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의 중요한 근거로 삼는
광개토대왕비 신묘년 기사 일부가 분명히 변조된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임나일본부설은 4세기 후반 왜가 한반도 남부에 진출해 백제와 신라, 가야를 지배했으며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었다는 주장으로 일부 일본 역사교과서는 정설로 기술하고 있다.
서예학을 전공한
김병기(51) 전북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최근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낸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글씨체로 밝혀낸 광개토대왕비의 진실’에서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일본이 해석하는 광개토대왕비문의 ‘渡海破’가 실은 ‘入貢于’
의 변조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신묘년 기사를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신라에 조공하기 시작했으므로 고구려는 왜도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지난해 4월 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에서 같은 주장을 펴 1차 논란이 됐었다.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경영을 둘러싼 한일 논쟁의 핵심에 있는 문제의 신묘년 기사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은 확인 불가능). 김 교수는 1970년대 초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씨가 처음 주장해 대단한 파문을 일으켰던 ‘渡海破’가 서예학적인 안목으로 분석했을 때 틀림없이 조작된 글자라는 것이다.
그는 1900년을 전후한 시기 일본이 다량으로 만든 석회본(비석 표면에 석회를 발라 면을 고르게 한 뒤 뜬 탁본) 중 하나로 추정되는 동아대학교 소장본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김 교수에 따르면 광개토대왕비 글자체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획이 거의 직선으로 된 것인데, 이 탁본 신묘년 기사의 ‘渡’자 마지막 두획은 오늘날 흔히 쓰는 해서체에서처럼 중간 부분이 아래쪽으로 상당히 굽어 있는 파도 모양이다.
국내 학계에서도 변조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海’자의 경우도 광개토대왕비 서체는 모든 자형이 기본적으로 정사각형 혹은 세로가 약간 긴 직사각형인데 유독 신묘년 기사만 ‘母’ 부분의 세로 획이 모두 왼쪽 방향으로 기울었다.
신묘년 기사의 ‘破’자도 ‘石’의 두 번째 획이 직선 획을 사용하는 광개토대왕비 서체에 어긋나는 해서체이고, ‘石’자와 ‘皮’자의 높이가 비문의 다른 ‘破’자와 다르다. 김 교수는 서체 분석으로 볼 때 ‘이 작은 차이의 의미는 매우 크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渡海破’의 원형을 신묘년 기사 중 ‘속민’과 ‘신민’이라는 언뜻 보기에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로 쓴 용어에 착안해서 찾아나간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와 같은 민족이면서 예로부터 조공을 해온 나라이기 때문에 속민이라는 전용 명사로 나타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혈족 관계로 보나 조공 관계로 보나 복속의 정도가 강한 속민인 백제나 신라를 복속의 정도가 낮은 신민이라는 일반 명사로 나타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는 ‘백제나 신라를 이미 속민이라는 칭호로 불렀으니 다시 신민일 수는 없다’며 광개토대왕비에서 유일하게 신묘년 기사에만 등장하는 ‘신민은 왜를 가리키는 말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맥락에 따라 그는 ‘渡海破’는 ‘入貢于’에서 변조됐을 가능성이 크고, 그 과정에서 변조탁본의 대표격인 사코 카게노부의 쌍구가묵본(종이를 대고 글자모양을 그린 뒤 여백에 검은 붓칠을 하는 탁본)에서처럼 ‘渡海破’의 줄이 심하게 틀어지는 현상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