문을 은폐하고 성문에 접근한 적을
공격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시설이다.
남문을 들어서면
읍성의 중심축인 남북로가
곧게 펼쳐지며 끝에 객사가 있다.
객사는 대부분 왕의 뜻을 받들고 내려온
사신들을 머물게 하며 접대하던 곳이므로
동헌보다 서열이 높다. 그러므로 객사와
동헌을 중심으로 많은 관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발굴 조사를 거쳐 전면 7칸의 객사를 복원했다.
성읍의 동헌은 일관헌
(제주도 유형 문화재 제7호)
객사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세종 25년(1443) 현감
송섬이 처음 건설했고
이후 많은 보수를 거쳤다.
동헌은 '동쪽의 건물'이라는 뜻으로
이때 방위의 기준은 객사가 아니라
지방관의 가족이 거주하는 내아다.
동헌은 일반적으로
남북쪽과 동서축을 이루는
도로의 교차 지점 북쪽에 위치.
이곳의 일관헌은
남문에서 오는 축에서
서쪽으로 벗어나 있으며
현재 건물은 1974년 복원된 것.
편액을
'일관헌(日觀軒)'
이라고 한 것은
중국 태산의 세 봉우리 가운데
맨 동쪽 봉우리를 '일관'이라고
한 데서 따왔다는 말도 있지만
정의현이 제주의 가장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 '해가 떠오르는 것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진다.
제주특별자치도 유형 문화재 제5호인
정의향교는 세종 5년(1423) 설치된 것으로
그 후 여러 차례 증·개축과 이건을 거듭하다
헌종 15년(1849) 방어사 장인식이 조정에 주청해
지금의 위치로 이건했다. 현재 대성전, 명륜당, 수선당,
수호사, 내삼문, 협문, 동재 등이 복원되어 있으며
배향 공간인 대성전과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2고주 7량가로
전후퇴를 두었으며
전퇴는 개방된
일반적 형식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에
전후좌우 퇴를 두었으며
앞퇴에는 개방된 토방이 있다.
가운데 3칸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좌우에 온돌방과 고방을 배치했다.
제주도 가옥의 일반적인 칸살 나누기로,
부엌이 없고 대청이 3칸인 점만 다르다.
정의향교에는 현재 전패가 보관되어 있다.
대성전에는
5성, 10철, 송조6현과
한국의 18현 위패가 봉안
해마다 봄가을에 석전제를 봉행.
일관헌 일곽에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와
팽나무 세 그루는 천연기념물 제161호 지정
읍성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알려준다.
수령 1,000년 쯤
느티나무는 높이 30m
가슴 높이 둘레 5m.
팽나무는 높이 24~32m,
가슴 높이 줄기둘레 2.4~4.5m
나무의 나이는 약 600년이다.
성읍마을에서는
봄에 이 느티나무에
싹이 트는 것으로 한 해
농사 결과를 점쳤다고 한다.
동쪽 잎이 먼저 피면
정의고을 동쪽 지방의 농사가 잘되고,
서쪽 잎이 먼저 피면 서쪽 지방의 농사가 잘된다는 것
정의고을을 지켜보는 산.
영모르 또는 영주산(324m)
예로부터 신선이 살았으며
아침 안개가 끼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고 한다.
성읍마을의 특성은
제주도 고유의 초가집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점.
정의현청 청사였던 일관헌 등을 제외하면
모두 초가집이며, 500년 동안 도읍지였는데도
기와집이 자리 잡지 못한 까닭은 초가집이
이 마을에 가장 적합한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성읍을 들어가면
남북 방향으로 관통해서
마을을 둘로 나누는 큰 도로.
전통 마을이라 하면
아늑함을 연상하겠지만
성읍마을은 이런 생각을
처음부터 깨버린다.
일제 강점기 때
마을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본래 있던 소로 폭을 확장했기 때문.
마을의 민가는 육지와는 다른 건축 기법을 갖고 있다.
대체로 一자형 평면을 가진 집 2채를 중심으로 했으며
제주도를 특징짓는 돌과 새를 주재료로 사용했다.
돌로 벽을 쌓고
새로 지붕을 덮어
초가집임은 분명하지만
모양은 다르다.
육지에서
초가집의 기본이 되는
볏짚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벼농사가 지극히
제한적인 곳에서만 이루어졌으므로
볏짚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볏짚이 쉽게 썩어
제주도의 독특한 지붕 형태가 된 것이다.
김정의 『제주풍토록』에
그 상황이 요약되어 있다.
"사람들은 모두 초가에 사는데
띠를 엮지 않고 지붕에 늘어놓은
긴 나무로 가로질러 눌러놓았다.
기와집이 극히 적으며 정의현과
대정현 등 군현관사도 역시 초가집이다."
오늘날 복원해놓은 관공서는
대부분 우람한 기와집이지만
육지를 흉내 낸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새 역시 항상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지붕갈이용 새를 조달하기 위해
띠를 관리하는 밭을 운용했다.
개인 소유가 아닌
마을 소유의 밭이었으며
대체로 해발 300m 이상의 들판에 있다.
토지가 척박하므로 윤작법으로 수확물을 거두었다.
건물의
규모와 건물 수는
경제적 형편과 가족
상황에 따라 다르다.
살림이 어렵거나 식구가 단출한 경우는
안거리 한 곳에 살았으며, 좀더 여유가 있으면
안거리 맞은편에 밖거리를 두어 마주 보며 살았다.
제주도 말로 '거리'란 채를 이르며
안거리는 안채, 밖거리는 바깥채,
모서리에 두었다는 뜻의 모커리
또는 묵거리는 부속채를 일컫는다.
대문간은 이문간,
부엌은 정지
라고 부른다.
육지의 전통 마을의 경우
안채와 사랑채는 성별로
사용 공간이 달랐지만
제주도에서 안채와 바깥채는
세대별로 사용 건물이 달랐다.
대개
안채는 부모가,
바깥채는 자식
세대가 사용했다.
부모 중 한쪽이
사망하거나 고령이 되면
사용자가 자식 세대로 바뀌었다.
생애 주기의 일정한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주인이 바뀐 것이다.
안거리, 밖거리라고 이름을 달리 불렀지만
규모나 재료 등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참고로
제주도에서는
안채와 바깥채를 쓰는
부모와 자식들이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지어주는 밥을
먹지 않고
초대받을
때에야
먹었다.
안채와
바깥채가
독립적으로
살림할 수 있는
부엌을 갖추었기 때문.
통시도 따로 있었다.
돼지 사육과 관련 있는
경제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두 경제 주체가 각기
통시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
성읍마을을 비롯한
제주도에서 집의 구성은
위계가 아니라 평등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전체가 중요 민속 문화재 제188호 지정
5채의 가옥이 별도로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
더불어 정의현의 동헌인 일관헌과 정의향교가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제주 민요가 중요 무형 문화재 제95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물론 돌하르방 12기가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더불어 민속놀이, 향토 음식, 민간 공예,
제주 방언 등의 무형 문화유산이 아직까지
전수되고 있어 성읍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문화재가 많은 마을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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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7 성읍마을 '조일훈 가옥' 객주집
조선시대 여인숙.,이영숙 가옥.
..........한봉일 가옥..........
중요 민속자료 제71호로 지정
19세기 초엽에 건설된 서민 가옥.
동문 터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다.
헛간과 외양간이 있는 좌우에
안채와 바깥채가 마주 앉아 있다.
3칸으로 된 대문간은 주택 규모에 비해
다소 커 보이는데 집이 동문으로 연결되는
큰길과 면해 있어 안과 밖을 좀더 뚜렷이
구분하기 위해 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대문간에 들어서도
안채와 바깥채가 모두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一자형 우진각 지붕의 초가로
안채와 바깥채 모두 3칸 집이다.
육지의 주택과 다른 것은 부엌에서 볼 때
상방, 곧 대청 건너편에 구들이 있다는 점.
육지에서는
부엌에서 난방하므로
부엌과 온돌방이 접해 있지만
제주에서는 난방이 필요 없는 상방이
부엌에 접해 있는 것이 기본이다.
안채는 재래식 온돌인 굴목으로 통하는
다른 문을 두지 않고 난간 쪽을 이용해
출입하는 제주도 전형의 가옥을 보여준다.
바깥채는
상방을 전면에만 시설하고
뒤쪽에 작은 구들을 배치했다.
안채를 180도 돌려놓은 모양인데
본래 부엌이었던 공간을 쇠막으로
사용하고 굴목에 작은 판문을 설치해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굴목으로 통하는 문을 별도로 두지 않고
난간 쪽으로 출입하도록 만들었다.
마소를 사람과 같은
지붕 안에 두는 것은
제주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많은 지역에서 동물과 주인이 함께 생활하는데
당시의 재산 1호라고도 볼 수 있는 마소가
평안해야 주인도 평안하기 때문이다.
개조된 부분이 별로 없어
재래적인 가옥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며 마을 길보다
다소 낮은 마당에서 북쪽 초가집 지붕들
사이로 한라산이 보이는 것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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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평오 가옥...................
중요 민속자료 제69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의고을 당시부터 1914년 면사무소가
표선리로 옮겨올 때까지 관원들의 숙소.
순조 29년(1829) 건설되었으며
안채, 바깥채, 부속채가 ㄷ자형
안채와 바깥채는 1979년에 보수해
원래 모습에서 다소 변형되었다.
호령창은 그대로 남았지만
부엌에 있었던 부섭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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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헌(할망당)
예나 지금이나 제주도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태풍이다.
2015.06.16 태풍
일관헌(할망당)
..................일관헌(할망당)................
제주도를 이야기하면서 마을의 안녕을 비는
무속신앙 장소 '할망당'을 지나칠 수 없는 일.
제주도에는 350개 당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곳에서 모시는 1만팔천 신(神)들 중 80%가 여신.
제주도에 당집이 많은 까닭은
1만 8천 신이 있다는 믿음 때문.
신도 신 나름으로.,
으뜸 신, 버금 신이 있고.
'할망신'이 있는가 하면
손자나 증손자뻘
신도 있다.
성읍 성안에만 20곳의 무속 장소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중 안할망당, 광주부인당, 일당, 개당은 아직 남았다.
주민의 신수와 건강을 관장한다는 안할망당은 '관청할망'
일관헌 남서쪽 옆에 있고 안내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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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현청(일관헌) 구내
서쪽 노거수 팽나무를 신목으로 해
기왓장 위에 비녀, 옥구슬 등을 놓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후에
돌로 제단과 울타리를 쌓았는데
1971년 성읍리사무소를 신축하면서
정면에 인접되자 현 위치로 이설,
2평가량의 나지막한 슬레이트 건물 안에
시멘트 제단을 축조, 감실을 만들어
'현해수호신지위'란 위패를 봉안해
주민들의 안녕과 신수를 기원하는
곳으로 이용해왔다.
1991년 현 건물로 개축하고
'안할망신위'로 대치 봉안했으며
1996년 건물을 보수하면서 고증을 거쳐
제단 위에 감실을 마련 기왓장, 비녀,
옥구슬 등을 봉안했다."
송심자 제주도문화유산해설사는
현재에도 많은 사람이 안할망당에서
치성을 드리는 등 무속의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성읍마을이 지닌 가치는
더 없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의 간판이라면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색의
돌하르방을 거론하는데
성읍도 예외는 아니다.
성읍에는
동·서·남문 입구에
각각 4기씩 12기의
돌하르방이 있는데
약간씩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다른 지역의
돌하르방에 비해
얼굴이 둥글넓적하고
눈썹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돌하르방을
'무성목'이라고도 부르는데
성읍에서만은 '벅수머리'라고 한다.
김영돈 교수는
영·호남 지방에서
장승을 벅수, 벅시 등으로
부르는 것을 볼 때
육지의 장승이 유입되어
돌하르방으로
변모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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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의 개념이 제주도에
도입되었다고 하더라도
돌하르방이 특산이 된 데에는
제주도만의 정신이 배어 있다.
돌하르방을 현무암 재료로
만든다는 고집이 그것이다.
육지의 전통 마을과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은 제주도인들이
열악한 환경에도 끈기를 갖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원천이었다.
그 많던 전통 마을이 대부분 사라진 지금,
성읍 전통 마을이 남아 있다는 것에 감사할 일.
그런 면에서 흥미있는 것이 성읍마을의 오메기 술.
제주도는 밭과 논 비율이 49대 1.
쌀농사가 어렵고 기상도 농사에
적당하지 않아 먹고살기가 어렵다.
술 역시 쌀로 만들 엄두를
내지 못했고 조로 만들었다.
오메기 술을 빚기 위해서는
우선 좁쌀을 가루 내 익반죽하고
도넛처럼 가운데에 구멍을 내
떡을 만들어야 한다.
이 오메기 떡을
이용해 술을 빚는다.
이처럼 떡을 만들어
빚는 술은 이화주,
동정춘 등이 있으며
꿀처럼 단맛이
강한 것이 특징.
오메기 술은 현재 제주도
무형 문화재 제3호로 지정.
가난의 산물이 문화재가 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성읍마을에는
제주도의 간판이라고
할 감귤나무가 없다.
성읍마을의 지리적
위치에 따른 영향인지는 모르나
여러 사람이 심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물론 감귤나무가 없다고 해서
주민들이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전통 마을로서의 위상이 감귤나무가
없다고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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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 전설에 의하면
제주도 국영말목장 시작은
벽랑국 3공주가 탐라에 입도할때
망아지를 들여왔다는데서 비롯된다.
벽랑국(碧浪國)은 현재
전라남도 완도군에 위치했던
우리나라에서 고대국가 중 하나.
탐라에 농경과 가축, 직조,
의상, 국가조직을 전했단다.
신라 후기 경덕왕 때 불렸던
탐진현 남쪽 섬의 하나인
벽랑도(현재 소랑도).
...............소랑도(少浪島)
전라남도 완도군 금일읍 사동리에 있는 섬.
완도읍에서 동쪽으로 약 28㎞ 떨어져 있다.
폭풍우에도 물결이 크게 일지 않아.,소랑도
북쪽 0.75㎞ 지점에 평일도가 있으며,
남쪽으로 다랑도·소다랑도·우도 등 섬들.
섬의 중앙에 높이 106m 구릉지가 있으며,
암석해안이 대부분으로 남서쪽에 해식애 발달.
기후는 온난하며, 비가 많다.
주민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며,
보리·고구마·쌀·콩·무 약간씩 생산.
멸치·장어·볼락·도미·게·새우 어장,
미역·다시마·전복·김 등 양식장.
특히 다시마는 이 지역 특산품.
취락은 북쪽해안 만 안에 주로 분포.
남북으로 소로가 나 있고, 연도교
소랑대교를 통해 평일도와 연결된다.
완도와 고흥에서
각각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면적 0.785㎢,
해안선 길이 5㎞,
인구 110(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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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조선조 후기까지의
각종 지지에는 벽랑도가
강진현의 섬으로.,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